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와 사회적 대화, 그리고 노사정위원회

노동사회

세계화와 사회적 대화, 그리고 노사정위원회

편집국 0 4,049 2013.05.24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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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지난 11월9일, 전태일기념사업회가 주최한 “한국형 사회협약, 과연 가능한가?”라는  토론회에서 발표한 글을 수정·요약한 것이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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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들어가는 말

노사관계에서 사회적 대화, 특히 그 실현체로서 노사정위원회를 바라보는 시각은 한 곳으로 모이지 않는다. 신자유주의를 주창하는 사람이 반대하는 데 이어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사람들도 반대하는 기현상이 나타나는가 하면, 그 중간 어름에 놓인 사람들은 찬성하는 등 묘한 스펙트럼이 나타나고 있기도 하다.

1987년 이후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그 결과의 일단인 양극화와 더불어 노사관계를 둘러싼 환경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키워드이다. 우리나라에서 노사정위원회는 ‘세계화’를 주창한 문민정부에서 태동하였으며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본격화되는 국민의 정부 출범과 맞물려 틀을 잡았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다시 말해 노사정위원회는 세계화에 대한 대응전략의 일환으로 구상되고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노사정위원회로 대변되는 사회적 대화가 순조롭게 진행된 것은 아니다. 1998년 출범과 더불어 합의된 최초의 사회적 협약이 민주노총 지도부의 퇴진으로 이어진 것을 시발로 양대 노총의 참여와 탈퇴가 거듭되었는가 하면, 노사 또는 노정 사이의 갈등이 노사정위원회를 축으로 다양하게 전개되기도 하였다.

참여정부에 들어서도 민주노총의 불참이 여전한 가운데 노사정위원회는 반쪽짜리 상태가 지속되면서 ‘식물조직’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참여정부가 출범할 당시만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은 ‘노동개혁’을 참여정부의 정체성을 살릴 수 있는 대표적인 브랜드의 하나가 되리라고 기대하여 왔다. 이러한 기대가 무너진 근본바탕에는 무엇보다도 사회적 대화가 정착되지 못하였다는 사실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면 이처럼 사회적 대화가 실종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사회적 대화를 발전시키는 방안은 없는 것일까? 

이 글은 참여정부에 들어 사회적 대화가 뒤뚱거려온 원인과 새로운 대안을 찾아보기 위한 것이다. 

II. 참여정부 시절 노사정위원회의 전개와 평가

참여정부가 출범 초기에 ‘사회통합적 노동정책’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사회적 대화를 추진한 것은 변화된 정치경제환경에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정치적인 측면에서 민주화의 진행과 경제사회적인 측면에서 세계화의 진행이 그것이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정부가 일방적으로 사회변화를 추동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 정부가 비록 속빈 강정은 아니더라도 정책의 자율성이 상대적으로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사회적 대화는 참여정부가 내건 ‘참여’를 실현하는 주요한 수단이기도 하였다. 이를 통해 노사관계의 안정화를 기하는 것은 물론 양극화의 해소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이해대립을 조율하려는 의지가 있었다. 

조급증 때문에 일을 그르친 정부

참여정부의 출범 초기, 정부의 노동정책은 사회적 대화의 성패와 맥을 같이한다고 할 만큼 노사정위원회는 중요한 의미를 부여받았다. 노동계의 원로인 김금수 선생을 노사정위원장으로 임명하였을 뿐 아니라 대통령이 노사정위원장에게 노동정책에 관한 총괄적인 관제탑(control tower)의 기능을 부여하고 나아가 사회적 합의를 위한 ‘총체적이고 일괄적인 접근’(빅딜)을 요청한 것도 이즈음이었다. 민주노총의 참여를 통해 노사정위원회를 정상화시킬 수 있는 기회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러한 기회는 몇 차례에 걸쳐 무산되고 말았다.  

애시 당초 노사정위원회에 대한 민주노총의 불참은 예견된 사항이었다. 다만 정부가 자율적인 노사관계를 실천하고 노동친화적인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민주노총이 변화하리라는 기대가 없지 않았다. 초기의 노동정책이 자율노사관계를 고집하며 융단폭격과 같은 보수언론의 비판을 감내한 주요한 이유도 출범 당해연도의 ‘춘투’만 넘기면 민주노총에 대한 참여 설득도 탄력을 받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는 2003년 6월, 철도노조의 파업에 대한 공권력의 투입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정부가 감내할 수 있는 인내의 한계가 의외로 빨리 다가온 셈이었다. 

두 번째 기회는 노사정위원회 참가를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된 민주노총 이수호 집행부의 출범과 함께 찾아왔다. 그러나 2004년의 ‘2·8 일자리 창출을 위한 사회협약’은 촉박한 총선일정상 민주노총의 참여를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노동정책이 정략적인 판단에 휘둘린 사례였다. 탄핵의 계절 동안 민주노총이 탄핵반대에 앞장선 것은 의미심장한 정치적 상징성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탄핵 이후 민주노총의 짝사랑은 물거품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 해 여름, 보건의료노조의 파업에 대한 직권중재의 연장으로 숨통을 틔는가 싶던 노정관계는 LG 칼텍스와 서울지하철 노조의 파업에 대한 직권중재 결정으로 다시금 얼어붙고 말았다. 노사정위원회 참가를 결의하리라 여겨졌던 대의원대회(8월)와 중앙위원회(9월) 어디에서도 노사정위원회 참가는 안건으로 상정조차 되지 못하였다. 

사회적 대화에 대한 의지에 마지막으로 못을 박은 것은 2004년 10월, 비정규 보호입법안의 국회상정이었다. 정부로서는 사실상 사회적 대화의 종료를 선언한 셈이었다. 노사관계 법질서를 정비하겠다는 개혁마인드와 무언가 성과를 내야한다는 조급증이 결합한 산물이었다. 사회적 대화체제에 대한 민주노총의 참여는 무망하다는 진한 아쉬움이 깔려있기도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이듬해인 2005년, 민주노총이 노사정위원회 참가를 결의하기 위해 열린 세 차례의 대의원 대회가 폭력사태로 얼룩지면서 지도력의 한계를 드러낸 것은 차 떠난 후에 손 흔들기라는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았다. 정부의 이러한 개혁조급증은 노사관계 법제도 선진화 방안(로드맵)에서도 여지없이 재현되고 말았다.   

우여곡절도 있었다. 노사정위원회 참가가 대의원대회의 파행으로 이어지자 민주노총 지도부는 ‘노사정대표자회의’를 통해 이를 돌파하고자 시도하였다. 그리하여 2005년 4월 노사정대표자회의에서는 노사정위원회의 개편과 노사관계 법·제도 선진화 방안의 처리방향을 논의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비정규직 보호입법안을 둘러싼 노정 간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노사정대표자회의는 표류하기 시작했다. 2006년 6월, 노사관계 법제도 선진화방안(로드맵)을 논의하기 위해 민주노총이 다시 노사정대표자회의에 참가했다. 그러나 민주노총이 배제된 가운데 2006년 9월 한국노총과 사용자단체 및 정부가 로드맵 처리를 전격 합의함으로써, 사회적 대화의 전망은 다시금 안개 속에 빠지고 말았다. 오히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간의 ‘상호 해체투쟁’을 후유증으로 남겼을 뿐이었다.  

능력도 의지도 철학도 없었던 사회적 대화정책

참여정부에 들어서서 사회적 대화가 파행을 거듭한 이유는 무엇일까? 결과적이지만 먼저 민주노총의 전략적 판단 오류와 지도력의 한계를 지적할 수 있다. 참여정부 출범 이후 노사분규가 폭발적으로 증대하면서 정부의 노동‘개혁’정책은 친노(親勞)라는 이름으로 보수진영이나 언론의 집중적인 포화를 맞았다. 이 과정에서 민주노총은 정부의 개혁 부진을 비판하고 나섰다. 물론 이는 민주노총의 이데올로기적 성향을 반영한 것이었으나 결과적으로는 참여정부의 개혁에 대한 보수진영의 비판에 힘을 더해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지도부 교체 후 민주노총이 사회적 대화체제로 복귀를 선언한 이후에도 노사정위원회 참여를 결정하려던 대의원대회가 연이어 폭력사태로 얼룩지면서, “과연 민주노총과 합의가 가능한가? 그 합의가 지켜질 수 있겠는가?”라는 물음이 던져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입장에서는 민주노총을 파트너로 한 사회적 대화의 복구가 불가능하게 비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대화의 파행에서 노동의 책임은 부차적일 뿐이었다. 핵심적인 사회적 주체인 정부의 책임비중을 모르쇠할 수는 없는 탓이다. 특히 사회적 대화의 성격이 경쟁적 코포라티즘으로 바뀌고 이 과정에서 정부가 ‘주요한 설계사’(principal architect: Rhodes, 2000)로 나타난다는 입장에서 본다면, 앞서 말한 민주노총이 겪은 상황에 대한 해석도 달라진다. 즉, 양대 노총 지도부가 적극적으로 사회적 대화를 요구하는 상황에서 그것을 구체적인 결실로 담아내는 데 정부가 무능을 연출한 것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실제 정부는 2004년 10월, 양대 노총의 적극적인 반대에도 비정규 법안을 국회에 상정하면서 사실상 사회적 대화의 장을 떠나고 말았다. 이는 노사관계 법·제도 선진화방안에서도 드러났다. 노조와 대화의 가능성을 열어두기보다는 선진화 방안의 통과에 방점을 찍음으로써 민주노총의 참여가 들러리라는 사실을 부각시킨 것이다. 결과적으로 정부는 민주노총을 ‘사회적 대화의 걸림돌’ 내지 ‘언제든지 배제시킬 수 있는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켰을 뿐이었다. 

참여정부 들어 사회적 대화가 여전히 파행을 벗어나지 못한 근저에는 사회적 대화에 대한 정부의 의지와 전략의 부재가 자리하고 있었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무분별한 수용뿐 아니라 비정규직 보호법안이나 노사관계 로드맵에서 보듯 개혁에 대한 조급증이 사회적 대화라는 ‘긴 여정’을 포기하고 ‘정부의 일방적인 추진’(비정규법안) 내지 ‘사회적 대화의 우회로’(로드맵)를 채택하게 만든 것이다. 더욱이 ‘대화와 타협’대신 ‘법과 원칙’을 전면에 내세운 참여정부의 노동정책 앞에서 사회적 대화가 자리할 공간은 넓지 않았다. ‘법과 원칙’이라는 용어에는 사회적 대화와는 양립할 수 없는 ‘노동배제성’이나 ‘노동때리기’(최장집, 2006)가 바탕에 깔려있기 때문이었다. 노동배제적 노동정책을 주무기로 삼는 정부에게 사회적 대화란 한낱 정치적 장식품이거나 노동조합을 포섭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결과적으로 참여정부의 노사관계를 특징짓는 유례없는 노정갈등의 심화와 개혁성과의 부재로 나타나고 말았다. 개혁에 대해 지칠 줄 모르는 열망은 있었으되 그것을 정책으로 풀어낼 의지나 능력은 물론 철학이나 비전조차 없었던 것이다. 

이참에서 참여정부 시절 노사정위원회의 공과를 평가할 수도 있다. 물론 초기이긴 하지만 배전분할 민영화를 막아낸 것이나 ‘일자리창출을 위한 사회적 협약’을 만들어낸 것은 성과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노사분규에 대한 공권력 투입이나 연이은 비정규직의 분신과 비정규직 보호입법안의 제안, 직권중재와 긴급조정의 남발, 그리고 노동조합 간부들의 구속 사태 등에 대해 노사정위원회는 ‘죽음과도 같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참여정부의 노동배제적 정책에 대해 노사정위원회는 최소한 묵인하거나 동조하는 모습을 보여 온 것이다. 그 결과 정부의 노동정책에 대한 노동계의 불신은 고스란히 노사정위원회로 옮겨 붙고 말았다. 이러한 정부정책에 대한 동조는 로드맵에 대한 이른바 ‘9·11 합의’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민주노총을 배제한 가운데 합의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노사정위원회는 윤활유 역할을 함으로써 스스로의 존재기반을 제 손으로 무너뜨리고 만 것이다. 그 과정에서 노사정위원회가 노사정 간의 대화를 촉진하기는커녕 그 자체가 노사 및 노정갈등, 심지어 노노갈등의 원인을 제공하고 또한 증폭시켰다는 것은 지독한 역설이라 할 것이다. 

그러면 이 시점에서 사회적 대화는 종언을 고하였는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적어도 세계화와 민주화의 흐름이 되돌릴 수 없는 흐름이라면 사회적 대화는 여전히 사회갈등에 대한 조정수단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사회집단 간의 이해표출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어느 일방도 자신의 요구를 일방적으로 관철할 수 없다면, 그리고 이러한 갈등조정이 경쟁력의 주요한 변수로 나타난다면 사회적 대화의 가치는 실종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사회적 대화의 부활을 위해서는 어떠한 조건이 필요한가?

III. 사회적 대화의 진전을 위한 조건

 사회적 대화의 진전과 관련하여 먼저 확인할 사항은 당분간은 그것이 가능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나라는 정치화된 파업구조를 갖고 있는 나라이다(이장원 외, 2005). 게다가 앞으로의 노사관계 역시 격화된 노정갈등이 예고되고 있기도 한다. 비정규 법안은 물론이거니와 노사관계 로드맵, 마주보고 달리는 공무원 노사관계, 그리고 특수고용 노동자의 노동기본권 문제 등이 걸려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미 FTA가 새로운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참여정부에서는 무망하다 치더라도 사회적 대화 자체가 이미 떠나버린 막차라는 인식은 과도할 것이다. 

사회적 대화의 설계사로서 정부역할의 정립

사회적 대화가 필요하다면 무엇이 필요할까? 사회적 대화의 조율사이자 설계사로서 정부의 입장을 먼저 검토할 필요가 있다. 과거 사회적 대화의 과정에서 정부는 조정자로서 노사 간의 교환을 중재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면 1990년대 이후 정부의 역할은 최종적 권위로서 당사자들을 정책형성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시키는 쪽으로 바뀌었다. 세계화의 과정에서 경쟁력의 강화와 사회적 통합의 조화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을 간과할 수 없었던 탓이다. 이러한 점에서 사회적 대화에서는 노사자율원칙에서 벗어나 국가중심성이 전면에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회적 대화의 테이블을 만들고 합의를 조율하는가 하면 합의된 사항의 이행을 강제하는 정부의 역할이 사회적 대화의 관건으로 등장한 것이다. 

정부의 관점에서 신자유주의는 사회적 대화와 양립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도 중요하다. 사회적 대화가 신자유주의를 도입하기 위한 통로라고 인식될 경우 노동의 참여를 기대하기는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참여정부가 신자유주의적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완결지음으로써 고용(일자리)의 창출과 투자를 통한 성장동력의 회복, 그리고 외자의 유치를 기도하는 동안 사회적 대화는 불임의 시대에 접어들고 만 것이다. 또한 노동조합을 시장원리의 걸림돌로 여겨 배제하는 순간 사회적 대화가 설 땅은 사라지고 만다. 노동조합을 사회적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는 상황에서 노동조합이 사회적 파트너십의 제고에 나설 리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세계화의 시대에 그 알갱이를 형성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은 선언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규제된 신자유주의’, 그리고 ‘타협에 의한 변화’를 주문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할 것이다.

두 번째로는 사회적 대화기구를 노조의존적인 구조로부터 벗어나게 설계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노사정위원회의 명칭을 ‘(가칭)전국경제사회위원회’로 변경하고 그 구성에서도 ‘국민대통합 연석회의’나 아일랜드의 ‘경제사회위원회’에서 보듯 노사정 이외에도 각계의 참여를 보장하여 사회적 협의기구로서의 대표성을 높일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박태주, 2004). 이 경우 사회적 대화기구로부터의 탈퇴는 사회적 배제로 이어짐으로써 탈퇴가 어려울 뿐 아니라 내부의 제3자에 의한 조정역할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공익위원의 축소를 뼈대로 하고 있는 노사정위원회법의 개정방향은 좀 더 깊이 있는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노사정위원회 의존적인 사회적 대화의 탈피

세 번째로 업종이나 지역차원의 사회적 대화기구의 형성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다. 이 역시 중앙차원의 사회적 대화기구의 구성원리를 이어받아 노사 및 지자체 이외에도 지역시민단체나 학계 언론계 종교계 등이 결합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노사정위원회가 불임의 시대에 접어든 중에서도 노사정위원회 바깥에서는 일정한 성과가 쌓여가고 있었다. 공공기관 지방이전에 따른 정부와 관련 노동조합 및 지자체와의 합의가 있었으며(2005년 6월) 지역수준의 노사정대화도 그 가능성의 싹을 틔워가고 있었다. 울산건설플랜트와 현대하이스코 노사분규가 지역수준의 사회적 대화를 통해 타결된 것이 그것이다. 보건의료산업 노사는 2004년 단체협약에서 ‘의료산업 발전과 의료공공성 강화를 위한 노사정 특별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결정하고 정부의 참가를 건의하기로 하였다(이는 2006년 단체협약에서 재확인되었다). 뿐만 아니라 국민대통합 연석회의의 제안을 이어받아 ‘저출산 고령화 대책 연석회의’가 사회적 합의안을 도출하기도 하였다. 지역, 업종(산업) 및 의제별 사회적 대화기구가 노사정위원회의 틀에 구애됨이 없이 활성화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네 번째로는 민주노총의 참가를 현실화시킬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참여정부 노사관계의 특징이 노정갈등의 폭발적인 첨예화이고 특히 그것이 로드맵 입법과정에서 민주노총의 배제로 나타난 이상 노정 간의 대화, 나아가 노사정위원회의 정상화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이 서로를 부정하는 노노갈등의 상황에서 그 전망은 더욱 흐리다 할 것이다.  

사회적 대화에서 특정 대표조직에 대한 배제가 존재하는 한 노사단체의 자발적인 참여가 보장되는 통합성의 원리는 관철되지 않는다(은수미, 2006). 이러한 점에서 민주노총의 참가는 사회적 대화의 성립에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따라서 비록 노사정위원회에 한국노총만이 참가한다 하더라도 정부로서는 최대한 전향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를 보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한편으로는 신뢰를 통해 민주노총의 입장을 변화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노총의 참가를 압박하는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우려되고 있는 ‘한국노총 껴안기’와 ‘민주노총 때리기’라는 구도가 현실화된다면 이는 최악의 노정갈등으로 연결되는 수순이 될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노동조합에 대해서도 몇 가지 지적하고자 한다. 세계화의 흐름이 노동조합으로 하여금 사회적 대화를 추동하는 요인이 된다는 사실은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다. 이외에도 동원(mobilization)에만 의존하는 전통적인 노동운동의 한계 속에서 정책참여의 필요성이 증대되고 있다. 정부의 정책적 독점을 막으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가령 법과 제도의 개선을 요구하더라도 정부와의 교섭이나 협의는 불가피하다. 비록 교섭결과가 ‘양날의 칼’이 될 수 있겠지만 그것이 참가 자체를 거부하는 이유는 되지 못한다. 이를 위해서는 노동조합 역시 사회적 대화에 대한 유연한 인식은 물론 정책역량의 제고에 나설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IV. 맺음말

오늘날 노사관계의 최대 화두가 고용불안이라면 그 이면을 관통하는 흐름은 세계화라고 할 수 있다. 세계화의 시대에 나타나는 특징적인 대응방안은 이해당사자 간의 타협에 기초한 사회협약의 실현이다. 한때 사회적 대화의 종언이 논해졌던 것과는 달리 최근 사회적 대화가 유럽에서 ‘시지프스적인 부활’(corporatist Sisyphus: Visser, 1999)을 보이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특히 무역의존도가 높은 나라에서 사회적 대화가 성공적으로 뿌리내리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나라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할 것이다.   

사회적 대화가 정권의 성격과 무관하게 필수적이라는 진술이 노사정위원회라는 조직을 전제로 하는 것은 아니다. 노사정위원회는 이미 자신의 역할에 의해 역사적으로 규정되는 조직이다. 노사정위원회는 스스로의 역사적 흔적에 의해 오히려 사회적 대화의 걸림돌로 나타나는 측면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도 곤란하다. 전국차원에서 노사정대화를 추동할 수 있는 새로운 조직은 물론이거니와 업종별 지역별 및 의제별 대화기구를 폭넓게 설계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화된 경제에서 세계화에 대한 노동조합의 지지와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할 경우 정부와 사용자측이 추진하는 세계화전략은 노사관계의 덫에 걸릴 수 있다. 노동운동이 세계화의 진전을 발목잡고 역으로 노동운동이 세계화의 덫에 걸린다면 국민경제의 미래는 쉽게 단언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기업차원은 물론 국민경제차원에서 ‘규제된 세계화’내지 ‘만들어가는 세계화’를 실현시키는 길은 노사정이라는 사회적 주체가 세계화를 어떻게 인식하고 대응하는가, 또한 이 과정에서 어떻게 서로 대화하며 타협하는가에 달려있다 할 것이다. 세계화에 대한 이러한 사회적 대응이야말로 ‘87년 노사관계 체제’를 ‘2007년 체제’로 이행시키는 핵심적인 연결고리가 될 것이다. 

<참고문헌>
국회예산정책처, 2006. 『2007년도 예산안 분석(II): 분야별 분석』.
박태주, 2004. 『세계화와 노사관계: 아일랜드의 사회적 합의를 중심으로』, 산업연구원.
은수미, 2006. 『사회적 대화의 전제조건 분석: 상호관계와 사회적 의제형성을 중심으로』, 한국노동연구원. 
이장원 조준모 이승욱, 2005. 『한국의 파업구조와 특징에 관한 연구』, 한국노동연구원. 
전태일 기념사업회 토론회자료집, 2006. 『한국형 사회협약, 과연 가능한가』.
최장집, 2006. 『민주주의의 민주화』, 후마니타스. 
Kelly, J., 1988. Trade Unions and Socialist Politics, London: Verso. 
Rhodes, M., 2000. The political economy of social pacts: “competitive corporatism” and European welfare reform, Pierson, P. ed. The New Politics of the Welfare  State,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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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작년도 :
  • 통권 : 제11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