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성 요구하는 로드맵 합의과정과 결과

노동사회

자성 요구하는 로드맵 합의과정과 결과

편집국 0 2,839 2013.05.24 12:02

노사정의 풍향계가 또 한번 거세게 요동치고 있다. 그 진원지는 노사관계선진화계획, 곧 로드맵에 대한 9월11일의 이른바 ‘노사정합의’다. 이를 둘러싸고 한편에는 당사자 다수의 합의동맹이 형성되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합의를 깨기 위한 배수진이 마련되어 있어, 노사정 관계에는 높은 긴장도의 한랭전선이 드리워져 있다. 노동운동진영 내부의 파열음도 매우 거칠다. 

한국노총은 위원장 폭행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면서 민주노총을 “현실을 무시한 무책임한 원칙주의자”로 몰아붙이고, 민주노총은 노사정합의의 부당성을 들어 9월19일 대의원대회에서 “11월 총파업”을 결의하였다. 사회시민운동 단체나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분분하다. 비판자들은 ‘9·11 합의’가 노동기본권을 침해하고 노동의 유연성을 확장하여 노동을 더욱 어려운 처지로 몰아넣었다고 지적한다.    

평가가 엇갈리는 노사관계로드맵 합의

노사정합의 당사자는 한국노총 위원장,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회장, 대한상공회의소(상의) 회장, 노동부장관, 노사정위원장이다. 합의사항은 현행 유지와 개선사항을 합하여 32개라고 한다. 그 주요내용을 보면, △복수노조 허용과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조항을 2009년 12월 말까지 3년 더 늦추어 시행한다는 것, △직권중재제도는 폐지하되 필수공익사업장을 현행에다 항공, 혈액, 폐수처리, 증기 온수공급사업으로 늘리고, 쟁의행위 시 필수업무유지를 의무화하며, 대체근로를 허용한다는 것, △5년 이하, 3천만원 이하 벌금이라는 부당해고 벌칙을 삭제하는 대신 노동위원회 구제명령에 대한 이행을 강제한다는 것, △경영상 해고 협의기간을 현행 60일 전 통보에서 기업규모 및 해고규모를 감안하여 60~30일로 차등 설정하고, 3년 이내 동일업무재고용을 의무화한다는 것 등이다. 

이렇게 하여 로드맵은 길게는 참여정부가 내놓은 지 3년 만에, 그리고 짧게는 노사정 사이에 논의가 시작된 지 4개월 만에, 노동개혁이라는 이름으로 국회의결의 마지막 수순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이번 합의가 절차상의 정당성을 갖지 못했을 뿐 아니라 “1,500만 노동자를 기만하고 노동권을 유린하는 폭거”라고 강력하게 규탄하였고, 상당수의 연구자들과 사회시민운동 쪽에서도 노동개혁을 왜곡했거나 포기한 결과라는 내용의 비판을 제기했다.  

노사정 다섯 당사자는 자신들의 합의의 의미를 <노사관계 선진화를 위한 노사정대타협 선언문>을 통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즉 이번 합의가 “보편적 국제노동기준과 우리 노사관계 현실을 함께 고려하여 마련된 것이며, 법 시행에 따른 심각한 사회적 혼란을 막고 어려운 경제적 여건 속에서 노사관계 안정을 도모해야 한다는 고심 끝에 내린 결단”이라는 것이다. 한국노총 이용득 위원장은 700만 내지 800만 노동자에게 혜택을 줄 수 있는 큰 성과라고 자평했고, 경총과 상의는 노사정이 한발씩 물러나 힘들게 이룬 대타협이라고 공식 입장을 천명했다. 이상수 노동부장관은 노동계가 많이 양보한 결과라고 소회를 밝혔다. 현실을 고려한 고심의 역작이라는 것이며 합의 성사에 만족해하는 표정들이다. 

진정한 ‘대타협’이 되기 위해 필요했던 조건들  

그럼에도 노사정합의는 여러 가지 면에서 많은 의문과 모순점을 드러내고 있다. 무엇보다 먼저 ‘민주노총이 왜 배제되었는가’하는 것이고, 또 ‘민주노총이 빠진 결정을 과연 노사정대타협이라고 할 수 있는가’이다. 당초 로드맵을 논의한 곳은 노사정대표자회의였고, 민주노총은 그 구성원이었다. 그런데 합의는 민주노총이 제외된 채 노사정대표자회의 나머지 다섯 구성원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이에 대해 누구도 해명하고 있지 않다. 민주노총이 시간과 장소도 알려주지 않았다고 해서 ‘밀실야합’이라고 비난한 데 대해, 한국노총은 “6명 중에서 5명이 야합을 했다면 나머지 한명은 도대체 무엇을 했느냐”고 반문했다. 하지만 민주노총 배제이유는 말하고 있지 않다. 

정부 역시 마찬가지다. 1996년 노사관계개혁위원회 때는 비록 합의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당시 비합법조직이었던 민주노총을 참가시켜 활발한 논의를 벌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합법조직인 민주노총을 논의과정에 참여시키고 합의에서는 배제해버렸다. 나아가 정부는 스스로의 권위를 허물어뜨리는 우를 초래했다. 당초 노사정대표자회의는 노사정위원회가 민주노총의 불참으로 제 기능을 할 수 없게 되자 민주노총을 참여시켜 노사정위원회의 개편과 로드맵 논의를 하자고 만든 기구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정부는 노사정대표자회의의 정식구성원을 배제함으로써 모처럼 성사된 3자협의기구의 권위를 스스로 무너뜨리고 만 것이다. 

국회일정에 따른 시간상의 긴박함에 비추어, 민주노총의 협상방식 때문에 논의가 진전되지 않은 데 대한 정책 입안자들의 초조감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협상 과정에서는 항시 원칙론과 현실론이 명분과 실리를 내용으로 하여 서로 충돌하거나 갈등하면서 합의에 이르기 마련이다. 따라서 원칙론만을 고집한다고 해서 결정적인 합의과정에서 배제시키는 것은 협상의 원리를 크게 벗어나는 일일 뿐 아니라 사회통합의 이치에도 맞지 않다. 이런 점에서 이번 ‘5자 합의’가 이름 그대로 진정한 노사정 대타협이 되기 위해서는 협상 당사자의 하나인 민주노총이 소외된 이유를 분명히 밝혀야 한다. 

민주노총 스스로도 석연치 않은 점을 설명해야 한다. 그 핵심에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는 동안 민주노총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라는 질문이 있다. 9월 들어 국회가 열리면서 노동부장관은 정부 독자안으로 입법예고하겠다고 누차 호언했다. 이에 반발하여 한국노총은 ILO 아시아·태평양 총회에서 철수한데 이어 경총과 합의안을 발표하였다. 그야말로 로드맵 마무리가 거의 초읽기에 들어간 것이 분명한 시점에서, ‘원칙적인 의사표명’ 이외에 민주노총이 무엇을 한 것인지 알 길이 없다. 때문에 민주노총 위원장이 한미 자유무역협정 반대투쟁과 노동법 개정안 반대에 대한 미국 노총의 지지를 요청하기 위해 미국을 갔다는 민주노총의 해명은 힘을 잃고 있는 듯 하다. 

물론 위원장이 미국에 간 것은 중요한 이유가 있어서였을 테고, 위원장이 빠지더라도 로드맵 논의와 관련해 민주노총은 나름의 판단에 따라 대응책을 준비해 놓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노사정 5자합의’는 감행되었다. 이것이 혹시 ‘강력한 투쟁력을 가진 민주노총을 제쳐놓고 감히 자기들끼리 합의할 수 있겠냐’는 자만심과 그에 기초한 방심에서 나온 결과는 아닌지 돌이켜 봐야 한다. 이러한 비판은 정파 간의 음해나 비난을 넘어, 민주노총 운동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제기로 받아들여야 한다. 

노동개혁 목표와 동떨어진 합의내용 

이번 노사정합의가 협상의 산물임에는 분명하다. 그리고 협상결과는 각기 처한 입장에 따라 이해득실의 계산법을 달리할 수 있다. 이에 대해 한국노총은 “교섭에서 불가피한 절충과 양보는 성과와 함께 평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인데 이번 합의는 결코 손해가 아니라고 강변한다. 또한 이번 합의가 “야합 아닌 투쟁 협상력의 산물”이라고 말하고 “무책임한 원론적 주장과 대안 없는 투쟁을 넘어선 가장 현실적인 방안”이라고 평가했다. 복수노조 허용과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조항의 3년 유예는 아무런 대안을 갖지 못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며, 직권중재 폐지나 근로기준법상의 개선내용은 전체 노동자들의 근로조건 보호와 고용안정에 기여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협상은 운동의 전략목표를 전제로 현실 조건과 역량관계를 감안한 전술적 선택이다. 한국노총의 주장은 이러한 맥락의 표현이다. 또한 합의 내용 가운데는 진일보한 부분도 실제로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어찌하더라도 노동개혁의 기본과제를 대책 없이 피해간 것이라는 비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다. 일부 근로기준상의 개선사항 확보에도, 노동자계급이 조직을 만들어 스스로 권리와 이익을 지키고 키워나가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노동자조직의 집단적 감시와 투쟁 없이 근로기준이 유지 향상되기란 쉽지 않다는 현실이 이를 잘 설명해준다. 

복수노조 허용과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조항의 시행은 3년 동안 유예되었지만 그 이유는 지난 10년 동안 유예되었던 때의 그것(“미쳐 준비가 안 되었다”)과 전혀 다름이 없다. 이번에는 다르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3년 후의 전망은 어느 것도 분명치가 않다. 3년이라는 짧은 세월에 노사정 관계에서 달라질 수 있는 조건이 선뜻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노조 스스로 3년 안에 스스로 전임자 임금을 준비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전임자 임금지급에 대한 노사자율 결정을 투쟁으로 쟁취해낼 수 있을 것인가? 

또한 복수노조로 인한 혼란이 3년 후에는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책은 어디에도 없다. 이번 합의에 희희낙락했다는 삼성재벌이나 포항제철 같은 거대자본의 막강한 위력이 엄존하는 상황에서, 복수노조 허용이 3년 후에 또 다시 유예될 가능성은 정말 없는가? 이렇게 보면 이번 합의 결과에 따라 복수노조 인정을 통한 비정규직노동자의 조직화와 여기에 기초한 노동조건의 개선은 지연되었고, 조직율의 제고를 통한 조직역량의 강화는 기약하기 어려워질지도 모르게 된 것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앞으로 어떤 성격의 정권이 등장할지 아무도 모르는 판국이다. 결국 참여정부가 노동개혁이라는 뜨거운 감자를 노사정합의라는 형식을 빌려 다음정부에 떠넘기는 것이라는 혐의를 벗어나기 어렵고, 이 점에서 노동개혁이 포기되었다는 비판이 설득력을 얻는 대목이다. 

직권중재 철폐는 성과라고 주장하지만…

한편 이번 합의결과 중 직권중재 철폐는 무엇보다 높이 평가될 항목임에는 틀림없다. 그간 필수공익사업 사용자들이 교섭을 해태하여 근로조건의 개선을 지연할 수 있도록 하고, 또 노사관계 파행을 초래했을 뿐 아니라 ‘불법 쟁의’로 인한 숱한 노조간부의 해고 구속을 가져왔던 원인이 제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한 이번 합의를 통해 대체근로의 허용되면서 과거보다 더 늘어나게 될 필수공익사업장의 단체행동권이 사실상 무력화되고, 뿐만 아니라 필수업무유지 의무화로 인해 노사간 분쟁을 유발될 가능성을 안고 있다는 사실을 함께 살펴봐야 한다. 

혹자는 대체근로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선진국의 경우 대체근로를 허용하는 추세라고 강변한다. 그러나 미국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우리보다 노조의 조직역량이 훨씬 강하고 정치적 영향력이 높은 나라들에서 시행되는 대체근로를, 우리와 맞비교 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세포적인 접근이다. 더욱이 필수공익사업의 범위 확대 등을 제쳐두고 직권중재 폐지만을 들어 ‘노동기본권 확장’이라거나 ‘국제규범에 맞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야말로 비약일 수밖에 없다. 노동기본권의 확장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선진국의 잘못된 제도를 따라가는 것을 결코 국제노동기준에 부합하는 것이라든가 노사관계의 선진화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튼 노사관계 개혁을 위한 노사정 차원의 시도는 단결권 보장의 기초 변화를 3년간 유보한 채 일단 마무리되었다. 노동운동의 변화도 그만큼 미뤄졌다. 직권중재제도의 철폐라는 중요한 발전은 필수공익사업장 범위확대와 대체근로 허용으로 인한 단체교섭 또는 단체행동권의 약화라는 제약으로 상쇄되었고, 근로기준상의 전향적 개선은 복수노조 허용을 통한 노동자 스스로의 자구적 장치 마련이 지연됨으로써 그 의미가 반감되었다. 노동개혁의 산물 치고는 너무도 퇴색한 모습으로 남게 된 것이다. 

합의과정에 드러난 부정할 수 없는 ‘역량 문제’

로드맵을 둘러싼 공방은 이제 국회로 넘어갔다. 민주노총은 국회의결을 저지하기 위해 총파업투쟁을 벼르고 있어 귀추가 주목된다. 또한 민주노동당의 결사저지투쟁을 비롯하여 정당 간 정략적 이해타산에 따른 정치적 변수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노사정합의’라는 사회적 중량 때문에 민주노총의 저항이 웬만큼 위력이 아니고서는 아무래도 국회에서 성과를 내는 게 힘겨울 듯하다. 거기다가 한국노총은 노사정합의의 정당성을 각인시키기 위한 활동을 추진한다고 한다. 상당한 정도로 민주노총의 자세를 비판하는 내용이 담겨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를 통해 양대 노총 갈등의 골이 더 깊어질 우려마저 배제할 수 없다. 이야말로 ‘노동운동의 분열’이라는 총자본의 노림수에 걸려든 형국이다. 어떻게 해서 이런 지경에까지 이른 것인가? 

그것은 이미 로드맵이 대두된 때 예정되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애당초 로드맵이 제출될 때도 노동기본권과 노동유연성의 확장을 맞바꾸는 것이라 하여 노동운동진영은 매우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거나 반대를 표시하였다. 로드맵에서 노동기본권의 핵심문제는 복수노조 인정,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조항과 직권중재제도 철폐 등이다. 복수노조 인정은 단결의 자유와, 전임자 임금지급은 노사자치와, 직권중제제도는 단체행동권과 관련되어 있었다. 이 모두 노동운동진영에게는 치명적이라 할 만큼 중대한 문제이지만, 자본가진영의 초미의 관심사는 ‘복수노조 허용’에 집중되어 있었다. 복수노조 인정이 노조의 역량을 확대하고 노조운동의 판도를 재편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삼성과 포철 같은 거대 독점자본에게는 절대 허용되어서는 안 되는 과제였다. 거기다가 정리해고 요건완화를 비롯한 노동유연화에 필요한 조치 역시 반드시 관철시켜야 할 대상이었다. 

그럼에도 노동운동진영은 1997년과 2002년에 5년씩 유예에 합의해 놓고는 10년간 아무런 준비도 갖추지 않았던 데 이어, 이번에 다시 3년을 유예해 줄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리게 됐다. 이는 노동운동진영이 가진 역량의 취약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결국 지난 10년간 노동운동진영이 자본의 의도에 말려 끌려 다녔고 기득권유지를 위한 관성의 법칙에 휘둘려 개혁과 변화를 게을리 했던 결과가 오늘의 결산서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라고도 할 것이다. 

이번 합의 역시 노동운동 진영이 지닌 ‘역량의 산물’임을 부인할 수 없다. 합의 내용은 어떻게 보아도 균형 관계에서 도출된 것은 아니다. “노사정 합의도출이 불가능하고 정부안이 강행되려는 시점에서” 합의도출은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었다는 한국노총의 고백을 단순한 변명으로만 볼 수 없는 이유다. 민주노총은 협상과정에서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고 마침내는 철저하게 소외당했다. 이 역시 민주노총이 지닌 역량발휘의 결과물이며, 양대 노총이 이해관계를 스스로 조정하지 못하고 분열된 것 역시 전체 운동역량의 취약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다. 

자본 분단전략 넘는 노동운동의 혁신전략 마련해야

민주노총의 투쟁의 결과가 어떻게 되든 간에, 이제 노동운동진영은 스스로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대응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최소한 지금까지와 같이 자본진영에 휘둘려 이끌려 다니지는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3년은 결코 길지 않다. 3년 후가 되든 내년이 되든, 노사관계 변화는 불가피하지만 그 때문이 아니더라도 노동운동이 스스로의 혁신을 서둘러야 할 조건들이 더욱 깊어지고 있다. 

무엇보다 우려되는 것은 산별노조 건설운동의 정체 위험성이다. 양대 노총은 향후 최대운동과제로 산별노조 건설을 내세웠고, 특히 민주노총은 대기업노조들이 금속산별 건설에 동참함으로써 부쩍 힘을 얻은 바 있다. 거기에는 고용안정에 대한 열망과 복수노조 허용과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조항의 적용이 목전에 당도했다는 현실인식이 가로 놓여 있었다. 그런데 이번 합의로 이 두 가지가 유예됨으로써 산별노조 건설운동의 지체가 현실화될 우려가 있는 것이다. 만일 정말로 그렇게 된다면 노동운동 발전에 대한 직무유기이자 배반이다. 지난 십수 년간의 경험에서 보는 것처럼 운동혁신의 결정적 요소인 산별노조 건설은 결코 저절로 이루어지거나 결의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목표의식적으로 추진되지 않으면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다.  

이제 노동운동진영은 이번 합의를 두고 치열한 정당성 확보싸움을 벌이게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노동운동의 원칙이 확인되고 자성의 계기도 마련될 것이다. 조직은 언제나 스스로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마련이지만 노동대중의 판단은 매우 냉정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며, 그 결과는 곧 밀어닥칠 노동현장 질서의 재편에서 판가름이 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87년 노동자대투쟁으로부터 20년, IMF위기로부터 10년, 노동운동은 무엇을 노동대중에게 내놓을 것인가? 역설적이지만 이번 노사정합의에 이르는 과정과 이후 진전 상황은 이런 점에서 노동운동진영에 또 한번의 중요한 자성 계기를 던져주고 있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1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