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FTA 저지 투쟁 2006년 평가와 2007년 전망

노동사회

한미FTA 저지 투쟁 2006년 평가와 2007년 전망

편집국 0 3,180 2013.05.24 12:48

새해가 밝았다. 지난 1년간 쉼 없이 달려왔던 한미FTA 저지투쟁을 평가해보고 2007년 투쟁을 전망해볼 시점에 서 있는 것 같다. 3월 말 타결 시한을 앞두고 한미FTA 협상은 중대한 분기점에 접어들고 있다. 각 정치세력의 물밑경쟁은 가열되고 있고, 협상결과에 따라 대선은 물론 향후 정치지형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따라서 한미FTA 저지투쟁을 관통했던 정치지형과 역관계를 중심으로 2006년을 큰 맥락에서 평가하고 전망해 보고자 한다. 협상결과 등과 관련된 미시적인 평가 등은 다음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뤄보도록 하고, 이 글에서는 큰 흐름을 짚어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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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7월12일 오후 2시 서울역 앞 광장에서 열린 ‘한미FTA 저지, 노사관계 로드맵 분쇄, 특수 고용 노동3권 쟁취’ 총파업 대회. ▶ 레디앙 ]

정부의 졸속추진이 불러온 폭넓은 저항의 시작

한미FTA 협상의 시작은 너무나 갑작스럽게 추진되었다. 후순위로 밀려있던 한미FTA는 2005년도 하반기부터 시작된 노무현정부의 대연정, 전략적 유연성 등과 같은 친미우경화 정책의 맥락에서 갑작스레 전면으로 부상했다. 2006년 2월3일 대통령과 소수의 관료와 정치인들에 의해 전격적으로 추진된 한미FTA 협상은 시작부터 졸속일 수밖에 없었다. 변변한 사전 연구조사조차 이뤄지지 않았고, 공청회 역시 김현종 본부장이 미국 의회에서 협상개시를 선언하기 16시간 전에 법정형식을 맞추기 위한 요식행위로 진행되었다.

기만적인 정부의 공청회를 시작으로 반대운동 진영은 빠르게 대오를 결집하기 시작했고, 한 달 보름 만인 3월28일 ‘한미FTA 저지 범국민운동본부’(이하 범국본)을 출범시켰다. 범국본은 1987년 6월 항쟁 당시 반전두환 운동을 주도했던 ‘호헌철폐와 민주헌법쟁취 범국민운동본부’에 버금갈 정도로 각계각층을 폭넓게 망라했다. 이후 반대운동은 각 지역과 부문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반대운동 초기 운동을 주도했던 것은 영화인과 농민이었다. 오래 전부터 스크린쿼터 투쟁을 전개해 온 영화인들은 초기 한미FTA 저지운동의 주동력이었다. 특히 안성기, 장동건 등 유명 영화배우들의 활동은 한미FTA 저지운동의 대중성과 정당성을 부여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한미FTA의 가장 큰 피해자인 농민 또한 운동 초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농민단체 가운데 상대적으로 중간층인 한국농업경영인중앙회가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반대운동을 확대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집단은 교수, 각계 전문가들, PD 등 인텔리들이다. 반세계화 운동을 꾸준히 전개해 왔던 교수, 전문가 집단은 오랜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한미FTA 반대의 논리적 근거를 제공했다. 언론노조의 총파업, 2006년 6월 1차 협상 당시 <KBS 스페셜>, 7월 2차 협상 당시 MBC <PD 수첩> 등 방송인들의 활동은 운동을 범국민적으로 확장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또 기억할 만한 것은 정태인, 조순, 정운찬 등 기존 제도권 인사들의 반대이다. 이들은 정부의 한미FTA 추진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며 한미FTA 추진의 정당성을 밑으로부터 약화시켰다. 

이 시기부터 협상은 이미 난관에 부딪히고 있었다. 원래 구상은 ‘4가지 선결조건’을 내주고 나머지 부분을 연내에 매듭짓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리 내어준 4가지 부분은 밀실 협상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님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은 3월13일 미국에서 3번째 광우병 소가 발견되면서 좌초되었고 이후 미국 현지 도축장의 안정성 여부를 둘러싸고 논란이 지속되었다. 의약품의 경우에는 약가 적정화 방안을 두고 2차 협상이 파행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쇠고기와 의약품, 자동차 등 4가지 선결조건은 협상 개시 이전에 해결된 것이 아니라 2006년 12월 5차 협상 현재까지 최대 쟁점으로 남아 있다.  

2월3일부터 7월12일까지를 종합해 본다면, 협상이 개시되었지만 선결조건으로 해결하려던 쇠고기와 의약품 분야에서 난항을 거듭했고, 각계각층의 신속하고 단호한 저항에 부딪혔다. 특히 한미FTA 협상이 졸속이라는 폭넓은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연내에 협상을 타결하려는 정부의 구상이 결정적인 난관에 봉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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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12월 열린 3차 국민대회의 일환으로 열린 민주노동당 결의대회. ▶ 레디앙 ]

전국에서 치솟은 저지운동의 불길

한미FTA 협상이 어려움에 직면하자 정부 당국은 ‘한미FTA 체결지원회’(위원장 한덕수)를 결성하여 상황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국정홍보처 등을 통한 무차별적인 광고가 난무하기 시작했고 관변단체와 중간단위를 중심으로 반대 운동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한편 7월5일 북의 미사일 발사와 10월9일 핵실험으로 한미FTA의 경제적 실익과 무관하게 한미동맹을 강조하는 보수층이 찬성 쪽에 힘을 싣기 시작했다. 이로써 빠르게 성장하던 반대여론이 주춤하고 있었다. 

반대진영은 7월 2차 협상을 계기로 농민대중의 서울 상경과 호의적인 국민여론을 기반으로 협상에 타격을 주었지만, 이후 반대 운동을 도시로 확대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부산과 서울의 민주노동당, 청년회, 사회단체의 성원들이 추석 연휴(10월3일~5일)를 반납하고 한미FTA 반대 서명운동에 나선 점, 광우병과 관련하여 도시 중간층 일부가 호의적인 여론을 보였던 점 등을 통해 운동의 동력이 유지되었다. 그리고 10월23일~27일 제주도에서 열린 4차 협상에서는 제주도 도민들의 압도적인 반대 여론과 참여, 2천여명의 원정대 등이 결합하여 대중적이고 역동적인 투쟁을 전개했다. 비록 제주도라는 다소 고립된 공간에서 진행된 투쟁이었지만 한미FTA 저지운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11월22일부터는 3번에 걸친 범국민대회가 진행되었다.(이하 ‘11월 총궐기’) 11월22일 서울과 지방의 광역 단위를 중심으로 제1차 범국민대회가 개최되었다. 서울은 민주노총과 전교조를 중심으로 서울 시청광장에서 대회를 마치고 행진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지만, 지방에서는 대전, 청주, 춘천, 전주 등 지방의 거점 도시를 중심으로 1만~수만에 걸친 농민, 노동자 대오가 대회를 마치고 도청(시청)을 향해 행진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11월22일 저녁 도청(시청)에 다다른 행진대오가 도청(시청) 앞에서 격렬한 형태로 한미FTA 반대 의사를 표출하면서 한미FTA는 사회적 쟁점으로 또 다시 급부상하였다.  

11월22일 이후 정부와 보수언론은 한미FTA 투쟁을 폭력·과격으로 몰아가며 엄벌할 것을 요구했고, 11월24일 한명숙 총리와 5개 부처 장관은 담화를 통해 동일한 방침을 천명했다. 그러나 이날 담화에서도 ‘폭력’에 대한 엄벌을 말하면서도 농민의 생존권에 대해서는 뚜렷한 입장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정부의 입장에서도 한미FTA가 농민 생존권에 감당하기 어려운 타격을 준다는 사실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정부의 탄압에 맞섰던 11월 총궐기

이런 상황에서 11월29일과 12월6일 각각 제2차와 제3차 범국민대회가 연이어 개최되었다. 11월29일 범국본의 집회는 불허되었고 시청 앞 광장은 정부의 차량으로 뒤덮였다. 서울로 상경하려는 농민들은 마을 앞에서 경찰에 의해 저지되거나 톨게이트를 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농민들은 서울역에서, 노동자들은 청와대 인근에서 각각 수백명 단위의 산발적인 시위를 벌이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이에 따라 범국본은 합법적인 틀을 벗어나 삼삼오오 기민하게 무리를 지어 약 1천명의 대오가 을지로 4거리에 집결하여 2시간여 동안 경찰과 대치했다. 제2차 범국민대회를 계기로 정부의 과도한 탄압과 진압에 국민 여론도 비판적인 방향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12월6일 제3차 범국민대회가 개최되었다. 마로니에 공원에서 민주노동당의 집회에 이어 개최된 3차 범국민대회를 마치고 을지로, 충무로 등지로 산개한 농민, 노동자, 사회단체 성원들은 서울 도심가를 누비며 1만명 이상의 큰 대오를 형성하여 정부 당국의 탄압을 완전히 무력화시키며 11월 총궐기의 대미를 장식했다.  

11월 총궐기는 여러 면에서 중요한 성과와 한계를 남겼다. 한미FTA를 사회적 쟁점으로 부각시킨 점, 합법·반합법을 뛰어 넘는 기민한 전술로 참여한 운동대오의 전술적 승리를 확보하고 기세를 높인 점, 노농 사이의 연대를 확보한 점, 도시민의 지지가 넓어진 점 등이 성과라면 도시서민의 참여가 미흡한 점, 11월 당시 도시서민의 가장 중요한 의제였던 부동산 문제와 결합하여 투쟁을 상승 발전시키지 못한 점 등을 한계로 지적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정부 당국의 무모한 협상기도를 파탄시키고 운동 대오의 결속력을 높인 성과가 있었지만 한미FTA 협상 전체를 파열시킬 위력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결정적인 한계는 도시서민과 중산층의 참여 정도가 미흡했다는 점이다.    

11월 총궐기가 열리던 시점인 11월7일 미국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승리하고 의회가 민주당 주도로 바뀌면서 한미FTA 협상에서 미국은 더욱 완고한 입장을 취하기 시작했고, 시간이 흐를수록 한국 측의 입지는 옹색해지고 있었다. 한편 비슷한 시기 수입된 미국산 쇠고기에서 뼛조각과 다이옥신이 발견되면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재개 문제가 사회적 쟁점으로 급부상하기도 하였다. 

공식협상보다는 밀실협상으로 선회

협상 개시 이전 해결하기로 했던 4대 선결조건은 2007년 1월 현재 해결은 고사하고 최대의 쟁점으로 부상해 있다. 쇠고기는 뼛조각과 다이옥신이 발견되어 수입재개 조건을 바꾸지 않으면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 불가능한 상황이고, 의약품의 경우에도 협상이 타결되지 못한 상황에서 보건복지부의 약가적정화방안이 시행되어 협상의 여지를 좁히고 있다. 자동차 문제도 여전히 중요한 쟁점으로 남아 있다. 이 모든 상황은 4가지 선결 조건이 애초부터 고위급 밀실 협상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한미FTA 타결 시 한국이 이익을 기대할 수 있는 몇 가지 분야인 공산품 관세인하와 무역구제는 미국의 강경한 입장에 막혀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공산품 관세인하는 4차 협상에서 미국이 자동차 분야를 개방 예외로 분류하고, 섬유·의류 분야의 경우에도 소극적인 개방안을 내놓았다. 이는 미국의 상응하는 양보가 있어야만 공산품 관세인하를 하겠다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한국이 최대 역점을 두었던 무역구제 분야에서는 미국이 양보를 거부함으로써 한국에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자동차 분야의 경우 자동차 세제개편, 섬유·의류 분야는 농산품 일부와 빅딜이 예상되고 있다. 이렇게 되면 한국 측의 구체적인 기대이익은 거의 사라진다고 볼 수 있다. 기타 서비스·투자·지적재산권 등의 신(新)통산의제의 경우는 미국 측의 요구를 그대로 수용하는 형식으로 타결되는 수준일 것이다. 

협상의 양상은 이미 정상적인 공식협상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한 시점으로 접어들었다. 5차 협상에서는 몬태나에서 열린 공식협상 대신에 김현종 본부장이 워싱턴으로 가 미 의회 관계자들을 만나고 12월8일 섬유분야의 차관보급 협상이 열리는 등 비공식, 고위급 밀실협상이 여러 갈래에서 벌어지고 있다. 즉 공식협상으로 타결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한미FTA 협상개시와 마찬가지로 밀실협상을 통해 현안을 일괄해결하려는 구상이라고 볼 수 있다. 

어두운 협상전망, 커져가는 투쟁의지

협상 전망은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3월 말 시한에 맞추어 전격 타결되는 경우이다. 현재 상황으로 보면 공식·비공식 협상을 통해 빅딜안을 적절히 조정한 뒤 노무현 대통령이 최종 결단하는 양상이 될 것이다. 이 경우 대선 일정을 고려하여 국회비준은 2008년으로 넘기는 방식이 될 가능성이 크다(심상정 의원의 발언에 따르면 열린우리당 내 적극적인 찬성론자인 송영길 의원의 주장이 그러하다고 한다). 둘째는 쟁점이 되는 분야를 그대로 두고 타결이 된 분야를 중심으로 한미FTA를 타결한 후 나머지 분야는 대선 이후 추진하는 방안이다. 이는 시한 내에 협상을 타결하기 어려운 조건에서 협상 결렬에 따른 정치적 부담을 덜고 협상의 동력을 유지한다는 차원에서 유력한 방안일 수 있다. 셋째는 결렬되는 경우이다. 한미 간, 부처 간, 이해집단 사이의 이견을 조정하지 못하거나 범여권의 차기 후보가 협상을 차기로 넘기는 것이다. 

한미FTA 범국본은 1월15일~18일 서울에서 진행될 6차 협상에 맞추어 1월16일 협상장 앞에서 전국집중투쟁을 진행하고 이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전국을 순회하는 행진을 조직할 것이다. 전국 순회 행진은 전국의 시군 단위를 폭넓게 망라하는 투쟁의 장이 될 것이다. 이와 더불어 광우병, 의약품 등 도시서민의 이해와 결합된 다양한 운동을 전개하고 이를 기초로 정치권의 결단을 압박하는 투쟁을 전개할 것이다. 3월경 기어이 정부가 한미FTA를 강행하려 한다면 근래에 볼 수 없었던 충돌이 불가피할 것이다.   

도시서민·중산층의 동참 끌어내야

3월 말을 하나의 시한으로 본다면 협상은 중대한 분기점에 접어들었다. 정상적이라면 협상타결은 불가능하다. 비판적인 국민여론, 협상의 성과가 부재한 점, 감당하기 어려운 농민층의 어려움 등을 고려해 보면 협상은 중단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합리적인 차원에서 결정되기보다는 무모한 도박에 의해 판가름 나는 경우가 많이 있다. 한미FTA를 절대선이라고 믿는, 또는 기왕에 여기까지 온 것 물러 설 수 없다는 오기가 발동할 경우 예측불허의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죽을 것을 알면서도 벼랑으로 내닫는 수레를 효과적으로 멈춰 세우는 일점돌파의 기민한 대응이 절실하다. 

3월 말 협상 타결 여부와 무관하게 한미FTA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논란은 가속화될 것이다. 한미FTA 협상이 타결되더라도 국회비준 과정에서 더욱 큰 반발과 충돌이 예상되고, 결렬되더라도 한미FTA를 재론하려는 시도는 계속될 것이다. 

한미FTA를 둘러 싼 여론 분포에서 주목할 만 한 점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확장 과정에서 농촌·농민의 감각적이고 행동적인 저항, 도시서민·중산층의 관망적인 태도 또는 자신은 피해갈 수 있으리라는 착각, 도시 기득권층의 적극적인 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따라서 향후 정세에서 중요한 것은 도시서민·중산층의 동참을 이끌어 내고 궁극적으로는 서민대중, 국민경제, 민족적 견지에 서서 진보적인 통상정책을 수립·시행하는 정치적 주체를 세우는 일이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1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