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와 민주시민이 될 아이들을 위한 경제교육

노동사회

노동자와 민주시민이 될 아이들을 위한 경제교육

편집국 0 3,526 2013.05.24 12:52

뜨거운, 그러나 속이 빈 논쟁

학교 경제교육에 대한 관심이 이토록 높았던 적이 또 있었을까?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누구도 현재의 경제교육에 만족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업에서는 학교 경제교육이  지나치게 반기업적이라고 말하고, 노동계에서는 학교 경제교육이 노동과 노동자들에 대해 충분한 지면을 할애하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소비자 단체에서는 현실의 소비자 문제를 담고 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고, 금융계에서는 금융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신용불량자를 양산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고 말한다. 경제학계에서는 정확한 경제학적 지식과 개념이 전달되지 않고 있다고 말하고, 교사들은 학생들의 흥미를 끌만한 교과서가 아니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이보다 더 놀라운 점은 경제교육과 관련된 수많은 비판들이 제기되고 있음에도 그럴듯한 대안은 전혀 나오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경제교육이 가야 할 바에 대해서 많은 이들이 저마다의 의견을 내놓고 있는 지금, 아직은 그 누구도 자신들이 주장하는 바를 고스란히, 그리고 알차게 담은 대안을 내놓지 못하는 실정이다. 경제교육을 둘러싼 이 전례 없는 논쟁이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경제교육의 방향과 원칙을 다투는 수준을 넘어 구체적인 대안이 필요하다. 

나는 전국사회교사모임의 연구회원으로 활동하고 있고, 뜻을 함께 하는 여러 선생님들과 함께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정말 절실하게 깨닫고 있는 바, 방향과 원칙이라는 얼개에 내용을 채워 정말 가르칠 수 있는 교육과정, 교과서로 만들어내는 일의 어려움은 너무도 크다. 지금의 경제교육에 대한 논쟁이 서로의 구체적인 대안을 두고 이야기하는 단계로 한 단계 성숙해가기를 원한다. 

현장에서 바라보는 경제교육의 방향

현장교사로서 나는 초중고교의 경제교육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원하는가? 한마디로 말하면, 초중고교의 경제교육 역시도 다른 모든 초중고의 교육들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경제교육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학생들이 경험하는 전체 교육과정을 생각하기보다는 경제교육 하나만을 따로 떼어놓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전체 교육의 맥락에서 경제교육만을 떼어놓고 논의를 전개하는 것은 훌륭한 대안을 만들어내는데 하등 보탬이 되지 않을 것이다. 학교 경제교육은 전체 학교 교육 목표에 복무하는 것이어야 하며, 전체 교육과정과의 연관 속에서 고민되어야 한다. 

첫째, 경제교육은 사회과 교육의 전체 목표에 부합하는 교육이어야 한다. 즉, 경제교육은 ‘꼬마 경제학자’를 만들어내기 위한 경제학 교육이 아니라, ‘민주시민’을 키워내기 위한 사회과 교육의 한 부분으로서의 자리를 보다 확고히 해야 한다. 이것은 경제교육의 역할을 축소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경제교육에 제자리를 찾아줌으로써 경제교육이 제 역할을 충분히 해낼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때문에 초중고교에서 이루어지는 경제교육이 ‘쉬운 경제학’이라는 방향으로 자리 잡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경제학은 경제교육을 가능케 하는 아주 중요한 모학문이지만, 경제학 그 자체가 경제교육이 되어서는 안 된다. 

둘째, 모든 교육이 그러하겠지만 경제교육 역시도 삶과 유리되어서는 곤란하다. 자신이 발 딛고 숨 쉬는 삶과 동떨어져 있는 교육은 그 자체가 기만일 수밖에 없다. 많은 연구들이 “학생들이 경제에 관심이 없다”, “학생들은 지금의 경제교육에 흥미를 느끼지 못 한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것은 사실이다. 다만 그 근본적인 이유가 교과서가 너무 어렵다거나 학생들의 흥미를 고려하고 있지 못하는 데 있다기보다는 학생들의 삶과 유리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제 아무리 흥미로운 영역이나 주제일지라도 그것이 자신의 삶과 유리되어버리면 누구라도 그에 대한 관심을 지속시키기는 어렵다. 경제교육이 학생들을 위한 것이 되려면 그것이 그들의 삶과 긴밀한 연관을 맺어야 한다. 소비자로서, 기업가로서, 노동자로서, 투자자로서, 납세자로서, 경제정책 결정에 참여하는 유권자로서의 삶에 직접적으로 관련을 맺어야 하는 것이다.  

경제교육이 삶과 유리된 추상적 내용을 전달하면서 나타나게 되는 문제점은 장차 경제문제에 대해서 무력한 시민을 양산하게 되는 데 있다. 경제문제 역시 사회문제의 일부이며, 그것은 우리 사회의 구성원이 어떠한 것을 선택하는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는 문제라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 진공 상태 속에서 논리적으로 전개되는 수요법칙과 공급법칙은  그것이 수많은 가정과 전제를 깔고 전개된다는 사실을 빼먹은 채 학생들에게 전달된다. 학생들은 그 결과 수요와 공급에 따라 자동적으로 가격이 결정되고 그것은 아무도 손댈 수 없는 자연법칙과 같은 것이라고 느끼게 된다. 다른 문제는 몰라도 경제문제는 시민의 손, 비전문가인 나의 손을 떠난 문제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셋째, 다른 모든 교육과 마찬가지로 경제교육 역시 ‘바람직한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경제교육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내용 가운데 하나는 경제교육이 윤리교육도 아니건만 지나치게 기업윤리를 강조한다는 것이다. 이어, 경제학은 인간의 이기심을 전제로 구축된 학문이고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우수성 또한 인간의 이기심을 인정하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제도화하였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뒤따른다. 맞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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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현섭 외, 중학교 사회 3, 고려출판 p.55. 다른 교과서들과 달리 이 교과서에서는 사회교사의 삶이 다양한 경제적 역할로 통합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학생들에게 우리의 삶에서 다양한 경제적 역할들이 작용하고 있음을 효과적으로 알려준다. ]

그러나 우리가 교육을 하는 것은 보다 진보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우리가 본래적으로 이기심에 기초해서 활동하는 존재라면, 교육은 이타심에서 활동하는 것의 아름다움을 가르치는 것이 본성이라고 생각한다. 때로 공동체를 위해, 인류를 위해 의사 결정을 하고 행동에 옮기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좋다는 것을 설득하고 신념화하도록 해주는 것이 교육이 아니던가? 그리고 교육이 그 본래적 역할을 다할 때 우리의 삶의 질이 한층 높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주류 경제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인간의 본성이 정말로 이기적인 것이고, 그것이 합리적 의사결정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이 적어도 교육에서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것의 아름다움을 가르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노동교육에서 나타나는 문제점

노동 교육과 관련해서 지금의 교과서와 교육과정이 여러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첫째, 노동에 대한 오해이다. 지금의 학교 경제교육은 노동을 다룰 때 자연자원(토지), 자본, 경영과 함께 생산요소의 하나로서 노동을 다룬다. 그러나 인간의 노동은 석유나 석탄과 같은 자연자원이나 공장설비와 같은 자본과는 다른 차원에서 다루어질 문제이다. 바로 인간 그 자체에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노동을 일반적인 상품 가운데 하나, 조금은 특수한 상품으로 취급하고 있는 문제이다. 시장에서의 수요와 공급이 선풍기나 라면의 가격을 결정하듯, 노동시장에서의 수요와 공급이 노동의 가격을 결정하는 것을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다루고 있다. 이 같은 논리에 따르면 시장가격보다 높게 설정된 가격 제한, 즉 최저임금제는 노동의 초과 공급을 만들어내는 비합리적인 제도로 이해될 뿐이다. 최저임금제라는 제도가 품고 있는 가치, 즉 인간적인 삶을 보장하는 사회적 연대로서의 개념은 실종되어 버리는 것이다.

셋째, 노동문제에 대한 잘못된 시각을 가지고 있다. 노동문제를 노사갈등이라는 용어로 대치함으로써 갈등은 부정적인 것이고, 양보를 통해 서로 화합해야 한다는 논리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당한 대우를 요구하는 KTX 여승무원들의 투쟁을 양보의 부재로 보아야 하는가? 답은 자명할 것이다. 

넷째, 노동자로서의 권리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인권에 대해 배울 권리는 유엔이 정하고 우리나라도 합의한 중요한 권리이다. 노동자로서의 기본적인 권리에 대해 학습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학생들의 기본적 인권을 보장하는 문제이다. 이것은 단지 많은 학생들이 장차 노동자가 될 것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 아니다. 노동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지 않을 학생들에게도 중요하다. 비장애인이 장애인의 권리를 아는 것이 우리 사회의 삶의 질을 높이는데 필수적인 것처럼,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바르게 아는 것은 그가 노동자이건 비노동자이건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노동권을 보편적 인권의 문제로 접근할 때 학생들은 비정규직문제가 왜 정말 문제인지, 인간적인 노동조건이 정말 왜 중요한지 알게 될 것이다.

다섯째,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문제 역시 경제적인 문제로 접근하고 있다. 예를 들어 임금격차의 문제를 다룰 때 임금 격차를 만들어내는 요소에는 학력, 성별, 인종, 작업의 위험도, 전문성 등이 있다고만 설명할 뿐 그것이 임금격차를 만들어내는 합리적인 요소인지에 대해서까지 사고를 이어가고 있지 않다. 

새로운 경제교육을 위하여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의 경제교육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갈 수 있을까? 나는 우리가 넘어야 할 장애물이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주류 경제학이 짜놓은 판을 넘어서는 일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말이 있다. 경제교육과 관련된 많은 논의 과정에서 노동교육이 강화되어야 한다는 제안을 하면 돌아오는 응답은 이렇다. “좋다, 그런데 그걸 어디에 넣지? 여기에 넣어도 이상하고 저기에 두어도 이상한데.” 맞다. ‘넣어보면’ 이상하다. 당연하다. 원래 그 얼개가 노동 교육을 위해 짜인 얼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안적인 경제교육을 꿈꾸는 사람들이라면 지금의 경제교육에 이렇게 저렇게 내용을 추가하는 문제를 고민해서는 안 된다. 처음부터 새로운 얼개를 고민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어떤 때는 부분적으로 리모델링을 하는 것보다 옛것을 허물고 새로 짓는 것이 더 수월할 때가 있다. 경제교육이 그렇다.

또 하나는 새로운 경제교육 전문가가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과 노동문제에 대한 잘못된 시각을 숱하게 노정하고 있는 교과서나 교육과정은 의도적으로 그렇게 구성되지 않은 경우도 많다. 교육과정 연구자들이나 교과서 필자들의 인식이 그만큼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회문화 과목의 농촌문제를 다룬 부분을 보면 잘못된 인식들이 숱하게 발견된다. 그 이유는 연구자나 필자들이 도시사람이기 때문이다. 도시적인 사고의 틀 안에 갇혀 있기 때문에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농촌 문제를 도시적인 관점에서 서술하게 되는 것이다. 노동교육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연구자나 필자가 실제로 노동자이건 아니건, 노동자로서의 관점에서 사고하지 못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여성 문제에 대한 끊임없는 문제제기가 교과서에서의 성편향을 많은 부분 물리쳤듯이, 노동문제에 대해서도 끊임없는 문제제기를 통해 교과서에서 나타나는 편향을 몰아낼 수 있을 것이다.

다양한 방법으로 보다 구체적으로, 지속적으로 문제제기하기, 이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기, 이것이 경제교육을 바꾸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너무 뻔한 방법 같지만, 그 뻔한 방법이 계속해서 세상을 바꾸어왔다. 경제교육도 마찬가지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1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