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은행식 해법은 '독'이 든 '약'이다

노동사회

우리은행식 해법은 '독'이 든 '약'이다

편집국 0 3,681 2013.05.24 12:47

우리은행 노사의 비정규직 정규직화 합의에 대해 다양한 사회적 반응들이 등장했다. 금융노조와 일부 여성단체들은 분리직군제 방식에 따른 차별 고착화에 대한 우려의 단서를 달긴 했지만 환영을 표명했고, 대체적으로 노동계와 자본측은 모두 조심스러워했다. 입장의 스펙트럼이 매우 다양하게 나타났다. 

노동계 내에서 우려를 앞세우는 입장은 분리직군제도를 부각시키거나, 이번 정규직화가 ‘비정규직보호법’의 발효에 따른 사용자측의 계산된 전략적 대응이라는 점을 부각시켰다. 심지어 정규직화가 아니라 “저임금의 무기계약직화일 뿐”이라거나, “자본과 정부가 비정규직보호법을 선전하기 위해 판을 짠 것에 불과하다”는 견해까지 등장했다. 상대적으로 긍정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입장들은 직군차별 고착화를 우려하면서도, 고용안정과 기업복지가 동등하게 제공되는 점에 주목하고, 또 노조의 우산 속에서 평등처우 노력이 기울여질 것을 기대하면서 조심스럽게 환영을 표했다(김태현, 『레디앙』, 2006년 12월22일). 

자본측도 조심스럽긴 마찬가지였다. 국민은행의 어느 고위관계자는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문제는 재계 전체가 공동으로 고민해야 할 사안”이며 성급한 접근을 견제하면서 “장기적인 인력 수급 계획 등을 감안해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입장을 피력했다(『머니투데이』, 2007년 1월11일). 경총, 대한상의, 전경련 등의 자본측 단체들은 어느 곳에서도 이와 관련 일체의 공식논평을 내지 않고 있다. 예상컨대 분권화된 구조만큼 자본측도 여러 세력이 암중모색과 조율을 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분리직군제 정규직화라는 ‘불완전한 개량’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이번 정규직화의 배경을, 비정규직보호법안 발효와 관련하여 2년 계약시효가 만료된 계약직들의 고용문제에 대한 사용자측의 전략적 결정, 혹은 합리적 계산의 결과에서 찾는다. 이는 옳다. 그러나 가치관과 이해관계에 따라 ‘계산’하고 결정을 내리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다. 노동자 투쟁의 성과로서 나타나는 사용자의 양보행동들도 거개가 이러한 ‘합리적 계산’을 거친 것이다. 그 계산의 근저에 어떤 비수가 준비되어 있는지는 날카롭게 점검해야 하겠으나, 그 결과는 물질적으로 객관화된 것이므로 그 자체로 평가될 필요가 있다. 

이번 사건과 관련하여 객관적으로 드러난 ‘사실’은 △노조의 정규직 임금동결 약속을 조건으로, △우리은행 계약직 3,100명이 노사합의에 의해 기존 정규직과는 분리된 별도직군의 정규직으로 고용형태가 변경되었으며, △노사가 이후에는 (직접고용) 비정규직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을 것임을 천명하였다는 것이다. 즉, 객관적인 사실은 ‘임금동결’, ‘정규직화’, ‘분리직군제도’, ‘(직접고용) 비정규직 활용 중단 선언’ 등이다. 

3,100명의 정규직화는 분명히 ‘개량’에 속하는 노사의 전략적 결정이다. 이 결정으로 과거 계약직이었던 노동자들은 훨씬 안정된 조건에서 근무할 수 있게 되었으며, 노조는 수천명의 신규조합원을 확보할 기회가 생겼다. 정규직 조합원들은 자신들의 일시적 희생으로 유사 학력과 직무를 지녔으면서도 형편없는 차별을 받았던 동료들을 구하는 데 일조했다는 칭찬과 자부심을 얻었다. 반면 분리직군제도는 은행권 여성노동자나 여성계에게는 ‘여행원제’라는 기억하기 싫은 과거를 떠올리게 한다. 얼마 전까지도 하나은행에서는 FM/CL이라는 분리된 정규직군이 신종 여행원제로 지탄을 받기도 했다.

결국 이렇듯 사실관계를 확인해 봐도 우리은행 계약직 정규직화라는 불완전한 개량이 대안이 될지 덫이 될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부정적 측면만을 놓고 본다면 일부의 평가처럼 2등 정규직, 무기계약직 등으로 굳어질 수 있고, 여행원제의 부활로 간주될 수 있으며(여성민우회, 2006), 또 일본식의 코스별 인사관리의 일환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충분하다(김성희, 2007). 그러나 분명한 점은 이 사안은 불투명하기 때문에 더욱 더 “한계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성과를 평가하고 이를 노동자의 관점에서 보다 발전시켜 나갈 것이 요구”(김태현, 2007) 된다는 점이다. 사소하다고 해도 분명히 ‘개량’의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복잡하게 중첩된 가능성과 한계, 무엇에 주목할 것인가

이제 우리은행 계약직 정규직화 중첩되어 있는 다양한 이슈들을 차근차근 검토해보자. 먼저, 노조운동이 반대했던 비정규직보호법의 ‘규율/유인 효과’에 대한 이슈가 있다. 노조측이 이 법안에 거세게 반대해왔던 만큼 실행효과에 대한 검토는 매우 중요하며, 어찌됐든 우리은행 사측은 이 법안을 전제로 움직인 것이 분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또 자본측이, 일부 자본분파의 행동일 뿐이라고 하더라도, 어떤 의도로 그러한 ‘개량’을 추구했는지 아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비정규직보호법이 어떤 식으로든 규율/유인 효과가 있음이 이번 사건으로 확인된 것이라면, 우리은행 사측의 행동은 자본측이 활용할 수 있는 구체적인 대응 패턴 중 하나를 드러낸 것일 터다. 이것이 갖고 있는 함의를 정확하게 아는 것은 비정규직뿐만 아니라 정규직에게도 무척 중요하다. 자본측의 포트폴리오식 고용관리가 확산되고 있는 상황에서 비정규직 관리는 정규직 고용관리와 동떨어져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이러한 패턴 변화는 정규직, 비정규직 모두에게 새로운 전선의 등장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새로운 노동시장체제의 구축을 실천적으로 고민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애석하게도 국회를 통과한 ‘비정규직보호법’은 바람직한 노동시장체제와는 무관한 형태로 귀결되었다. 하지만 그 영향력이 워낙 크기 때문에 노동측은 바람직한 노동시장체제의 상에 비추어 비정규직보호법의 나쁜 측면을 개정하려는 노력과 함께, 노사관계 현장에서 독립적으로 ‘좋은 노동시장관리체제’를 만들어나가려는 노력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우리은행의 정규직화는 몇 가지 흥미로운 검토지점을 제공한다. 즉 △자본측 계산으로도 대규모의 정규직화 여력이 있음을 웅변하는 사례를 제공했고, △임금제도의 규율효과에 대해 다시 검토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 후자는 특히 우리은행장이 “분리직군제는 곧 직무급제”라고 의제를 제공하면서 이루어졌으며, 뒷부분에서 좀 더 살펴보도록 하겠다. 

셋째, 임금동결과 노조의 집중성 문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번 정규직 임금동결 방식의 비정규직 정규직화는 우리은행 내부에서 조합원들의 불만을 일부 자아냈다. 하지만 이는 주로 민주적 절차의 문제였다. 민주적 토론을 전제로 할 경우 노조의 일정한 양보는 사용자들에게 공세적 제안을 던질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렇게 중요한 사건에서 산별노조인 금융노조의 역할이 주변적이었다는 점은 곱씹어볼 측면이 있다. 물론 내부적으로 양해가 된 사항일 수 있겠으나, 여전히 기업에 노조권력이 몰려있는 분권적 산별노조의 현실을 보는 것 같아 애석한 면이 있다. 노조측은 이번 일을 집중화를 확장하는 계기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넷째, 은행부문에서 선도적인 정규직화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구조적인 조건에 관한 것이다. 금융부문에서 계약직 정규직화가 먼저 일어난 데는 △금융부문이 ‘준공공부문’이라는 측면, △민영화 이후 관계마케팅 등 고객관리가 경쟁력 확보에 중요한 구실을 하게 된 금융서비스업무의 특성 등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번 정규직화가 노동자와 시민의 희생에 기반한 금융부문의 엄청난 수익률이 가능케 한 ‘시혜’일 수도 있다는 점 역시 유념해야 할 것이다. 어찌됐든 이렇게 사례의 특수성을 구체적으로 검토하는 것은 다른 부문에서 정규직화를 추진할 때도 참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밖에도 들추어 보면 많은 이슈들이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그 중에서도 분리직군제 방식을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우리은행장이 제기했던 ‘임금제도의 문제’를 중심으로 논의를 좀 더 발전시켜보고자 한다.     
 
 산별노조와 사회적 노동시장체제 전략

노동운동은 정치·경제구조와 환경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1987년 이후 한국사회는 자유주의적 정치민주화가 제도적 측면에서 정비된 반면, 노동시장 구조에서는 신자유주의적 체계가 깊숙하게 관철되어 왔다. 최근 한국의 노사관계 관련 지표들은 영미형 신자유주의적 양상이 한국의 노동시장과 노사관계에 깊게 드리워졌음을 드러내고 있다(김동원 외, 2006). 또한 신자유주의적 변화를 배제하더라도 현재의 노동시장 구조에는 ‘서비스화’와 같이 질적으로 불가역적인 측면들이 과거에 비해 많이 반영되어 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노조운동은 노동시장에 대한 자체적인 규율능력을 새롭게 확충하지 않으면 현재 상황조차 유지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절박한 상황에 몰렸다. 물론 경제구조 변화의 영향을 완전히 거스를 수는 없겠지만, 노사관계가 지닌 상대적 독자성을 극대화하여 노동자들의 삶을 지키려는 노력을 경주해야 하는 것이다.  

노조운동의 노동시장 규율방식 혁신은 ‘사회적 노동시장체제’의 수립을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정이환, 2006). 사회적 노동시장체제의 구체적인 상은 정립되지 않았으나 거칠게나마 정의하자면, “임금과 고용 등에 대한 ‘사회적 기준’을 설정하고 이에 대해 ‘노조를 중심으로’ 당사자들이 규율의 중심에 서서 관리하는 노동시장체제” 정도가 될 것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제도적으로 △중층적이고 포괄적인 사회안전망, △적극적 노동시장정책, △중층적인 사회적 대화체제 등이 기본틀로 구축되어야 한다. 또한 노조운동은 정치와 노동시장에서의 노동자 대표성을 제고함과 함께 연대적인 고용·임금·노동·복지정책을 진정성 있게 추구해야 한다. 

민주노총을 비롯하여 전체 노조운동은 이러한 전략적 방향을 오래전부터 천명했다. 그러나 조직구조적 파편성 등 여의치 않은 내부 사정으로 인해 실천적 접근에 있어서는 희망보다는 우려가 두드러졌던 게 사실이다. 내부의 연대보다는 자본과의 협력이 부각되거나, 내부적으로 조율되지 못한 기업별·분파적 의식의 소산들이 ‘전투성’을 명분으로 부각된 측면이 존재했다. 그러나 최근의 산별체제의 급격한 확산에서 나타나듯, 장기적으로 노조운동의 방향전환은 낙관적인 것으로 보인다. 산별노조 건설과 같은 노조운동의 체제전환은 곧 노사관계체제의 전환과 맞물릴 것이고, 이 과정에서 사회적 노동시장체제의 골격과 세부정책들이 구체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분들은 최근 산별체제의 확산과 심화 과정을 통해서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산별교섭에 있어서 ‘교섭구조’ 중심 논의에서 ‘협약체제’에 대한 관심으로 심화되는 점 등이 그러하다(강신준, 2006). 그러나 이러한 노조의 체제전환 과정에서 신자유주의 공세와 맞물린 내부갈등과 불균등 발전은 불가피할 것이다. 방향을 분명히 잡고, 소통을 원활히 하여 조율능력을 최대한 발휘해야 한다. 그러한 속에서 주어지는 계기들을 잘 포착하여 변화를 촉진해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은행 계약직 정규직 전환을 통해 제기된 임금체계의 개편논의 역시 이러한 계기로서 적극적으로 타고 넘어야 할 것이다.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의 제도적 기반으로서 직무급

사회적 노동시장체제가 작동하려면 ‘임금에 대한 사회적 규율’이 이루어져야 한다. 즉, 임금이 시장작용에 의해 결정되는 부분을 제한하고 제도에 의해 규율되는 면적을 넓혀가야 한다. 이러한 사회적 임금결정과 관련하여, 노조운동은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리를 지속적으로 제기해 왔다. 그리고 이를 제도상으로 구현할 수 있도록 “직무급 내지 숙련급으로 임금체계를 변경할 것”을 꾸준히 제안했다(강신준; 1996; 한국노동사회연구소, 1998; 한국노동사회연구소/금속산업연맹, 2003; 김유선, 2001; 윤진호, 2001; 정이환, 2006).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리를 구현하는 임금결정의 논리는, △통용가능성이 있는 사회적 기준에 근거하여 임금결정에 관한 노사합의를 이루고, △이를 통해서 비정규직 등 차별받는 다양한 노동자집단들을 교섭울타리 안에 포섭하자는 제안을 담고 있다. 즉, 효력범위 확장 등 단체협약의 사회적 관철을 통해 노동시장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임금결정 작용을 노사관계제도 안으로 끌어들인다는 것으로, 이를 통해 노조는 임금수준뿐 아니라 임금격차를 규율할 능력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노조의 강한 임금규율 능력을 내부연대, 정치적 교환, 노동시장 관리 등에도 활용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사회적 노동시장체제를 정립하기 위해서는 교섭울타리 속에서만 이루어져온 임금규율을 사회적으로 확장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노조는 무엇보다도 임금규율을 통해 고용, 그리고 여타의 시장과 제도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이의 가능케 하는 기반 임금제도 중 하나가 직무급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한편, 직무에 기반한 임금제도에 대해서는 노조운동뿐 아니라 자본측도 관심이 많다. 국내 기업들 역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이후 연봉제를 매개로 하는 직무 및 성과 지향의 임금제도를 꾸준히 검토해 왔고, 제도화를 확산시켜 왔다. 이는 환경변화로 지속적인 기술과 직무 변화를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에 조응하는 임금관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업의 관심은 앞에서 언급한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리나 사회적 임금결정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단지 기업은 내부노동시장의 효율적 관리를 통해 생산성과 통제력을 유지·확대하고자 할 뿐이다. 우리은행장이 “직무급 도입”에 대해서 절실함을 토로했던 것 역시, 나름대로 진정성이 반영된 것이나 이러한 이해관계 위에 터 잡고 있는 것으로, 노동측의 관심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러나 어찌됐든 중요한 것은 초점은 다르지만 현재 노사 모두 ‘직무급 도입’에 대해 관심이 있다는 점이다. 사실 직무급 임금제도는 1990년대 자본측의 신경영전략 속에서 도입이 시도된 적이 있었다. 당시 노동운동 내에서도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물질화할 수 있는 직무 기반 임금”이 노동자연대의 중요한 물질적, 제도적 기반임을 주장하는 목소리들이 있었다(강신준, 1996; 한국노동사회연구소, 1998; 김유선, 2000). 하지만 기업별노조체제의 구속과 직무기반 관리관행의 부재 속에서 직무급의 도입은 노사 모두에게 친근한 선택이 아니었고, 따라서 별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그러나 IMF 경제위기 이후 구조조정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연봉제(직무성과급제)가 확산되는 것을 계기로 기업들의 직무분석이 활성화되었고, 또 구조조정에 대한 대응 결과로 대거 등장한 산별노조들은 임금을 횡단적으로 규율할 제도적 장치에 대한 관심을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금속산업연맹, 2003). 거기에다가 최근 통과된 비정규직 법안에서 미약하게나마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이 천명되면서 직무급제가 또다시 노사관계의 전면에 등장할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직무급을 둘러싼 노사의 동상이몽

직무급제가 연공급이나 직능급과 같은 ‘속인급’ 임금체계와 다른 점은 직무구조와 임금구조를 상응시킨다는 것이다. 통상 숙련도, 책임성, 노동강도, 노동환경 등의 기준에 의해 직무를 평가하여 그 직무의 등급을 설정한 뒤(ILO, 1946), 특정 직무등급의 임금가격을 시장임금을 참조한 별도의 평가를 통해 매긴 결과가 직무급인 것이다. 이렇게 평가를 거쳐 가치가 측정되고 임금이 매겨지기 때문에 개별직무의 값은 횡적으로는 직종별로 달라지고, 종적으로는 등급화된다. 이를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익숙한 기존 연공급제(직급제) 체계에서 존재했던 ‘직종별 임금 차등’과 ‘직급별 임금격차’의 결합을 떠올려도 무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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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사회에서 연공급-직급제도 하의 임금차등은 별도의 ‘가치평가’를 통해 이루어지기보다는 오랜 관행의 결과일 뿐이었다. 반면 직무급에서는 동일한 직무가치에 대해서 동일한 임금을 제공받을 수 있는 ‘근거’가 제공된다. 이러한 직무가치 평가는 기업의 주도로 이루어질 수도 있고, 기업 외부 주도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 기업외부에서 주도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란 직무가치 평가의 기준이 산별 노사나 국가에 의해 설정되고, 기업이 이를 수용하여 기업 내의 직무가치를 결정하는 경우다. 독일이나 스웨덴 등이 그러한 사례다. 반면 기업 내에서 주도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각 기업의 인사관리측이 독자적인 방법을 통해 가치를 평가하는 경우다. 이 경우에도 외부 시장임금을 참조하지만 주된 결정은 인사관리측이 설계한 평가방법과 기업내 노사협상 등에 의해 이루어진다. 미국식이 여기에 해당된다. 

결국 직무급에는 두 가지 변형이 있는 셈이다. 이 중에서 노동시장에서 동일노동 동일임금이 관철되는 경우는 기업외부에 강력한 참조틀이나 준거가 설정되어 있는 경우, 다시 말해 주로 직종별 노동시장이 탄탄하게 존재하고 산별교섭에 의해 임금이 결정되는 경우다. 즉, 직종별 횡단노동시장의 작용을 산별교섭에서 흡수·제도화하여 형성된, 횡단임금으로서의 직무급이다. 이렇게 산별교섭에 의해 정당화되는 유럽식 직무급에 ‘직종별직무급’이라고 별칭하기도 한다(경총, 1996). 이것이 우리 노조가 주되게 참조할 것이다. 

미국식 직무급은 이와 다르다. 미국에도 직종별 횡단노동시장이 부재한 것은 아니지만, 독점기업의 대거 등장과 테일러주의의 지배를 따라서 체계화된 미국식 직무급은 강력한 내부노동시장과 취약한 산별교섭을 안고서 제도화되었다. 미국식 산별교섭은 교육훈련시장 등의 제도적 기반이 엉성한, 단순한 임금률 결정기제를 면치 못했다. 일부에선 아예 대각선교섭을 통해 임금이 결정되어 횡단임금을 제도화하는 데 한계를 보였다. 이러한 조건들 때문에 미국의 직무급은 기업주도 직무평가에 의해 결정되었다. 물론 기업들이 외부노동시장의 직종별·직무별 임금을 참조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그 영향은 유럽형과는 차이가 뚜렷하다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미국식 직무급은 ‘과업지향적 직무급’으로 불리기도 한다. 황영기 우리은행장을 비롯하여 국내에서 자본측이 도입하고자 하는 직무급은 바로 이러한 미국식 직무급이다. 

금융권에서 직무급의제 구체화를 위해 필요한 것들 

이처럼 같은 직무급을 두고 양자의 관심은 매우 다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노조가 직무급을 제의한다고 해도 임금을 노동력 투입의 인센티브 혹은 통제수단으로 간주하는 사용자의 입장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 우리은행식 정규직화는 노조에게는 직무와 임금 관리를 심화하는 계기가 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우리은행 사례 속에서 드러난 의제들을 다음의 방식으로 살려나가는 것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먼저 직무급 도입문제를 짚어보자. 황영기 은행장이 말 속에서 드러났던 것처럼, 우리은행의 분리직군제 방식 정규직화의 기저에는 ‘직무급’이라는 의제가 도사리고 있다. 노조측은 이를 “동일노동 동일임금이 실현되는 직무 및 숙련 기반 임금제도”로 재의제화하여 사용자측에 제안할 필요가 있다. 은행이 비정규직문제를 직무급 도입을 통해 규율하길 원한다면, 노조가 이러한 직무급 도입이 노리는 임금을 통한 생산성 규율에 동의하는 대신 그 규율이 기업이 아니라 산업 차원의 단체교섭 등을 통해 노사공동으로 이루어지도록 요구함으로써, 새로운 방식으로 임금의 공동규율을 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호혜적 노사관계의 기본정신에도 부합한다. 노사 모두 직무급 제도설계의 전제를 이루는 합리적 직무분석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할 뿐 아니라, 직무분석 자체가 ‘과학’이 아니라 사회적 합의를 요구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직무급제도를 도입하기 위해서는 노사의 협력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편, 노사가 새로운 임금제도를 설계하는 과정에서 기술적 문제와 공정성, 객관성 담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공공영역의 지원이 필수적이다. 현재 우리 사회에는 직무관리의 경험이 일천한 데다 관련 분석능력을 가진 연구·조사·컨설팅 인프라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임금제도 변경이 노사관계의 이슈가 된다면 ‘공익’의 참여와 권고는 더욱 중요해질 수 있다. 

따라서 공공부문과 노사 당사자들에게 직무급 관련 연구조사 역량이 집중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첫째, 현재 기업별 임금체계 변경에 주력하고 있는 노동관련 공공부문 연구기관이 산별노사와의 파트너십 형성에 더 치중할 필요가 있다. 둘째, 민간부문에 분산되어 있는 직무관리 역량을 공공부문으로 집중시켜, 보다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직무분석과 임금제도 설계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지원할 필요가 있다. 이는 노사정이 공동으로 전국적인 직무분석 및 생산관리 컨설팅기구를 설립하여 지원하고 있는 독일의 방식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개별 기업노조보다는 상급노조가 주체가 되어 공공부문과 소통하여 합리적인 직무설계 및 직무급체계를 설정할 필요가 있다. 

제도의 구체적인 측면과 관련해서는, 단기적으로 ‘직무/숙련급+연공급’의 종합급체계를 유지하고, 이를 장기적으로 순수한 직무급제로 이행시키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연공급은 연령별 생계비 커브에 부합되도록 설계하고, 직무급은 직무평가 결과에 따라 임금이 설정되도록 하면 될 것이다. 혹은 직무급체계로 단일화하고 직무내에서의 경력보상으로 연공급을 고려할 수도 있다. 또 동일가치 직무 내에서의 역량개발을 위해서 숙련급(역량급)을 보충적으로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성과급과 관련해서는, 전체 임금 중 성과급비율을 규율하는 한편, 근로시간, 직무혼합, 노동강도 등을 강도 높게 규율할 필요가 있다.

현재 은행권에는 연봉제 형태의 직무성과급제가 이미 도입되어 있으며, 도입 과정에서 자본 주도의 직무분석이 실시된 바가 있다. 이 분석의 절차와 결과, 그리고 이를 직무급화하는 데 있어서 노사가 충분한 협의나 합의를 거치지 않았다. 직무급을 제대로 도입하기 위해서는 산별노조 차원의 재논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노사 간 교섭력 격차, 사용자측의 논의 거부 등으로 인해 현실적으로 직무급 문제가 의제화되지 않을 수 있다. 이럴 경우에도 노조는 기존 직무급 도입과정의 문제점을 분석하고, 합리적 도입의 절차, 규범, 원칙에 대한 가이드를 제공해야 할 것이다. 산별노조 입장에서는 임금제도가 기업수준에서 결정되는 것을 결코 방치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런 기회를 통해 비정규직에 대한 직무 및 임금 관리의 주도권을 산별노조가 일정하게 확보해야 한다.

분리직군제도라는 ‘뜨거운 감자’를 식힐 방법들

다음으로 분리직군제도를 검토해보자. 사실 은행의 직무변화 추세를 감안할 때, 그리고 다른 산업부문에서의 직무분화 양상을 고려할 때, 분리직군제도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 가능한지부터 검토할 필요가 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은행의 직군별 관리는 경쟁력이나 특수숙련 정도에 따라 고용형태의 포트폴리오를 구성하려는 전략적 인사관리 시도와도 관계가 있지만, 실질적인 은행업 직무 분화의 반영이기도 한 것이다. 예를 들어 병원에서도 임금수준의 균등화를 지향하는 노조가, 기능직군과 기술직군 간의 직무체계 통합은 시도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직군별 보상차별의 근거와 정도가 ‘직무가치’상 명확하고, 보상과 승진 이외에 복지, 고용안정 측면에서 특별한 차별이 존재하지 않도록 하는 점이다. 그 점에 대한 통제와 불합리한 격차 축소가 더 바람직할 것으로 본다. 이와 관련해서 분리직군에 대해 아래와 같은 통제를 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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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리직군의 직무설계, 임금, 기타 조건 등에 대해 금융노조의 직접관리 강화.
●분리직군과 기존 정규직군 간의 현행 임금격차를 합리적으로 감소.  
●분리직군과 기존 정규직군 간 인적자원의 속성 차이 명확화.
●분리직군과 기존 정규직군 간의 과업혼성을 엄격히 금지.
●분리직군의 기존 정규직군으로의 직무승진과 경력개발 기회제공.
●기업복지, 고용안정 면에서 기존 정규직과 차별적인 제도를 운용해서는 안 됨.
●분리직군에 대한 임금률을 산별교섭에서 직접 정하도록 함.   
●분리직군 전체를 조합원화하고 노조내 직군조직을 구축.
●분리직군 이외 비정규직 직군의 직무평가 및 임금률 결정을 산별교섭 의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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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별 노사에 의해 설계된 직무급은 비정규직을 포함하여 노조의 포괄적인 임금규율을 가능하게 하며, 이는 ‘동일가치 노동에 대한 균등임금’의 실현과 전반적인 임금격차의 통제를 가능하게 할 수 있다. 이런 특징들이 제도 내에 장착되지 않는다면 노조 입장에서는 직무급을 도입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한편, 직무급 도입은 노조에게 직무관리 개입에 대한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형성하는 측면도 있다. 임금이 직무에 의해 결정된다면 직무통제가 조합원들의 주요 이해관계로 등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리직군제는 구조상 현실적인 성차별 가능성이 상존한다. 이에 대해서는 단기적으로는 뾰족한 대책이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여성계의 비판적 논조는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즉, 분리직군제 방식의 정규직화는 일반화해야 할 모범은 아니다. 행동은 늘 고유한 환경과 상황, 역사의 제약을 받으므로 은행부문의 경험은 그 자체의 특수성과 참고할 부분을 잘 분리해서 인식할 필요가 있다.  

기능 유연성과 제도 안정성을 ‘노조가’ 조율하기 위하여

그러나 노조의 노동시장 규율이 과거와 같이 균등주의적 안전성을 추구하기에는 전반적인 상황이 너무 많이 변했다. 이제까지의 변화된 상황은 대개 자본이 지배했다. 하지만 노조가 어떤 행동을 선택하느냐는 내부자-외부자간 분리효과를 증폭시켜 노조를 더 고립시킬 수도 있고, 내부자-외부자간 연대와 통합을 촉진하여 자원을 확충할 수 있도록 조절효과를 발휘할 수도 있다. 노조는 이제 미래를 위해 멤버십 중심의 자족적 사고가 아니라, 계급대중의 이해관계를 적극적으로 수렴할 의사를 진정성 있게 표현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노조가 추구할 사회적 노동시장체제는 유연안전성(flexicurity)에 기반해야 ‘물질화’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직무 간 차이와 기능적 유연성을 통제하되 인정하면서, 더 많은 불안정 노동자들이 안전성의 울타리에 포함되도록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달리 표현하면 기업별노조에서 추구된 기업 내의 직무·임금 균등화 노력은 그 가치를 상대화시키고 다양성과 차이를 통합하고 통제하려는 노력으로 대체되어야 하며, 사회적 평등의 차원으로 승화될 필요가 있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1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