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매서운 겨울에 노동조합활동가로서 삶을 시작하며

노동사회

이 매서운 겨울에 노동조합활동가로서 삶을 시작하며

편집국 0 2,911 2013.05.19 02:12

출근 4일째.
단위노조 대표자수련회가 열리는 날이다. 현장 간부들과 첫 조우. 긴장감에 턱없이 일찍 일어나 출근을 했다. 준비를 다그치는 상황실장의 목소리가 사무실을 메우고, 준비물 목록을 대조해 가며 물품을 버스로 나르는 상근자들의 발걸음도 빨라진다. 제 시간을 맞추지 못한 사람들에게 개별적으로 연락을 하고, 빠뜨린 물건은 현지 조달하기로 하고 드디어 출발!

시동이 걸리기도 전에 버스 안 사람들은 고개를 떨구고 부족한 잠을 채우기 바쁘다. 이번 수련회의 목표와 안건들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한 나는, 방금 배달된 자료집을 읽기 시작한다.

사전결의대회, 결의한마당, 강연, 분임토의, 보고대회 및 투쟁결의대회…. 머릿속으로 가상 진행을 해봐도 숨가쁜 일정들이다. 그 중에서도 분임토의 주제가 눈에 띈다. ‘비정규법 개악 저지와 노사관계로드맵 반대 투쟁계획과 각 단위에서의 실천방안.’
“흠….” 
히터가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데워진 버스 안 공기에 답답함을 느껴서 일까…. 짧은 한 숨이 세어 나온다. 차창 밖으로 올림픽대로를 가득 메운 자동차들. 덤프트럭도 보이고, 레미콘 행렬도 보이고, 재활용품을 가득 실은 트럭도 보인다. 곳곳에 가끔 보이는 최고급 승용차들은 뒤쪽 모든 차들의 대장인 듯 번쩍이는 검정색으로 압도한다.

아! 이게 현실이구나

구호와 노랫소리로 가득 찼던 대강당은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뒷정리를 하는 상근자들과 단위노조에서 붙여 놓은 플래카드만이 남았다. 이제 잠시 후면 내내 긴장하고 있었던 분임토의 시간이다. 정부측 안과 노동계 안, 인권위 권고안, 어느 교수가 분석했다는 보고서. 머릿속으로 다시 한번 되짚어 본다. 
‘어떤 질문이 나올까… 토론은 어떻게 진행될까….’
“모든 상근자들은 배정된 각 분임토의조로 들어가 주십시오.” 
“후우….”
깊은 심호흡을 한번하고 숙소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토론주제에 대한 짧은 제안 설명에 이어 자유토론이 이어졌다.

“머리로 이해는 하지만 자기의 문제로 느끼지를 못해요. 교육 몇 번 더 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계약직들을 조합원으로 받으려다가 규약변경안이 부결되었는데, 할 말 다 했죠.”
“그래도 지침에 따라서 움직이기야 하겠지만, 선거가 코앞이라….”
“뉴스에 맨날 노조 비리사건만 터져 나오는데 얼굴을 들 수가 없어요. 민주노조와 어용노조의 차이가 이젠 없어요.”
“노동운동이 이렇게 도덕적으로 왕창 깨지고, 게다가 내부적으로 완전히 원수처럼 분열되어 있는디 무슨 힘으로 투쟁하겠어요?”


정규직 노조가 대부분인 분임조였다. 법안이 어떻게 개악되는지 내용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일년을 넘게 질질 끌어온 싸움을 무엇으로 이길 수 있는가 하는 호소였고, 갈구였다. 단위노조의 핵심간부들은 위축되어 있었고, 조합원들에게 적극적인 투쟁을 요구하며 나서기를 주저하고 있었다. 

분임토의 장소도 난방으로 인해 어느새 달궈졌다. 이마 밑에서 땀이 삐질삐질 나면서, 시원한 밤공기, 아니 소나기를 맞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산 속의 숙소는 어느덧 초겨울의 냉기와 짙은 어둠에 잠기고, 단결의 밤이 시작되었지만 고민은 내내 떠나지 않았다.

한순간의 나태함을 경계하자

내가 몸담고 있는 곳에서 활동한 지는 불과 1주일째. 노동운동에 대해, 활동가로서의 삶에 대해 나의 결심과 고민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아니, 이제 출발선에 서 있다는 게 더 정확하겠다. 

하지만, 한가지 가슴속에 깊이 새기고 있는 건, 나의 진정성과 대중의 요구성이 한 지점에서 만날 때, 활동가인 나의 존엄과 대중의 존엄이 함께 피워 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다. 진정성은 단 한순간의 나태함으로도 그 뜻을 잃어버릴 것이다. 요구성은 계급적 자각이 무뎌지는 순간 이기심으로 변해 버릴 것이다. 오로지 이 결심뿐이다. 현재는.

모든 일정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
싯귀 한 구절이 입가에 맴돈다.

살아있는 것들에게 겨울은 
 혹독한 계절이다.
 풀은 말라야 하고 나무는 자라기를 그만두어야 하는 계절이다.
 하지만, 봄이 오거든 보라
 자연은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되살아난다.


노동운동의 한 복판에서 나의 시작이 따뜻한 봄이 아니라, 매서운 겨울인 것에 대해 감사드린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0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