노동자의 자존심을 아프게 옹호해주십시오

노동사회

노동자의 자존심을 아프게 옹호해주십시오

편집국 0 2,698 2013.05.17 10:17

‘노동’을 부여잡고 고민하는 모두에게 매우 힘이 든 계절입니다. 정권과 자본의 의도를 탓하기보다 노동계 내부의 자성이 훨씬 더 커야 한다는 생각이 제게는 점점 더 강해집니다. ‘적에게 빌미를 주지 말라’는 피로 얼룩진 노동운동의 교훈이 시나브로 망각의 저편으로 흘러갔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곤혹스런 역설입니다. 한편으론 정권의 무지막지한 비정규직 관련 법안이, 진보적으로 평가되던 한 교수 출신 장관에 의해 안하무인격으로 추진돼온 상황이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론, 양대 노총 모두에서 비리가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지금의 노조 비리 정국은 그리 간단히 마무리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특히 현대자동차 노조의 일각에서 불거진 이른바 ‘채용 비리’가 주는 충격은 너무 큽니다. 산전수전 다 겪은 한 노동운동가가 “어용으로 비판하던 1980년대 한국노총에서도 저런 비리는 없었다”고 분개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오래도록 곪은 상처를 바라보며  

지난해 하반기 정규직 노조들이 온갖 힘을 짜내, 비정규직 관련 법안의 개악을 막기 위해 총력투쟁을 벌였던 긍정적인 성과마저 모조리 말짱 꽝이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2005년 5월, 역사의 시간은 이렇게 전체 노동계에 불리하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민주노총의 ‘장기침체’가 계속되는 한, 이런 흐름은 막을 수 없을 겁니다. 오히려, ‘봉합’은 해결책이 아닌 더 큰 위기의 불씨이기에, 이 참에 아예 곪은 상처가 모두 다 드러나야 한다는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냉정한 역관계 속에서 ‘어떻게 싸울 것인가’ 하는 문제에 답하기보다, ‘싸울 생각이 있느냐 없느냐’는 식의 ‘문제가 아닌 문제’로 갈등이 점점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전망은 없어 보입니다. 노사정위원회 참여를 막기 위해선 조직 내부의 폭력 사용도 어쩔 수 없다는 식의 정서가 지배하는 한 새로운 비전은 없습니다. 고립은 심해지고 분노와 짜증이 어우러진 메아리 없는 반발만 커질 겁니다. 진보적 시민운동에 대한 비난과, 제대로 보도하지 않는다는 식의 언론에 대한 비난은 점점 커질 겁니다. 또한, 그 속에서 ‘한겨레’보다 ‘조?중?동’을 보는 블루칼라 노동자들이 많은 척박한 현실은 바뀌지 않을 겁니다.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이런 악순환의 불균형이 그저 최악의 시나리오만은 아닌 듯합니다. 물론 조금씩 나아지고 있음을,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연대를 위한 정규직노조의 고민이 해마다 조금씩 전진하고 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 속도는 너무나 느리고, 그 방향을 보통의 정규직노동자들이 깊이 공감하고 있다는 징후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징후가 활성화된다면 물량이 부족한 라인의 노동자를 물량이 넘치는 라인으로 전환배치하고자 하는 노조 집행부에 아마도 힘을 실어주는 모습으로 나타날 겁니다. 그런데 현실에서 그렇게 자발적으로 서로 나누는 모습은 기대하길 어려우니 노조 집행부는 전전긍긍하게 됩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괜히 이런 문제 잘못 건드렸다가 머지않아 기업단위 복수노조가 허용되면 공장 안에 자신들말고 다른 노조도 들어서는 불행한 사태로까지 이어질 수 있을 테니까요. 

노동자 자존심 살리는 길 가주길 

『노동사회』는 지금 우리가 맞고 있는 이 위기를 꾸준히 경고해 왔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정권과 자본만을 탓하는 앙상한 논리만 아니라, 노동계 내부가 스스로를 단련해야 한다는 지적을 끈질기게 해온, 어쩌면 거의 유일한 월간지라고 한다면 지나친 표현일까요. 저는 그것이 노동운동의 시민성을 높이는 것이자 노동운동의 계급성을 높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길을 계속 가주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를 향해 ‘민족해방’ 계열에 가까우니 어쩌니, ‘조합주의자’들이니 어쩌니 하는 일각의 비난에는 신경 쓰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묵묵히 가주셨으면 합니다. 한 걸음 더 나가서 연구소의 이름으로 노동자의 계급적 자존심을 살리는 ‘정풍운동’을 호소하는 것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축하 편지라고 쓰면서, 나라 안팎이 하수상하고 되는 일도 제대로 없으니 짜증 섞인 한숨만 늘어놓은 게 아닌가 걱정됩니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의 10주년, 『노동사회』 100호 기념호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건강하십시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0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