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4]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시간제 근무를 하는 여성의 11.5%는 더 많은 노동시간을 원하고 있다. 반면 시간제 근무를 하는 여성 중 2.1%의 여성만이 노동시간의 단축을 원하고 있다. 즉, 2백만 명의 독일 여성들은 더 많은 노동을 할 준비가 되어 있고, 이 숫자에는 80만 명의 유자녀 여성들도 포함된다. 특히 노동시간을 늘리고 싶어 하는 여성의 숫자는 현재 노동시간이 짧을수록 더 높아진다. 그러나 노동시간 증가를 원하는 여성들이 반드시 노동시간을 늘리는 방법을 찾거나 전일제 일자리를 찾고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가사와 양육, 가정 내 돌봄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전문 지식과 기술이 있느냐 없느냐에 상관없이 미성년자인 자녀가 있는 여성들에게 전반적으로 나타고 있다.
독일의 대다수 젊은 세대는 남녀 모두 기존의 가정경제모델을 더 이상 원하지 않고, 파트너와 동등하게 가정생활과 직업을 수행하기를 원한다. 2013년 통계에 의하면 젊은 부모(18~40세 사이) 중 60%는 부모 모두가 동일한 조건의 근무형태를 갖고 동일하게 가정을 돌보기를 원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약 14%의 가정만이 가정생활과 노동생활을 동일하게 수행하고 있다고 답하였다. 저출산으로 인한 인구 고령화 문제로 전문 업무를 수행할 사람들의 숫자가 점점 줄어드는 상황이지만, 현재 독일 여성들은 남성과 비교하여 더 나은 학교 성적과 더 높은 상급학교 진학률에도 불구하고 출산 이후 제대로 된 연금을 받을 수 없고 경력을 쌓을 수도 없는 시간제 근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일․가정 양립의 해결책, 동일노동 동일임금
독일에서는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노동력을 가진 대부분의 남성들이 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여성들은 산업전반에 걸쳐 필요한 노동력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종전 후부터 90년대까지 익숙한 전통적 가부장제도의 틀로 돌아가 여성이 가사, 육아와 가정 내 돌봄을 수행했다. 그 결과는 급증하는 노년 여성의 빈곤으로 나타나고 있다. 독일 노후 보장의 핵심인 공공연금제도에서 가정주부(Hausfrau)에 대한 배려는 없고 직업이 없던 기혼여성이 이혼을 하거나 연금 수혜자였던 남편이 사망하는 경우 노년연금을 전혀 받을 수 없거나 받더라도 생활이 불가능할 만큼 적은 액수를 받게 된다. 이에 따라 2013년 소득이 없어 공공부조로 생활하는 65세 이상 여성의 수치는 17%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독일 언론은 이러한 상황을 ‘여성들은 양육의 대가로 가난의 벌을 받고 있다’고 표현한다.
현재 독일에서 여성은 동일노동 또는 동일가치노동을 하는 남성에 비해 80% 수준의 임금을 받는다. 이러한 남녀의 임금격차는 가정 내 양육이 필요한 경우, 경제적이고 합리적인 이유로 여성들이 시간제 근무를 선택하게 하는 가장 큰 원인이 된다. 즉 여성들이 더 이상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성적인 판단에 의해 전통적인 성역할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리는 것이다. 따라서 남녀의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을 실현하는 것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근본적인 해결책이라 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여성들은 여전히 경력을 쌓아도 남성에 비해 현저히 낮은 승진기회를 갖는다. 특히 시간제 근로를 하는 여성들에게는 경력을 쌓을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관리자와 임원진으로 올라갈수록 여성의 숫자는 매우 적어지는 결과를 낳는다. 또한 여성이 가정 내 돌봄을 도맡게 됨으로써 나타나는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은 여전히 업무를 평가하고 부서를 배치하거나 관리자를 선정할 때 많은 영향을 미치고, 이는 여성 노동자 전반에 대한 다양한 형태의 간접적인 차별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독일 정부와 정당들은 500인 이상 기업에서 남녀의 동등한 임금보장과 여성임원할당제를 의무화하는 법안을 마련하고 있다. 남녀의 임금격차를 없애고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을 실현시키기 위한 법안의 핵심은 모든 노동자들이 개별적으로 임금에 관한 정보청구권을 가짐으로써 임금체계의 투명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또한 여성임원할당제는 사기업과 공기업의 임원을 선발하는 데 있어서 여성의 비율을 일정한 수준으로 의무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요구사항의 전제로 모든 여성들이 요구하는 중점 사항은 공공보육의 전면적인 확대이다. 가장 시급한 것은 3세 이하의 어린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보육시설의 확충이다. 그동안 부모의 육아휴직 또는 2013년 새롭게 도입된 보육보호정책으로 독일 정부는 3세 이하 어린이들을 가정 내에서 보육하도록 유도했지만, 이제는 보육시설 확충으로 정책을 전면 수정해야 한다. 또한 일반적으로 오전 9시에서 오후 4시 사이에 운영되는 보육시설의 구조와 운영시간은 현 산업사회의 특성에 맞지 않기 때문에 많은 변화가 필요하다고 보여진다. 세계화된 현 산업사회는 노동자들이 어떠한 사안에 대하여 민첩하게 반응하길 원하고, 외국으로의 이동이 많으며 근로시간의 유연성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보육시설의 운영시간을 24시간으로 늘리는 등의 변화가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공공보육은 무상으로 실시되어야 한다. 국가가 출산율 증가와 함께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자녀의 출산 이후에도 노동시장에 남아있기를 바란다면, 그들이 선택한 출산으로 인하여 경제적인 손실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독일의 기존 일·가정 양립 정책이 실패했다고 판단하는 것은 정·재계도 비슷하다. 특히 저출산으로 인한 전문인력 감소의 심각성은 재계 내부에서도 제기되는 문제이다. 2014년 조사에 따르면 독일의 영향력 있는 재계 임원진 중 80%는 독일의 기업들이 젊은 세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젊은 세대가 원하는 가정경제모델-남녀 모두 동일하게 일하고 동일하게 가사와 양육을 분담하는-은 앞으로 5~10년 내에 기존 가정경제모델을 대체하게 될 것이고, 이러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기업들은 도태될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해당 연구를 진행했던 베르거 박사는 “변화된 인구구조에 따라 독일 기업들의 생존은 전문인력 확보의 여부에 따라 좌우될 것이고, 이러한 문제는 새로운 일·가정 양립 정책을 통한 전문지식을 가진 여성들의 노동시장 진출로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공공보육 확대 등 복지정책 확대해야
독일의 사례에서 살펴보았듯이 노동시간 단축은 노동자들의 삶의 만족도에 많은 영향을 미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사, 육아나 가정 내 돌봄의 문제에 있어서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여성의 시간제 일자리 확대 정책 등을 통해 일·가정 양립을 가능하게 하여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독일 정부의 시도는 실질적인 효과를 내지 못했다. 오히려 유자녀 여성의 대부분이 시간제 근로를 해야만 하는 상황과 더불어 육아, 가사와 가정 내 돌봄의 짐을 모두 여성에게 지우는 상황을 초래했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최근 독일의 정당과 노동조합들이 요구하고 있는 남녀 동일노동 동일임금 현실화 정책과 여성임원할당제도 어디까지나 과정에 불과하다.
우리나라는 장기적인 저성장과 견고한 가부장제도가 결합된 상황으로, 기존 외벌이 모델로는 가정 경제를 유지하기 힘들지만 그럼에도 전통적인 성역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유자녀 기혼 여성의 경우 경제활동을 해야 함과 동시에 가사 전반과 육아, 가정 내 돌봄 모두를 책임져야 하는 이중의 짐을 지고 있다. 이미 그 결과는 ‘출산파업’으로 표현될 만큼 세계에서 가장 저조한 출산율로 나타나고 있다. 이에 정부도 심각성을 인식하고 일·가정 양립을 위한 여러 정책들을 계획하고 추진 중이다. 그러나 가정 내 돌봄 노동을 해야 하는 여성에게 시간제 일자리를 제공하는 식의 정책들은 앞서 독일 사례를 통해 보았듯이 실질적인 해결 방안이 될 수 없다.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육아에 대한 부담 없이 일과 삶의 균형이 가능한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으로 정책 목표를 삼아야 한다. 독일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이 많은 유자녀 여성들은 직업을 통한 발전가능성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경력도 쌓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중요한 경제 잠재력을 잃고 있는 것이다. 만약 부모들이 공공보육 확대를 통해 제대로 된 사회지원을 받을 수 있고 부모 모두가 전일제와 같은 환경에서 근무를 할 수 있는 가정경제모델이 확립된다면 시간제 근무를 하는 유자녀 여성들은 더 많은 노동시간을 택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족을 기본단위로 하는 독일식의 가정경제모델로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 따라서 가족이 부재한 상황에서도 개개인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복지시스템을 확립하는 것이 노동자들의 실질적인 일과 삶의 균형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