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중 민주노조, 대투쟁의 흔적과 ‘새로운 87년’의 꿈

노동사회

현중 민주노조, 대투쟁의 흔적과 ‘새로운 87년’의 꿈

편집국 0 5,329 2013.05.29 08:36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울산에서 시작되었다. 그해 7월5일 울산시 옥교동의 디스코홀에 모인 현대엔진 노동자 101명은 문을 걸어 잠그고 권용목 씨를 위원장으로 선출하며 현대엔진 노동조합 결성식을 가졌고, 노조결성의 물결은 곧바로 미포조선과 중공업으로 이어졌다. 당시 울산 현대그룹 계열사 중 규모가 가장 컸던 현대중공업(이하 ‘현중’)에서는 사측의 어용노조 기습 설립에 맞서 일명 ‘11인 대책위’를 중심으로 민주노조 건설투쟁에 나선다. 그리고 7월28일 새벽, 대책위원들이 온몸에 플래카드를 칭칭 감고 유인물을 숨긴 채 현중 정문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어용노조 물러가라”, “임금 인상하라”, “상여금 차등지급 철폐하라”라는 구호를 목이 터져라 외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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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7년 울산의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이 중장비를 동원하여 투쟁을 진행하고 있는 모습.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그해 여름의 뜨거웠던 울산, 골리앗 전사의 탄생

출근하는 동료 노동자들은 힐끗힐끗 눈치만 보며 그들을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대책위원들은 순간 정신이 아찔했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 작업현장 안으로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걸어 나가자, 삽시간에 눈치만 보던 노동자들이 합세하기 시작했다. 불과 몇 분 만에 대오는 수천명으로 불어났다. 어느새 만여명으로 늘어난 거대한 작업복의 물결은 작업장 곳곳을 돌고 사내 대운동장으로 운집했다. 오전 9시, 운동장에 집결한 만여명의 노동자들은 국민의례와 산업현장에서 숨져간 노동자들을 위한 묵념을 하고 보고대회를 성공리에 마칠 수 있었다. 한순간에 터져 나온 노동자들의 열망을 확인한 이날이 현중 노동조합의 창립기념일이다. 

8월에 들어서자 현중의 노동자들은 가두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아스팔트 위에서 울산의 노동자들은 단사의 울타리를 넘어 하나로 뭉치고 있었다. 8월18일, 현대그룹노동조합협의회의 주도로 약 5만명의 노동자들은 중장비를 앞세우고 남목고개를 넘어 울산 시내로 진출했고, 9월2일에는 울산시청을 에워쌌다. 그리고 9월22일 드디어 정상조업이 이루어질 무렵 현중의 노동자들은 예전의 ‘근로자’가 아니었다. 

그해 여름은 현중에 무수한 노동운동가를 탄생시켰다. 지도부가 해고?구속되면 또 다른 지도부가 그 공백을 채웠고, 다시 그 지도부가 어려움에 처하면 어디선가 일군의 사람들이 나타나 조합원의 열망을 기꺼이 대표했다. 1988년 12월부터 다음해 4월까지 진행된 ‘128일 파업투쟁’과 ‘90년 골리앗 투쟁’을 위시하여 94년 ‘LNG선 점거농성’에 이르기까지, 현중 노조운동이 정권과 자본의 탄압에 굴하지 않고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1987년 이후 새롭게 배출된 무수한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그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합원들은 자신들을 대표하는 조합 집행부가 파업을 호소하면 드넓은 현중 작업장에서 망치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정도로 호응했고, 지도부가 직권조인으로 자신들을 배신하면 여지없이 새로운 민주집행부를 들어앉혔다. 이 속에서 현중은 한국의 민주노조운동을 상징하는 사업장이 되었고, 민주노조 활동가들은 ‘골리앗 전사’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부여받았다. 

현중 노동조합의 성공과 변신과 제명 

그러나 1990년대 중반부터 서서히 ‘변신’의 바람이 불어왔다. 조합 주최의 집회에 고작 수백명의 조합원만 모이는 일이 나타났고, 집행부가 식당 앞에서 쇠사슬을 묶고 단식농성을 해도 조합원들은 눈도 꿈적 안하고 밥을 먹으러 들어갔다. 1996년 6월에는 대의원 성원미달로 쟁의발생 결의가 무산되는 일이 발생했다. 1996~97년 노동법개정 총파업도 참가자가 초반에 6천 명에서 불과 며칠 사이에 2백명 규모로 급속히 감소하더니, 결국 활동가들만의 총파업으로 축소되고 말았다. 1998년 IMF 사태가 전국의 사업장을 휘몰아치던 때 현중에서는 사상 유례 없는 조선업종의 호황 속에서도 파업 찬반투표조차 성사시키지 못한 채 무기력하게 임금동결에 합의할 수밖에 없었다. 2000년에 오면 회사측의 방해로 쟁의행위 찬반투표가 중단되는 사태도 발생했다. 

결국 2002년 13대 집행부가 조합간부의 비리사건으로 사퇴한 이후 조합의 집행권력은 소위 ‘협조적 노사관계’를 표방하는 세력에게 넘어가게 된다. 이 노동조합 집행부와 대의원들은 2004년 사내하청 노동자였던 박일수 열사의 분신으로 투쟁이 촉발됐을 때 회사의 노무관리를 대행하는 역할을 하기에 이르고, 민주노총 금속연맹은 그해 9월 임시대의원대회에서 87.9%의 찬성률로 현중 노동조합을 제명했다. 제명 결정을 기다리기라도 했듯 2005년 6월 현중노조는, “노사가 상생관계임을 깊이 인식하여 노사 호혜적 협력관계를 바탕으로 조합원의 행복과 미래를 추구”할 것을 선언하며, 새로운 조합운동의 이념과 강령을 제정하여 자신의 ‘변신’을 대내외에 천명하기에 이른다. 

20년의 세월 동안 많은 것이 변했다. 1987년에 현중 노동자의 다수는 20대와 30대 초반의 청년들이었지만 2007년 오늘날 현중 조합원의 평균 연령은 46세이고, 첫째 자녀가 19세 정도인 4인가구의 가장으로 살아가고 있다. 1987년에 대다수의 노동자들이 비좁은 독신자숙소와 사택, 전세방에서 오밀조밀 살아가고 있었다면, 20년이 지난 지금 조합원의 77.2%는 아파트에 살고 89.9%는 자기 집을 소유하고 있다. 1987년 당시 생산직 노동자 중 중졸 학력 이하가 45.1%에 달하여 못 배운 설움을 묵묵히 견디고 있었다면, 지금 현중 조합원의 대학생 자녀들은 아버지의 배움에 대한 한을 풀어주기라도 하듯이 회사가 전액 지원해 주는 등록금 혜택을 누리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일정 부분 회사의 노력도 있었지만 주요하게는 지난 20년 동안 노동조합운동의 성과로 나타난 것들이었다. 이런 점에서 물질적 안정을 통한 조합원의 보수화는 어느 정도는 지난 20년간 조합운동의 ‘성공’이 가져온 역설적 결과라고 할 수 있다. 1990년대 초반에 입사한 한 평범한 조합원은 올해 4월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처음에 내가 입사했을 때만 해도 노동문화 자체가 노동자는 좀 못살고 약하다는 것을 밑에 깔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우리 중공업 노조가 강성이었다. 노조가 노동자들은 못산다는 전제를 지반으로 해서 계속 강하게 치고 나갔다. 그런데 우리가 삶의 질이 향상되고 하다보니까, 강성노조가 주장하는 전제와 우리 현실이 안 맞는 거다. 내가 봤을 때도 조금 안 맞았다. …… 이렇게 생각하는 와중에 회사에서도 계속 조직적으로 자기네들 편을 만들려는 작업을 하면서, 우리가 소위 말하는 회사 편에 있는 사람들이 당선이 됐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나름대로 합리적인 노선으로, 현실적인 노선으로 계속 가니까 이게 계속 이렇게 유지가 되고 있다. 지금은 그 문화 자체가 좀 정착이 된 것 같다. 

신경영전략과 민주노조운동의 고립

하지만 현중노조의 ‘변신’을 조합원의 변화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1987년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를 민주노조운동의 ‘전투적 동원’의 시기라고 한다면,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현중자본의 ‘역공세’의 시기로 볼 수 있다. 전투적 동원 시기에 자주적 노동조합, 안정적인 기업내부노동시장, 다양한 기업복지 혜택 등이 노동의 주요 요구였다면, 자본의 역공세는 그러한 노동의 요구를 일정 부분 수용하면서, ‘Reform '90s’ 등과 같은 신경영전략과 정교한 노무관리 정책의 형태로 나타났다. 

1993년에 한국의 조선산업은 마침내 일본을 앞지르고 세계 1위를 기록했고, 한국 최대의 조선소를 보유한 현중은 막대한 지불능력을 배경으로 1987년 이후 노동자의 급진적 요구를 일정하게 충족시켜 주면서 새로운 공세에 나섰다. 자동차산업과 달리 조선산업은 과학적 생산관리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반장, 팀장을 중심으로 하는 생산현장의 노무관리가 생산관리의 핵심을 차지한다. 따라서 회사측의 신경영전략과 노무관리는 불가분의 관계를 이루게 된다. 반생산체제에서 반장들은 체계적으로 조직관리교육을 받고 상급자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상태에서 생산관리와 노무관리를 병행했다. 그리고 특히 노조 활동에 적극적인 노동자들을 작업량 할당과 실적 평가, 잔업의 선별 배정 등을 통해 다른 노동자들로부터 고립시켜 노조의 대중적 기반을 와해시켜 갔다. 

그 효과는 서서히 나타났다. 조합원들은 속으로 노동조합에 애착을 갖고 있더라도 일상적 참여를 통해 그 애착을 표현하지 않게 되었다. 회사는 또한 독자적인 인사관리부서의 망을 통해 일선 부서에까지 그물망처럼 퍼져있는 노무관리 조직을 가동시켜 조합원의 성향을 파악하고 일상적 조합활동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특히 회사가 주목한 대상은 노동조합의 허리라고 할 수 있는 대의원들이었다. 작업현장에서 조합원의 권익을 대변하는 임무를 맡고 있는 대의원들을 하나둘씩 포섭했고, 그 결과 1996년에는 대의원 성원 미달로 쟁의발생 결의가 무산되기에 이른다. 조합원과 집행부를 연결해 줄 골간조직이 무너진 것이다. 그 후 노조의 투쟁은 대부분 집행부와 소수의 현장활동가 그리고 해고자들을 주축으로 고립된 투쟁의 양상을 띠게 됐다. 

현중의 현장조직 활동가들 중 상당수가 현중 민주노조운동의 분기점을 1996~97년 노동법개정 총파업이라고 지적한다. 이듬해 IMF 사태가 터지고 정리해고가 합법화되자, 인원조정이 거의 없었고 오히려 유례없는 호황을 누렸던 현중의 노동자들 또한 심리적 고용불안에 휩싸이게 된 것이다. 한 해고자는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노개투 총파업 할 때 파업이 ‘절반의 성공’밖에 못했다. 그 전에 이미 현장이 조금씩 무너져가는 과정이었는데, 노개투 파업을 집행부가 때렸다. 처음부터 절반 정도밖에 참여를 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눈에 띄게 기울기 시작했지 않았나 싶다. 정리해고에 대한 조합원의 부담감, 이런 게 생각 외로 엄청 컸다. 지금 보면 그때까지만 해도 현장도 활발하고 활동가들도 그나마 의지가 있었는데, 사측이 조합원들에게 ‘튀면 정리해고 1순위다’고 집요하게 괴롭혔다. 집에 전화를 걸어 당신 남편 저렇게 다니면 재미없다고 협박하고…. 

지역사회 재편: ‘회사도시’가 되기까지

1990년대, 공장 바깥의 지역사회도 눈에 띄게 변화했다. 현대중공업이 위치한 울산 동구는 남목고개를 사이에 두고 시내와 차단되어 지리적으로 고립된 곳이다. 이러한 고립성은 투쟁의 고양기에는 투쟁의 파급력을 대단히 촉진하는 효과를 갖는 반면, 자본의 입장에서도 비교적 쉽게 지역사회를 재편할 수 있는 지리적 조건이 된다. 

1987년 이후 몇 년간은 지역사회도 노동자 투쟁에 활발히 동원되었고, 더 나아가 폭발적 투쟁기에는 작업장 안팎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일이 빈번했다. 1989년 128일 투쟁 시기와 1990년 골리앗 파업 때, 현중 노동자 가족 4천여 세대가 모여 사는 만세대아파트와 독신자숙소였던 오좌불 숙소 일대는 일종의 ‘해방공동체’를 연출해내기도 했다. 노동자의 가족들은 파업 시 주거지역에서 빈대떡 장사를 하며 파업기금을 마련했다. 시가투쟁 때에는 주부들이 김밥이나 주먹밥을 만들고 이웃들의 성금을 모금하는가 하면, 노동자의 자녀들은 투석전을 위해 돌을 날랐다. 1990년을 전후로 하여 ‘현대중공업노동자가족협의회’가 만들어져 파업지원부터 선거 시 노동자후보 지원활동, 지역시민운동 등에도 가담했다. 1990년대 초반까지 현중이 위치한 울산 동구 지역은 일종의 노동계급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와 작업장 안에서의 변화에 발맞추어 지역사회도 빠르게 변신했다.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종래의 주거지역에 새롭게 건설되고 각종 문화?복지시설이 회사측의 투자로 인근 지역에 들어서면서, 지역사회의 경관은 하루가 다르게 현대화되었다. 지금은 전형적인 중산층 거주지와 같은 모습으로 완전히 탈바꿈되었다. 회사의 사택재개발 사업으로 아파트를 분양받은 조합원들은 매달 일정한 주택상환금을 껴안고 사는 자가보유자가 되었다. 또한 회사는 소득수준의 꾸준한 상승에 따른 노동자 가족의 문화적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아낌없이 돈을 썼다. 1990년대 초반부터 각종 예술회관과 복지회관을 건립했고, 또 1990년 현대주부대학을 설립하여 해마다 450여명의 졸업자를 배출하고 기수마다 동창회를 조직해왔다. 

이러한 지역사회 재편은 자본의 문화적 헤게모니를 강화하는 효과를 가져왔고, 지역정치의 차원에서도 현중의 오너인 정몽준이 국회의원에 연이은 당선되는 데 직간접적인 효과를 미쳤다. 민주노조운동 세력이 노동조합을 장악하고 있었을 때에는 미약하나마 지역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신문을 정기적으로 만들어 배포하여 지역에 진보적 가치를 전파했다. 하지만 현재에는 그마저도 없어져 자본의 문화적 헤게모니에 도전할 구심이 사라져 버린 형국이다. 현재의 울산 동구는 현중 자본의 경제?정치?문화적 지배력이 효력을 미치는 ‘회사도시’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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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3월22일 열렸던 현대중공업 노사공동선언 선포식 모습. 현중 사내체육관에서 열린 이날 행사엔 현대중공업 노사 관계자와 이상수 노동부 장관, 박맹우 울산시장 등 울산지역 기관장들이 대거 참여한 가운데 성대하게 치러졌다. ▶ 현대중공업 노동조합 ]

87년 20주년,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1987~90년 동안 벌어진 현중 노동자들의 투쟁은 투철한 계급의식의 발로는 아니었다. 그들의 행동을 추동한 것은 일차적으로 동료 노동자에 대한 ‘의리’와 ‘자존심’이었다. 냉정하게 보면 그들은 이제 막 형성되기 시작한 계급이었고, 장차 협소한 노동조합주의에 몰두하게 될 것인지 아니면 강한 저항정신을 유지하면서 보다 폭넓은 계급연대로 나아갈 것인지는 확정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이후 작업장과 지역사회라는 일반 조합원들의 경험세계의 변화는 그때까지 폭발적으로 진행된 계급형성의 과정을 역전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러한 흐름에 맞서 현중의 민주노조운동이 대응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자본의 막대한 물량공세를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자본은 초기의 실패를 교훈삼아 일사불란한 체제를 갖추고 지구전을 펼쳤지만, 민주노조운동은 적전 분열의 양상을 매년 반복했다. 현재 현중 노동조합은 일본식의 기업노조를 모범으로 삼고 ‘노사상생’을 역설하고 있다. 조합원들은 작업현장에서 사측의 정교한 감시망 속에서 숨죽이며 묵묵히 노동하고 있고, 현장 활동가들은 다년간의 패배와 전망의 불투명함 속에서 자기 자신을 추스르는 일에도 버거워 하고 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직접 경험한 어느 활동가는 20주년을 맞은 소회를 공식석상에서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막상 뭘 하려고 해도 의지할 것이 없다. 현장의 활동가를 다 끌어 모으면 많게는 200명, 적게는 한 50명 된다. 이게 우리의 현재 상태다. …… 지금 우리의 모습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현재 당면 사업, 민주노조 복원사업도 필요하지만, 현재 활동가 스스로가 자기 자신의 삶의 방향을 놓고 헤매고 있는 우리의 현주소부터 돌아봐야 한다. 과연 내가 어디를 걷고 있고, 20년 동안 활동하면서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는 게 의문이다. 실제로 내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으며 앞으로 활동을 계속 해야 되는가, 어떤 목표를 갖고 살아야 하는가, 이 문제들에 답하면서 우리의 20년 투쟁을 평가하고 반성하는 게 급선무다. 

-2007년 7월3일, 87 현중추진위 수련회 중 어느 활동가의 발언


7월3일, 87년을 되돌아보기 위해 현중의 활동가들이 퇴근 후 모였다. 20년 동안 같은 사업장에서 같이 골리앗에 올라갔고, 함께 감옥에 가기도 했으며, 농성텐트의 옆자리에서 단식도 했던 사람들이다. 또 서로에게 상처를 주며 다시는 안 볼 사람처럼 분열과 갈등을 보이기도 했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무너진 10년’을 말하며 노동자대투쟁 20주년을 맞고 있었다. 현실은 쉽사리 희망을 이야기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작년 말 노조 대의원 선거에서 민주노조운동 진영에서는 단 1명의 대의원도 당선시키지 못했다. 인터뷰 도중 활동가들은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다는 말을 자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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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2월14일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는 박일수 열사 2주기를 맞이해 추모집회를 열었다. ▶ 금속노조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 ]

언제 올지 모를, ‘새로운 87년’을 위하여!

하지만 20년 전 뜨거웠던 여름의 기억은, 서로 간의 분열과 갈등 속에서 그동안 많은 것을 잃어버렸던 현장의 노동운동가들을, 그래도 다시 한 자리에 불러 모으고 있었다. 5년 후에는 정년퇴직할 나이가 된 노동자부터, 아직도 복직의 꿈을 못 이룬 해고노동자와 30대 초중반의 사내하청 노동자까지, 모두 머리를 맞대고 자신에게 87년이 어떤 의미인지 자정을 넘겨가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이미 역사가 되었다. 그 역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무엇을 다음 세대에 남길 것인지도 치열한 투쟁의 영역이다. 현중의 몇몇 노동자들은 작년부터 노동자문예모임 ‘글패’를 중심으로 20년을 기록하는 일을 꾸준히 해왔고 올 여름 그 성과가 나온다고 한다. 한편으로 현 노조 집행부도 거액의 사업비를 들여 올해 『현중노조 20년사』를 발간한다는 소식도 들린다. 

20년 전 노동운동사의 새장을 연 울산에서는, 이미 그 20년의 기억을 둘러싼 싸움이 올 여름 소리 없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노동조합의 자주성과 민주성, 하도급의 직영화, 노동자 간 임금차별 완화, 조기출근제 폐지, 억압적 노동통제 철폐 등은 1987년 현중 노동자들의 핵심적 요구사항들이었다.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이러한 요구들은 여전히 미래의 과제로 남겨져 있다. 악조건 속에서도 현중의 활동가들은 앞으로 언제 올지 모르지만 기어코 찾아올 ‘또 다른 87’의 꿈을 함께 꾸고 있었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2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