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파워’를 휘두르는 자는 누구인가

노동사회

‘피플파워’를 휘두르는 자는 누구인가

편집국 0 3,705 2013.05.19 03:40

최근 필리핀 아로요 대통령은 군부 쿠데타 움직임이 있다는 이유를 들어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관련된 군 지도부를 검거하였다. 또한 배후 인물로 주목되는 인사들에 대한 수배와 수사가 진행 중에 있다. 더불어 언론의 검열을 강화하고 국민들을 선동할 수 있는 보도나 기사들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으며, 반(反)아로요 인사들을 검거하는 등 강경한 대응을 하고 있다. 국가비상사태는 발효 후 8일 만에 해제되었으나 정부는 여전히 쿠데타 위협이 존재하고 있다고 보고 지속적인 감시와 통제를 유지하고 있다. 

되풀이되며 퇴색하고 있는 피플파워 

이번 국가비상사태 선포는 마르꼬스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필리핀 ‘피플파워(People Power)’ 20주년이 되는 2월25일의 하루 전날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때문에 또 다른 피플파워에 대한 소문이 무성했다. 20주년을 맞이하는 피플파워 기념일을 기해 반 아로요 인사들은 아로요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계획했으며, 정부는 일부 군부세력이 여기에 가담할 움직임을 보이자 즉시 이를 차단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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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로요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필리핀 민중들 ]

피플파워는 필리핀에서 일어났던 ‘민중혁명에 의한 정권변동’을 일컫는 것으로서 학문적인 용어라기보다는 상징적인 말로서 이해할 수 있다. 필리핀에서는 1986년과 2001년 두 차례의 피플파워를 통한 정권변화가 있었다. 1986년 피플파워를 통해 마르꼬스 독재정권을 무너뜨렸을 때는 그 행위의 정당성이 초헌법성에 대한 논란을 압도하였다. 그러나 2001년 제2의 피플파워에 대해서는 일부 외국의 언론에서도 그 행위의 비헌법성을 비판적으로 다루면서 ‘폭도들의 정치(mob politics)’라고 매도하기도 했다. 

당시 피플파워의 합법성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자유민주주의 헌법에서 암묵적으로 보장하고 있는 국민들의 저항권이 발동한 것으로 해명하고 있다. 이러한 초헌법적 정권교체는 민주화 과정에서 독재정권을 몰아내는 방법으로 많은 국가에서 나타났으며 그러한 행위에 대한 정당성이 국제적으로도 인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2001년 피플파워가 선거를 통해 민주적으로 선출된 지도자를 몰아내는 방편으로 이용된 것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그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처럼 필리핀에서는 피플파워가 거듭해서 등장하고 또한 그 의미가 퇴색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상황의 본질을 피플파워의 역사에 대한 고찰을 통해 살펴본다.

피플파워의 주체는 정말 ‘민중’일까?

그 단어가 의미하는 그대로, 피플파워 행위의 주체는 대개 국민 혹은 민중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필리핀 피플파워의 주체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으며, 크게 세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본질적으로 민중과는 거리가 먼 전통적 엘리트(Traditional Elite) 계층이 피플파워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특히 1986년 피플파워 당시에도 마르꼬스 독재정권으로부터 소외당했던 전통적 엘리트들이 반 마르꼬스 대중시위를 주도했다. 피플파워의 상징으로 부각되었던 아키노 여사는 필리핀에서 막강한 재력과 권력을 소유하고 있는 대표적 엘리트 가문인 꼬후앙코(Cojuangco) 가의 딸이며, 1983년 암살당한 아키노 상원의원의 부인이었다. 

전통적 엘리트들이 대중동원을 할 수 있는 능력은 ‘후원-수혜관계’라는 필리핀의 전통적인 관계의 문화가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적 관계가 약한 도시 지역에서 대규모의 대중동원을 가능하게 하는 요소는 역시 필리핀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종교단체, 특히 가톨릭 교단의 지도력이다.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필리핀 국민들의 존경과 추종은 두 차례의 피플파워를 성공적으로 이끄는 데 가장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였다. 지난해 타계한 추기경 신(Sin)은 아키노 전 대통령과 함께 두 차례의 피플파워에서 대중들을 이끈 주도적 인물이었다. 이처럼 전통적인 관계나 종교적 지도력에 의한 대중운동은 민중들의 주체적 사회변혁에 대한 인식에 근거한다기보다는 일부 정치적 권력집단에 의해 동원되는 성격이 강하다. 이는 필리핀에서 정치인들이 대중적 지지를 얻기 위해 가톨릭을 포함한 여러 종교단체 지도자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마르꼬스가 키운 군부가 주도하는 아이러니 

대중동원 능력을 가진 두 번째의 그룹은 노동운동세력을 포함한 좌파 사회운동세력이다. 이들은 진정한 의미의 근대적 대중운동의 주체라고 할 수 있다. 필리핀의 노동운동은 식민지와 독재정권을 거치면서 좌익 이데올로기와 결합하여 반식민지 투쟁과 반독재 투쟁을 수행하는 정치적 운동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박승우, 『노동사회』2005년 3월호 참조). 이들은 주로 지식인들에 의해 조직된 노동자와 학생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회변혁에 대한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1930년대에 탄생한 필리핀 공산당(PKP)은 일제 점령기에 게릴라 활동 등을 통해 강력한 전투력을 발휘했지만, 독립 이후 냉전이라는 국제적 상황 속에서 친미정권의 강력한 탄압에 직면했다. 그러나 1960년대 말에는 민족주의 사상에 고취된 학생운동세력이 좌익운동세력과 결합함으로써 다시금 강력한 민중운동의 주체로 떠올랐다. 

그렇지만 1972년 마르꼬스에 의해 계엄령이 발포됨에 따라 사회운동세력은 급격히 위축되었고, 당시 지도부는 해외로 망명했다. 남은 일부는 신인민군(NPA)을 이끌고 농촌지역에서 반정부 게릴라로서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한편 마르꼬스 독재정권 시기에 필리핀 노동운동은 국가에서 만든 필리핀노동조합회의(TUCP)에 묶여 정부의 하수인으로서 움직였고, 실질적으로 노동운동다운 활동을 전개하지 못했다. 그러나 마르꼬스 독재정권 말기에는 민주화 운동의 물결 속에서 좌파 사회운동세력이 민중운동의 주도세력으로 다시 등장할 수 있었다. 

피플파워의 마지막 주체는 아이러니컬하게도 극우파로 구분될 수 있는 군부세력이다. 필리핀에서 군부의 정치화는 마르꼬스 독재정권이 권력유지 차원에서 군부의 정치적 역할을 강화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군부 내의 각종 파벌과 사조직은 군부의 정치적 야망을 실현하기 위한 기반이 되고 있다. 이들은 국가와 국민의 보호자를 자처하면서 정치ㆍ사회적 개혁을 주장하며 쿠데타를 자주 시도하고 있다. 1986년과 2001년 피플파워에서도 군부는 대중시위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정권으로부터 이탈함으로써 피플파워가 성공을 거두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는 일부에서 피플파워를 ‘군부 쿠데타’로 규정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실제로 1986년 피플파워 당시 군부 측 지도자였던 라모스(Ramos) 육군 참모총장은 이후 정계에 입문하여 국방장관을 거쳐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다. 2001년 피플파워 당시 에스트라다 정권에 등을 돌린 레예스(Rayes) 육군 참모총장도 전역 후 국방장관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이와 같은 쿠데타 군인에 대한 정치적 보상은 군부의 정치적 모험주의를 지속적으로 존재하게 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1986년 1차 피플파워와 아키노 정부의 수립

이처럼 필리핀 피플파워는 성향과 이상을 달리하는 세 그룹이 일시적으로 동일한 목적을 위해 결집됨으로써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 목적이 달성된 후에는 각자의 성향에 따라 다시금 분열되는 모습을 보였다. 좌파 사회운동세력들은 독자적으로 대규모의 민중들을 동원하는 데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대중동원의 저변이 넓은 종교계, 특히 가톨릭계와 연합하여 대중운동을 펼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필리핀 가톨릭은 전통적으로 보수적 성향을 가지고 있어, 이 두 세력은 이념적으로 합치될 수 없는 근본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군부와 좌파운동세력의 관계는 더욱 더 합치될 수 없는 입장에 있다. 즉 필리핀 군부는 현재도 일부 농촌지역에서 활동 중인 필리핀공산당 군사조직인 신인민군(NPA)과 간헐적으로 교전하고 있고, 좌파 사회운동세력들이 이들과 연계되어 있다는 것은 널리 알져진 사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지’보다는 ‘적’으로 서로를 인식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맥락 속에서 두 차례의 성공적인 피플파워에서 이들 세 그룹의 이해관계가 어떻게 합일점에 도달했으며, 또한 피플파워의 결실이 어디로 돌아갔는지는 살펴보는 것은 피플파워에 대한 필리핀 민중들의 입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마르꼬스 독재정권은 장기간 권력의 독점을 통해 다른 전통적 엘리트 계층의 전면적인 저항에 직면하였으며, 1970년대 말부터 시작된 극심한 경제난은 일반 국민들의 불만을 최고조에 달하게 했다. 이런 조건 속에서 1983년 8월 아키노(Benigno Aquino Jr.) 상원의원의 암살사건을 계기로 ‘마르꼬스 독재정권 타도’라는 단일명제 아래 이념적 구분을 초월하여 전 민중세력이 결집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극심한 사회적 혼란과 대내외적인 압력에 직면한 마르꼬스 정권에 대해 군 수뇌부가 등을 돌림으로써 드디어 정권이 몰락했다. 

1986년 피플파워의 성공으로 수립된 아키노 민주정권은 범 민주세력의 결집으로 강력한 혁명정부 형태를 추구하였다. 그러나 정권수립 초기부터 좌파 계열의 사회운동세력들은 친미 성향의 아키노 정부에 대해 지속적인 투쟁을 고집하며 정권에 동참하기를 거부함으로써 피플파워의 결실을 나누는 데에서 배제되었다. 군부 측에서는 일부 지도자들이 정계에 입문함으로써 결실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일부 군부세력들의 불만이 축적되면서 쿠데타 시도가 거듭되었고, 아키노 정권을 지속적으로 흔들어 놓았다. 결국 새로운 민주정권의 수립은 마르꼬스 독재시절 권력으로부터 소외당했던 전통적 엘리트들이 정치적으로 전면 복귀하는 결과로 수렴됐다. 

‘방송의 힘’이 과시된 2001년 2차 피플파워

이렇게 민주적 정치체제에서 의회를 장악한 지방의 전통적 엘리트들은 아키노 정권이 추진한 토지개혁과 같은 각종의 민중지향적 정책을 가로막음으로써 반민중적인 행태를 보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민주화 이후 지속되었던 경제난으로 인한 빈곤층의 확대와 빈부격차의 심화는 필리핀 민중들의 전통적 엘리트들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심화시켰다. 필리핀 국민들은 전통적 엘리트를 트라뽀(trapo)라는 말로 표현하는데, 이는 그들의 언어에서 ‘쓰레기’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은 민중들의 반 엘리트 정서는 1998년 대통령 선거에서 ‘소외된 민중의 대변자’로 자처한 에스트라다 후보가 다른 후보들을 압도적 표차로 누르고 당선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권좌에 오른 지 불과 2년이 지나지 않아, 에스트라다 대통령은 경제정책의 실패를 뒤집어썼고 연이어 각종 스캔들에 연루됨으로써 대통령의 탄핵이라는 역사상 초유의 사건에 휘말리게 되었다. 전통적 엘리트들과 가톨릭 지도자들은 여성편력과 지나친 음주습관을 가진 에스트라다 대통령에게서 국가적 지도자로서의 자질과 도덕성을 발견하지 못했다. 좌파 민중운동세력들 또한 민중의 이름으로 정권을 차지한 대통령이 각종 부정과 부패에 연루되는 것을 보고 반 에스트라다 투쟁에 동참하게 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발생한 2001년도 피플파워에서는 시위의 광경이 실시간으로 방송되었다. 방송은 정권의 이탈자들이 시위대열에 참여하는 모습을 마치 ‘영웅’의 등장처럼 연출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침내 군부의 지도부가 정권에서 등을 돌림으로써 2001년 피플파워는 성공을 거두게 됐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2001년 피플파워를 ‘반혁명적 사건’으로 본다. 민중들이 선거혁명을 통해 뽑아 놓은 그들의 대변자를 도시 중산층들이 시위를 통해 물러나게 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실제로 당시의 시위 주도세력들은 하층 민중들이기보다는 아키노 전 대통령을 포함한 전통적 엘리트들과 정부의 경제정책에 불만을 품은 경제계 지도자들, 그리고 보수적 가톨릭 지도자들 등을 기반으로 하는, 가톨릭계 대학의 학생들과 도시의 사무직 근로자들이었다. 

피플파워혁명 20주년과 아로요 대통령의 선거부정

people_02.jpg2차 피플파워를 통해 부통령으로서 권좌를 계승한 아로요는 ‘피플파워 연합(People Power Coalition)’을 만들어 시위참여 그룹들과 연합하여 정부를 이끌어 가고자 했다. 그러나 점차 대통령의 독단적 행태가 이어짐에 따라 좌파 사회운동계열과 경제계지도자들이 아로요 정권에서 멀어졌다. 거듭해서 밝혀지는 가족들의 부정부패 사건은 여성으로서 그리고 피플파워를 통해 집권한 대통령으로서 갖고 있던 깨끗한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떨어뜨렸다. 그 중에서도 아로요 대통령의 도덕성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던 사건은 2004년 대선에서 아로요 대통령과 한 선거관리위원이 나눈 전화통화 내용이 도청되어 국민들에게 알려진 일이다. 통화내용은 선거 개표부정을 아주 구체적으로 논의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국가적 지도자로서의 도덕성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힌 선거부정사건은 지속적으로 아로요 대통령을 정치적 궁지로 몰아넣었다. 2005년 7월, 장관 7명을 포함한 경제계 중심의 고위 관리 10명이 현직에서 사임함과 동시에 성명을 발표하고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했다. 또한 과거 두 차례의 피플파워을 통해 대중적 지도자의 상징적 인물이 된 아키노 전 대통령도 아로요 대통령에게 사임을 촉구하고 나섰다. 그러나 라모스 전 대통령을 포함한 전통적 엘리트들은 대통령의 사임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고, 보수적 가톨릭 지도자들 역시 입장을 유보하고 있다. 때문에 아로요 대통령은 일단 결정적인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이렇게 정치적 혼란이 거듭되던 상황에서 맞게 된 피플파워 혁명 20주년 기념일은 새로운 피플파워의 분위기를 강하게 조성했다. 반 아로요 진영에서는 2월25일에 대규모의 대중시위를 준비하고 있었으며 여기에 군부가 동참하려고 한다는 계획이 드러났다. 이에 따라 아로요 대통령은 2월24일에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관련된 군 지도자들을 구금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부 군 병력 간의 대치 상황이 일어나기도 했다. 2001년 피플파워 당시 언론의 생중계가 시위 군중들을 모으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을 알고 있는 아로요 대통령은 비상사태선포와 동시에 각종 언론을 철저히 통제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또한 일부 시위대의 강제적인 해산과 관련 주동자들에 대한 검거 등 강력한 조치를 취함으로써 상황을 무마하고자 했다. 그러나 지속되고 있는 강압적인 통치행태는 전통적 엘리트들조차도 상당수가 아로요 정권에게서 멀어지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면 엘리트들 간에 반 아로요 정서가 보편화되어 또 다른 피플파워를 가져올 수도 있을 것이다. 

지친 민중들, “누구를 위한 피플파워인가!” 

필리핀 정치의 속성인 승자독식(勝者獨食)의 원칙은 쉽게 엘리트 계층내의 분열을 가져오는 요소가 된다. 또한 엘리트들 간의 권력순환이라는 전통적인 관습은 권력이 민중들의 손이나 군부의 손에 전적으로 들어가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 피플파워의 진정한 주체는 민중들이지만, 그것을 실질적으로 움직이고 수혜를 차지하는 것은 전통적 엘리트들이라고 볼 수 있다. 필리핀에서 피플파워는 정치적 권력집단의 필요에 따라 언제나 나타날 수 있는 것이 됐다. 그리고 그 결과가 민중들의 삶에는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못함으로써 민중들 사이에 ‘피플파워 피로증’이라는 말까지 나타나게 되었다. 지금 민중은 ‘누구를 위한 피플파워인가’에 대해 의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0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