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노동시장의 정치사회학』

노동사회

『현대 노동시장의 정치사회학』

편집국 0 5,199 2013.05.24 12:14
 

book_01.jpg노동시장의 정치사회학이라? 서점에서 처음 책을 접했을 때 우선 제목에 눈이 갔다. 노동시장의 ‘경제학’도, 노동시장의 ‘사회학’도 아닌 노동시장의 ‘정치’사회학이라니. 시장이 어떻게 해서 정치사회학의 연구 대상이 될 수 있을까? 그것도 시장의 자유가 그 어느 때보다 활개를 치고 있는 지금에!

사실 제목에서부터 저자는 많은 것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단지 노동시장 연구를 위하여 사회학, 정치학, 사회복지학 등 여러 분과 학문들의 시각과 연구 성과들을 폭넓게 동원하려는 의도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노동시장의 형성은 애초부터 정치와 긴밀히 연관된 것이었고 노동시장의 구조변화 또한 정치의 문제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다는 메시지가 제목에서부터 녹아있는 것이다. 

IMF 외환위기 이후 한국사회가 겪은 광활한 변화의 중심에 고용과 노동시장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면 지난 10년 동안 한국의 노동시장은 어떠한 변화를 겪었으며 그 특징은 무엇인가? 현재의 고용의 양극화는 무엇 때문인가? 좀 더 평등한 노동시장을 만들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외국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이 책은 단순명료하지는 않지만 매우 상세하고 진지하게 답을 추구하고 있다.

갈 수 없는 길, 기업내부노동시장 강화와 노동력 유연화 

책 전체를 관통하는 저자의 문제의식은 ‘노동시장제도’라는 단어에 집약되어 있다. 아주 간단히 말하면 노동력이 매매되는 시장을 복잡한 제도적 그물망으로 바라보는 것인데, 그 그물망을 구성하는 씨줄과 날줄에는 단체교섭제도, 고용보호법제, 실업보험, 최저임금제, 직업훈련제도, 각종 사회복지제도, 정부의 각종 노동관련 법률, 노동조합 및 사용자단체의 관계 등이 모두 포함된다. 책의 1부와 2부에서 여러 각도로 조명하고 있듯이, 이러한 씨줄과 날줄이 짜이는 방식에 따라 한 나라의 노동시장체제의 모습은 달리 나타나게 되며, 그렇게 한 번 짜인 그물망은 일정한 관성을 유지한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그런데 이 그물망을 누가 어떻게 짤 것인가는 다시 정치의 문제이다. 노동시장의 제도적 변화가 정치의 문제라면 그 핵심에는 그 변화를 추동할 세력연합의 형성이 놓여 있다. 한국의 경우 이 세력연합의 형성 문제를 둘러싸고 두 가지 상반된 가능성이 공존하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자세히 들어보자.

*************************************************************************************
(한국, 대만, 일본 중) 노동시장제도 전환의 가능성이 가장 큰 곳은 한국이다. 기업별 노조를 산별 노조로 전환하는 움직임도 가장 큰 규모로 이루어지고 있고, 비정규직 노동자의 저항도 가장 격렬한 편이며, 진보정당의 성장세도 가장 빠르다. …… 그러나 아직 전반적인 노동시장제도에는 별 변화가 없다. 무엇보다도 한국 노사관계의 변화를 주도할 조직력과 자원을 가진 대기업의 노조들이 노동시장제도 혁신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있다. 한국에서의 외환위기는 기업별 노조와 기업내부노동시장을 근간으로 하는 기존 노동체제의 한계와 변화의 필요성을 드러낸 동시에, 당사자들로 하여금 기존의 체제에 더욱 의존하게 하는 이중적 효과를 낳았던 것이다.(296쪽)
*************************************************************************************


딜레마의 상황에서는 ‘혁신’이 필요하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의 노동운동은 조합원의 고용안정, 즉 기업내부노동시장을 재강화하려는 데 노력을 경주하였다. 반면에 사용자들은 영미식 탈규제와 유연화를 유별나게 적극적이고 공세적으로 추구하였다. 저자가 보기에 양자의 이러한 노력은 나름의 근거와 한계를 동시에 갖는다. 실업이 곧 ‘죽음’이 되는 한국사회에서 기업내부노동시장은 “1987년 이후 노동자들이 노동운동을 통해 얻어낸 자기보호 조치들”의 핵심이었고, 그 혜택을 받는 노동자들이 쉽사리 유연화를 수용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사용자들의 입장에서는 노동자의 장기고용이 가져다주는 물질적 유인이 매우 작아진 상황에서 그것을 최대한 축소하려는 것 역시 이유가 있다. 

그러나 이 모두는 명확한 한계를 갖는다. 저자는 특히 노조가 추구하는 기업내부노동시장의 재강화 전략, 다시 말해 조합원의 고용안정을 최우선시하는 전략은 대기업 정규직 조합원인 내부자와 그 이외의 대다수 외부자의 간격을 확대시킴으로써 노동시장의 전체적인 불평등을 온존하거나 확대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지적한다. 한국의 모든 기업들이 현재 한줌밖에 안 되는 대기업들처럼 잘 나가지 않는 한, 기업내부노동시장에 의존하는 전략은 장기적으로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사회적 노동시장의 구축을 위한 단초들

그렇다면 노동의 입장에서 혁신의 방향은 무엇이고 그 단초는 어디에 있는가? 저자는 조심스럽게 ‘사회적 노동시장의 구축’을 내놓는다. 그 핵심은 기업내부노동시장 대신 사회적으로 규제되는 노동시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노동시장체제 혁신의 세력연합과 관련하여 저자는 책의 결론부에서 크게 두 가지 단초를 말한다. 하나는 현재 탄력을 받고 있는 산별전환이 전제조건이 되는 노조운동의 연대적 조율이고, 다른 하나는 비정규 노동자의 조직화와 기존 노동조합운동과의 연대이다. 이 두 가지는 세계적으로 독보적인 수준에까지 이른 한국의 분절적 노동시장체제를 ‘아래로부터’ 무너뜨리고, 영미식 탈규제를 금과옥조처럼 생각하는 한국의 사용자들을 ‘사회적 노동시장체제의 구축’을 위한 테이블로 끌고 올 수 있는 단초이면서, 동시에 노동시장 변화를 위한 세력연합의 구체적인 지향점이다. 

냉정하게 돌아보면 현재 한국 노동조합운동의 주도세력은 이 분절적 노동시장체제에 의존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동시에 지금 우리는 여러 곳에서 노동조합운동의 연대적 혁신의 가능성을 이미 목격하고 있다. 이 책이 갖는 최대의 미덕은 아마도 이 두 개의 사실성 중 어느 하나도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점일 터이다. 일독을 권한다. (정이환 짓고, 후마니타스 냄. 1만8천원.) 

 

  • 제작년도 :
  • 통권 : 제11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