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노동운동의 사회복지투쟁 그 실질적 전진을 위하여

노동사회

한국 노동운동의 사회복지투쟁 그 실질적 전진을 위하여

편집국 0 3,131 2013.05.24 12:13

한국 노동운동이 본격적으로 사회복지투쟁을 선언한 것은 1995년 민주노총이 건설되고 ‘사회개혁투쟁’을 표방하면서부터였다. 하지만 실제 복지개혁을 둘러싼 논쟁에 가담한 것은 1998년 IMF 위기이후 사회복지부문이 비약적인 확대국면을 맞으면서였고, 또한 그 경험들을 돌이켜봤을 때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은 노동운동의 관점에서 제출되는 대안이 거의 부재했다는 점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한국 노동운동이 어떤 문제설정으로 사회복지에 접근했는가를 함께 인식하고 소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글은 그런 노력의 일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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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대 사회보험노조는 9월22일 정부의 '사회보험 적용징수 통합 및 이관'졸속통합 저지 및 공공성 강화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공동투쟁 할 것을 결의했다.  ▷ 사회보험노동조합 ]

성장주의 극복 못한 ‘연대주의 복지전략’  

노동운동진영이 그동안 견지해 왔던 사회복지전략은 ‘연대주의 전략’으로, 이를 구성하는 두 가지 핵심개념은 ‘사회임금’과 ‘통합주의’였다(김연명·남기곤·오건호, 1999). 먼저 사회임금은 시장임금과 대별되는 것으로 사회복지제도와 조세제도 등의 재분배기제를 통해서 획득되는 임금을 뜻한다. 사회임금을 확대시키는 노동운동은 시장임금이 양산하는 불평등을 축소시키기 때문에 노동자민중의 연대 강화라는 정치경제적 효과를 발휘하는 것으로 간주됐다.

통합주의 역시 한국 복지개혁에서 민주노조세력이 일관되게 견지하고 있는 노선이다. 이는 의료보험통합과 연금개혁을 둘러싼 논쟁에서 잘 드러났다. 구체적으로 지금처럼 사회보험의 적용대상을 크게는 직장(노동자)과 지역(자영자), 작게는 공무원, 사립학교교직원, 노동자 등으로 분리해서 관리·운영하는 것은 노동자들에게 불리하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분리가 사회보험의 위험분산 효과를 감소시키고 비용이 많이 들게 하며 그 결과 재분배효과가 줄어들기 때문에, 사회보험이 통합되어 관리·운영되는 게 노동자들에게 더 유리하다는 것이다. 또한 제도별로 형성되는 상이한 이해관계는 노동자민중의 단결에도 좋지 않으며 이는 결국 사회불평등을 개선하는 데 불리한 조건 형성이라는 정치경제적 효과의 발생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연대주의 전략이 여전히 유효한가에 대해서 상당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노동운동이 빈곤과 양극화 같은 당면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데 그다지 기여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노동운동이 자신의 사회복지전략 실현을 위해 정치사회적 조건구축에 미치는 사회적 영향력이 점점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의 관심은 이러한 의문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찾는 데 있다.   

노동운동, ‘시민권’에 걸맞게 행동하라

한국의 사회복지발달에서 노동운동은 분명한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현 시점에서 노동운동이 시민권에 걸맞게 과연 실질적으로 기여하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노동운동이 성장주의 복지의 문제설정에 아직도 갇혀있다는 혐의를 지우기 어렵기 때문이다. 성장주의 복지란 ‘선 성장 후 분배’ 또는 ‘성장제일주의 경제발전 패러다임’과 같은 맥락에 대응하는 복지발전 패러다임을 말한다. 즉 복지확대 그 자체를 복지발전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사회복지지출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단계에서 복지예산 확대로 대표되는 복지성장은 일종의 지상과제였고 사회진보를 위한 대항담론으로 간주되기에 충분했다. 성장주의 복지는 △4대 사회보험 완비, △보편적 사회보험을 갖추기 위한 적용대상 확대, △급여범위 확대와 급여수준 인상 등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며 오늘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러한 성장이 지금에 와서는 빈곤해소나 불평등완화와 같은 사회복지 본연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보건복지지출은 2006년 예산기준으로 교육(28.8조)과 국방(일반회계 22.5조)보다 훨씬 많은 56조여원으로, 그 규모와 증가율에서 제일 크지만 우리사회의 빈곤과 양극화 문제는 갈수록 나빠지고 있는 것이다. 즉 우리사회에서는 서구의 경험에서 탄생한 복지국가 혹은 ‘복지자본주의’조차 실현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복지발전의 핵심동력인 노동운동이 이 모순을 해결하고 새로운 비전을 갖지 못한다면 한국사회는 복지성장과 빈곤 및 양극화 심화가 동시에 진행되는 현상을 지켜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새로운 문제설정이 필요하다. 

jgkim_02.jpg‘권리성 급여’ 도입 통한 사회임금을 재구성

한국의 사회보장은 사회보험을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고 역사적으로 그 틀에서 성장을 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보험체계가 잘 작동하는, 즉 ‘고성장-저실업 시대’에서처럼 안정된 노동자집단의 비중이 클수록 실질적인 사회보장이 잘 된다. 그러데 문제는 사회보험 중심의 사회보장체계는 지금처럼 유연해진 한국 노동시장과는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도 사회보험 중심의 사회보장체계를 유지할 경우, 안정된 고용과 나은 사회보장의 혜택을 받는 ‘내부자’와 불안정한 고용과 부실한 사회보장에 시달리는 ‘외부자’로 사회가 이원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Scott Lash and John Urry, 1987). 이는 곧 노후소득보장에서 광범위한 사각지대의 등장과, 연금을 받는 고령자와 연금을 받지 못하는 고령자의 분절로 이어질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이미 우리사회에서 쉽게 관찰할 수 있는 것들로, 기존 사회임금의 정치경제적 효과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을 고려할 때 새롭게 재구성될 복지전략의 핵심은 고용과 연계되지 않으면서도 기본생활이 가능한 복지공급이 이루어지도록 사회임금의 체계를 재구성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노동시장에서의 배제와 불평등이 사회보장에서는 포용과 불평등완화로 이어지도록 작동하는 ‘권리성 급여’가 도입·확대되어야 한다. 

권리성 급여란 노동시장에서의 고용형태, 종사상 지위와 상관없이 아동, 노인, 장애인 등의 인구학적 기준과 거주경력(거주기간, 주거형태 등)과 같은 보편적 기준에 입각하여 주어지는 급여를 말한다. 여기에는 △아동 수와 연령에 따라 지급되는 아동수당, △가족구성에 따라 제공되는 가족수당, △노인세대에게 지급되는 정액의 기초연금 등이 해당된다. 또한 집합적 소비의 형태로 제공되는 공공임대주택, 전기가스, 상하수도, 쓰레기처리 등도 포함된다. 이런 권리성 급여는 기본적으로 가처분소득을 높여주기 때문에 동일한 크기일 경우 소득하위계층에게 더 큰 효과를 발휘함으로써 사회적으로 불평등을 완화시킨다.

공공성 강화하고 시장 견제하는 복지정치 고민해야

한편 사회복지비 지출과 삶의 질 사이 긍정적인 상관관계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삶의 질을 낮추는 다른 변수들의 영향력이 통제되어야 한다. 쉽게 말해 국민연금이 아무리 많이 지급되더라도 의료비와 주거비로 쓰일 수밖에 없는 형편이라면, 국민연금이 노후소득보장이라는 본연의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또 ‘내 집 마련’을 목표로 부어온 적금 및 청약부금(저축)을 탈 수 있는 시점이 됐음에도, 집값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상승해 그 금액으로는 도저히 집을 살 수 없는 경우들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현실은 앞에서 언급한 부정적인 사례들에 훨씬 가깝다. 기초생활수급자가 생계급여를 인상된 주거비와 자녀 교육비에 우선적으로 지출하다보니 전기요금이나 수도요금을 내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 발생하는 게 IMF 위기이후 빈곤의 실상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사회복지 지출이 수급자들에게 현금기준으로 최저생활이 가능한 소득을 제공하더라도 실제로는 기본생활을 전혀 보장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인상분을 금전적으로 보전하려고 하면 사회복지는 시장가격에 좌우되며 무척 큰 변동폭을 갖게 될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실현 불가능하다. 결국 사회복지제도가 의도된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안정된 시장’이 전제되거나 해당 부문의 시장가격을 ‘관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시장을 견제하는 복지정치가 제도형성 저변에 자리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기존 연대주의 복지전략은 이러한 부분에 대한 고려가 거의 없었다. 때문에 제도의 순효과가 시장에 의해서 상쇄되는 것을 저지할 수 없었다. 

따라서 새롭게 구성될 복지전략은 ‘공공성’을 강화하기 위한 보다 복합적인 고민을 담고 있어야 한다. 공공성이라 함은 생활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재화·서비스의 생산과 소비를 ‘시장외부’에서 실현할 수 있는 정도를 말한다. 이러한 공공성은 생산차원에서는 재화와 서비스를 누가 생산·공급하며 이는 어떻게 사회적으로 통제되는가에 따라, 그리고 소비차원에서는 재화와 서비스의 시장가격 및 그 가격의 사회적 통제에 따라 결정된다. 그런데 한국의 사회복지는 국가가 서비스를 직접 생산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서비스 비용에 대해서 수익자 부담원칙을 일관되게 견지해 왔다. 그 결과 서구 복지국가들과는 달리 서비스방식보다는 보험방식을 더 선호하고, 서비스전달에서 사회복지사무소와 같은 정부조직보다는 사회복지관과 같은 민간위탁조직이 지배적이 됐다. 이를 테면, 조세가 재원이기에 의료를 무료로 이용하는 영국 국민건강서비스(NHS)와 의료에 드는 비용을 보험료를 통해서 제3자(보험자인 국민건강보험공단)가 의료공급자에게 지불하는 한국의 국민건강보험의 차이인 것이다.   

권위주의 정권 아래에서는 적은 재정지원만으로도 민간을 통제하는 것이 용이했을 것이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에는 그런 방식이 유지되기도 어려울뿐더러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이렇게 공공성을 약화시키는 조건들은 부담능력을 빌미로 사회복지 대상자들이 기본생활을 보장받고 적절한 질의 서비스를 누릴 수 있도록 하는 데 장애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보육의 사회화가 확대되고 있는데, 이 경우에도 보육정책이 현금지원만을 확대하고 국공립보육시설 증설 등 보육서비스의 생산과 공급차원에서 공공성을 확보하는 노력과 병행하지 않을 경우 의도한 결과를 얻기 어려울 것이다. 

사업장 안팎을 뛰어다니는 노동운동을 위하여 

위에서 다룬 새로운 복지전략을 노동조합을 통해서 실물화시키기 위해서는 앞서 말한 문제설정을 공유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즉 대다수 조합원들에게 사회복지문제는 여전히 “사업장 담벼락 밖의 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에 첫째, 사회복지가 절대로 사업장 밖의 일로 취급될 수 없다는 점과 둘째, 노동조합이 이런 문제를 다룰 때에는 새로운 접근방법이 필요하다는 점에 맞추어 대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첫째, 노조활동가들이 복지를 ‘제도적’인 것이 아니라 ‘잔여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성찰할 필요가 있다. 즉 복지를 국가가 책임져야 할 노동자민중의 권리가 아니라 개인, 가족, 공동체의 자선과 시혜를 통해 획득되는 것이라고 무심결에라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철저하게 토론하고 성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  민주노총이 출범하면서 내건 사회개혁투쟁이 단위노조로 갈수록 효력과 실천력이 감퇴하는 이유는 투쟁지침에 내재된 복지에 대한 인식과 활동가와 조합원들의 인식 사이에 질적인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김종건·최원탁·한진, 2001). 노조활동가들은 새로운 이슈를 받아들일 때 그것이 과연 조직화에 기여할 수 있는가 하는 실용적인 차원에서 주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복지에 대한 인식 또한 체득되기 어려운 측면이 존재한다. 상당한 교육과 토론이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다.

둘째, 사회복지가 사업장 밖의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공유하기 위해서 그 동안의 노동조합운동을 평가하고 성찰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노동운동은 역사적으로 사회진보에 필요한 새로운 가치를 생산하고 관철시키고자 노력함으로써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해 왔다. 그리고 이제 한국사회에서 사회복지는 최근 발표된 <비전 2030>에서 보듯 대안담론을 넘어 ‘국가발전전략’으로까지 취급되고 있다. 사업장 안의 노동자들은 사업장을 벗어나면 누군가의 자식이요 부모고, 지역사회 주민 등으로 다양한 모습을 갖는다. 사회복지문제에 실질적으로 관여한다는 것은 노동자의 관점에서 사업장 밖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참여한다는 의미다. 따라서 실질적인 사회복지투쟁을 위해서는 노동자민중의 삶 전반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 일부 지역단위 노조에서 빈곤과 보육문제에 관심을 가지면서 그러한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는 점은 주목할 만한 사례라 할 것이다. 

셋째, 새로운 복지전략은 노조활동가들의 상상력과 다른 사회운동과의 소통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 사회복지는 국가, 시장, 가족이 복지의 생산과 공급을 둘러싸고 서로 연관되어 있는 영역이다. 국가는 재분배, 시장은 교환, 가족은 호혜의 원리에 입각해서 그것을 실현한다. 사실 노동자는 오래 전부터 이런 원리를 노동조합활동을 통해서 경험해 왔다. 상조회를 통해서, 투쟁기금조성을 통해서, 종종 비합리적으로 비춰지기도 하지만 활동가들의 헌신과 조합원들의 무조건적인 충성이 발생하는 곳이 노동조합인 것이다. 하지만 노동조합은 또한 다른 사회운동의 가치와 원리를 받아들이는 데는 익숙하지 않다. 오히려 불편해하기 일쑤다. 그러나 사회복지는 다양한 영역에서 다양한 주체들에 의해서 실천되고 있다. 따라서 노동운동이 사회복지강화를 위해서 실천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회운동의 다양한 가치를 인정하면서 소통하고 연대해야 한다. 조직화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과는 다른 원리와 방법으로 운동하는 파트너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

사회복지투쟁은 노동운동의 진정성 증명하는 길

마지막으로 한국 노동운동이 실질적인 사회복지투쟁을 하기 위해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노동조합에 대한 외부의 인식을 직시하고, 그 불신을 사회복지투쟁을 통해서 회복하려는 자세다. 모든 운동은 늘 사회적 약자의 처지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에서부터 정당성을 획득한다. 자본주의사회에서 복지를 확보하려는 노력은 개인의 소유권보다 생존권을 더 중시함으로써 사회진보에 기여하고 도덕적 우위를 확보할 수 있다. 노동운동이 빈민과 비정규노동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를 외면하고 빈곤과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보이지 않는다면 지금도 위협받고 있는 정당성과 도덕적 우위는 완전히 상실되고 말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노동운동은 지표상의 복지확대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빈곤을 해소하고 불평등을 완화시키는데 앞장섬으로써 그 진정성을 보여야 할 것이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1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