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가다’가 좋아하는 영화

노동사회

‘노가다’가 좋아하는 영화

편집국 0 5,345 2013.05.19 02:53

2003년, 팔월 보름, 오사카 가마가사키에서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가마가사키는 일본에서 제법 큰 요세바(인력시장) 중에 하나로, ‘건설일용노동자의 거리’라고도 불린다. 나는 소개받은 어느 노동자에게 축제를 촬영하고 싶다고 했고, 그는 나에게 몇 마디 묻곤 이내 빨간 깃발을 앞세우고 안내해 주었다. “노동자의 모습을 카메라에 잘 담아주세요. 그리고 노동자들이 좋아하는 영화를 만드세요…”. 일본의 늙은 건설일용노동자이며 활동가인 그의 말이 <노가다> 작업 내내 가슴에 남았다. 

목수인 내 아버지, 너무 착해서 바보 같고, 너무 약해 보여서 화가 나는, 그런 아버지가 늙었다. 일이 없어 노시는 날이 많아지면서 술주정도 심해진다. 술을 드시면 ‘노가다’로 살아온 자신의 인생이 억울하다고 흐느껴 우신다. 노동이 한 인간의 가슴에 한으로 남을 수도 있다는 사실. 외면하고 싶지만 그 눈물과 흐느낌이 자꾸만 가슴을 옥죄어 온다. 

너무 빨리 늙는 그들, 오래 활동하길 바라면 욕심일까?    

1998년, 카메라를 들고 노가다운동판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남자였다면 건설현장으로 바로 들어갔을 텐데, 남자였다면 노가다운동판에 적응하고 이해하는 것이 훨씬 빨랐을 텐데…. 처음에는 수없이 그런 생각들이 절실하게 들었다. 한국 사회만큼이나 남성적이고 보수적인 노가다판, 운동판. 게다가 한국 건설현장은 왜 그리 복잡하고 어려운지, 직접 현장경험 없이 말만으로 이해하려니 도통 감이 잡히지가 않아서, 활동가들에게 끊임없이 묻고 또 물어야했다. 반복되는 질문과 설명에 미안하기도 했지만, 그건 그들이 해야 하는 일이고,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잘 하면 될 뿐이라고 위안도 하고 얼굴에 철판도 두껍게 깔고서. 그렇게 느리게도 5, 6년이 흘렀다. 놀랍게도 그 활동가들이 너무 빨리 늙었다.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까? 처음 만났을 때보다 훨씬 늘어난 흰머리와 주름살, 푸석푸석해진 피부. 몇 번이고 쓰러졌다는…, 그렇게 건설노조운동은 힘겹게 굴러가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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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가사키에서는 젊은 노동자나 활동가를 만나기 힘들다. 노동자들은 대부분이 늙었고, 활동가는 아주 드물게 남아있다. 이 거리에서 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때는 1970년대였다. 가장 차별받고 억압을 당하던 건설일용노동자들이 모여있는 이 거리에서 수 차례 폭동이 이어지면서 ‘가마가사키 해방’이라는 깃발을 들고 많은 활동가들이 모여들었고, 노동자들이 조직되었다. 조직된 노동자와 활동가들이 노동절 행사를 사수하기 위해서 경찰과 몸싸움을 하고, 노동자의 축제를 위해서 힘을 모아 공원에서 폭력배를 몰아냈다. 투쟁의 힘만큼 희생도 있었다. 야쿠자에 의해 살해당한 노동자와 활동가, 빈곤과 과로로 쓰러져 죽어간 노동자와 활동가. 그들의 낡은 사진들이 노조사무실 벽면에 빼곡이 걸려있다. 그들이 프레임 속에서  여전히 ‘가마가사키 해방’을 염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죽은 자들과 함께, 이제 몸은 늙었지만 투쟁을 함께 했던 노동자들은 노동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광부의 자식인 자신을 프롤레타리아 계급이라며 자랑스러워했던 노동자. 나지막이 노동자의 단결을 말하는 그의 모습이 큰 목소리로 단결투쟁을 부르짖는 어떤 구호보다 훨씬 설득력 있게 가슴에 다가왔다. 

대화란 존재하지 않는다

건설노조에서 건설현장 활동이 시작되었다. 건설현장에 산적해 있던 수많은 문제들이 아주 조금씩 수면으로 떠올려졌다. 노조로서 본질적인 활동을 준비하기도 전에 노조사무실로 수많은 임금체불과 노동재해 상담이 쏟아져 들어왔다. 노가다의 가슴에 한으로 맺혀 있는 고질적이고 상습적인 임금체불과 노동재해 싸움. 몇 차례 그들의 싸움에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이 내겐 좋은 경험이 되었다. 말로 해결이 안 되는 임금체불은 조직적인 힘으로 밀고 들어가 현장사무실에서 점거투쟁을 해야만 겨우 해결의 실마리를 볼 수 있다. 본래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믿었던 나는, 싸움보다는 대화를 더 좋아했다. 서로 존중하면서 서로의 입장차이를 점잖게 마주 앉아 대화로 풀어낸다는 것이 얼마나 이상적인가? 그러나 건설현장 안에서는 이미 대화란 존재하지 않는다. 지배자와 심하게 착취당하고 멸시당하는 자가 있다. 뜨거운 여름, 에어컨 바람으로 써늘하기까지 한 현장사무실. 그 밖에서 시원한 물조차 제대로 마시지 못하며 일하고,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된 몸조차 씻을 곳이 없는 현장. 심한 악취로 현기증이 나는 간이화장실. 그렇게 일하고도 돈을 못 받고 몇 개월 피를 말리며 애간장을 태워야하는 임금체불. 그러나 살아남는다는 것이 오히려 운이 좋을 정도로 산업안전시설조차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서 일하다가 떨어져 죽고, 다치는 건설현장. 

그냥 눈앞이 캄캄했지…”

건설현장을 직접보기 시작하면서 아버지의 ‘한’의 실체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시작했다. 현장 일을 좇아 전국을 떠돌고, 어느 곳에서도 사람대접 못 받고 일하고, 일한 임금이 체불되어 일한 날보다 돈 받으러 다닌 날이 더 많은 현장도 있다. 일한 돈 못 받아서 받으러 다닌 심정이 어땠을까? 
“아버지, 거기까지 얼마나 걸리는데?” 
“멀지. 버스타고, 갈아타고 해서 한 3시간 걸렸나.”
“가면서 무슨 생각했는데?”
“무슨 생각을 해. 그냥 오늘은 돈을 줄려나~, 그 생각뿐이지”
“엄마는 아버지가 돈 못 받아오면 어땠는데?”
“앞이 캄캄했지. 니들은 아무것도 몰랐을 거다. 쌀 외상 지고, 시장에 나가서 팔다 남은 콩나물 대가리라도 얻어 오려고 기웃기웃거리다가 그거 조금 얻어 와서 콩나물 밥해서 주면, 니들은 맛있게 먹을 줄만 알았지?”
“그래. 엄마가 해주는 콩나물밥이 제일 맛있었는데, 그게 그렇게 얻어온 거였구나….”


인간다운 욕설

건설현장에 대한 분노가 내 가슴에 쌓이면 쌓일수록 나는 카메라를 들고 해야 할 일이 더 많다고 느꼈다. 노가다들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일하는 조직가들에게 물었다. 처음부터 알고 시작을 했냐고. 아니다. 이렇게까지 건설현장이 열악한 줄 몰랐다. 현장활동을 하면서 해야할 일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건설노조 조직가들은 절대 점잖지 않다. 현장싸움에 들어 갈 때는 소위 ‘양아치’ 같다. 나는 그들의 욕설이 더 진해질수록, 노가다에 대한 진한 애정을 느낀다. 그 무식한 공격을 점잖은 척 타이르며 유려한 말솜씨로 대응하는 사측의 태도에 간악함을 넘어 차가운 사악함을 본다. 그 태도가 더욱 분노를 불러일으킨다. 유리창이  부셔지고 테이블이 엎어져야 약간 인간적인 태도가 엿보인다. 이 사회의 노가다에 대한 멸시와 차별은 그렇게 힘으로 뒤집어져야 할 거 같다. 나는 건설노조 조직가들의 이러한 헌신적인 활동에 언제나 경의를 표한다. 그러나 20대, 30대의 몸 하나가 유일한 재산인 그들도 한명, 두명 병치레를 하고 있다. 그들이 오래도록 건설현장에서, 노가다들이 노동기본권을 보장받고 사람대접 받는 그날까지, 오래도록 활동하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이고 욕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있기에 지금 조금이나마 건설현장의 희망을 말 할 수 있어, 나는 행복하다. 

늙고 따뜻하고 강한 눈물, 그리고 ‘가마사키 해방’

가마가사키의 늙은 활동가가 기어코 눈물을 보였다. 누구보다 강하고 따듯해 보였던 그분의 눈이 늘 촉촉이 젖어 있어 언젠가는 눈물을 보일 거 같더니, 떠나기 전날 기어코 눈물을 흘렸다. 오래 전 함께 활동했던 한 활동가가 보고 싶다고 했다. 자신보다 나이는 어렸지만 스승과 같은 사람이었다고. 수년 전에 한국노동자의 임금체불 싸움에 함께 했고, 체포되었는데 그 이후로 소식을 알 수 없다고, 한국에서 이렇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러 카메라를 들고 온 것을 그가 알았다면 무척 기뻐했을 텐데, 그가 지금 없다. 너무 보고싶다며 기어코 눈물을 뚝 떨구었다. 가마가사키 해방을 위해서 함께 투쟁했던 많은 활동가들이 떠났고, 이제 몇명만 남아서 늙고 있다. 그들마저 없어졌을 때 가마가사키 해방은 누가 부르짖을 것인지…. 가마가사키 해방은 언제 오는가? 

<노가다>는 아버지에게서 한국 건설현장으로, 그리고 일본으로 건너가 노가다와 활동가들을 만난다. 일본에서 나는 한국 노가다와 노가다운동의 미래를 보는 것 같았다. 촬영본에는 <노가다>에 녹여내지 못한 많은 활동가들과 노가다들의 목소리가 남아 있다. 나는 처음에는 노동자의 모습만을 카메라에 담고자 했다. 하지만 현장 밑바닥에서 희생적으로 드러나지 않게 노동자를 조직하고 투쟁하는 활동가들이 있다. 언젠가는 그들의 이야기를 해야겠다. 

“달이 떴네, 달이 떴네, 탄광촌 위에 달이 떴네….”
“국가는 가마가사키에 일을 만들어내라”
김미례 감독의 <노가다>는 1960~70년대 ‘개발한국'의 뿌리로, 그러나 현재 한국 사회의 밑바닥 계층이 돼버린 일용직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건설현장의 일용직 목수였던 아버지의 이야기에서 시작하는 <노가다>는 ‘노가다’로 대표되는 한국 건설현장의 하도급 구조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어떤 형태인지, 어떻게 노동조건을 악화시키고 있는지, 그리고 해결방안은 무엇인지에 대해 담담한 어조로 풀어나간다. 김미례 감독은 이 영화로 한국독립영화협회가 주는 ‘2005년 올해의 영화’를 수상했다. 자세한 사항은 김미례 감독의 홈페이지(www.mi-re.com)를 참조하시오.가마가사키 노동자들이 탄광의 노래에 맞춰서 춤을 추고 있다. 일제시대 일본 탄광촌에서 일하던 조선인들이 고향을 그리며 부르던 노래다. 한 노동자가 아리랑을 부른다. 한 노동자는 한국에 가고 싶다며 비행기 값이 얼마냐고 물어본다. 수년 전에 부산에서 온 한국노동자와 함께 일한 적이 있는데 그가 보고 싶다고 한다. 가마가사키에서는 젊은 노동자를 만나기 힘들다. 대부분 늙은 독신노동자들이다. 그들과 함께 늙어 가는 활동가들. 



김미례 감독의 <노가다>는 1960~70년대 ‘개발한국'의 뿌리로, 그러나 현재 한국 사회의 밑바닥 계층이 돼버린 일용직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건설현장의 일용직 목수였던 아버지의 이야기에서 시작하는 <노가다>는 ‘노가다’로 대표되는 한국 건설현장의 하도급 구조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어떤 형태인지, 어떻게 노동조건을 악화시키고 있는지, 그리고 해결방안은 무엇인지에 대해 담담한 어조로 풀어나간다. 김미례 감독은 이 영화로 한국독립영화협회가 주는 ‘2005년 올해의 영화’를 수상했다. 자세한 사항은 김미례 감독의 홈페이지(www.mi-re.com)를 참조하시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0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