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라이트 신노동연합과 민주노조운동의 ‘창조적 파괴’

노동사회

뉴라이트 신노동연합과 민주노조운동의 ‘창조적 파괴’

편집국 0 2,998 2013.05.24 12:17

취임 직후부터 참여정부는 국민과 노동자들의 기대감을 거침없이 무너뜨리더니 결국 “대통령 끝까지 할 수 있을까”하는 자조적인 말까지 내뱉고 말았다. 그러나 대통령이 무슨 고민을 하든지 간에 지금의 한국사회는 ‘사회 양극화’라는 벗어나기 힘든 긴 터널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 각종 여론조사들은 2007년 대통령 선거의 화두가 ‘사회 양극화’가 될 것이라고 진단을 내리고 있다. 이러한 사회 양극화의 중심에 동일한 노동을 하면서도 절반의 임금밖에 받지 못하는 비정규직들의 문제가 있다. 애초 정치권에 무언가를 기대하는 게 어리석은 일임을 뻔히 알지만, 비정규직문제에 대한 해법이 정치권에서 쟁점이 되리라고 은근히 기대했다. 그러나 아니, 당연하게도 그 기대는 여지없이 박살나고 말았다.

“무능한 진보가 부패한 보수보다 더 싫다”

지난 2월과 4월 비정규직 확대 법안을 반대하는 민주노총의 총파업을 전개하며, 이 고비만 넘기면 국회에서 날치기 상정된 정부의 비정규직 법안을 폐기하라는 목소리가 국민적 울림으로 터져 나올 것임을 확신했다. 그러나 그 어리석은 기대는 어느 언론에서 발표한 여론조사 항목을 보면서 무참히 무너져 내렸다. 바로 “무능한 진보가 부패한 보수보다 더 싫다”는 거였다. 그런데 내가 놀란 건 거기에 동의하는 국민들이 많아서가 아니라, 참여정부뿐만 아니라 진보정당운동은 물론 노동운동까지 싸잡아 매장시킬 그 ‘결정적인 구호’를 생산해 낸 보수언론과 보수진영의 ‘능력’이었다.

한마디로 무슨 잘못을 저지르다 들킨 아이처럼 가슴이 ‘뜨끔’했다. 그 한마디의 문장을 의제화하는 것을 통해 보수언론은 부패정치와 비리재벌에게서는 부도덕한 이미지를 완전히 벗겨버리고, 개혁과 진보진영은 ‘아무것도 맡기지 못할 무능력한 세력’으로 낙인찍어 버린 것이다. 부정부패 정치세력의 권력안정을 위해 ‘미워도 다시 한 번’이라는 읍소를 넘어서, 아예 정의의 칼을 손에 쥐어줘도 휘두를 줄 모르는 무능력한 진보개혁세력들을 공격적으로 제압해 버린 것이다.

머릿속이 하얘지고, 눈앞이 캄캄했다. 사회 양극화의 책임까지 개혁과 진보를 주창하는 세력의 무능력에게 돌리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의 약점을 감추고 국민들의 공격의 화살을 상대에게 돌리면서, 혼돈 속에 있는 4천8백만 국민들의 시계추를 과거의 화려했던 추억으로 되돌리려 하는 것이다. 역시 수천 년 동안 인간의 역사를 지배해 온 지배자들의 화술은 화려하게 대중을 사로잡았고, 그 앞에서 진보개혁세력은 초라하고 무능력했다. “가진 놈들이 덜 해먹는다”는, “옛날이 좋았다”는 택시기사나 이발소 주인의 주장이 설득력 있는 시대가 되고 말았다.

현장 빈틈과 보수언론 필요 파고든 신노동연합 

지난 11월26일 울산 MBC에서 ‘정치파업’에 관한 토론회가 있었다. 울산시민들도 관심이 많기에 지역방송으로서 당연히 기획될만한 프로그램이라서 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도 출연을 약속했다. 그런데 토론자를 보고 깜짝 놀라 참석을 거절했다. 신노동연합 영남지역본부 정책기획국장이라는 자가 섭외되어 있었다. 울산시, 경총, 민주노총이 토론자로 나가는데 정체도 불투명한 임의단체인 뉴라이트 신노동연합을 앞세우는 울산 MBC가 괘씸했다. 입장은 다르지만 한국노총도 아니고, 아직 공식 결성조차 하지 않은 신노동연합을 의도적으로 띄워 주고 은근히 민주노총과 동격의 단체로 부상시켜보려는 속셈이 보였던 것이다. 

울산에서 임의로 결성하여 활동 중인 노동단체는 수십 개가 넘을 것이다. 현대자동차노동조합만 봐도 내부에 이미 친회사적인 조직부터 강성까지 넘나드는 10여개의 현장조직이 활동을 하고 있다. 뉴라이트 신노동연합이 현대자동차에 현장조직을 만들건 해산하건 그들의 자유이고, 현장 노동자들 입장에서 보면 또 하나의 현장조직이 만들어지는 사사로운 일일 뿐이다. 오히려 조합원들에게는 지금도 현장조직들의 이전투구와 이합집산 패거리 권력투쟁에 신물이 나는데, 또 하나가 만들어지는 건 골치만 아플 뿐이다. 울산지역 언론들도 현대차 노사관계를 진단할 때면 어김없이 “과도하게 많은 현장조직들이 선명성 경쟁 때문에 합리적인 협상보다 해마다 파업을 되풀이한다”며 “부패한 노동권력”으로 규정하기까지 했었다.

그랬던 언론들이 뉴라이트 신노동연합이라는 현장조직의 출현은 유래 없이 반기고 있으니, 참으로 속보이는 짓이다. 지역의 보수언론은 연일 현대자동차에 결성을 준비 중인 뉴라이트 신노동연합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도하며 조직선전에 신경을 써주고 있다. 민주노총의 노동법 개악저지 총파업 투쟁시기에 민주노조운동의 상징인 현대자동차노동조합의 정치파업을 반대하는 그들의 활용가치가 한층 높은 모양이다.

노동조합이 일자리 창출? 꿈이 크다

신노동연합은 한나라당 지지선언을 한 뉴라이트 전국연합의 노동조직으로 알려져 있다. 그 단체의 상임대표로 1987년 노동자대투쟁 당시 울산의 상징적 인물이었던 권용목 씨가 등장하면서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특히 민주노총 초대 사무총장 출신이 자신이 몸담았던 조직을 비판하며 새로운 노동단체를 만든다는데, 민주노총을 반대하던 세력들에게는 정말 반가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앞세운 노선이 “노사상생과 일자리 창출”이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게 아니라, 노동자 대중들의 의식수준을 너무 얕잡아 보고 있는 것 같아서다. 보수적 관점에서 고용불안 심리를 자극하면 일거에 새로운 조직으로 가입을 할 것이라는 기대를 했는지 모르지만, 그건 착각이다. 참으로 무식하던지 아니면 순진한 기획이다. 아직도 한국의 노동현장에서는 일방적인 노동탄압과 단체협약 위반이 자행되고 있다. 전근대적인 노무관리와 여차하면 노동조합을 무력화시키려는 자본 측의 공세가 집요하게 진행 중인 노동현장에서, 노사상생은 요원하며 ‘살생의 노사관계’를 목격하며 살아가는 조합원들이다.

거기다가 사용자들은 틈만 나면 외주 용역화를 추진하고 이제 어느 현장이건 정규직보다 비정규직이 더 많다. 함께 일하던 동료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떠나고 있는 현실을 이들은 진정 모르는 것일까? 자동화와 신기술이 도입되며 갈수록 생산성은 올라가지만 일자리는 감소하는 소위 “고용이 감소하는 성장”의 시대에 “노사상생을 통한 일자리 창출”이 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다면, 뉴라이트 신노동연합의 운동노선은 출발하기도 전에 실패하고 있다고 밖에 할 수 없다.

현장 노동자들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시대 상시적 고용불안에 노출되어 노심초사 하루하루 살아가지만, 그렇다고 세상물정 모르는 미혹에 몸을 맡길 만큼 어리석지 않다. 탐욕스러운 회사는 쥐어짜고 탄압하며 옆의 동료가 일자리에서 쫓겨나는 판에 노사협력과 상생은 어불성설이라는 점을 몸으로 알고 있다. 또 노무현정권도 실패한 ‘일자리 창출’ 문제를 일개 노동단체에서 성공할 리 없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다. 거창한 간판을 내걸 수 있겠지만 대중적으로 뿌리를 내리기에는 금방 한계가 드러나고 말 것이다.

누구나 이유를 아는 현장보수화, 그러나… 

유럽의 노동운동사를 보면 탄광산업에서 철강산업, 조선산업의 순으로 노동운동의 쇠퇴기를 맞으며 노동운동이 보수화된다. 이는 산업 자체의 쇠퇴와 노동자들의 고령화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우리나라의 역시, 물론 정권과 자본의 탄압과 무력화 정책에 따른 고립을 고려해야겠지만, 노동자 보수화의 가장 큰 원인은 고령화와 고용불안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987년 대투쟁 당시 폭발적인 노동조합 설립 이후 벌써 20여년이 지났고, 조합원들의 평균연령은 40대를 넘기고 있다. 이들은 안정적인 생활을 추구하고, 사측은 이를 이용해 상시적 고용불안을 조장한다. 이렇게 ‘공포관리’라는 방식으로 사측이 노동자를 통제하기 시작하면서 보수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보수화됐다고 하는 조합원들도 답답해하는 건 마찬가지다. 1998년 IMF 사태 이후 비정규직 저임금 착취체제가 도래하였음에도 민주노조운동이 아직까지 이 지긋지긋한 억압과 굴레에서 벗어날 뚜렷한 전망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업의 분사화, 외주화를 통한 다단계하도급 구조는 기존의 전통적인 노동조합 조직을 해체시키고 있다. 최고 19%까지 이르렀던 노동조합 조직률은 정규직의 감소와 비정규직의 증가로 10% 미만으로 하락한 실정이다. 여기에다 대안 없는 정파들의 패권경쟁에 대한 신물은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매력을 잃어버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새로이 보충되는 인력은 비정규직으로 채워지며, 1998년 이후 정규직 채용은 거의 없는 상황이다. 활동가 발굴 역시 중단된 채 10년, 20년 같은 사람들이 반복해서 노조간부로 나서고 있다. 당연히 현장은 활력을 잃어 간다. 또 1998년 IMF 사태 이후 조합원들의 노사 모두에 대한 불신은 노골적인 개인주의 성향으로 나타나고 있다. 노동조합에 대한 집단적 희망이 사라지고 대신 개인별로 살아남기 위한 고민은 깊어 간다. 파업 동력이 저하되고, 집회 참가율이 갈수록 떨어지는 건 놀라울 게 없는 사실이다. 

민주노조운동, ‘애정어린 질타’ 받고만 있을 건가

하지만 이렇게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과 노조활동 참여율 저조 등을 이유로, 노동자들의 이념과 의식까지 보수화 되고 있다고 해석하기에는 성급하다. 조합원들은 민주노조운동에 대해 일시적인 불만을 갖기도 하지만, 자본의 입장에 동조하고 있지는 않다. 즉 뉴라이트 신노동연합의 보수적 노선에 노동자들이 이념적, 의식적으로 동조하거나 흡수될 것이라는 판단은 착각이라는 것이다. 

신노동연합이 주최한 토론회에 참석했던 어느 조합원이 “회사가 현장을 탄압하고, 해외공장으로 인한 고용불안은 현실로 다가오는데 노사상생과 일자리 창출이 설득력이 있겠습니까?”라는 질문에 우물쭈물 대답을 못하던 그들의 모습을 전했다. 또 토론회에 참석했던 그 조합원은 “안면 때문에 마지못해 갔지만 현장에서 어용취급 당할 수 있어서 부담스럽다”고 전했다. 뉴라이트 신노동연합의 앞날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말이다. 만약 그들이 자기 노동운동 노선의 설득력에 자신이 있다면 대형노조 내부를 공략할 게 아니라 90%의 미조직노동자들을 조직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그래야 입장은 다르나마 ‘노동단체’로 인식될 수 있다. 그러나 현대자동차노동조합처럼 상징성과 대표성을 가진 노동조합에 깃발을 꽂기에 바쁘고 이를 생색내는 데만 치중한다면, 이들은 친사용자, 반노동자 ‘정치조직’으로 밖에 볼 수 없다. 

한나라당이 노동자들을 위해 일하는 정당이 아니라 재벌과 가진 자들의 정당임이 명확한 이상 보수적인 노동운동이 설 땅은 좁다. 조합원들은 20년 이상의 경험을 통해 마지막에 믿고 의지할 것은 그래도 민주적인 노동조합뿐이라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조합원 대중의 노동운동과 진보운동에 대한 가혹한 질타는 좀 더 잘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크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이 근본부터 보수화되었다 생각하는 것은 분명한 예단이다.  

그렇긴 하더라도 사실 노조 비리사건과 투쟁 실패 등의 역풍에 의한 보수화의 경향이 점점 진폭을 넓히고 커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현재의 위기를 노동운동이 극복하지 못하고 고립이 가속화 된다면, 그리고 고령화 및 산업변화와 더불어 체감되는 크기가 더욱 커지고 있는 고용불안을 관리하지 못한다면, 이러한 보수층이 지금보다 훨씬 넓어지고 민주노조운동이 재기불능의 치명상을 당할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젠 정말 ‘창조적 파괴’가 필요하다! 

노동운동 내부의 무능력이 위기와 고립을 자초했다. 그 속에서 뉴라이트 신노동연합이니 하는 불순한 씨앗이 자랄 수 있었다. 이렇게 미래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지 못하는 상황 중 일부는 솔직하게 간부들의 실력부족과 게으름에서 비롯되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실력을 비상하게 높여 노동대중들에게 설득력 있는 대안을 제시하기보다, 패거리정파를 구성하여 표를 구걸하고 권력을 추구했던 과오를 깊게 성찰하고 반성해야 한다. 조합원 대중 위에서 군림하며 가르치려 들었던 오만과 교만함을 겸손하게 반성하고 자신부터 혁신해 나갈 때 대중들은 다시 민주노조운동에 희망을 갖고 함께 할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이젠 지난 20년의 민주노조운동에 대해 냉정하게 평가하고, 잘못 된 길은 과감히 폐기해야 한다. 출발 지점으로 돌아가는 것을 각오하는 대범하고 용기 있는 행동이 필요하다. 장시간 노동체제에서는 임금에 대한 만족도 인간다운 삶도 어렵다. 소아적 실리추구와 담합적 노사관계로는 삶의 질은 더욱 왜곡될 뿐이다. 동일한 노동을 하며 비정규직에게 절반의 임금을 주는 세상은 결단코 노동자들에게 행복한 삶을 가져다 줄 수 없다. 정규직이 살기 위해 비정규직을 죽여야 한다는 약육강식과 무한경쟁 체제를 깨뜨려야, 정의롭고 모두가 즐거운 삶을 앞당길 수 있다. 

과거에는 엄두도 못 냈을 보수주의 노동운동이 노골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지금 민주노조운동에게는 과거의 잘못된 패러다임을 과감하게 파괴하고, 저임금 장시간노동체제의 극복과 인간다운 삶을 방해하는 모든 억압과 착취를 벗어날 수 있는 창조적인 투쟁전선이 필요하다. ‘평등과 연대’를 온전하게 실현할 용기 있는 추진세력의 구축과 창조적 파괴만이 진보적인 민주노조운동을 부활시킬 수 있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1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