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의 좌파바람, 과연 ‘바람’인가?

노동사회

남미의 좌파바람, 과연 ‘바람’인가?

편집국 0 4,077 2013.05.19 02:50

1월22일 볼리비아에서는 에보 모랄레스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모랄레스는 500년에 걸친 인디오 피지배의 역사를 끝낸다고 선언하면서 동시에 신자유주의의 종언을 선언했다. 그러나 볼리비아의 예는 이제 일반화된 남미 좌파정권 탄생의 한 사례일 뿐이다. 이미 몇 년 전부터 룰라와 차베스를 비롯한 좌파정권이 탄생했고 신자유주의 정책의 실패와 반미감정의 확산으로 2006년의 정세는 격변을 예고하고 있다.

최근 칠레에서도 최초의 여성대통령이 탄생했는데 중도좌파연합의 미첼 바첼렛 후보가 1월15일 결선투표에서 큰 표 차로 당선된 것이다. 칠레를 시작으로 2006년 한 해 동안 코스타리카(2월), 페루(4월), 콜롬비아(5월), 멕시코(7월), 브라질(10월), 에콰도르(10월), 베네수엘라(12월), 아이티(미정)가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하게 된다. 친미 자본주의자인 알바로 우리베 현 대통령의 재선이 확실시되는 콜롬비아를 제외하곤 모두 좌파 후보가 선전하고 있어 당선이 유력하다. 페루는 인접국 볼리비아에서 차베스 혁명노선의 지지를 공개 표명한 에보 모랄레스 좌파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로 반미 사회주의 노선의 올란타 우말라 후보의 지지율이 10% 포인트 이상 급격히 치솟았다. 

일부에서는 이러한 남미 좌파정권의 잇따른 주장을 ‘바람’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한두 개의 나라가 아니라 대륙 전체가 그러하다면 이것은 결코 바람이라고 표현할 수 없다. 단순히 미국에 의한 공작정치의 희생양 정도로 여겨지던 남미에서 잇따라 좌파정권이 등장한 데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이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외의 원인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더 이상 추락할 곳이 없는 남미의 현실

2005년 11월 미주자유무역지대(FTAA) 창설을 협의하기 위한 제4차 미주정상회담이 34개 참가국들의 입장 차이만 확인하고 폐막되었다. 그러자 미주자유무역지대를 적극 추진했던 부시는 폐막식 참석을 포기하고 다음 방문지인 브라질로 떠나 버렸다. 8억 인구에 14조 규모의 통합시장 개막을 추진했던 미국은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파라과이 등 남미공동시장(메르코수르) 4개국과 베네수엘라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이후 논의 일정도 잡지 못했다. 당시 회담에 참가했던 브라질은 미국의 농산물 보조금 철폐를 주장했고, 아르헨티나는 불평등한 무역구조 개선을 요구로 내걸었다. 자신은 자유무역의 원칙을 지키지 않으면서 상대국에게만 요구하는 미국의 위선을 공격한 것이며 불평등 구조에 대한 반미정서가 반영된 결과였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 좌파정권 등장의 배경과 원인은 빈곤과 불평등, 반미주의, 신자유주의 실험의 실패 등이 가져온 결과로 분석할 수 있다. 이를 더 살펴보면 첫째, 빈곤과 불평등의 심화이다. 라틴아메리카에는 식민지 시대부터 이어져 온 대토지소유제와 부의 집중이 심각하게 존재했고 신자유주의 실험에서 더욱 악화되기에 이른다. 예를 들어 브라질은 상위 3%가 전체 농경지의 60%를 소유하고 있고, 전체 국민의 44%가 하루 2달러 이하의 저소득층이다. 이것은 이들의 불행에 그치지 않는다. 불평등한 사회구조는 하층민의 구매력을 저하시켜 시장을 축소시킨다. 이런 저가 중심의 시장구조로 인해 부유층은 고가의 수입품을 구매하여 부는 누출되고 시장을 왜곡시킨다. 더구나 빈곤에 따른 열악한 영양 상태와 교육의 미비로 인하여 노동력의 질마저 떨어지게 되고 노동생산성마저 하락하여 빈곤의 악순환이 전개되는 것이다.

바람의 배경-미국과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

둘째, 반미주의의 오랜 역사이다. 먼로주의(Monroe Doctrine) 이후 남미가 미국의 앞마당이 된 이래로 강한 미국의 영향을 받아 왔던 남미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사실상 미국의 신식민지가 되었다. 단순한 경제적 종속을 넘어서 정치적으로도 극심한 간섭을 받아야 했다. 하버드 대학의 존 코츠워스 교수는 1898년부터 1994년까지 백여 년 동안 미국이 직간접으로 축출한 중남미 정권이 최소한 41개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먼로주의
1823년 12월 미국의 제5대 대통령 먼로가 의회에 제출한 연두교서에서 밝힌 외교방침으로, ① 미국의 유럽에 대한 불간섭의 원칙, ② 유럽의 미국 대륙에 대한 불간섭의 원칙, ③ 유럽 제국에 의한 식민지건설 배격의 원칙 등 3개 원칙을 뜻한다. 그러나 먼로주의는 미국 외교정책의 일방적 표현에 지나지 않았으나 각종 사건에 의하여 국제적으로도 인정을 받았다. 예컨대, 베네수엘라 국경분쟁에서 국무장관 오르니가 먼로주의에 기초를 둔 강경한 의견을 제시한 데 대하여 영국이 그것을 인정한 점 등이다. 대통령 루스벨트는 이러한 외교방침을 더욱 확산시켜, 미국이 서반구에서 국제경찰력을 행사할 것을 주장하였고, 카리브해 지역으로의 진출을 정당화하였으며, 미국 이외의 나라가 영토적으로 발전하는 것을 배척하였다. 

바나나공화국
미국의 바나나 자본이 중앙아메리카에 구축한 비즈니스 제국. 중앙아메리카로의 미국자본의 진출상과 거대한 지배력을 상징한다. 코스타리카, 온두라스, 과테말라, 파나마, 콜롬비아가 포함되어 있다


소련과 공산주의의 침투를 막는다는 구실이었지만 이런 과정에서 인권을 침해하고 부를 독점한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빈부격차는 더욱 심해졌고, 산업구조는 미국의 주도대로 단순화되었다. 바나나만 생산하는 바나나 공화국이나 커피만 생산했던 브라질 등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런 부실한 경제체제는 미국의 주도 하에 만들어 진 것이다. 따라서 남미의 민중주의는 반미의 오랜 역사를 가질 수밖에 없었고 민주화는 미국의 간섭을 제거하는 것이 주된 목표였다.

셋째, 신자유주의 실험의 실패다. 허약한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던 남미에 1980년대부터 시작된 민주화는 개방화를 수반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심각한 경제위기를 초래하였고 미국은 다시 국제통화기금(IMF) 등 국제자본의 형태로 이 지역에 개입하여 자유무역, 민영화, 균형재정 등의 미국식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게 하였다. 

우리 언론의 아전인수식 남미 해석

한국 언론은 연일 남미의 좌파정부 수립에 관한 기사를 내놓고 있다. 하지만 적지 않은 경우 남미의 현상에 대한 이해 부족이나 편견 때문에 왜곡된 사실을 보도하고 있다. 

우선, 이런 좌파정부 등장을 일시적인 현상으로 보는 것이다. 이는 역사성에 기반하여 라틴아메리카의 문제를 보지 못함으로써 생긴 것이다. 남미 좌파정부의 등장은 끊임없이 계속되어 온 불평등한 사회구조 극복을 위한 노력, 라틴아메리카 공동체 수립에 대한 구상, 그리고 이런 현실 타개에 대한 가장 큰 걸림돌인 미국에 대한 저항,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 일시적인 경제개혁의 실패는 하나의 계기가 된 것뿐이다.

둘째는 민중주의에 대한 오해이다. 우리는 중남미의 정치하면 포퓰리즘을 떠올린다. 포퓰리즘은 대중의 요구를 추종하거나 이끌어 내어 권력을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페론을 대표적으로 들고 있는데 페론에게 그런 측면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으나 오히려 페론은 아르헨티나의 토지개혁을 시도하고 산업화를 추구했다. 반면 현재 경제위기의 주범으로 지목되는 외채문제는 이후에 등장한 군부세력이 만들었다는 사실은 가려져 있다. 당시에 인구의 3분 1에 달하는 중산층이 형성되었고, 그들이 페론를 대하는 태도는 거의 국부 이상이었다. 물론 이 중산층의 대부분은 아르헨티나의 외환위기로 다시 빈민층이 되어 제자리로 돌아갔지만 말이다. 오히려 라틴아메리카의 문제는 ‘까유딜료 정치(Caudillismo)’라고 하여 힘센 자가 절대권력을 행사하는 정치라 할 수 있다. 반미는 포퓰리즘이고 친미나 신자유주의는 이성적인 것처럼 몰고 가는 것은 상당히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페론이 비판받는 것은 그가 바로 이 까유딜료(절대 권력자)였기 때문이다. 

셋째는 단순화의 오류이다. 멕시코의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EZLN)의 마르코스 부사령관이 현재 당선이 유력시되는 좌파후보인 민주혁명당(PRD)의 오브라도르 전 멕시코시티 시장을 반대하는 것도 다양한 좌파 성향의 존재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반미와 반신자유주의를 무조건 좌파와 동일시하는 것은 우리의 보수언론이 얼마나 미국 중심으로 사고를 하고 있는가를 나타낼 뿐이다.

남미의 좌파바람은 바람이 아니라 물결이다.

라틴 아메리카에는 현재 커다란 변화가 진행 중이다. 그 변화는 과거의 연장선에서 진행된다. 변화의 첫 물결은 1980년대의 ‘민주화 물결’이다. 1982년 외채위기로 인한 상환불능의 위기는 오일쇼크와 선진국의 구조조정에 따른 고금리의 영향을 받았다. 이에 무능력을 보인 군부는 민주화의 요구에 의해 민간정부로 권력을 넘기게 된다. 이는 곧 미국주도의 경제체제가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 결과이다. 

이후 등장한 민간정부는 이른바 워싱턴 컨센서스(Washington Consensus)에 모든 프로그램을 맡기게 된다. 1980년대 후반부터 재정적자를 줄이고 국영기업매각과 자본의 자유이동 등을 골자로 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미국의 주도하에 진행하게 된다. 미국은 민주화라는 가면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계속 주도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파국이었다. 1995년 멕시코의 페소화 위기로부터 시작된 경제위기로 2002년 아르헨티나 외환위기까지 라틴아메리카의 경제는 역사적으로 형성되어진 빈부격차보다 더욱 큰 위기를 맞게 되었다. 따라서 이 프로그램을 주도한 미국과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두 번째 물결로 좌파정권들이 등장한 것이다. 외부적으로는 반미와 내부적으로는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불평등의 해소라는 과제가 좌파정권의 등에 지워진 것이다. 이는 다층적인 남미의 상황을 표현할 뿐 아니라 21세기 새로운 국제질서의 흐름과 연결되어 있다. 

세 번째 물결도 준비되고 있다. 그것은 스스로의 운명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우선 지역통합이 그것이다. 이를 위해 국가 간 연대를 공고히 하고 있다. 럼스펠드 미 국방장관이 “베네수엘라와 쿠바가 볼리비아 정정불안의 배후”라고 할 정도로 국가 간 연대와 지원이 구체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2004년 말에는 남미 12개 국가가 모여 ‘남미국가공동체’를 결성했다. 따라서 기존의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우루과이 등 4개국의 메르코수르, 그리고 5개국이 모여 있는 안데스공동체 등 남미에서는 하나의 공동체를 향한 실험이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남미의 공동체 구상은 미국에 대한 경제적 종속과 일부 참가국의 이해부족, 잦은 통상분쟁으로 넘어야 할 산이 많다. 하지만 지역통합이라는 대세를 거스를 수 없다. 한 뿌리라는 정서와 이미 수천만이 서로의 국경을 넘어 통합되어 살아가고 있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 과도한 기대는 금물이다. 외환위기 이후의 민간정부처럼 실패할 수 있다. 물결이 들이치고 나면 다시 밀려나오는 것이 또한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벗어나고 불평등을 해소해야 

현재 라틴아메리카의 과제는 미국에 대한 저항과 내부불평등 해소이다. 밖으로는 건국 당시부터 시작된 미국의 간섭과 통제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안으로는 식민지시대부터 이어져 온 부의 불평등을 해소하는 것이다. 그래서 보수 언론은 남미정권들을 반미좌파노선과 실용좌파노선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무엇을 우선순위로 두거나 좀 더 강조하는가의 차이일 뿐이다. 

분명한 것은 대외관계에서는 미국의 외교정책 반대에 한목소리를 낼 것이라는 점이다. 동시에 식민지시대부터 시작된 내부의 빈부격차를 줄이지 않는 한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찾기는 힘들 것이다. 라틴아메리카에서 1980~90년대 정치적 민주화가 첫 번째 물결이었다면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는 것이 두 번째 물결의 과제이다. 이번의 물결에서 어떤 결과를 내오는 가에 따라서 21세기 라틴아메리카의 미래도 변화될 것이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0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