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시장 양극화 해결과 사회협약 정치의 활용

노동사회

노동시장 양극화 해결과 사회협약 정치의 활용

편집국 0 3,558 2013.05.19 02:00

사회민주주의적 시각에서 본다면 현 시기 한국사회가 겪고 있는 노동시장 양극화와 관련한 핵심의제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사회경제적 시민권, 무엇보다도 ‘노동3권’이 보장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또한 동시에 이제는 덩치가 제법 커진 한국경제가 세계화의 압력을 ‘노사관계의 혁신’을 통해 극복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찾아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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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사정이 함께 하는 사회대타협은 가능할 것인가? 지난 10월 6일 양노총과 경총이 공동 주최한 노사대타협 토론회 - 출처 : 오마이뉴스 ]

한국 노동정치 핵심과제는 비정규직의 시민권 강화

1990년대 중반 이후 세계화의 거친 파도를 만난 한국 경제는 비정규직의 양산과 노동3권 박탈을 통하여 미봉책에 가까운 탈출구를 모색했다. 그러나 불안정 노동의 보편화를 기초로 하는 현재의 노동시장 체제는 심한 갈등과 불안의 요소를 품고 있다. 이러한 상태는 향후 국가 경쟁력의 핵심이라고 간주되는 인적자원(human resource)의 장기적인 수급과 관련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따라서 이러한 비정상적이고 불균형적인 노동시장의 상황을 속히 극복하고, 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한 사회경제 모델을 다시 구상하는 것이 현재 한국 ‘노동정치'의 핵심의제이다.

세계화 시대 노동시장의 비정규화와 양극화의 경향은 모든 자본주의 국가들, 특히 서유럽 국가들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서유럽국가들은 노동의 사회적 시민권 수준을 어느 정도 제한하는 개혁을 추진하더라도, 동시에 그것을 어느 수준에서 계속 보장할 것인가를 함께 고민하고 있다. 나라마다 편차가 있긴 하지만 유연화의 이름으로 단체교섭과 사회보장제도를 재구성하더라도 축소와 유지를 함께 놓고 고민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 국가에서 비정규직의 도입을 통한 유연화의 확대는 노동시장에서 ‘무권리의 영역’을 양산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1990년대 후반 노동의 시민권이 겨우 보장되기 시작한 가운데 급격하게 세계화의 충격(외환위기)을 맞이했고, 이를 통해 일부에서 1987년 이후 그나마 확대된 노동의 시민권 발전이 되돌려지는 현상이 벌어졌다. 한국의 비정규직은 제도적 기제의 공백 속에서 그야말로 '초취약(hyper-precarious)' 노동대중으로 사회적 지위의 급락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노동시장 개혁과 관련하여 고민할 부분은, 비정규직노동자에 대한 시민권 부여와 강화이다. 문제는 그 정도와 속도를 조절하는 데 있을 뿐이다. 서유럽과는 고민의 방향 자체가 다른 것이다.  

한국의 정규직 노조들은 기업내부 노동시장만을 규제하기 때문에 기업외부 노동시장(파견업체 등)에는 노동의 이해를 대변하는 조직적 주체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기업 외부에서 만들어진 비정규직은 노동계급 속에서도 ‘서자’ 취급을 받으면서 대표자를 잃은 상태로 경제위기 상황에서 기업 안으로 밀려들어 왔고, 내부노동시장의 붕괴를 막기 위한 한국 기업노조들의 수세적 대응으로 인하여 그 확대와 차별이 암묵적으로 용인됐다. 그 결과 노동3권과 함께 각종 사회보장제도의 혜택을 입고 있는 정규직 ‘적자’와, 아무것도 갖지 못한 비정규직 ‘서자’가 작업장에서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두고 함께 존재하게 되었으며, 후자는 이제 자신의 대표성을 회복하기 위해 1987년 이전에 정규직들이 그랬던 것처럼 '인정투쟁(acknowledgement struggle)'을 감행해야 하는 형국이다.  

방치보다 교섭권 부여가 더 적은 비용 들어

비정규직들에게 최소한의 시민권을 부여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정규직의 임금을 깎아 비정규직에게 몇 푼 더 주는 것도 넓게 보아 시민권 확장의 일환으로 간주될 수 있겠으나, 그것은 개혁이라고 할 수 없다. 개혁은 시스템과 제도를 바꾸는 것이어야 하고, 바람직한 방식은 노동시장 제도, 그 중에서도 핵심적으로 단체교섭과 사회보장체제의 개혁을 통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만에하나 비정규직이 정규직보다 낮은 수준의 임금을 받는 일이 생기더라도 이것은 사용자의 일방적인 결정이 아니라 비정규직을 대표하는 조직적 주체가 나서서 개입하고 결정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국가, 사용자, 정규직 모두 적정한 비율로 지출부담을 늘려서라도 비정규직이 어느 정도 사회적 안전망에 기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개혁의 비용은 최소한 ‘모든 비정규직의 정규화’ 보다는 적게 들것이다. 그리고 지금처럼 상황을 방치해두다가 맞닥뜨리게 될 엄청난 갈등의 해소비용, 혹은 사후 치료비용보다도 저렴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아무런 교섭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는 한국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단체교섭의 수혜자로서 지위를 부여해 줘야 한다. 예컨데 독일에서는 파견노동자도 기존 (정규직)노조의 노조원이 될 수 있고, 자신이 가입한 노조와 파견업체의 사용자단체가 체결한 단체협약에 의해 임금을 비롯한 기본적인 고용조건을 결정받는다. 그리고 계약직 노동자일지라도 업무의 형태가 정규직과 동일하다면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리를 적용받는다. 또한 임금교섭을 안 한다는 것만 제외하고는 한국 기업노조와 유사한 역할을 하는 ‘종업원평의회(Betriebsrat)'의 구성원으로, 다시 말해 기업 내부 노동자 대표조직의 일원으로서 참여권도 부여받는다. 이에 비춰본다면 독자적인 비정규직노조의 단결권과 교섭권을 인정하든, 아니면 기존 정규직노조가 주체가 되어 비정규직노동자들을 위한 단체교섭을 별도로 체결하게 하든, ‘비교섭의 무법지대’에 비정규직을 방치하고 있는 한국의 현 상황은 분명히 개선되어야 한다. 

한편 연금과 실업 등 사회보장의 혜택이 정규직을 중심으로 제공되는 것도 문제다. 1998년 노사정위원회를 통한 사회협약의 내용은 노동의 유연성을 높이되 조직노동의 사회적 시민권을 증진시켜주는 정치적 교환이었다. 그 결과 의도하지 않게 비정규직의 희생을 통해 정규직의 안정성을 높여준 형국이 되어 버렸다. 독일에서는 정규직, 비정규직을 망라해서 모든 노동자들이, 예컨데 시간제 단순서비스 아르바이트를 하는 외국인 학생일지라도, 연금보험의 주체가 되고 혜택을 받는다. 기간제 노동자든 파견노동자든 기본적인 사회보험의 사각지대에 놓인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또한 사회보장체계 운영의 핵심 주체는 노사 단체들이고 사회보장시스템이 기본적으로 기업 밖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노사가 추구하는 복지정치는 기업복지가 아니라 자동적으로 사회복지의 성격을 지닌다. 그러한 체계를 기반으로 하여 노동계급의 보편적 시민권은 그들이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원청이든 하청이든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 고용관계를 맺고서 현재 노동시장에서 근로를 하고 있는 피고용인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도록 발전되어 있다. 

‘하이 로드’ 경제 향한 협약정치를 고민하자 

그동안 한국의 정권은 비정규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규직이 양보를 하고 그것을 통해 비정규직에게 혜택을 주는 방식의 정치적 교환을 구상했다. 그리고 이를 위한 사회협약의 전략을 짜면서 정규직에 대한 ‘정치적 공격’을 강화해 이들을 움직이도록 했다. 그러나 이는 정규직이 그간 얻은 파이마저 다시 내놓으라고 하는 것이고, 조삼모사식의 “줬다 뺏는 정치”를 하는 것에 불과할 수 있다. 정규직의 이타적인 행동을 통해 비정규직에게 자발적인 수혜를 베풀기를 기대하는 것도 무리이지만, 그들에게 사회협약의 이름으로 다시금 양보를 요구하고 그것을 위해 정치적 압력을 가한다면 그 역시 현실적이지 못한 것이다. 

어쨌거나 원론적으로 보면 단체교섭이든 사회보장체제든 노동시장제도의 개혁을 위해 노사정이 함께 중앙수준에서 머리를 맞대고 개혁안을 모색하는 일은, 참여자 모두의 진정성이 동반된다면, 바람직하고 효과적인 정치적 방식이라 할 것이다. 그러한 논의 결과 비정규직에게 보편적 시민권을 부여하는 것이 전제될 수 있다면, 필요한 부분에서 비정규직의 확대를, 여러 가지 제도적인 보완책을 함께 고민하면서 사회협약의 의제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한국경제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길이 반드시 ‘비정규직의 확대’를 기반으로 하는 소위 ‘로우-로드(Low-Road)’ 방식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노동이 적극적인 생산성 파트너로 간주되고, 고숙련 고혁신의 작업장을 기반으로 하는 ‘하이-로드(High-Road)' 전략도 가능하다. 당연히 중소기업 정책을 비롯한 여타 기업정책의 개혁과 함께 노사관계제도 개혁을 통해서 적극적인 ‘하이-로드' 전략을 취하는 것도 세계화의 도전에 대한 타당한 응전일 수 있다. 이러한 전략을 현실화하는 과정에서 조직노동이 참여하고 개입할 수 있는 새로운 통로가 마련될 수도 있다면 이 역시 사회협약의 주된 의제로 적극 채택될 수 있다. 비정규직의 시민권 부여를 조건으로 그러한 전략에 조직노동이 협력할 것을 결단하는 것도 정치적 교환의 방식 중에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사회협약을 체결해도 ‘로우-로드'를 염두에 둔 교환이 아니라, 과감히 ‘하이-로드'를 지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말이다. 

한국사회에서 사회협약 정치의 성과와 한계

그 동안 한국에서 ‘사회협약 정치’는 민주화와 세계화의 충격을 완충시키는 혁신적인 정치기법으로서, 어려운 경제상황 속에서도 민주주의 공고화 시기를 헤쳐 나가는 데에 나름대로 의미 있는 기여를 했다. 그러나 아무런 제도적 기반이 없는 상태에서 추진된 일련의 시도들은 당연히 여러 가지 한계를 갖고 있기도 했다. 현재 그 역할에 대해 계속해서 의심을 받고 있지만, 그나마 현재 수준의 노사관계 제도화가 그렇게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것도 객관적인 시각에서 보았을 때 그리 예사로운 일은 아니다. 

협약정치는 일각으로부터는 국가의 불합리한 개입으로, 시장경제를 해치는 불필요한 정치적 수단이라고 비판을 받고 있고, 다른 일각에서는 신자유주의를 도입하기 위한 기만적인 국가의 술수로 비판을 받고 있다. 하지만 국가수준의 민주적 노사관계가 전무했던 한국에서 지난 10여년간 사회적 합의주의의 실험은 ‘관계의 제도화’라고 하는 무시하지 못할 성과를 가져왔다고 판단한다. 한국의 민주화 수준과 노사관계의 일천한 역사에 비추어 보았을 때, 현재 수준의 관계설정이 이루어진 것도 그나마 여러 주체들의 혁신적인 노력과 투자의 결과였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10년간 지속된 노동의 강한 투쟁이 이끌어낸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국에서 진행된 사회협약 정치를 ‘성공’이라고 일컫기에는 너무나 많은 한계가 드러났다. 특히 노동시장 양극화의 주범이라고 간주되는 정리해고의 도입과 파견노동의 허용 등의 제도개혁이 1996년 노사관계개혁위원회나 1998년 사회협약의 핵심 의제였다는 점에서, 사회협약은커녕 사회적 대화마저 일부 노동운동가들에게 금기가 되어 버렸다. 때문에 다시 사회협약을 통해 노동시장의 양극화를 해결하자는 말은 마치 “병을 줬던 놈이 약을 주겠다고 나서는 식”으로 들릴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사회협약 자체가 노동시장의 양극화를 초래한 것은 아니라고 판단한다. 1998년 사회협약의 내용을 보면 정리해고를 인정하되 이를 규제하는 요건을 마련하고, 파견노동제를 도입하되 파견노동자를 보호하는 실천 및 그와 유관한 제도적 보완책들을 구축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물론 파견노동자 보호방안의 구현의제는 지금까지도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급격한 양극화의 초래는 사회협약의 내용에 있었다기보다는 그 실천성의 결여에 있었다고 봐야 한다. 특히 한국의 사용자단체가 국가수준에서 체결한 사회협약을 실제로 회원들에게 강제할 수 있는 조직적 역량이 취약하고 그것을 실천할 진정성이 부족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외환위기 이후 발생한 수많은 부당노동행위 역시 사회협약을 실행하는 조직자본의 내부 규제력이 취약했던 결과라고 판단한다. 사회양극화가 초래한 비참한 결과를 노동이 고스란히 짊어져야 했던 것은 부당한 일이지만, 사회협약에만 그 책임을 묻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양극화를 초래한 데는 불법파견에 침묵하는 정부의 비대칭적인 공권력 집행도 분명히 작용했지만 이는 사회협약 자체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노동이 사회협약 정치 활용할 수 있기 위해서는…  

노동이든 사용자든 중앙수준의 결정을 하부사업장에서 집행시켜낼 수 있는 자체 ‘행정력’이 취약하다는 것이, 많은 이들이 지적하는 한국식 코포라티즘의 취약점이다. 혹자는 그러한 구조적 요건의 결여로 한국에서 사회적 합의정치가 의미를 지닐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구조결정론적인 시각은 지나친 ‘조건론’에 경도될 우려가 있으며, 행위자들의 자율적 행위선택과 창조적인 학습의 가능성을 차단한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오히려 내 판단으로는 이미 한국에서 출현해 나름대로 제도화의 수준까지 이른 한국식 코포라티즘은 기존의 조건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한국의 사례는 노사관계 교과서를 새로 쓰도록 만드는 경험적 자원을 제공하는 쪽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산별수준에서 단체교섭이 발달하고 노사간 갈등적 협력관계가 제도화된 서구의 나라들은 그러한 제도적 자원을 기반으로 해서 중앙교섭을 진행하는 게 보편적이지만, 우리의 경우 오히려 중앙교섭 활성화를 통해 산별수준 교섭의 활성화를 위한 제도적인 기반을 마련하는 모습을 보여 왔다. 서구와는 순서가 반대로 된 것이다. 이는 한국적 특수성을 반영한 모습이라고 생각하며, 역사발전은 반드시 공식대로만 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 개발독재를 이끌어 온 한국 국가의 특수한 요소들이 민주화 이후에도 계속해서 유지되고 있는 것에 주목을 한다면, 한국의 노동조합이 국가와의 대화를 통해 얻어낼 수 있는 것들은 여전히 많다고 본다. 따라서 만일 국가가 대화를 원하는데 노동이 그것을 거부한다면 열심히 개혁을 요구해야 하는 노동의 입장에서 하나의 중요한 정치적 장을 포기하는 꼴이 된다. 

다만 사회협약이 단순한 선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경제 제도의 주체로서 노사가 경제적, 사회적 파트너십을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면, 현재의 이해단체들의 조직적 취약성에 대한 배려와 보완책이 협약과 대화의 진행 과정에서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코포라티즘은 노사가 주체가 된 ‘협치(Co-Governance)’를 함의하며, 우리 사회의 노사가 아직 협치를 실현할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기 때문이다. 

한국식 사회적 협약정치의 또 다른 문제는 행정부 내부의 일관되지 못한 행위선택에 관한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많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우리들은 노동부가 주체가 되는 사회협약의 정치를 경제관료들이 고깝게 보는 모습을 자주 경험했다. 협약의 체결을 위한 논의과정뿐 아니라, 협약의 체결 이후에도 입법과 실행의 과정마다 협약의 결과를 무시하는 경제관료들의 일방적 거부는 협약에 참가했던 이익단체들, 특히 노동조합에게 심각한 정당성 위기를 불러 일으켰다. 

사회협약 비판론자들은 정부의 모순된 태도를 애당초부터 의도적으로 계획한 ‘국가전략’의 일환으로 간주했으며, 이는 중앙차원의 사회적 대화에 노동조합, 특히 민주노총의 지도부가 참여할 수 있는 여지를 제한했다. 따라서 사회협약의 성공을 원한다면 이익집단 내부의 조직적 취약성뿐 아니라 행정부 내부의 일관성을 확보하기 위한 방안이 함께 모색되어야 한다. 

사회협약 정치의 핵심은 복지강화

한국에서 다시 사회협약을 추진한다면, 그 방향은 ‘유연한 고복지국가’로 가는 데에 기여하는 내용이어야 할 것이다. 개발독재 시대의 한국이 ‘경직된 저복지국가’였다면,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유연한 초기 복지국가’로 전환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서유럽은 현재 ‘경직된 고복지국가’에서 탈피해 ‘유연한 고복지국가’를 지향하고 있다. 급격한 유연성 강화가 노동시장의 무복지 지대를 낳고 그로 인한 심각한 사회병리 현상을 경험하고 있는 우리의 경우, 사회협약의 내용에 적극적인 복지국가 강화방안을 담고, 새로운 노동시장제도의 혜택이 비정규직까지 미치도록 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것이 협약의 핵심에서 반드시 시급하게 이루어야 할 ‘공공의 선(public good)’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0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