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전태일 열사의 비문 앞에서

노동사회

11월, 전태일 열사의 비문 앞에서

편집국 0 3,585 2013.05.24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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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죽음이 있어 여기 한덩이 돌을 일으켜 세우나니 아아 전태일. 우리 민중의 고난의 운명 속에 피로 아로새겨진 불멸의 이름이여. 1948년 8월26일 대구의 한 가난한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낮선 도회지의 길거리를 그늘에서 그늘로 옮겨 다니며 신문팔이, 껌팔이, 구두닦이, 리야카뒤밀이로 허기진 밑바닥 삶을 이어가다가 평화시장의 재단사가 된 그는 거기에서 노동자의 청춘과 생명과 건강을 갉아먹는 지옥과 같은 노동현실을 보았다. 허리도 펼 수  없는 비좁은 다락방의 먼지구덩이 속에서 햇빛 한번 못 본 채 하루 열여섯 시간을 기계처럼 혹사당하는 어린 소녀들의 어두운 눈망울 앞에 절망과 분노로 몸서리치던 그는 뜻있는 재단사들을 삼동친목회로 묶어 작업시간 단축, 건강진단 실시, 임금인상, 다락방 철폐 등 “인간최소한의 요구”를 내세우고 싸우던 끝에 업주들과 경찰의 압도적인 폭력 앞에 저지당하자 1970년 11월13일 평화시장 앞길에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거행하며 몸을 불살라 스물두해의 짧은 생애를 마쳤다. 이 폭탄과 같은 죽음이 사람들의 억눌린 가슴가슴을 뒤흔들어 저 숨막히는 분단독재의 형틀에 묶여있던 노동운동의 오랜 침묵을 마침내 깨뜨렸고 굴종과 패배를 모르는 그의 불타는 넋은 청계피복노조를 결성하고 지켜낸 이소선 어머니와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헌신적인 투쟁으로 이어졌으며 70년대와 80년대에 걸쳐 폭압에 맞서 싸우는 모든 사람들의 무한한 용기의 원천이 되었다. 아 아 저 스물두해의 아픔 삶을 결단하여 가진 자들의 야만과 횡포에 온몸으로 부딪쳐 간 그의  피어린 발자취가 있었기에 오늘 이 땅에 노예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사람답게 사는 자주 민주 평화의 새 세상을 쟁취하려는 일천만 노동자와 사천만 민중의 우렁찬 해방의 함성이 있나니, 지나는 길손이여 이 말없는 주검 앞에 눈물을 뿌리지 말라 다만 기억하고 또 다짐하라. 불길속에 휩싸이며 그가 남긴 마지막 한마디 “내죽음을 헛되이말라!”하던 그 피맺힌 울부짖음을. 

- 전태일 열사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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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이의 염원은 얼마나 실현되었을까

이 글은 “1988년 11월13일 삼동친목회와 청계피복노조가 일천만노동자의 뜻을 모아 조영래의 글과 장일순의 글씨로” 새긴 전태일 열사의 추모비 글이다. 조금 길어 보이지만 전태일 열사의 삶과 헌신의 뜻을 너무도 생생하게 압축해 놓은 듯 해 여기에 전문을 담아 보았다. 이 비문에서 전태일 열사의 삶의 뜻은 이렇게 집약되어 있다. “노동자의 청춘과 생명과 건강을 갉아먹는 지옥과 같은 노동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인간최소한의 요구”에 목숨을 걸었고 죽음을 통해 “숨막히는 분단독재의 형틀에 묶여있던 노동운동의 오랜 침묵을 마침내 깨뜨렸”으며 어머니와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헌신적인 투쟁 그리고 1970, 80년대 폭압에 맞서 싸우는 모든 사람들의 무한한 용기의 원천이 되었다고. 나아가 그의 피어린 발자취는 오늘 “노예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사람답게 사는 자주 민주 평화의 새 세상을 쟁취하려는 일천만 노동자와 사천만 민중의 우렁찬 해방의 함성“을 가져왔다고. 

이달 13일은 열사가 산화한 지 서른여섯 해 되는 날이다. 그의 요구와 염원은 얼마나 실현되었을까? 임금 노동자는 4배 이상 늘었고 노동자의 임금은 절대액으로 140배 이상 올라, 노동조합의 임금인상 요구기준은 최저생계비 기준에서 이제는 표준생계비로 바뀌었다. 그러나 그것은 명목상의 증가일 뿐 실질임금의 증가는 매우 더디고 노동생산성 향상율과의 격차는 다소 줄어들었을 뿐 여전하다. 그 결과로 경제성장의 결실 중 노동자의 몫인 노동소득분배율 역시 여전히 낮다. 또한 기업규모 간의 임금격차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크기만 하다. 오늘날 전체 노동자의 90%를 차지하는 중소영세기업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의 임금은 지극히 낮다. 500인 이상 사업장 노동자 임금을 100이라 할 때 5~9인 사업장은 50%에 불과하고 10~29인은 58%, 30~99인은 63% 수준이다. 아울러 전체 노동자의 절반을 훨씬 넘어섰다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임금은 정규직의 50% 수준이고 사회보험 가입률은 30% 안팎에 머물고 있다. 

법률상 정해진 노동시간은 1일 8시간, 주48시간에서 1일 8시간 주 40시간으로 바뀌었다. 36년 사이에 겨우 시간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2006년 7월 현재 100인 미만 사업장에는 주40시간제가 적용되지 않고 있으며 여전히 44시간이 법정기준이 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연간 노동시간은 2,500시간을 넘어 1970년대와 다름없는 세계 최장의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산업재해의 건수나 재해도수율, 재해강도율, 재해만인율 모두 현저히 개선되었다고는 하지만 선진사회에 비해 크게 열악한 수준이고, 사망자 수는 1970년 639명에서 매년 늘어나 2005년에는 2,493명이나 되었다. 

이런 간단한 지표들이 지난 36년 동안 변화한 표면의 내용이다. 얼핏 보아 노동자의 삶의 조건이 많이 호전된 듯 보이지만 국민경제 규모의 확대 정도나 자본축적의 크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초라하다. 더욱이 그 구조나 내용에서 나타나는 불평등과 차별은 여전히 노동자들의 소외감을 짙게 해주고 있다. 전체적으로 임금은 올라 배고픔은 면했지만 최근에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비롯한 근로계층에 다시 절대 빈곤의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또 노동자 사이에는 임금, 노동시간, 작업환경, 노동복지 등 이러저러한 격차가 존재할 뿐 아니라 갈수록 벌어지고 있고, 살아남은 정규직 노동자들마저도 ‘경쟁력 강화’라는 이름으로 시시각각 조여 오는 노동강도 강화와 구조조정의 위협 앞에서 초조와 불안의 늪으로 몰리고 있는 게 오늘날 노동현장의 모습인 것이다. 

녹슨 시민권 확보 훈장과 노동기본권

전태일 열사가 죽음으로 내놓았던 최소한의 인간적 존엄함을 위한 요구들은 단지 근로기준법의 준수만으로 실현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노동자 스스로의 단결과 투쟁에 의해서만이 가능했다. 근로기준법을 단체협약에 그대로 베껴놓는 것 하나만도 노동조합 없이는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가 이를 잘 말해준다. 이런 뜻에서 열사가 요구한 것은 노동자 스스로 단결하여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지키고 키워낼 수 있도록 투쟁을 보장하는 장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바로 노동기본권 보장이다. 

실제 1970년대 이래 노동자들은 엄혹한 유신독재와 신군부 폭력정권에 맞서 노동기본권 투쟁을 전개해왔다. 노동기본권투쟁은 반독재 민주화투쟁의 필수적인 조건으로 되었다. 그리고 경이로울 만큼 빠른 속도로 진전된 정치민주화에는 한참 뒤지지만 노동기본권 확장은 분명 이루어졌다. 이를 두고 민주정부를 자처하는 1990년대 후반 이후 정부들은 이제 민주화가 되었으므로 저항적인 노동운동을 지양해야 한다고 강변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전태일 열사 죽음 이후 50명에 가까운 노동자가 절실한 요구를 내놓고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 그 숫자는 전태일-김경숙 열사의 죽음으로 상징되는 포악한 70년대 보다 민주화시대, 노동기본권이 크게 신장되었다는 민주정부시대에 더 많다. 이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현행 제도와 법률, 심지어 합법 노동조합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기에 스스로 목숨을 던진 것은 아닌가? 보장된 노동기본권이 노동자의 삶의 요구와 새로이 제기되는 긴박한 노동문제를 해결하는 데 한참 멀리 있는 결과는 아닐까?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부당노동행위 구제신청건수는 매년 1천여건을 훨씬 웃돌고 불법 쟁의, 집회 시위, 업무방해, 폭력행위 등의 죄목으로 구속·수배·해고되는 노동자의 숫자는 민주화시대를 비웃기나 하듯 해거름 없이 이어진다. 노사관계를 선진화한다는 마당에도 사업장 내 단결의 자유는 여전히 제지당하고 있고, 단체행동권 역시 필수공익사업의 범위 확대와 대체근로 허용에 의해 더욱 제한되는 상황에서 시민권 확보의 훈장에는 녹이 슬고 있는 것이다.  

열사가 염원했던 세상이 얼마나 이루어지기 어려운가는 그가 죽음의 조건으로 내세웠던 근로기준법 준수가 그 내용은 고사하고 아직도 노동자 전체를 아우르지 못한다는 데서 극명해진다. 법률상으로 근로기준법은 5인 이상 사업장에만 적용되고 수십만에 이르는 4인 미만의 사업장 노동자들에게는 그 적용도 매우 까다로운 일부 조항만 적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열어보기 참담한 성장주의 지배의 결산서

전태일 열사의 요구는 지옥과 같은 노동현실을 개선하려는 데서 출발하였다. 최저의 기준을 정한 근로기준법만이라도 지켜지기를 갈구했던 것이고 그것은 당시 풍미했던 경제개발의 신화에 대한 절실한 문제제기이었다. 경제개발, 경제성장은 근로기준법을 사문화하고 생존비 이하의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을 자양분으로 해서만 가능했고, 정부정책은 그 기조 위에서 노동자들을 몰아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대 정권과 자본가들은 경제성장주의, 수출제일주의를 내세워 줄곧 노동자들을 동원의 대상으로만 규정하였고 우리사회의 문화와 국민의식까지도 그에 함몰시켰다. 이로부터 경제성장 지상주의는 1997년 외환위기로 그 모순이 백일하에 드러났음에도 불퇴전의 논리로 자리를 잡았다. 실질민주주의의 착근을 역사적 사명으로 해야 할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에서도 성장주의는 여전히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여기에 노동자들은 끊임없이 저항하며 성장기조의 전환을 요구하였지만 권력과 자본의 양보 폭은 그지없이 좁기만 하였다. 오늘 노동자들이 맞이한 상황과 조건은 성장주의의 지배가 낳은 결산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노동자의 삶은 극심한 불안과 차별로 특징지어진다. 그 속에는 노동운동의 침체와 혼돈이 있다. 노동운동의 침체와 혼돈은 전태일 열사가 결단에 이르는 과정에도 있었다. 한편에서는 고도성장이 이룩되고 다른 한편에선 대량의 이농민과 처참하리만큼의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이 노동자의 삶을 옥죄고 있었다. 부익부 빈익빈에 대한 사회적 저항은 격화되었다. 노동기본권의 제한과 노동조합운동의 제도적·정책적 억압에 항거하지 못한 채 대기업 노동자의 이익대변에 안주해온 노동조합운동은 대중들의 저항에 직면하여 방향전환을 촉구받고 있었다. 하지만 노동조합운동은 단호한 내부개혁을 바탕으로 한 대정부 대자본 투쟁을 전개하지 못한 채 기득권 보존에 안주하였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전태일 열사가 파열구를 낸 것이었다. 황금만능의 성장주의가 판을 치고 생산성과에 대한 가진 자의 독점이 갈수록 두드러지는 상황에서, 노동조합운동에서마저 소외된 중소영세기업 노동자, 임시직·일용직 노동자들의 설움과 분노를 대변하여 제 몸을 던진 것이었다. 

전태일의 넋이 살아있는 노동자대회를 기대하며

물론 오늘의 상황은 많이 다르다. 지금은 전제적 권위주의의 군사독재에서 일찍이 벗어나 탈권위주의 정치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시대이다. 저실업 고도성장의 시대가 아니라 고실업 또는 고용불안의 저성장 시대이다. 노동조합운동의 지형이 크게 달라졌고 노동조합운동의 역량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증대하여 사회진보의 중심축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성장주의의 우세한 담론 아래 가진 자들의 독점구조가 더욱 강해지고 근로대중의 삶의 조건이 갈수록 피폐해지고 있는 점이나, 방대한 중소영세기업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운동에서 소외되어 고통받고 있는 점은 별반 다름이 없다. 

여러 가지 상황과 조건이 다르므로 그 극복방법도 달리할 수밖에 없지만 36년 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한 계층의 노동자들이 어려운 삶을 살고 있는 것은 분명 오늘날 노동운동의 한계가 아닐 수 없고, 이것이 전태일 열사의 36주기에 옷깃을 여미는 이유의 하나일 것이다. 전태일 열사의 뜻을 기리는 올 노동자대회가 보다 활기 있는 노동운동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1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