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의 손때가 묻어야 할 책

노동사회

노동자의 손때가 묻어야 할 책

편집국 0 3,043 2013.05.29 08:34

gwjeong_01.jpg민주노총은 2003년 말 정책연구원을 설립하고 그 안에 자료실을 만들었다. 민주노총에서 발간하는 자료, 그 이전시기 노동운동 자료들을 수집 정리해 보관하자는 데 의견을 모은 것이다. 

2005년 민주노총은 건설 10년을 맞았다. 조직 내 갈등, 수석부위원장의 비리사태 등으로 어려운 시기를 통과하는 만큼 그동안 걸어온 길을 돌아보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이에 민주노총이 걸어온 길을 정리해보기로 했다. 그 첫 출발이 ‘연표’를 만드는 것이었다. 

1년에 한 번이라도 정리해놓았더라면…

노동과 세계, 사업보고서를 놓고 비교해가며 사실을 입력했다. 상근 인력이 부족해서 일주일에 몇 시간씩 나와 일하는 학생들의 힘을 빌려 무조건 ‘때려넣기’를 1년. 처음 작업을 할 때 민주노총의 주요 회의, 전국적 사안으로 확대된 투쟁, 가맹 산하조직의 주요 활동, 정부의 주요 노동정책 등 기준을 정하긴 했으나 막상 작업을 하다보면 구체적 사안에 대한 판단이 쉽지 않다. 때문에 현재 책으로 발간된 양의 두 배 가량의 데이터를 입력했다. 그리고 애초 정한 기준에 맞춰 ‘수준’을 정리했다. 아울러 빠진 것을 채우고, 자료마다 틀린 것을 확인하기 위해 세 번 정도 검토했다. 그 기간이 6개월 정도 걸렸다. 앞으로도 수정보완할 게 많다. 민주노총 홈페이지에서 검색하도록 제공하면서 수정보완 작업을 지속적으로 할 것이다. 

작업을 하면서 내내 ‘1년에 한 번이라도 정리해 놓았다면’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민주노총, 연맹, 지역본부는 1년 단위로 사업보고 자료집을 만든다. 만드는 형식도 싣는 자료도 조직마다 다르다. 그 해의 활동 연표를 제대로 정리하는 곳은 드물다. 사업보고서를 충실히 만들어 놓는 일이 바로 노동조합 활동사를 기록하는 일이 될 것이다. 연맹이나 지역본부에서는 특히 단위노조의 주요 투쟁의 발생, 전개, 평가에 대해 잘 정리해놓는 게 필요하다. 

노동운동사 구성으로 가는 길잡이

“돈 들여서 꼭 그걸 만들어야 하나”, “인터넷으로 검색 다 되는 시대에 그런 게 필요한가?” 하는 얘길 많이 들었다. 노동자 기록을 사라지게 하는 위험스런 생각들이다. 10년 전에 만든 자료가 다 있을 것 같지만, 그걸 찾기 위해 노력해본 사람이라면 1차 자료에 접근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된다. 무엇이 있는지, 어디에 있는지 찾아가기 어렵다. ‘길잡이’가 필요하다. 노동운동사를 정리하는 데 있어서 연표는 ‘있으면 편하지만 없어도 그만’인 게 아니라 길잡이다. 연표를 보면서 큰 줄기를 잡고, 관련 자료를 세세하게 찾아 들어가면 자료 접근이 쉬워질 것이다. 민주노총 활동을 보기 위해서는 연표와 『노동과 세계』, 『사업보고』를 같이 보면 전반적인 흐름을 이해하는 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책을 출간하고 나서 몇몇 사업장 동지들에게서 항의 전화를 받기도 했다. “우리 얘기는 왜 달랑 한 줄이가?” 미안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기쁘기도 하다. 그런 종류의 항의에 답은 하나다. “밑에서부터 정리하시라. 그리고 그걸 함께 볼 수 있도록 모아보자.” 

한 권으로 만든 이 연표집은 한계가 너무나 많다. 지역과 연맹, 단위노조 투쟁을 세세히 기록하지는 못했다. 중앙의 결정이 어떻게 집행되는지, 밑으로부터의 투쟁이 어떻게 전국적 사안으로 발전하는지, 조합원들의 판단과 실천은 어떠했는지 등을 보여주기에는 제한적이다. 알짜배기는 다시 채워져야 한다. 지역별, 연맹별, 더 나아가 단위 사업장별 활동사가 만들어져야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 있다.  

또 이런 평가도 한다. “이 기록이 객관적이냐?” 그러려고 노력하였으나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사실을 채택하는 것도 어떤 사실을 보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모든 기록은 관점이 들어가게 마련이다. 그 제한성을 인정하며 최대한 객관성을 유지하려 노력하되, 이후 역사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판단할 수 있도록 해야 할 일이다. 연표집은 사실에 접근하는 길잡이 역할을 충실히 하는 것으로 제 역할을 다 하는 것이다. 

큰 흐름 속에서 ‘노동자’ 발견하기의 기쁨

바스러질 듯 먼지 풀풀 나는 자료와 씨름한 지 벌써 12년째다. 힘들지만 즐겁다. 자료를 새롭게 발굴하는 재미가 있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게 안타깝기도 하고 그 속에서 노동자의 치열함을 보기도 한다. 잡초같이 이어지는 생명력에서 미래의 희망을 읽을 수도 있다. 발자국 찍힌 집회장의 유인물 한 장은 인쇄된 문구가 주장하는 것 이상의 느낌을 준다.

이런 소중한 자료들이 잘 보관되지 않고 있다. 한국사회 전체가 기록에 대한 인식이 낮은 것도 원인이지만, 가장 큰 이유는 노동자 스스로 자기 역사에 대한 인식이 아직 부족하기 때문이다. 현실의 치열한 싸움과 사업들에 밀리거나 재정과 인력의 문제로 다른 곳에서 챙겨주기를 바라는 생각이 많다. 그러나 스스로 해야 한다. 그 일 자체가 역사적 인식의 과정이다. 노동자 스스로 기록을 남기고 역사를 재구성하는 일은 하나의 운동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자본과 정권은 노동자가 역사의 주체로서 자신을 자각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이전 시기는 접어두더라도 ‘민주화’된 이후에 만들어졌다고 하는 역사교과서를 한번 들춰보라. 노동자들의 투쟁을 교묘하게 피해 서술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역사는 살아있는 계급투쟁의 장이다. 노동자 스스로 자기 기록을 남기고 역사의 주체임을 자각하는 일, 역사의 줄기 속에서 나의 위치를 찾는 일은 현실투쟁과 나아갈 바를 밝히는 출발점이다.      

남들은 내 취미가 독특하다고 한다. 세계사, 한국사, 노동운동사 연표를 넘기며 재미를 찾는 게 흔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크게 크게 볼 때 내 시각도 커진다. 내 일만 생각할 때와 달리 큰 줄기 속에서 나를 파악할 수 있다. 이 즐거움이 노동운동에 관심 있는 모든 이의 즐거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역사 속에서 개인과 조직의 위치를 확인하고, 개인과 조직의 움직임이 역사를 만들어간다는 것을 확인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2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