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라디오, 내가 만드는 라디오 방송

노동사회

우리 동네 라디오, 내가 만드는 라디오 방송

편집국 0 4,330 2013.05.29 08:35

1990년에 나온 <볼륨을 높여라>라는 영화가 있었다. 영화 속의 소심하고 내성적인 주인공 마크는 밤만 되면 라디오의 DJ가 되어 자신의 개인 라디오방송의 마이크를 잡고 속사포같이 멘트를 쏟아내곤 했다. 인터넷이 발달한 요즘에는 개인 방송을 하는 것이 전혀 신기한 일이 아니지만, 그 때만 하더라도 방송사가 아닌 개인이 해적방송을 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기에 <볼륨을 높여라>의 장면은 조금은 부럽고 신기한 장면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 우리에게도 능동적으로 방송을 제작하고 송출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 2005년 분당을 시작으로 개국한 전국 8개 ‘공동체라디오’가 바로 그것이다. 공동체라디오는 주류방송에서 다뤄지지 않는 공동체의 관심사와 현안에 대한 내용을 다루는 비상업적인 라디오 방송이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서울 마포와 관악, 성남 분당, 대구 성서, 나주, 영주, 공주, 광주의 8개 지역에서 공동체라디오가 활동하고 있다. 

 이 중에서 서울 마포의 ‘마포FM’은 2005년 9월26일 개국해 8개 공동체라디오 중에서도 가장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는 곳이다. ‘방송활동회원’이라 불리는 170여명의 활동가들의 참여가 그 밑바탕이다. 2004년 11월 소출력라디오 시범사업자로 선정된 직후 자체 교육을 시작해 현재 11기까지의 활동가들이 배출됐다. 이들은 6번에 걸쳐 방송 제작과 프로그램 진행, 장비 사용법, 방송 윤리 등에 관한 교육을 받고 현장에 투입된다. 물론 후원금만 내는 후원회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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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동체라디오 방송 중 가장 많은 활동가를 확보하고 있는 마포FM이지만 아직까진 지역주민보다 학생들의 참여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12시 파워충전>의 활동가들. ▶ 출처 : 마포FM ]

 공동체라디오의 필수조건, 청취자 참여 프로그램

 마포FM은 기존 방송과 구별될 만한 공동체라디오로서의 확실한 정체성을 갖추고 있다. 그 핵심은 바로 청취자 참여 프로그램(퍼블릭 액세스)이다. 현재 <함께 쓰는 희망노트>, <희망마차>, <꽃다방>, <L양장점>, <경계를 넘어> 등 총 22개 프로그램 중에 음악방송을 제외한 대부분이 청취자 참여 프로그램으로 제작되고 있다. 방송법 규정상 공동체라디오 방송은 전체 방송의 50% 이내에서 청취자 참여 프로그램을 의무적으로 편성해야만 한다. 현재 지상파방송사의 시청자 참여 프로그램 의무편성 비율이 KBS에만 한정해 매월 100분 이상인 것과 비교하면 상당한 수준이다.

 마포FM의 간판 프로그램인 <함께 쓰는 희망노트> (이하 ‘희망노트’), <꽃다방>, <L양장점> 역시 청취자 참여 프로그램으로 제작되고 있다. 이 중 <희망노트>는 20여명의 장애인들이 직접 제작하는 프로그램이다. PD, 취재, 프로그램 진행까지 모두 장애인들이 직접 한다. 방송 초반에는 장애인으로 살아온 인생에 대해 얘기하던 진행자가 감정이 격해져 울음을 터뜨리는 일도 있었다. 사회적 소수자로 살아온 장애인들이, 자신의 입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비장애인들에게 표출할 수 있는 공간이 그만큼 절실했다는 뜻이다. 일반 지상파 방송에서 다루어지는 장애인들은 언제나 힘들게 살아가는, 그래서 비장애인들의 도움이 절실한 존재로 왜곡되어 그려져 왔다. 그들을 바라보는 비장애인의 시선으로만 방송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막상 그들이 그들의 입으로 “우리도 같은 사람이기에 차별은 부당하다”고 직접적으로 말하는 내용은 다뤄지지 않았고 비장애인들은 그런 방송의 내용을 무감각하게 받아들여 왔던 것이 사실이다. 희망노트가 갖는 차별성이 여기에 있다.

  그래서 <희망노트>는 장애인들의 이해가 걸려 있는 내용들을 직접적으로 다룬다. 이동권 문제가 대표적이다. 마포FM 이웅장 편성국장은 “집에만 틀어박혀 있던 장애인들이 방송을 제작하기 위해 외출을 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이동권 문제가 방송 주제로 떠올랐다”고 말한다. 실제로 밖으로 나와서 어딘가로 이동을 해보면 비장애인들에 비해 제약을 받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이 자연스럽게 방송 내용으로 연결되면서 그들의 권익을 스스로 되찾으려는 노력이 가능해진다. 이렇게 청취자 참여프로그램은 수용자들의 참여를 통해 자신에게 중요한 이슈를 스스로 말하는 공간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의 발언권을 직접적으로 확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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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동체라디오는 지역공동체의 참여를 먹고 산다. 노인 대상 프로그램인 <올드 앤 뉴> 공개방송을 보며 즐거워하는 주민들. ▶출처 : 마포FM) ]

 사회적 소수자의 목소리에 밴 떨림을 온전하게 담아내는 방송

 같은 청취자 참여 프로그램이지만 <꽃다방>과 <L양장점>은 조금 특이한 경우다. 꽃다방은 여성대안운동 커뮤니티인 언니네와 미디어연대의 제안으로 시작됐고 L양장점 역시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와 한국레즈비언상담소, 대안영상문화발전소 아이공의 공동 제안으로 시작됐다. 이렇게 수용자들의 주체적인 기획과 제안으로 만들어지는 방송은 공동체라디오의 중요한 역할 모델을 제시한다. 희망노트와 같은 방송은 기존 방송에서 다루지 않았던 주제를 새로운 시각으로 다룬다는 차별성이 있지만, 방송국에서 방송을 할 대상을 선정해 “이런 방송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하고 설득해서 방송을 하도록 만드는 ‘계몽적’인 방송이라는 면에서는 기존 방송의 한계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 하지만 수용자들 스스로 직접 기획해서 제작하는 방송은 말을 하는 주체가 누구냐 하는 문제부터 주제의 선정, 주제를 바라보는 시각까지 모든 면에서 수용자가 결정한다는 점에서 ‘진짜배기’ 청취자 참여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방식의 방송은 할 말을 제대로 못해온 사회적 약자들의 공동체에 특히 필요하다. 꽃다방과 L양장점은, 제안한 단체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각각 사회적 약자로서의 여성과 레즈비언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사회적 약자·소수자들의 공동체가 공적·사회적으로 발언할 수 있는 권리와 통로를 실질적으로 보장받는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 공동체라디오의 중요한 역할인 것이다. 이웅장 국장이 “지역주민들의 참여를 유도해 직접 방송을 제작하고 진행하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보면 구성원들을 엮어 공동체를 만들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공동체라디오의 이상형”이라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외에도 마포FM은 청취자들이 직접 만든 방송을 받아 내보내는 <열린 라디오>, 구정감시활동을 펼치며 구 의원들을 2주에 1번씩 초청해 청취자들의 의견을 전달하는 <톡톡마포>, 열악한 근무환경과 치열한 경쟁에 시달리고 있는 마포지역 노점상들의 연대의 가교 구실을 하는 <희망마차>, 민주노총 노동방송국에도 방송을 공급하고 있는 ‘경계를 넘어’ (IFIS :  Imagination For International Solidarity)의 방송 <경계를 넘어> 등 다양한 청취자 참여 프로그램을 방송하고 있다. 

 공익을 보장하게 하려면, 공적지원을 확대하라

 어려움도 없진 않다. 가장 시급한 것은 재정 현실화 문제다. 현행 방송법 시행령에서는 공동체라디오 방송의 광고수입을 한 해 전체 수입의 50% 이내에서 허용하고 있는데, 이 규정에 대해서 공동체라디오 쪽에서는 실효성이 없는 ‘생색내기용’이라는 비판을 제기한다. 현재 방송광고 시장은 거의 한국방송광고공사의 독점 형태다. 방송광고공사에서 광고 신청을 받아 각 방송사별로 나눠주는 식이다. 그런데 공동체라디오 방송은 이 방송광고 배분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광고수입을 받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방송광고공사의 광고 배분이 불가능하다면 구체적 시행령에 방송발전기금의 안정적인 지원을 명시하라는 것이 공동체라디오 측의 요구다. 공익 보장을 목적으로 하는 방송이라는 이유로 심의와 편성규제 같은 제약은 일반방송과 똑같이 받도록 하면서, 방송의 실질적인 유지·발전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모순된 태도라는 비판이다. 이웅장 국장은 “방송법에 ‘소출력라디오의 운영은 지상파방송 사업자에 준용한다’는 문구 하나만 있어도 광고 배분을 받을 수 있다”며 “광고 배분 없이 광고수입을 허용하는 규정은 실효성이 전혀 없고, 특히 지방 공동체라디오 방송의 경우에는 더욱 더 운영이 힘들 수밖에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전파가 공공재로 규정되는 이유는 다른 매체에 비해 월등히 탁월한 접근성에 있다. 글을 읽을 줄 몰라도 방송을 보고 들을 수는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라디오의 중요성은 그것이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의 공적인 발언 통로라는 데에 있다. 매스미디어에서 주목하지 않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얘기를 직접 소통하고자 하는 시도를 최소한도로 보장하는 것이 공동체라디오의 사명이다. 국가에서 이런 공익성을 인정하고 지원하기로 한 이상, 실질적인 공적 지원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공적 지원을 뒷받침하는 것은 방송 수용자들의 참여다. 마포FM만 하더라도 활동가들 중 마포지역 주민 비율은 35%밖에 되지 않는다. 다시 글의 처음으로 돌아가서 공동체라디오 방송국이 있는 도시를 다시 한 번 확인해보자. 만일 우리 도시에 방송국이 있다면, 지금 당장 라디오의 주파수를 맞추고 어떤 내용이 나오는지 들어보자. 듣다가 좋으면 당장 다음 달부터는 내가 라디오를 진행할 수도 있을 일이다. 내 손으로 만드는 우리 이야기 방송, 생각만 해도 즐거운 일이 아닌가.


 
  • 제작년도 :
  • 통권 : 제12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