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노동안전보건 제도

노동사회

유럽의 노동안전보건 제도

편집국 0 4,716 2013.05.17 10:29

역사적으로 볼 때 노동안전보건시스템은 오직 노동자들의 주장과 참여에 의해서만 발전해 왔다. 그 어느 나라의 역사에서도 자본이 먼저 나서서 노동안전보건시스템의 발전을 추구한 적이 없다. 어찌 보면 이는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다. 무한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이 노동자의 생명과 건강을 위해 쓰는 비용을 자발적으로 투자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노동안전보건시스템의 효과 및 노동자의 건강수준은 노동운동의 역사적 역량의 반영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다. 실제로 각 나라의 노동안전보건시스템을 비교론적 시각에서 연구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각 나라의 노동조합 조직률과 노동자정당의 역량을 종합한 변수와 그 나라의 노동자 건강수준은 정확히 비례하였다([표] 참조). 

sylee_01.gif

그러므로 노동운동의 전통이 오래 되고, 노동자정당이 오랜 기간 동안 정권을 잡았던 경험이 있는 유럽 여러 나라들의 노동안전보건시스템이 여러 면에서 우수한 측면을 가지고 있음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유럽에도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몰아치면서 자본의 도전이 강화되고 그에 따른 제도의 후퇴가 이루어진 부분도 없지 않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제도를 굳건히 지키거나 더 강화된 예도 적지 않다. 이에 이 글에서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이른바 ‘복지국가’와 영국, 독일 등 고전적인 유럽 국가 등을 중심으로 유럽의 노동안전보건시스템을 개괄해 보고, 이들 나라에서 현재 논의가 진행 중인 쟁점 및 과제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노동안전보건 관련법의 포괄 범위

많은 나라들에서 포괄적인 형태의 노동안전보건 관련법이 제정되기 이전에는 각 노동자 부문별로, 또 안전 영역별로 여러 개의 분산적인 법이 존재했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 이러한 법들이 통합되어 포괄적인 형태의 노동안전보건 관련법이 제정되면서 이 법이 포괄하는 노동안전보건 문제와 대상도 포괄적이 되었다. 대표적으로 1974년에 제정된 영국의 노동보건안전법(Health and Safety at Work Act)의 경우, 고용주, 자영업자, 노동자, 제조업자, 물질 공급업자 등의 의무와 책임을 포괄적으로 규정하였고, 작업장에 있는 노동자뿐 아니라 작업장 방문객, 작업장 주변의 일반 시민으로까지 법의 보호 대상을 확장하였다. 

한편 1977년에 제정된 스웨덴의 노동환경법(Work Environment Act)에서는 작업장에서 사업주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모든 고용자뿐 아니라 의무교육을 받는 학생까지도 이 법의 보호 대상이 되도록 하였고, 일반적으로 고용자로 인정되지 않는 군인, 죄수, 환자에게까지도 부분적인 적용이 이루어지도록 되어있다. 더 나아가 이 법은 1994년 개정을 통해 1인 기업 및 가족 기업에도 적용되게 되었다. 스웨덴에서는 사기업과 공기업을 불문하고 모든 사업장에 이 법이 적용되고, 이 법은 단지 물리적 요인들을 규제하는 것을 넘어서 고용의 내용, 노동시간, 노동조직, 노동자 참여구조 등의 틀을 규정짓는 내용을 담고 있다.

결론적으로, 유럽에서 노동안전보건 관련법은 형평과 효율을 달성하기 위해서 모든 사업장에서 노동하는 모든 노동자들을 포괄하도록 제정되었다. 이는 국가별로 몇몇 예외와 특수성이 있지만 일관되게 관철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법적으로 규정된 사업주의 책임

유럽에서 사업주는 노동자가 안전하고 건강하게 작업장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합리적으로 실행가능한(reasonably practicable)’ 모든 방법을 강구할 의무가 있다. 스웨덴, 덴마크 등의 나라에서 모든 사업주는 자신의 사업장의 모든 위해 요인을 평가하고, 유해 요인 예방 대책을 문서화된 형태로 만들어 보관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들 나라에서는 사업주가 노동자에게 적절한 노동안전보건서비스를 제공할 의무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웬만한 대공장에는 모두 공장 자체에서 의료 및 안전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사업주의 의무를 포괄적으로 규정하였음에도, 사업주에 대한 의무 부과가 부족하다는 의견이 존재하기도 한다. 이는 노동안전보건 관련법 자체가 가지고 있는 한계로 인한 것이다. 노동안전보건 관련법은 ‘예방법’이기 때문에 법을 어겨도 그 처벌이 미약할 수밖에 없어 대부분의 사업주들이 법을 어기고 미약한 처벌을 감수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국 등을 중심으로 노동자의 안전보건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않아 노동자를 사망에 이르게 한 사업주는 형법에 의해 ‘살인죄’로 처벌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어 치열한 논쟁이 이루어지고 있다.

sylee_02.jpg다양한 노동자 참여구조의 제도화

유럽의 노동안전보건 제도의 특수성이기도 하고, 사실상 제도를 지탱해 나가고 있는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적극적인 ‘노동자 참여구조’의 존재이다. 유럽에서는 노동자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 노동자의 적극적인 참여구조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철칙에 가깝다. 노동자의 참여 없이는 모든 제도가 휴지조각이 되어 버릴 것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1977년에 영국에서 안전대표 및 안전위원회법(Safety Representatives and Safety Committees Regulations)이 제정된 이후로 거의 모든 유럽 국가에서는 노동자의 적극적 참여구조를 제도화하였다. 

특히 안전대표(Safety Representatives)의 활약은 눈부신 것이었다. 안전대표는 노동자들에 의해 선출되어 회사로부터 노동안전보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시간과 노동안전보건 활동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유급으로 보장받는다. 이들은 자신의 사업장을 돌아다니며 유해요인 평가, 동료 노동자의 의견수렴, 회사의 안전보건 방침 및 정책에 대한 감시와 감독 등을 일상적으로 행하고, 특별한 경우에는 직접 정부에 조사를 요청하거나 정부의 조사에 동참하여 함께 조사할 권리를 부여받는다. 

이러한 획기적인 제도가 도입된 것은 사업주에게 노동안전보건문제를 맡겨 놓았다가는 죽도 밥도 되지 않는다는 인식이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1974년에 제정된 영국의 노동보건안전법에는 안전대표제도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이 법만으로는 제도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영국의 노동자들은 노동당이 집권하자마자 1977년에 이와 같은 제도를 만들어 노동자의 실질적 참여구조를 관철시킨 것이다. 그리고 이 제도가 만들어진 이후 그 효과가 만천하에 증명됨에 따라 이 제도는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것으로 굳어졌다.

sylee_03.jpg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제도에도 맹점이 있음이 드러났다. 그것은 노동조합이 존재하지 않거나 노동조합의 조직률이 낮을 경우 적용되기 힘들거나 제대로 기능하기 힘들다는 점이다. 이러한 약점은 1980년대 들어 대처리즘의 공세 아래 놓인 영국 노동조합이 뼈아프게 경험한 것이었다. 그 결과 노동조합은 이 제도의 개선을 위해 노력하게 되었는데, 구체적으로는 노동조합이 없는 사업장의 경우에도 노동자대표나 노동자 전원의 의견을 필수적으로 청취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순회 안전대표(Roving Safety Representatives) 제도를 만들어서 지역 단위로 활동하는 안전대표가 영세사업장을 책임질 수 있도록 하는 방향으로 제도 개선을 위한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노동자의 참여 구조가 가장 확실하게 보장된 국가는 스웨덴을 비롯한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이다. 스웨덴은 1977년 노동환경법 제정 때부터 노동안전보건시스템에 있어 노동자의 통제구조를 핵심적인 요소로 간주하여 강력한 노동자 참여구조를 마련하였다. 5인 이상의 노동자가 노동하는 사업장에서는 무조건 노동자안전대표(Employee Safety Delegates)를 선출해야 하는데, 노동자안전대표는 노동조합 혹은 노동자의 직접투표에 의해 선출되어 3년의 임기를 보장받고, 이들에게는 영국에서보다 더욱 큰 권한이 주어졌다. 영세사업장의 경우에는 지역별로 노동자안전대표를 구성하도록 하였고, 이들의 활동비는 국가가 부담하도록 하였다. 

한편 노사 동수로 구성된 직업안전보건위원회에서 작업장의 안전보건과 관련된 핵심적인 사안을 결정하도록 하였다. 50인 이상의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는 사업장에서는 이 위원회의 구성이 의무조항이 되도록 하였고, 노사가 합의하지 못한 문제에 대해서는 정부에 중재를 의뢰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후 정부에 의해 중재된 국가 수준의 노사합의를 통해 직업안전보건위원회의 역할과 기능은 더욱 강화되었고, 위원회에 참여하는 위원들도 노사 동수가 아닌 노동자가 다수가 되도록 조정되었다. 1991년에 사용자단체의 반발로 국가 수준에서는 이 협약이 파기되었으나, 노동조합의 조직률이 80%에 가까운 현실 속에서 아직까지도 지역수준에서는 이 협약이 상당한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

스웨덴의 경우 현재 전국적으로 10만명 이상의 노동자안전대표가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들의 활동은 매우 활발하여 노동자 건강 보호를 위하여 크나큰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제도에 대한 비판이 없지는 않다. 하나는 이 제도가 노동자에게 강력한 권한을 주기는 하였으나 그 권한이 생산을 통제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해 반쪽 짜리에 불과하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 제도를 통해 위원회의 역할이 강조되다보니 오히려 노동안전보건에 대한 사업주의 책임이 희석되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첫 번째 비판은 노동자 참여 형태에 대한 근본적 비판의 성격을 가지므로 논의를 생략하겠다. 후자의 비판 내용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노동안전보건에 대한 궁극적 책임은 사용자에게 있음에도 직업안전보건위원회의 강화에 따라 사업주가 이 위원회의 결정에 책임을 미루면서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경우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위원회가 사업주의 면피용 수단이 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단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를 진정으로 위협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사업주의 훼방이다. 노동측의 힘이 강한 스칸디나비아 국가에서도 1990년대 들어 사업주의 보이콧이 빈번해지고 있다. 사업주단체는 노동안전보건과 관련된 노사정위원회에 불참을 선언하여 위원회를 유명무실하게 만드는 전술을 사용하는 등, 국가 수준의 정책 결정에는 참여하지 않고 지역 수준에서나 혹은 개별기업 수준에서 문제를 각개격파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사업주단체의 보이콧 전략에 맞서기 위해 노동측이 다양한 방법을 강구하고 있는 현실이다.

요약하면, 스칸디나비아 국가에서 선도적으로 도입된 노동자 참여제도는 다른 유럽 국가에도 확산되어 노동자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다양한 형태로 도입된 노동자안전대표제도는 매우 유용하고 효과적인 것으로 증명되고 있다.

노동안전보건 관련법 집행기관의 행정력

모든 법이 그렇지만 특히 노동안전보건 관련법은 법이 제정되었다고 해서 모든 일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법제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제정된 법이 제대로 집행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정부기구의 행정력이 매우 중요하다.

영국의 경우에는 1974년 법에 의해 노동보건안전법을 집행하는 기구로 보건안전청(Health and Safety Executive)이 설립되었다. 보건안전청에는 일상적으로 사업장 감시, 조사, 감독을 행하는 보건안전감독관(Health and Safety Inspectorate)이 있다. 이들은 1천5백여명의 감독관과 6백여명의 전문위원으로 구성되어 있고, 사업장 조사를 위하여 많은 권한을 부여받고 있다. 특히 이들은 법 위반이 발견된 사업장을 기소할 권한과 시정조치를 명령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 스웨덴에서는 노동감독관(Labour Inspectorate)이 일반적인 노동기준에 대한 감시와 더불어 노동안전보건에 대한 감독과 조사도 수행한다. 스웨덴 노동감독관은 노동자 1만명 당 한명 꼴로 분포되어 있는데, 영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법 위반에 대한 제재와 더불어 예방적 조사 및 감독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유럽의 노동안전보건 관련법 집행기관은 양질의 인력과 재정이 투입되어 다양한 예방 활동을 펼치면서 적지 않은 효과를 거두어 왔음에도, 최근에는 ‘작은 정부, 규제 완화’의 흐름 속에 이들의 규모가 축소되고 재정이 삭감되는 등 여러 가지 도전에 직면해 있는 처지이기도 하다.

sylee_04.jpg신자유주의의 공격과 현재 추진되는 과제들

최근 유럽에서 관심을 두고 해결하려고 하는 과제들을 살펴보면, 화학물질 중에서는 발암물질의 위험을 규제하기 위한 다양한 접근이 시도되고 있고, 안전 영역에서는 기계 안전, 추락사고 방지 등에 중점이 두어지고 있다. 또한 새로운 영역으로서 작업장 스트레스 예방을 위해서 많은 노력이 기울여지고 있다. 특히 새로운 노동구조 및 생산패턴이 나타남에 따라 이것이 노동자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많은 관심이 모아지고 있으며, 그 연장선상에서 노동조직과 관리형태에 대한 관심도 높아가고 있다.

대상별로는 청소년노동자, 노년노동자, 비정형노동자, 특수고용노동자의 노동안전보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는 고용의 성격이 변화해감에 따라 나타나는 다양한 노동안전보건문제를 포괄하기 위함이다. 산업별로는 농업, 화학산업, 금속산업, 건설업 등 고전적인 산업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상업/운수/서비스 부문, 교육부문, 병원산업, 공공부문 등에 대한 정책 마련에 우선순위가 두어져 가는 경향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유럽의 노동안전보건 제도는 노동운동의 끊임없는 참여와 견제 속에서 지속적으로 발전해 왔다. 최근 들어 자본과 정부의 반격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까지는 노동자들의 단결됨 힘으로 이러한 공격을 막아내고 있다. 이는 유럽의 노동운동 진영이 노동자의 생명과 건강을 양보할 수 없는 가치로 부여잡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유럽의 발전된 제도와 더불어, 이러한 유럽 노동운동 진영의 우선순위 판단 기준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노동운동의 발전 없이는 노동자건강 보장이라는 과제를 달성하기 힘들다는 사실은 역사적 진실이다. 하지만 역으로 노동자건강에 대한 관심 없이 노동운동이 발전한다는 것도 어불성설이 아닐까?

  • 제작년도 :
  • 통권 : 제10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