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더러운 곳에서 예술하자는 거요?

노동사회

지금 이 더러운 곳에서 예술하자는 거요?

편집국 0 3,404 2013.05.19 01:32

지난 9월 초순, 2005 부천민중문화제 행사 중 내게는 조금 색다른 공연을 봤다. 커다란 텔레비전 안에서 여성들 몇몇이 화장을 하고, 요리를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소수자로서 여성의 일상생활, 사회생활을 몸짓으로 표현하는 퍼포먼스, 즉 ‘행위예술’이라고 했다. 아하, 하고 손뼉을 치게 만드는 부분도 있었지만 나를 포함하여 아무래도 전통적인 민중문화에 익숙해 있는 사람들에게는 낯설겠지 싶었다.  

이번 호 ‘똑똑똑’을 위해 방문할 사회단체를 찾다가 문득 그 때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 낯선 곳에 도전해보자.’ 그리하여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찾아낸 곳이 ‘공공문화표현집단 퍼포먼스 반지하’라는 독특한 이름의 ‘집단’. 이름처럼 정말로 인천 서구 어느 빌라 반지하방에 아예 살림을 차려놨다. 그 구성원들을 만나 지역문화운동으로서 퍼포먼스가 가지고 있는 가능성과 의의, 활동하면서 겪게 되는 어려움과 즐거움 등에 대해서 들어봤다.   

“퍼포먼스는 소수자의 짓거리다”

예술과 담쌓고 사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 사실 퍼포먼스라는 말은 기괴한 표정과 불안한 몸짓이 뒤숭숭하게 얽힌, 피하고 싶은 무언가를 연상시켰다. 조금 과장하자면 평온하게 길을 걷다가 만난 ‘새똥’ 같은 거라고 할까? 그러나 퍼포먼스를 직접 본 것은 머리털 나고 올해 딱 한번뿐이다. 그 경험은 낯설기는 했지만 꽤 좋았다. 그런데 왜 그런 이미지를 갖게 됐을까? 아마 예술을 가십거리로 다루는 보수언론을 통해 이미지를 형성했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퍼포먼스라는 게 왠지 부유하고 잘나고 자의식 강한 인간들이 벌이는 사회에 무해한 일탈처럼 느꼈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반지하 활동가들은 나의 이런 고정관념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퍼포먼스란 “소수자의 사회적 발언으로서 짓거리, 직접행동”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퍼포먼스가 허공에서 영감을 얻는 ‘예술’이 아니라, 직접 발 딛고 있는 곳에서, 마주 잡고 있는 손의 온기와 떨림에서 삶의 에너지를 끌어내는 ‘활동’이라고 했다. “기획자가 정형화된 틀거리 속에 참여자들을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참여자들의 삶을 재료로 공연과 프로그램을 구성하고, 이들이 자신들의 정서를 사진, 영상, 전시, 공연 워크숍 등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도록 하는 활동”이 반지하의 퍼포먼스 개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퍼포먼스는 많은 경우 자본주의에 의해 공격받는 구체적인 삶의 현장으로부터 출발한다. 도시의 난개발이 불러일으키는 주거권의 침해 현장에서 지역주민들의 정서를 함께 관찰하고, 사진과 영상, 글, 몸짓 등의 형태로 함께 표현한다든지, 삶의 무료함에 질려하는 지역의 실업계 청소년들과 함께 ‘직업’과 관련한 영상다큐멘터리 작업을 한다던지, 뜨거운 돈바람으로 삶의 문화를 굴절시키는 월드컵 광풍에 딴지를 건다든지 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반지하의 퍼포먼스는 단지 잠깐 삶을 환기시키는 ‘이벤트’가 아니라 지역사회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의 싹을 틔우는 씨뿌리기를 지향한다고 했다. 특히 2001년 인천 재개발지역의 오래된 주택과 동네를 기록하는 작업으로 시작된 <디지털 인천하우스>라는 작업은 지역사회의 문화교육, 문화연구 프로그램들과 결합되면서 촬영 지역의 청소년들이 참여하고, 그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교육프로그램으로 발전하기도 했다고 한다. 

넓은 그늘을 가진 나무로 자라기 위해

이처럼 반지하의 퍼포먼스는 삶의 예술이자 씨를 뿌리는 노동이고, 지하에서 터 올라 끊임없이 성장하는 새싹이고자 한다. 그런데 이들의 퍼포먼스가 안 통하는 공간이 아주 가까이에도 있다고 한다. 바로 지역사회를 바꿔보겠다고 모인 운동권들의 회의자리다. 물론 개개들은 훌륭한 사람들일 테지만 이들이 모인 운동권문화의 논의방식이라는 게 관료적인 짓누름과 토론에서 토론으로 이어지는 공허한 과정만 있지, 섬세하고 구체적인 조율과 일에 자신을 투영하고 싶도록 만드는 소통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반지하는 잘 버텨왔고, 끊임없이 퍼포먼스를 만들어왔다. 그리고 작으나마 새로운 지역문화운동 패러다임의 싹을 틔운 상태다. 이 싹이 그늘이 넓은 나무로 자라기 위해서는 먼저 뿌리가 깊고 넓게 퍼져야 한다. 이를 위해 반지하의 실뿌리가 그들이 보기에 굳어있는 기존 운동의 관성 속으로 침투해야 한다. 쉬운 일이 아니다. 스스로도 변화해야 한 부분이 많을 것이다. 쉽지 않겠지만, 나 같은 예술 문외한에게도 좀 더 즐거운 세상을 위해 이들의 건승을 기원한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0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