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의 뜨거움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노동사회

처음의 뜨거움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편집국 0 3,395 2013.05.19 03:28

껍데기는 가라. 
4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것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 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leewb.jpg1967년 『52인의 시집』에 발표된 신동엽 시인의 작품이다. 제목은 “껍데기는 가라”이다. 평자들은 이 시가 우리 역사의 알맹이를 동학혁명과 4월혁명의 이음으로 본다고 풀이했다. 그리고 그를 가로막거나 거스르는 모든 기만과 위선을 ‘껍데기’라고 칭했다고 덧붙였다. 1960년 4월혁명은 친미․반공․독재권력의 불의에 대한 거부이며 민주․민족․자주통일을 향한 열망의 폭발이었다. 3월부터 4월에 이르기까지 청년학도의 선혈 속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과 절규나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라는 함성이 그 상징이었다. 19세기 말 동학혁명의 깃발은 ‘보국안민(輔國安民)’, ‘광제창생(匡濟蒼生)’, ‘척양척왜(斥洋斥倭)’이었다. 민중을 수탈하는 봉건과 나라를 집어삼키려는 외세를 척결하자는 것이었다. 시인은 또한 아사달 아사녀의 순결한 결합을 꿈꾼다. 이를 빌어 민족의 화해와 중립 통일을 바라며 남북의 끝에서 끝까지 강토를 짓누르고 있는 무기와 폭력의 껍데기를 걷어내 버리자고 소리친 것이다. 
후세인들은 “시인의 붓끝이 가를 모르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에 닿아 있는 듯하다”고 말한다. 4월혁명의 순수함이 잔혹한 총칼을 앞세운 군부 개발독재에 짓눌려 버리고 가짜 민주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 미국 일본의 힘이 정치 군사 외교 경제에서 의식까지 지배하고, 또 그에 힘입어 더욱 강성하게 군림하고 있는 지배권력, 남북화해와 통일에 가까이 가기보다는 냉전의 폭정과 금수강산 곳곳에 쌓여만 가는 전쟁 살상무기를 보면서, 알맹이보다 껍데기가 더 많아지고 순수함과 진지함보다는 가식과 기만이 더 기승을 부리는 데 대해 시인은 뜨거운 한숨을 뱉고 있다는 것이다.

억압과 위선의 껍데기로 점철된 날들 

그로부터 40여년이 지났다. 그 때 4월혁명과 동학혁명 정신의 변질과 퇴색을 아파하며 그토록 절절하게 가라고 외쳤던 ‘껍데기’는 어떻게 되었는가? 이미 그 이전부터 이 사회의 질곡을 끊어내기 위한 숱한 저항과 희생이 있었고, 1960년대 후반에서 지금에 이르는 역사도 사실은 시인의 외침을 실현하는, 자주․민주․민중․통일을 부정하는 지배권력의 쓰레기를 치우는 과정이었다. 
4월혁명을 총칼로 찬탈하고 1960, 70년대를 석권한 박정희 정권은 반자주․반민주․반민중․반통일의 충실한 사도였고 그 결정체는 ‘종신 총통’의 꿈과 결합한 유신체제였다. 전두환 5공 정권은 유신위기, 자본위기의 해결사를 자처하며 미국의 보호 하에 잔혹한 유혈폭력으로 권력을 유지하려 하였다. 이들을 관통하는 가식의 이데올로기는 통일 염원을 사장시키는 ‘반공 안보’와 노동자 농민 근로대중을 희생양으로 하는 ‘선성장 후분배’의 철학이었다. 민중들은 치열하게 저항하였다. 때로는 반유신투쟁으로, 때로는 사회변혁의 기치를 내걸고 끈질긴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987년 6월, 30년 가까이 가식과 허구에 가득했던 허접데기 역사를 청산하기 위한 민중의 대장정은 1980년 5월 남녘땅을 핏빛으로 물들였던 광주민중항쟁의 교훈을 살려, 비록 미완의 혁명이지만 ‘6․29 항복선언’을 쟁취하였다. 노태우 정권이 들불처럼 번지는 민주화 요구를 폭압과 음모로 가로막고 가식의 이데올로기를 재연시켜 역사의 시계바늘을 되돌려보려 했지만, 민주화와 통일을 향한 민중의 에너지를 억누를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30여년의 군부독재정치는 종언을 고하고 문민정부-국민의정부-참여정부로 이어지는 이른바 ‘민주화 이행기’의 역사가 펼쳐졌다. 
우리의 민주화는 최소한 절차 면에서는 매우 빠른 속도로 진전되었다. 국민의 기본권과 자유는 비교적 크게 신장되었고 정치참여도 전례 없이 활발해졌다. 삶과 생각을 오래도록 지배해왔던 획일성도 어느새 많이 희석되고 여러 방면에서 다양성이 발휘되고 있다. 남북화해는 2000년 ‘6․15 선언’의 금자탑을 세우는 데까지 이르렀고, 아직 미국의 전쟁위협과 같은 누적된 장애물과 예기치 않은 방해공작으로 뒤뚱거리기도 하지만 남북 민중 간 신뢰와 평화공존을 위한 노력 역시 줄기차게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신동엽시인이 절규했던 없어져야 할 ‘껍데기’는 숱하게 남아있다. 어떤 것은 소멸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생하고 있기도 하다. 주한미군으로 상징되는 외세는 여전히 주인행세다. 남의 땅에 군대를 갖다 놓고 운영비와 기지 이전비를 내놓으라 하고, 제멋대로 폭격훈련을 하게 승인하라고 윽박지른다. 민중의 격렬한 저항투쟁으로 기가 꺾이기는 했지만 쉬 물러갈 태세는 아직 아니다. 여기에 과거사 청산반대에 목을 매는 부류들이 가세하여 외세의 힘을 북돋운다. 이들은 온 세상이 ‘빨갱이판’이 되었다고 분개하고, 진보진영에서는 신자유주의 신봉자라고 비판해 마지않는 노무현 정부마저 ‘사회주의 정권’이라고 몰아 부친다. 
이들에게는 시장주의 원리에 의한 경쟁력 강화와 노동유연화에 의한 성장만이 우리 사회의 살길이고 사회복지 확충이나 소득재분배를 통한 삶의 질 향상정책은 “나라 망치는 낡은 평등주의”일 뿐이다. 옛날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사람들 사이에도 시장주의 세력에 못지않은 억지와 착각이 자주 돌출한다. 해방 전후의 역사를 ‘재인식’하고 박정희 시대를 재평가해야 한다거나, 민주화가 되었으니 이제는 법과 원칙대로 해야 하고 고용의 유연화는 경제를 살릴 수 있는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주장이 그 예들이다. 
껍데기 사회의 실체는 알맹이 민주주의가 채워지지 않은 데서 더욱 분명해진다. 오히려 쪼그라들었다는 것이 더 진실일지도 모른다. 소득과 고용이 불안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60%에 육박하고 노동소득 분배율은 해마다 낮아지고 있다. 새로운 빈곤층이 급증하여 다수의 빈곤과 소수의 부가 모두 늘어나면서 공동체는 붕괴 위기에 처하고 사회양극화는 그 끝을 가늠하기 어렵다. 우리사회는 치열한 투쟁 끝에 절차상 민주주의, 정치상의 민주주의와 남북화해와 접근을 성취했지만, 고른 나눔과 다수 민중의 배고픔을 해결하지 못했다. 그리고 외세의 지배와 간섭은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망령의 힘을 빌려 이 민족, 민중의 숨통을 갈수록 거칠게 조르고 있다. 

노동운동의 껍데기는 갔는가

민족통일과 민주주의를 괴롭힌 껍데기들이 치열한 투쟁을 통해 벗겨지는 동안에 노동을 뒤덮은 껍데기도 같이 벗겨졌을까? 아니었다. 오히려 한참이나 더 기다려야 했다. 노동에 뒤덮여진 껍데기는 두텁고도 질겼기 때문이다. 강력한 독재권력의 비호 아래, 횡행하는 자본의 폭압 앞에, 노동의 저항력은 너무도 약했기 때문이다. 해방 후 노동의 시련은 먼저 미군정이라는 외세의 강요로부터 시작되었다. 미군정은 일제 식민지체제에서 남겨진 노동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루어진 자주적 노동운동의 터전을 철저하게 파괴하였다. 이후 노동의 절박한 요구는 국가권력에 의해 무참하게 차단되었고 자본은 이를 배경으로 노동을 무자비하게 착취하고 무시하였다. 
남북분단과 북괴 남침 위협을 빌미로 노동운동이 지향해야 할 이념적 지평으로, ‘반공’, ‘멸공’이 강요되었고, 노동조합운동의 가장 기초적인 내용마저 허용되지 않았다. 뒤늦게 제정된 노동법은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 현실에서 무력화하였고, 1960년 4월혁명의 여진 속에서 잠시 이루어진 노동운동의 변화도 1년 만에 군홧발 아래 단절되고 말았다. 군사정권이 강제한 것은 ‘선성장 후분배’의 철학이었다. 그것은 자본에게는 알맹이지만 노동자에게는 껍데기였다. 노동은 국가주도 경제개발정책 아래 생계비의 절반도 안 되는 임금으로 노동기본권 박탈에 순종하기도 했다. 전태일 열사를 필두로 수많은 노동자들이 자신의 몸을 던져 저항하고 집단적으로 싸움에 나서면서 민주, 변혁의 깃발을 올려보기도 했지만 총자본의 위력을 꺾기란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노동자들은 40여년이라는 인고의 세월을 보냈다. 
물이 고이면 넘치고, 용암이 꿈틀대다 보면 화산으로 폭발하는 것은 자연의 이치다. 마침내  노동자들의 분노가 폭발하였고 그것이 1987년 노동자대항쟁이었다. 이를 계기로 노동을 속박했던 껍데기가 매우 빠른 속도로 물러갔다. 노동기본권이 신장되면서 임금도 크게 올랐고 노동조건도 개선되었다. 현장을 짓누르던 폭력적 권위주의도 이른바 작업장 민주주의에 의해 힘을 잃었다. 허구에 찬 노사협조주의도, 실리적 국가주의도 설 자리를 잃고, 자주 민주 연대 투쟁 이념을 원칙으로 하는 민주노조운동이 구축되었다. 노조의 힘은 자본의 그것에 맞설 수 있을 만큼 강해지고 정치적 발언권도 높아졌다. 
특히 1996~97년 총파업은 권력과 자본이 지닌 힘의 크기를 폭로해냄으로써 1987년 노동자 대항쟁이 요구한 노동운동의 도약을 상징적으로 입증하였다. 이를 통해 노동은 오랫동안 갇혀왔던 패배의식과 좌절감을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노동은 더 이상 권력과 자본이 마음대로 갖고 놀던 대상도 아니며, 국민의 의식 속에 “천한 무리”, “무식한 집단”으로도 남아 있지도 않았다. 노동은 이제 생산의 원동력으로서 역사발전의 지렛대로서 당당히 제 위치에 서게 되었다. 

관성으로 두터운 구태를 넘어서기 위하여

그러나 그것도 잠시, 오늘날 노동에게는 또 다른 형태의 껍데기들이 더덕더덕 눌러 붙어 목을 조여오고 있다. IMF 경제위기를 고비로 들어온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망령이 쳐놓은 덫에 걸린 때문이다. 이 망령은 노동의 성과를 송두리째 무너뜨리고 그 존립마저 위협하고 있다.
기업이 무너지고 구조조정이 강행되었으며 노동조건은 파괴되었다. 정리해고를 정점으로 한 노동의 유연화가 급속도로 진전되었고 비정규직 노동자는 전체노동자의 절반을 훨씬 넘어서 있다. ‘선성장 후분배’의 철학이 다시 기승을 부리고, 기업에 대한 사회적 불신이 높아가는 한편에는 “기업이 살아야 노동자도 산다”는 구호가 부활되고 있다. “대기업노조의 집단이기주의가 사회양극화의 원인”이라는 진단이 서슴없이 나오고 “고용의 확대를 위해서는 노동시장의 유연성 확대는 불가피하며 비정규직의 확산은 차별시정, 근로감독을 통해 대처하면 된다”는, 이른바 ‘유연안정성’이 정책의 기조로 통용되고 있다. 노사관계선진화라면서 노동기본권 확장에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끼워 넣으려는 시도도 끈질기다. 난폭한 노조파괴와 부당해고를 일삼으면서 노사협력을 강조하는 가면극도 늘어나는 추세다. 경제주의, 시장주의는 만연하고 노동의 위기를 말하는 강도는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껍데기만 안고 있으라고 강요당하는 현실, 그것이 노동의 현주소다. 
그 원인은 두말할 것도 없이 무한대의 탐욕을 추구하는 자본운동의 변화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그것은 밖의 조건일 뿐, 상황의 핵심 설명요소는 아니다. 노동은 분명 성장하였다. 하지만 그에 취한 사이에 어느덧 누덕누덕 관성의 덧칠이 가해지고 두꺼운 껍데기로 되어 스스로를 얽매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비원칙이 원칙인 것처럼 변질되고 착각되고 있기도 하다. 낡은 이념의 굴레에 얽매여 대중을 대상화하고 편 갈라 다투게 하는 일, 민주적 조직체계와 운영을 자신의 관념의 잣대로 재단하여 파괴하는 일, 조합원의 변화를 무시하고 과거의 관성대로 동원하려고만 드는 일, 임금에만 모든 활동을 집중시키면서 입으로는 사회개혁을 외치는 일, 기업별노조의 마력에 안주한 채 산별노조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일, 무엇보다 정규직 이익을 지키기 위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문제를 애써 외면하면서 연대의 원칙을 외치는 일, 대중성을 외치면서 대중위에 군림하는 권위주의, 실천보다는 관념에 매달려 논쟁을 즐기려는 일, 투쟁에 몰두한 나머지 소박, 성실, 겸손, 용감함으로 집약되는 노동자의 품성이 훼손되는 일 등등, 지금 노동의 주변에는 치워야 할 껍데기가 어느 때보다 많아 보인다.  
바쁘게 뛰어 다니는 사이에 누더기처럼 달라붙은 이러한 껍데기들을 청산하는 것, 이 역시 노동운동 혁신의 과제가 아닐까 싶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0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