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별노조운동에 드리는 고언

노동사회

산별노조운동에 드리는 고언

편집국 0 3,143 2013.05.19 01:18

조직구조를 설계한다는 뜻은 조직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활동과 사람들을 조직화하는 것이다. 조직구조는 조직자원(사람과 돈과 권력)을 배분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조직구조의 설계는 조직의 목표를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가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변수로 작용한다. 그러나 동일한 조직구조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금속, 보건, 금융노조의 내부 조직체계나 조직운영이 다르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것이 정답'이라 할 수 있는 구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최근 산별노조의 조직구조 설계에서 '지역이 원칙'이라고 주장하는 것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가장 대표적인 예를 들어 살펴보자. 민주노총은 업종 중심의 조직인가 아니면 지역 중심의 조직인가? 민주노총은 업종과 지역을 종횡축으로 설계된 대표적인 바둑판같은 조직이다. 그런데 문제는 조직구조 가운데 균형을 잡기 가장 어려운 동시에 운영하기 힘든 조직구조가 바로 이 형태라는 데 있다. 여러 가지 장점에도 불구하고 종횡축이 만나는 부분에서 각자의 기득권에 매달리거나 이중적 지휘계통 때문에 효율적인 조직운영이 어렵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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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년의 통합과정을 통해 거대노조로 태어난 베르디(Ver.d). 외국의 사례에서 배우고자 할때에는 과정의 역사' 자체를 원칙으로 신봉해서는 안된다. ]

전도된 쟁점, 조직구조의 설계

민주노총 회의록을 보면 산별연맹은 의무금을 납부하는 조직, 지역본부는 산별연맹이 납부한 의무금을 쓰기만 하는 조직이라는 냄새를 풍기는 발언들이 간혹 보인다. 이는 하부조직에도 비슷하게 적용되어, 민주노총의 방침을 산하조직에 통보하고 조직을 동원할 때조차도 산별연맹의 방침이 내려오기 전에는 연맹의 산하조직이 민주노총의 지역본부 체계를 따르지 않는 괴이한 현상을 낳고 있다. 즉, 민주노총은 종축이 강조되면서 횡축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특성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일부 산별연맹(특히 제조업 이외의 조직)은 하부조직조차도 관장하기 어려운 조건에 처해있기도 하다. 이는 곧 지역본부의 사업에 결합하는 전체 조합원 수를 감소시켜 업종 조직의 조직력 강화에도 기여하지 못하는 악순환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민주노총은 지역본부의 위상과 기능을 적어도 현재보다는 강화하는 게 맞을 수 있다. 그렇다고 민주노총을 지역 중심으로 재편해야 한다는 것은 맞지 않다. 조직구조가 잘못되었다기 보다는 균형을 잡아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민주노총 조직진단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사업에 따라 산별연맹과 지역본부가 적절히 분담해야 할 영역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조직구조만이 아니라 조직을 운영하는 주체들의 문제도 함께 검토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를 조직구조의 문제로만 환원하면, 산별노조가 되었는데 여전히 기업별 의식이 잔존하고 기업별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재의 산별노조는 산별노조가 아니라는, 소위 '무늬만 산별'이라는 섣부른 비판을 하게 된다. 때문에 '산별만능론'에 빠지지 말자는 비판은, 곧 산별노조 건설이 노동조합의 조직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전술적 고려의 대상이지 그 자체가 목표는 될 수 없다는 점에서 타당한 지적이다. 나아가 산별노조 자체를 계급적 운동조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더더욱 타당하지 않다. 산별노조는 노동조합의 역사속에서 터득한 것처럼 기업별노조보다 장점이 많고 계급의식을 고양시킬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기에 지향하는 것이지, 이를 곧바로 계급운동의 조직이라고 주장해 버리면 그야말로 본말이 전도된 것에 불과하다. 유럽에서 산별노조가 형성된 배경의 이면에는 사회주의의 위협이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게다가 서구의 산별노조 성립은 숙련공(우리의 정규직) 중심의 직업별 노조(우리의 기업별노조)가 더이상 자신의 '협소한' 이해관계를 담보하지 못하는 시점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 형태와 구조를 불문하고 노동조합은 자본주의 체제를 '오히려' 안정화시키는 부정적인 역할도 한다는 맑스주의자들의 주장을 새삼 되새길 필요가 있다.

더욱이 노동조합은 기업조직이나 정부조직과 달리 다수 조합원으로부터 대부분의 자원을 의존하는 조직이다. 때문에 그림을 그린다고 그대로 구조가 결정되고, 그 구조에 의해 조직운영을 할 수 있는 그런 쉬운 조직이 아니다. 구조는 조직과 그 구성원의 성격 등에 따라 최적의 형태를 갖추는 것이지, 하나의 원칙을 들이대고 밀어붙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리고 형태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조직 안의 특정집단이 아니라 소위 '지배연합'의 합의와 동의를 필요로 한다.

공허한 주장, 지역 '원칙'

최근 진행되는 산별논의에서 특징적인 점 가운데 하나는, 산별노조의 구조는 지역을 '원칙'으로 하여 혹은 지역을 '중심'으로 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얼마 전, '평등사회로 전진하는 활동가연대'(전진)의 정치대회에서 지역중심의 대산별노조를 건설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 적이 있고, 공공연맹에서도 산별노조 건설경로와 관련해 교섭은 업종단위로 하지만 업종분과에 의결권은 없는 지역 중심의 조직체계와 운영체계로 나가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노동사회』 9월호에 실린 정일부 금속노조 정책실장의 '지부중심 운영'이란 주장은 이미 금속노조 준비 당시 현장과 중앙을 연결하는 주요한 고리로 지역지부를 설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혀 새로운 내용은 아니다. 다만, 지부교섭에 대해서는 본래의 내용과 달리 이해하는 것 같아 조직 내부에서 충분한 논의가 필요할 듯하다. 3년 동안 금속노조 준비사업을 하고 출범 초기 3년 동안 금속노조 정책을 담당했던 필자가 보기에 정일부실장의 주장은 그 근거를 찾기도 어렵거니와 조직구조에 대한 역편향의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연대와 실천』 7월호에서 임영일 교수가 기존 산별노조가 실패라고 한 이유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여전히 강고한 기업별노조 체계의 관성이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짐작된다. 한 가지 더 짐작하자면 임 교수는 현대자동차노조 모 간부의 말을 빌어, 지금의 기업단위 지부(또는 지회)가 아니라 이를 더 세분화해 지역으로 재편해야 한다는 주장을 우회적으로 하고 있는 것 같다. 예를 들어, 현대자동차를 기업지부가 아니라 울산, 전주, 아산공장을 각 지역조직에 배치하거나, 더 나아가서는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을 1공장부터 5공장까지 독립적인 지부로 배치하자는 것으로까지 연결될 수 있을 듯하다. 

이 지점에서 금속노조를 준비하던 시기에 논란을 빚었던 지역지부와 기업지부 논쟁을 돌이켜보는 수고를 해야겠다. 당시 지역론을 주장하던 이들은 산별노조는 기업지부를 인정해서는 안 되고, 지역으로 재편하는 것이 '원칙'이라는 주장을 했었고, 결국 자신들이 주장하는 원칙에서 벗어나는 산별노조는 건설되어서는 안 된다며 부결운동을 벌인 바 있다. 이 대목에서 '원칙'이 무엇인지 꼼꼼히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사전에 나오는 '원칙'의 뜻은 근본이 되는 법칙 또는 여러 사물이나 일반 현상에 두루 적용되는 법칙이다. 

이것을 지금의 논의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산별 구조의 문제에 앞서 '왜 산별노조인가'라는 점부터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산별노조는 노동조합이 가장 '효과적으로' 조직력과 투쟁력을 발휘할 수 있는, 그러면서 광범위한 노동자의 이해관계를 대변할 수 있는 조직형태라는 점이 적어도 우리가 알고 있는 한 역사적으로 입증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산별노조를 추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기업별노조 또한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기업별노조의 장점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으되, 산별노조에 비하면 그 한계가 너무 뚜렷하고 많기 때문에 우리는 기업별노조 체계를 극복하려고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이런 점에서 기업별노조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산별노조를 건설하자고 하는 것이지, 조직형태에서 산별노조가 노조의 '원칙'적 조직형태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다. 왜 지역이 원칙이어야 하는가? 백번을 양보해 설사 원칙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어떻게 지역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서구 산별노조의 조직형태뿐만 아니라 그 운영시스템, 인적자원, 교섭구조 등에서 그들을 따라 할 수 있겠는가? 

덧붙여서, "서구 산별노조의 관료화 현상은 우리가 극복해야 할 지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산별노조의 장점과 단점은 분리되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구조가 보여주는 동전의 양면이다. 산별노조는 곧 조직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조직구조임과 동시에 관료화의 위험이 상존하는 조직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다들 '나름의 길'을 가고 있더라

서구 산별노조가 지역을 기반으로 발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애초 노동조합의 출발이 기업 '내부'가 아닌 기업 '밖'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고, 교섭구조와 관련해 사용자들이 기업 내부를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지역을 중심으로 한 노동조합만을 인정하여 교섭 파트너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을 간과하면 서구 산별노조의 완성체만 보고 이행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 우를 범할 수 있다. 따라서 노동조합의 조직 구조는 나라별로 산업화 시기가 언제냐에 따라 직종별 노조의 전통이나 산별노조의 건설 양상이 다를 뿐 아니라 같은 유럽권에서도 독일과 스웨덴의 조직구조가 다르다는 점에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변화무쌍한 결과물일 뿐이다. 

독일의 현장에는 '노조가 없다'. 스웨덴은 '로칼'이라는 명칭의 우리와 비슷한 조직체계가 있다. 조직구조가 역사의 산물이라면, 우리의 경우 산별노조 체계로 조직과 투쟁을 했던 전평의 역사가 단절된 후, 한국노총의 어용적 산별노조 외에는 기업별노조의 역사밖에 경험하지 못했다. 따라서 우리들로서는 기업별노조의 관성을 어떻게 시급히 극복할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당연하다. 문제는 이것이 조직설계상의 구조에만 매몰되어 '서구 산별노조의 경험을 따라' 지역이 원칙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어떤 '현실적 경로'도 부정하는 것으로 나아간다면 이것은 '형식주의'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다. 서구 산별노조가 가지고 있는 일반적 장점을 받아들이는 것과, 현재의 모습을 갖추기까지 누적되었던 '과정과 역사' 자체를 원칙으로 신봉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점을 인식하지 않으면 아무리 잘해봐야 조직 형식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이면, "금속노조가 현장위원회 체계를 기반으로 지역 중심으로 가야 한다"는 주장은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시 금속노조 조직체계와 운영방식에 대한 초안을 작성했던 내가 조직체계와 운영에 관한 구상을 할 때, 가장 많이 고민했던 것이 기업별노조 체계의 관성을 '현실적으로' 수용하면서 가장 빠르게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하나 밝혀 둘 것은 이런 방법을 찾는 데 가장 많은 참고를 했던 모델은 흔히들 사석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독일 노조의 조직구조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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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중앙교섭을 타결한 금속노조와 사업자대표 ]

현장에 노조의 조직구조가 없는 독일은 애당초 고려의 대상도 아니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지금 당장 벤치마킹하기에는 너무나 우리의 현실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반면 당시 가장 적은 자료가 있었음에도 가장 많이 들여다봤던 모델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코사투(COSATU)였다. 현장위원회 체계를 두면서도 이들이 지역에서 의결과 집행을 책임지며 현장조직 활동가로서 활동하도록 만드는 것, 이것이 금속노조의 규약에도 반영된 것이다. 구체적으로. 지부대의원은 당연히 지회대의원이 된다는 규약과 이러한 규약을 현실에 적용했던 것이 월 1회 지부대의원 대회(회의, 간담회)를 개최하고 금속노조의 방침을 논의하는 한편, 현장에서 실천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왜 처음부터 현장위원회라는 명칭으로 개편을 하지 않았는가? 안타깝게도 조직이 가진 인적자원의 역량과, 그토록 강조하는 현장이 비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문제제기는 당시 현장에서부터 제기되었던 것으로, 금속노조 3기의 조직발전 전략에 반영할 과제로 남겨두었다.

기업구조를 깡그리 무시할 수 있을까

금속노조는 '지역중심으로 운영해야 한다는 원칙'이 아니라 '지역중심으로 운영하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에 지역지부의 위상을 강화하려는 시도를 과감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물론 이는 지금도 사업장 지회의 전임자가 지부로 나오지 않으려 한다는 고백처럼, 그리고 출범 전 구상했던 현장위원 체계가 결국은 사업장 지회 간부들의 역량부재 등을 이유로 애매하게 절충을 할 수밖에 없었던 한계 내에서 시도된 것이었다). 금속노조는 지역지부의 역할을 높이기 위해 애써왔다. 세가지 측면에서 이것이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첫째 전노협 시절부터 지역중심의 활동 경험을 풍부히 가지고 있었다는 것과, 둘째 기업별체계의 관성을 하루라도 빨리 극복하기 위해서는 과도할 정도로 집중성을 강화시켜야 하고, 마지막으로 금속노조 본조의 방침을 원활히 실현하기 위해서는 지부의 '매개역할'이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특히 고려되었던 것은 둘째 사항으로 중소영세사업장이라 하더라도 독립기업에 조직된 노조는 그 자체로 독립적인 활동을 해왔고,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언제라도 예전의 기업별노조로서 활동할 우려가 있었다. 

반면 금융노조나 사무금융노조, 혹은 자동차판매노조의 경우에는 이와는 전혀 다른 특성을 갖는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점포, 대리점은 어떤 경우에도 독자적인 조직으로 활동하기 어렵다. 또한 조합원 수도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20명을 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조합원이 흩어져 있는 조직에서는 지역조직을 강화하려는 노력보다는 대체로 중앙조직의 권위와 힘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특성을 가진 조직에게 지역을 중심으로 운영해야 한다는 것만 강조해서는 답이 안 나온다. 지역을 중심으로 운영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를 구체적으로 제기하지 않으면서 이것이 원칙이기 때문이라고만 주장하는 것은 어느 논자의 표현대로 쓸데없는 입만 벌리게 되는 것뿐이다. 그리고 이들 조직이 만약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을 잘하게 된다면, 그것은 지역이 중심이어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하나의 업종 조직이기 때문일 것이다. 즉 '지역이냐 업종이냐'하는 것은 대립각을 세울 문제가 아니라 상호보완적인 체계를 갖출 수 있는가의 문제다. 오히려 조직구조에 적합한 '조직행동'을 유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기왕 이야기가 나왔으니 앞에서 약간 언급한 금속노조의 '지부교섭'에 대해서도 한마디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은 방침이 변했는지 모르겠지만, '지부교섭'은 중앙교섭에 집중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서 지부가 산하 조직의 일탈을 막기 위하여 교섭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고 행사하는 것이라고 표현해야 정확할 것이다. 일반적인 지부교섭이라 함은 지부가 '독자적인 요구'가 있어서 해당 지부에 대응하는 사용자(들)과 교섭을 하고 '지부협약'을 체결한다는 의미일 텐데, 금속노조에서 실제 이뤄지고 있는 것은 그게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도 각 지부별로 지부 요구를 내걸고 지부교섭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는 장기적으로 전혀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를 낳을 것이다. 

애초 이러한 지부교섭을 하게 된 동기는 중앙교섭 요구만으로는 사업장 동력을 끌어내기 어렵다는 지부의 요청을 따른 것이었다. 그러다가 점차 지부의 독자적인 요구를 관철하는 것이 가능할 것 같아 관행을 만든 것이 각 지부별 특성에 따른 요구를 제기하게 된 배경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중앙교섭을 강화해야 할 시기이며, 사업장 지회의 교섭을 여기에 종속시키기 위한 과정과 내용을 면밀히 고민해야 하는 매우 중요한 시점이다. 현재로서는 어느 하나의 지부에만 국한돼 별도의 지부교섭을 할 만큼 특수한 상황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부교섭을 중앙교섭에서 다루는 방향으로, 조직 전체의 문제로 변화시키기 위해 조정해야 한다. 더구나 사용자단체가 만들어지는 조건에서 사업장 지회의 동력을 굳이 '지부교섭'을 통해 동원해야 할 이유도,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금속노조가 지역 중심의 운영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왜 사업장 지회의 전임자들이 지부로 나오지 않는가? 현실이기 때문이다. 산별노조로 바뀌긴 했으되, 사업장 내부의 문제에서 전임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크고 그 공백을 메울만한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상태가 이런데 지역중심으로 가야 한다는 원칙만 가지고는 부족할 수밖에 없다.

현실 분석 없는 원칙은 무너지기 쉬워

퇴근 공공연맹이 산별건설과 관련하여 조직을 지역중심으로 재편하고 업종단위 의결권을 제한하자는 입장이 나오고 있는데, 이러한 주장들이 추상적인 형태로서의 지역을 거론하는 것이라면 공공연맹의 현실지형에서 역편향을 보이고 있다는 점을 지적해야겠다. 토론회에서 제기된 것이라 확정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이 글이 공공연맹의 산별노조 건설 경로와 관련해 균형을 잡는데 도움이 된다면 그것으로 족하겠다.

공공연맹은 다양한 업종과 규모의 단위로 구성되어 있다. 조직 구성이 다양할수록 이질성이 높아지고,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데 어려움이 뒤따르는 것은 상식이다. 그리고 노동조합은 그 이념적 목표를 전제로 하더라도 교섭과 투쟁을 하는 조직이다. 그렇다면 특히 기업별노조에서 산별노조로 이행하는 과도기에 조직의 투쟁을 집중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교섭의 집중화가 중요하다. 공공연맹을 지역으로 재편하자는 주장은 이런 점에서 현실 지형을 과도하게 뛰어넘으려 하고 있다. 

둘째, 공공연맹의 산별 조직도를 보면 광역단위로 지역본부가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이들 지역본부는 활동범위, 인적자원의 배치와 역량, 산하 조직의 분포 등 그 어떤 측면으로 보더라도 조직을 통제, 관리, 관장, 조직화하기에는 너무나 미흡하다. 지역중심의 운영을 하겠다는 주장을 하려면 지역 중심의 운영을 하지 않는 현재의 체계가 무엇이, 왜 문제인가를 더듬어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최선의 방안이 과연 지역 중심의 운영인지를 판단한 다음에 지역중심의 운영을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조건과 자원이 갖춰져 있는지, 혹은 어떻게 갖출 것인가에 대한 검토가 있어야 한다. 공공연맹의 지금까지 활동과 조직, 투쟁이 한계가 있었고, 이러한 한계를 낳았던 포괄적인 원인이 기업별노조 체계 때문이라면 산별노조 체계로 전환했을 때, 왜 교섭단위는 의결권을 가지면 안 되는가에 대한 분명한 근거나 상이 있어야 한다. 단순히 교섭구조와 조직구조는 다를 수 있다는 것만으로 조직 내부에서 이러한 주장을 관철시키거나 합의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부산을 가려면 대전도 대구도 찍어야 한다

갑자기 산별노조에 대한 논의가 무성해지고 있다. 현실론에 빠지지 말자는 주장도 있고, 원칙에 대한 주장도 있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은 현재 한국의 노동조합들이 기업별 노조로는 버티기 어려운 환경변화에서 살아남기 위한 최적의 구조를 찾으려는 생존의 몸부림일 게다. 모든 조직은 생존을 최고의 목표로 삼는 게 생리다. 그런 점에서 노동조합은 '조합원'을 위한 이기적인 조직일 수밖에 없다. 여기에 딜레마가 있는데, 무수한 현장조직들이 자신의 권력기반을 유지하기 위해 조합원의 이기주의를 충족시키면서 자신들이 '현장'에 있을 때와 집행부를 장악했을 때 달라지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마찬가지 원리다. 조직구조를 환경변화에 맞게 재설계하는 것, 즉 산별노조 건설은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는 여러 가지 방법 중의 하나일 뿐이다. 다만 이것이 우리가 지금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여기에 집중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산별노조의 조직구조를 어떤 형태로 설계하고 운용할 것인가의 문제는 각 조직이 처한 조건과 구성원의 상태를 고려할 수밖에 없다. 하부로부터 자원을 의존할 뿐만 아니라 공식조직보다 비공식조직(정파, 현장조직)의 정치역학이 무수히 작용(최근에는 부작용 외의 긍정적 측면은 별로 발견하지 못하겠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지만)하는 노동조합에서는 더욱 그렇다. 조직구조는 권력 배분의 채널이 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노동조합 조직구조의 설계는 조직 내의 권력지형을 드러내는 기제가 되기도 한다. 때문에 산별전환이 어려운 것이고, 기업별 관성이 잔존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을 고려하지 않으면, 단순히 현실론에 빠지지 말자는 반감에 치우쳐 지역이 원칙이란 '말'만 나부끼고, 결국 막연한 대산별주의는 아무런 프로그램도 계획도 없는 공허한 주장으로 추락할 것이다. 사람이 하늘을 날게 된 것은 중력의 법칙을 거슬렀기 때문이 아니라 중력의 원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라는 말이 있다. 기업별노조에서 산별노조로 전환하는 과도기인 현재로서는 기업별 관성이 나타나는 것도, 때문에 무늬만 산별이라는 비판도 당연하게 나올 수밖에 없다. 수십 년의 시행착오를 거쳐야 할지도 모르는 문제를 단 몇 년간의 경험에 비추어 현재의 산별운동은 실패라고 규정하는 것은 너무 성급하지 않은가 싶다.

'어떻게' 대답 못하면 '정파'는 '패거리'와 다를 바 없다

구조의 문제와 함께 현재의 노동조합운동이 안고 있는 문제의 가장 큰 원인은, 구조를 결정하고 운영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현장 내의 간부활동가 집단, 즉 '현장조직'의 약화라 할 수 있다. 집행부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조합원의 투표권에 의존할 수밖에 없어, 조합원의 '실리적 이해'에 휘둘리거나, 반대로 그것을 악용하는 현장조직들의 한계가 구조의 한계보다 더 심각하다. 

이념적 지향과 현장활동이 괴리되고 있는 모습이야말로 우리 운동의 위기라 할 수 있다. 같은 전국 정파조직에 속해 있으면서도 현장에서는 따로 존재하는 기아자동차의 '기아민주노동자회(기노회)'와 '전진하는 노동자회(전노회)'의 차이가 뭘까? 현대자동차 이상욱 집행부가 주장과 현실 사이에서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이유가 뭘까? 최근에 한 완성차노조의 현장조직을 집중적으로 살펴볼 기회가 있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대충 이렇다. "현장조직이 포괄하는 대의원들조차도 회사 관리자의 지원을 받지 않으면 당선되지 못한다. 현장조직의 방침과 회사의 방침이 심각하게 부딪칠 경우 현장조직에 소속된 대의원들이 누구의 통제를 따를 것 같은가? 회사의 통제를 따른다는 노골적인 증거는 없지만, 현장조직 지도부의 고백으로는 적어도 현장조직의 통제가 먹히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과거 어용조직으로 불렸던 조직의 의장은 "이제 현장조직들 사이에 어떤 차이도 없다"고 단정하고 있었다. 이것은 이념과 현실권력 사이에서 부유하는 현장조직의 현실을 단 한마디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운동의 위기에 대한 원인도 조직내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원인이 될 수 없고, 원인 진단이 공유되더라도 실현방법을 합의하지 못하면 처방은 없다.

이제는 자신의 주장만이 아니라 주장의 근거를 제출해야 한다. 그래야 상호 발전한다. 현장이 약화되고 있다. 그래서 현장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 자체에 대해서는 좌파나 우파 모두 동의한다. 그런데 '어떻게' 라는 차원으로 들어서면, '우리가 권력을 잡아야 하고 우리의 입장을 관철시킬 수 있는 다양한 조직적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는 것으로 전락해버리는 것, 이것이 문제가 아닌가?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현실에서부터 출발하자. 현실을 돌아보는 것이 현실에 안주하자는 것은 아닐터이다. 현실이 왜 무엇 때문에 문제가 되는가에 대한 밑바닥 성찰이 없으면, 흙 한방울 묻히지 않고 진흙탕에서 빠져나오겠다는 것과 다를 게 없지 않은가.

  • 제작년도 :
  • 통권 : 제10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