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모자람과 부끄러움아, 사랑해

노동사회

나의 모자람과 부끄러움아, 사랑해

편집국 0 3,472 2013.05.24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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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는 이번 호부터 노조 및 사회단체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진행됩니다. 누구에게든 열려 있습니다. 독서를 통한 삶과 노동의 경험을 다른 이들과 나누고 싶은 분들은 언제든  
ljh@klsi.org로 보내주십시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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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_01.jpg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 얼핏 제목만 봐서는 사랑에 대한 담론을 다룬 듯하다. 그러나 사실 이 책에는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분노와 저항이 담겨있다. 작가 김형경 씨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두 전문직 여성의 잘 나가던 삶에 불현듯 찾아온 불능을 시작으로 상처에 대한 고찰, 그리고 그 상처 때문에 억압됐던 무의식을 마치 자신의 이야기를 하듯이 끄집어낸다. 

서른일곱 그 여자들의 자기를 찾는 여행

10년 넘게 자기분야에서 경쟁하여 나름대로 성공한 서른일곱 살의 두 여성. 택시를 탔다가 가출한 아내를 찾기 위해 택시 운전사가 됐다는 남자와도 하룻밤을 함께하고, 지금도 유부남과 교제 중인 인혜, 그리고 남자들이 친절할 수밖에 없는 미모와 미소를 가졌고 성공한 건축가지만 단 한 번도 누구를 사랑해 본 적이 없는, 마음뿐 아니라 이유 없이 육체적으로도 고통 받고 있는 세진.

세진은 이 아픔을 치료하기 위해 종교적인 방법과 민간요법, 대체의학까지 섭렵하지만 그저 가슴 깊은 곳에 불같은 덩어리가 있다는 사실, 마음이 비가 새는 집 같다는 사실만 감지할 뿐이다. 결국 정신과 의사와 상담을 하며 마치 ‘시루떡’처럼 의식영역 사이에 켜켜이 쌓여있던 자신의 무의식과 치유 받지 못한 상처를 발견한다. 그리고 이런 세진을 바라보는 인혜 또한 사랑이 깊어지는 순간 파열하는 자아를 알기에 그저 자신의 사랑은 “남자가 너무 불쌍하게 느껴져서 내가 안아주는 것”, 연민이라고 표현한다. 

한통속이다. 

남자는 있지만 사랑이 없으며, 성적으로도 불능이다. 결국 삶 자체가 모두 불능과 다름없다. 답보상태에서 폐쇄적인 자기 복제만을 반복하는 무기력한 삶, 과연 이들의 삶을 어떻게 이해할 것이며, 상처의 시작은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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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은 정신의 역동성을 표현하면서 열역학 제1법칙에 비유했다. 에너지란 서로 대립되는 두 힘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정신에서도 의식과 무의식이, 긍정성과 부정성이, 극과 극이 서로 섞이고 균형을 유지해야 운동 작용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내면의 부정성은 한없이 억압해놓고 성격의 긍정적인 면만 밟으며 앞으로 나아가려 했으니 운동성이 생겼을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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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진은 셋째 딸로 태어나 영아 때부터 쌓여왔던 분노를 퇴행의 절차를 거치면서 풀어낸다. 세진이 끝내 인정하기 싫었고, 그래서 더욱 꾹꾹 눌러 두었던 억압과 분노들, 그것은 마땅히 표출되고 치유되어야 할 무엇이었다. 아픔을 직면하고 그것에 대한 진실을 정면으로 돌파하는 용기를 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세진은 긴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그녀는 낯선 땅에서 알몸으로 해변에 누워 다른 이들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마치 모든 상처를 털어버리기 위한 담대함을 가진 것처럼…. 인혜 역시 사랑이 무거워지자 스스로 떠나보낸 그 사람에게 여행을 가보기로 한다.

상처를 헤집고 또 보듬는 책읽기 경험 

이 책을 읽다가 가슴이 먹먹해져 한동안 책에서 손을 떼고 멍하니 있기도 했다. 또 잊고 있던 분노가 느닷없이 고개를 쳐들어, ‘야, 이xx! 난 전혀 용서되지 않았어!’라고 욕이라도 해야 풀릴 것 같아 핸드폰을 손에 쥐고 망설이기도 했다. 나에게도 타인에게 들키기 싫어 깊은 무의식으로 숨겨버린 상처들이 많이 있다는 반증일까…? 세진이 치유되는 과정을 따라가 보며 나의 상처를 헤집고 또 보듬어주기도 하였다. 

욕구와 사랑은 콤플렉스로부터 시작하기도 한다. 때로는 그것이 과하여 족쇄가 될 수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너는 왜 내 맘처럼 안 되는 것이냐”며 몰아세우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주 가끔씩이라도 나의 내면의 모자람과 수치스러움을 차분히 꺼내놓고 용기 있게 대면할 수 있다면 내 자신에 대해서, 다른 사람이 나에게 주는 불편함에 대해서도 좀 더 너그러워지지 않을까 싶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1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