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의 한해를 도약의 디딤돌로

노동사회

바닥의 한해를 도약의 디딤돌로

편집국 0 2,778 2013.05.24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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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까지 가본 사람들은 말한다
결국 바닥은 보이지 않는다고
바닥은 보이지 않지만 
그냥 바닥까지 걸어가는 것이
바닥까지 걸어가야만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바닥을 딛고 
굳세게 일어선 사람들도 말한다
더 이상 발이 닫지 않는다고
발이 닫지 않아도 
그냥 바닥을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고

바닥의 바닥까지 갔다가 
돌아온 사람들도 말한다
더 이상 바닥은 없다고
바닥은 없기 때문에 있는 것이라고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라고
그냥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고

정호승, “바닥에 대하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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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값 폭등의 광풍이 도시 민중들의 간절한 내집 꿈을 마구 헤집어버린 대지 위에 한해의 노을이 짙어간다. 어느 것 하나 정붙일 곳이 없어 보이는 황량한 초겨울, 삶의 고통에 멍울진 민중의 울분이 전국 곳곳에서 터져 나와 세밑을 뒤흔들고 있지만, 아무래도 낙망의 어둠을 밀어내기에는 힘이 부친 듯하다. 권력자들은 법과 원칙을 내세우며 대량 연행과 구속으로 대응하고 있으니 역사는 정말 진보하는가 되묻고 싶어진다. 

언제부터인가 세밑은 이렇게 갖가지 분노의 함성과 권력자들의 고집이 서로 날을 세우며 부딪치곤 했다. 근로서민대중의 요구가 갈수록 절박해진 탓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희망은 쉽사리 발견되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낙심의 깊이는 더해간 듯하다. 우리 사회에 밝고 신명나는 구석은 어디에도 없는 것인가? 정말 근로대중의 삶에는 아예 가망이 없는 것인가?  

허연 바닥을 드러낸 민중의 삶

올해 벽두는 우울함과 우려스러움이 많은 인사로 시작하였다. 그래도 그 속에는 조그만 희망이라도 스며들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깃들어 있었다. 먹고 입고 자는 아주 원초적인 문제를 넘어서서 보다 보람되고 가치 있는 일들이 이루어지기를 바랐다. 결과는 허망했다. 민중들의 소박하기 그지없는 바람은 대부분 거부당했고 좌절되었다. 올해 여름 찜통 같은 더위에 난데없는 폭우로 온 산하가 깊은 상처를 입었듯이 민중들의 삶도 허연 바닥을 드러낸 듯하다.  

그 모습은 우리 사회의 여러 지표들에서 나타난다. 가까워져야 할 격차는 더 벌어졌거나 멀어진 그대로 굳어져가고 있다. 사회적 양극화가 그렇고 그 한가운데 놓여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비중과 그들의 참담한 노동조건들이 그러하다. 성장의 성과가 한쪽으로만 몰리면서 노동소득분배율은 악화일로에서 변함이 없고 절대빈곤층의 문제가 선진국 문턱 진입을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저출산·고령화문제는 경제적 부담이 그 가장 큰 원인이고 여성의 사회적 진출의 확대에 따른 육아와 보육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출산율 상승을 기대할 수 없음이 분명해지고 있음에도, 여성은 비정규직의 69% 이상을 차지할 만큼 소외되거나 방치되고 있다. 

이런 판에 시장주의자들은 경제성장만이 해법이라고 주장하며 나라 안팎의 경쟁력 지표들을 들이댄다. 시장에 맡기면 성장은 저절로 되고 나라경제와 국민의 살림살이는 쉽사리 펴질 수 있는데 그리 하지 않아 병이 생겼다고 주장한다. 거대 기업들은 엄청난 이윤에 사람은 쓰지 않으면서 고용 없는 성장패턴 때문이라고 강변한다. 이들 원망과 비난의 강도는 보수언론을 통해 계속 높아지면서 대중들을 성장론의 울타리 안에 가두어버린다. ‘분배론자’, ‘사회주의자’라고 욕을 먹으며 경제살리기에 목을 매던 10년간의 민주정부도 끝내는 성장론으로 기울어 기업하기 좋은 나라, 경제특구 만드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경제는 계속 어려웠고 불균형은 확대되었다. 거대 재벌들과 외국자본의 배는 더욱 풍요로워졌지만 대다수 중소 영세기업은 여전히 죽지 못해 사는 형편이었다. 특히 자영업자로 불리는 영세상인들의 사정은 그야말로 파탄 직전이라고 한다. 그런데도 보수 정치판은 정상배 속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채 당리당략에만 몰두하였다. 빈곤과 차별, 속박과 불안이 번져가는 속에서 정치부패가 판을 치는 상황, 개선의 여지가 거의 없어 보이는 절망의 시대, 사람들은 이러고도 왜 폭동이 안 일어나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한때 통일의 꿈을 키우면서 조심스레 화해분위기를 만들어가던 남북한관계도 이리저리 삐걱거리더니 급기야는 전쟁 위기로까지 상황이 돌변하였다. 이에 대해 수구 보수세력은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이 그 직접적 원인이라고 우기며 경제협력과 인도적 차원의 지원을 모두 끊어 차제에 북한 정권을 뒤집어야 한다고 거품을 물었다. 남한 정부는 미국의 강경 제재방침을 물리치지 못하고 화해의 열기를 싸늘하게 식혀 버렸다. 그러나 민중들은 놀라울 만큼 차분했다. 이 만큼 우리 민중들은 남북한 화해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이것이 남북한관계, 북미일관계를 규정하는 기본요소임을 분명하게 표출시켰다. 그러나 남한정부는 민중의 이 같은 태도 변화를 바탕으로 북한의 위기감이나 어려움을 해소시키는 데 별다른 역할을 못한 채로 주변 강대국의 움직임에 끌려 다닐 뿐이었다.  

 참여정부의 불안한 계산과 무자비한 저지선

어느 것도 변화를 예측하기 어렵고 분명한 답이 보이지 않는 상황은 사람을 다급하게 만든다던가? 사회의 한구석도 조용할 틈이 없는 판국에 정부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을 시작하였다. 곧 바로 반대세력이 형성되고 저항투쟁이 전개되었다. 정부는 국민을 상대로 협상의 필요성을 설득하는 데 나서고 노무현 정부의 정책이라면 무조건 반대하던 한나라당, 보수언론, 자본 쪽이 협상을 지지하는 묘한 양상이 나타났다. 시간이 흐르면서 민중세력과 참여정부, 수구보수의 연대세력 사이의 대립의 열기는 높아져 연말의 정면대결 국면까지 이르렀다. 

정부는 이 협상을 통해 그 지긋지긋한 경기침체의 터널에서 빠져나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불균형성장에 수출로 커온 나라이니, 잘 나가는 산업, 업종을 키워서 다른 쪽을 먹여 살리면 된다는 계산도 있었을 것이다. 세계 최강의 경제대국과 경제규모 11위의 나라 사이의 ‘윈-윈협상’은 이론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으며, 경제 통상전문가라고 자처하는 정책 당국자들이야 상대가 미국이라 해서 두려워하거나 기피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해보다가 안 되면 반대여론을 핑계 삼아 그만 둘 수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돈 생기는 곳이라면 지옥에라도 갈 국제독점자본의 총본산 미국과 협상하는 것이 국민의 눈에는 못내 불안하기만 하다. 역사상 미국과 협상해서 이겨본 적이 없던 데다가 쇠고기 수입이나 스크린쿼터 축소 같은 이른바 ‘4대 선결조건’에서 힘의 불균형은 그대로 드러났다. ‘수출증대·외자유치·선진기법 도입 → 고용확대·복지증진·경쟁력 강화’라는 정부의 공식은 멕시코, 캐나다가 처한 부정적 국면을 분명하게 해명하지 못함으로써 격렬한 저항을 불러오고 있다. 더욱이 미국은 의회와 정부가 한 몸이 되어 돌진해오고 있는 데 비해 한국은 철저히 비밀이다. 참여정부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는 협상 장막이 국민의 반대여론을 자극하고 있음에도 정책 당국자는 협상 일정만을 걱정하고 공권력은 무자비한 저지선에만 매달리고 있다. 

개혁 진보진영의 위기 불러온 ‘민주화’

누군가 물을 수 있다. 왜 밝은 면은 찾아보지 않고 어두운 곳만 들추느냐고. 물론 보는 사람의 처지에 따라서는 밝은 면이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고 가진자의 처지에서는 온통 장밋빛 세상일 것이다. 지난 10년 가까이 이른바 ‘민주화세력’이 집권하는 동안 상당히 밝은 기대를 가졌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현실의 민중의 삶은 펴지기보다 더욱 고단해졌다. 개선의 여지도 그다지 많아 보이지 않는다. 민주화가 되면 권력의 억압도 줄고 생활형편도 나아지리라, 그것이 곧 개혁이요 진보라고 생각했던 민중들은 허탈할 뿐이었다. 민심은 5·31지방선거로 표출되었다. 이미 예견된 결과라고 해도 개혁 진보세력은 패배의 폭과 깊이에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고 위기의식을 가지기에 충분한 수준이었다. 진보정당 일부에서는 개혁과 진보를 나누어 보아야 한다고 강변했지만 설득의 파급력은 그리 커 보이지 않았다.  

그 원인은 민주정부의 실정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공통된 문제의식 아래 여러 군데로 진단되었다. 권력자의 오만이라거나 개혁 진보세력의 정책역량 부족이 많이 지적되었지만, 무엇보다 큰 기대를 갖고 지지를 보냈던 젊은이와 근로서민대중의 배신감이 가장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였다. 그 근원에는 정치와 경제를 분리시킨 모순된 정책의 이중구조가 자리하고 있었다. 민주정부는 정치적·절차적 민주주의 개혁과 시장주의를 별개로 추진하였다. 권위주의, 반공주의 시대의 유물들을 정리 청산하고 새로운 민주질서를 세워가는 것이 전자였다면, 경제정책의 중심에는 시장개방과 자유경쟁의 원리가 자리 잡았다. 

이들 두 갈래 정책은 본질상 서로 모순되어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기 어려운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정치민주화는 성장성과의 공평배분과 대다수 국민의 삶의 조건을 개선해내는 경제민주화가 뒷받침되지 않고는 인정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정치상의 현실적 개혁은 수구세력의 발호에 밀려 어느 것 하나 시원스레 정리되지 못한 채 중도반단의 결과로 끝나기 일쑤였고, 시장주의의 관철을 위한 정책들은 노동의 유연화를 집요하게 요구함으로써 노동운동 진영의 강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비정규직 노동자보호법, 노사관계로드맵의 진행과정이 그렇거니와 공무원노조의 사무실 강제 폐쇄, 노동기본권 보장 없는 특수고용 보호책, KTX승무원에 대한 불법파견 불인정, 수많은 해고자·구속자·희생자의 양산 등이 그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장주의 지향은 독점자본에 대한 짝사랑으로 끝나고 말았다. 자본가들은 투자를 위한 참여정부의 애절한 호소를 번번이 외면했다. 무엇이든 반대로 일관한 수구세력과 같은 맥락에서 애당초 노무현 대통령 치하에서는 투자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 자본가들의 심산이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결국 참여정부의 개혁정치, 시장경제는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가진자로부터도 못가진자로부터도 외면당했고, 노동자, 농민의 저항에 대해서는 이제 민주화되었으니 법을 지키라는 법과 원칙론으로 대처함으로써 대립과 갈등만을 되풀이하였다.  

바닥을 딛고 오를 힘, 산별노조운동의 성장!  

개혁 진보세력의 퇴조에는 오래 정체된 노동조합운동이 상당한 무게로 자리하고 있었다. 대중조직운동으로서 노동조합운동이 대중의 절박한 요구와 불만을 책임지지 못함으로써 개혁 진보세력에 대한 국민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가 없었고, 따라서 지지를 확보해 갈수가 없었다. 올해 운동도 그 연장선에서 악전고투를 거듭할 뿐이었다. 구조조정이 일상화하고 경기침체가 장기화하는 국면에서 절박한 생활상의 요구는 자제될 수밖에 없었고 사상 최저로 떨어진 조직률로 계급의 대표성은 심각하게 위협받기도 하였다. 제도개혁투쟁의 성과가 두드러지지 않는 가운데 민주노총, 한국노총의 균열은 더욱 심해졌고 민주노총은 대의원대회 유회라는 내부 혼란의 악몽을 되풀이하였다. 게다가 이른바 뉴라이트운동이 수구 보수진영의 지지 엄호를 받으면서 노동운동의 혼란을 더욱 부추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운동 진영은 중대한 역사적 진보를 이룩하면서 새로운 기원을 기약하였다. 바로 산별노조건설운동의 급진전이었다. 금속노조, 보건의료노조가 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사용자단체 구성을 비롯한 산별협약을 맺게 되었다. 거기에다 자동차 등 거대기업노조들이 조합원 투표를 통해 산별노조 참여를 결정하였고, 얼마 전에는 철도노조 등이 운수산별노조 건설을 투표로 결의하였다. 어쩌면 우리 사회의 중장기적인 발전과 관련하여 유일하게 밝은 변화라고 할 수 있는 쾌거이었다.   
여기까지 오는 데 실로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러한 변화는 노동운동이 바닥을 드러내고 더 이상 밀려갈 곳이 없다는 위기의식의 산물일 수도 있고, 기업별노조체계의 한계를 구체적으로 체득하고 새로운 조건에 대응할 다른 대안이 없다고 인식한 결과일 수도 있다. 아무튼 민주노동운동의 열망이 폭발한 지 20년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일어난 이들 결단은 운동 내부만이 아니라 노사관계를 포함한 사회관계 전반에 걸쳐 중요한 변화를 추동하게 될 것이다.  

긴 호흡의 성찰 통해 내년을 계획할 수 있길

내년은 1987년 노동자대투쟁으로부터 20년, 1997년 IMF위기로부터 10년이 되는 해에 대통령 선거까지 예정되어 있다. 수많은 꿈과 환상이 공약이라는 이름으로 던져지고 수구와 개혁, 진보와 보수가 불꽃 튀는 결전을 벌일 것이다. 특히 수구 보수세력은 ‘잃어버린 10년’을 되돌리기 위해 물불가리지 않고 덤벼들 공산이 크다. 이 과정에서 노동조합운동의 역할은 더욱 중요하게 제기될 수밖에 없다. 노동조합운동은 이 사회발전의 기본축으로 이미 자리매김해 있을 뿐만 아니라, 특히 진보진영의 핵심세력이자 기반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노동조합운동은 스스로 그 기반을 획기적으로 확대할 수 있어야 하고 어떤 사회를 만들어갈 것인지 조합원만이 아니라 근로대중에게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산별노조가 그 답이 되기 위해서는 산별노조건설이 조직 전체로 확산되어야 하고, 조직, 교섭, 운영 등에 창의적이고 다양한 실천방안이 마련되어야 한다. 과제도 많고 시행착오도 예견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나치게 두려워하거나 주저할 이유는 없다. 기업별노조를 혁파하고 산별노조로 가는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기업별노조에 대한 미련이나 기득권 유혹을 과감히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기업별노조 그 자체가 오랜 관성으로 붙어 있거니와 정부와 자본가들은 끈질기게 기업별노조로의 환원을 획책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 노동운동 100년여, 민주노조운동 20년의 궤적을 성찰하면서 바닥까지 가버린 듯한 한해의 기억을 훨훨 털어내고, 보람 있는 새해를 설계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1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