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노동체제 붕괴 이후 노사관계와 노동운동의 과제

노동사회

87년 노동체제 붕괴 이후 노사관계와 노동운동의 과제

편집국 0 3,723 2013.05.29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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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금융경제연구소 주관으로 2007년 6월15일 개최된 심포지엄 <IMF에서 FTA로: 축적기획으로서의 신자유주의>에서 발표한 글을 정리한 것입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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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이후 한국의 노사관계는 여러 측면에서 많은 변화를 겪었다. 무엇보다도 기존의 소위 ‘87년 노동체제’가 무너진 것이 가장 큰 변화로 지적된다. 87년 체제로 일컬어지는 1987년 이후 10년간 한국의 노사관계 체제는 △매우 제한적이고 불균등한 제도화, △매우 높은 수준의 노사 갈등, △기업별노동조합을 근간으로 하는 분산적 노동조합 체계 등을 특징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1997년 말의 위기는 기존의 노사관계 체제를 급격히 흔들어 놓았다. 무엇보다도 노동시장 상황의 변화에 따른 고용불안의 증가와 노동시장의 분절이 그 중요한 요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 변화는 노·사 간 (상대적인) 힘의 균형 관계를 사용자 우위의 관계로 전환시켰다. 금융, 공공부문, 대기업부문의 대규모 구조조정이 이루어졌고, 또한 구조조정에 따른 인력감축 등을 둘러싸고 심각한 노사갈등을 겪었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급격히 증가하였고, 중소·영세기업과 대기업 간의 노동시장 양극화가 심화되었다. 

한편, 87년 체제의 등장은 한국의 노동조합운동에 ‘기업별 노동조합 체계’라는 짐을 안겼다고 볼 수 있는데, 1997년 위기는 노동조합운동으로 하여금, 기업별 노동조합 체계를 공고화하여 결국은 노동조합운동의 쇠퇴를 초래할 것인가 아니면 기업별 노동조합 체계를 극복하여 산업별 노동조합으로 조직 형태와 내용을 전환할 것인가의 양자택일을 강요하였다. 전자의 경우는 노동조합운동의 위기로, 후자는 노동조합운동의 재활성화로 귀결될 것이었다.

경제위기 이후, 구조조정 정치 그리고 사회협약 정치

jhhong_01.jpg경제위기 이후 ‘구조조정의 정치’와 ‘사회협약의 정치’가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일상적인 구조조정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었던 고용문제를 임금수준에 우선하는 문제로 만들었고, 이로 인해 대기업 노동자들조차 고용불안을 전제로 한 행위전략을 취하곤 하였다. 구조조정 또는 고용조정의 일상화는 대기업 노동시장에서 비정규노동 활용의 확대로 이어졌는데, 노동조합운동은 이들 비정규노동의 조직화를 촉구하였으며, 비정규직 중심의 노동조합과 사용자 사이의 격렬한 갈등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고용불안감은 한편으로는 정규직 노동자 중심의 노동조합들로 하여금 비정규직 배제적인 행위전략을 선택하도록 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연대의 필요성을 자각하도록 하여 산별노조운동을 촉진하기도 하였다.

한편, 경제위기 이후 한국사회에도 사회협약의 정치가 등장했다. 그러나 이는 노·사·정이 대등한 위치에서 국민경제의 안정과 ‘대화와 타협’에 의한 새로운 형태의 노사관계 체제를 꾀한 것이었다기보다는,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일시적인 노동 포섭의 의미가 강하였다. 따라서 1998년 초 노·사·정 대타협에 의한 사회협약 이후 사회협약의 정치는 파행을 거듭했다. 대화와 타협의 노사관계를 견인할 것으로 만들어진 (사실상 급조된) 노사정위원회는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위상과 역량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였는데, 특히 민주노총으로부터의 불신과 반복되는 불참은 노사정위원회의 위상을 크게 약화시켰다.

경제위기 이후 구조조정은 일상화되었다. 경제운영 원리로서의 시장기제의 활성화와 그에 따른 경쟁의 심화는 노동시장의 유연화로 이어졌다. 특히 노동시장 양극화에 대한 우려가 현실화되었는데, △기업조직 내 노동력을 핵심-주변 집단으로 구분하여 관리하는 인적자원관리 관행의 확산, △중소·영세기업의 경영조건의 악화와 이 부문 노동자들의 고용조건 악화 등은 양극화의 주된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노동시장 양극화에 대처할 수 있는 노동복지 등의 제도적 장치는 매우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고, 노동자들이 노사관계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하는 노동관련 법·제도 및 그것의 운영은 여전히 미흡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특히 상대방에 대한 신뢰 부족, 미래에 대한 긍정적 기대의 부족은 사회적 대화를 통한 노동시장·노사관계 구조개혁을 더욱 힘들게 하였다.

좌초한 사회통합적 노사관계와 노동조합운동의 대응 방향

참여정부가 등장한 이후 ‘사회통합적 노사관계 구축’을 기조로 하는 노동정책이 제시되었다. 하지만 정부의 ‘노동시장 유연화’ 및 ‘노사관계 선진화’ 기조는 노동을 실질적인 파트너로 하는 노·사·정 관계를 구축하지 못하도록 했고, 이는 익히 알다시피 비정규법 및 노사관계로드맵을 둘러싼 갈등으로 표출된 바 있다.

사회적 대화를 통해서 노동시장 및 노사관계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참여정부 시절에도 정부 주도적인 틀을 관철시키는 선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상호 이해관계의 충돌, 당사자 내부의 이해관계 차이 등으로 인해 비정규법 및 노사관계로드맵 논의는 장기간 파행을 겪었다. 특히 비정규법과 노사관계로드맵을 둘러싼 양대 노총 사이의 이견은 결국 민주노총이 빠진 ‘노사정 대타협’으로 귀결되었고, 이와 관련된 갈등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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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노총, 경총, 대한상의, 노동부, 노사정위원회는 작년 9월11일 민주노총이 빠진 채 정부의 '노사관계로드맵'에 합의했다. 이로써 촉발된 양대노총의 갈등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 매일노동뉴스 ]

한편, 경제위기 이후 노사관계·노동운동에서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첫째, 기업별 노동조합에서 산업별 노동조합으로의 노동조합 조직형태의 점진적 전환과 산별교섭의 등장, 둘째, 공공부문 노사관계의 활성화 등이다. 즉 교직원노조의 제도화, 공공행정부문의 노동조합 결성 및 ‘제도화’ 등이다.   

공공부문 노사관계의 활성화는 공공부문의 특성상 그 사회적 파장이 적지 않다. 특히 일반직 공무원들의 조직화 및 노동조합 합법화는 더 이상 공무원을 ‘국민의 종복’으로만 볼 수 없도록 하였다. 임금·근로조건뿐만 아니라 공공행정 전반에 대한 노동조합의 개입은 기존의 행정조직 운영상의 관행을 크게 변화시킬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공공부문’ 특히 ‘공무원·교사’ 노동조합운동의 사회적 위상(정체성)의 정립은 아직 미흡한 상태이고, 이는 당분간 공공부문 노사관계의 갈등 양상으로 표출될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산업별 노동조합 결성의 확대는 기존의 기업별 노사관계 관행에 큰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예상된다. 금융, 보건, 금속, 공공 등 산업·업종 부문에서 대규모의 산업·업종별 단위노조가 이미 결성되었으며, 중장기적으로는 단체교섭구조도 안정될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기업별 노동조합 관행이 유지되고 있어 노동조합 내부의 집중과 분권의 갈등 문제는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조직 노동 내·외의 이해관계를 조율할 수 있는 리더십과 소통 구조를 형성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로 등장하였다. 

산업·업종별 조직률 증가 전망도 현재로서는 불명확하다. 결국 산업별 노동조합은 조직률 확대를 위한 노력과 함께 교섭의 사회적 효력을 확장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기 위한 노력을 동시에 추구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는 상황이다. 산업별 노동조합을 통해서 임금·근로조건, 고용관행 등을 개선하기 위한 노동조합운동의 노력은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한편, 산업별 노사관계는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전국·중앙 수준에서의 사회적 파트너십 등 다양한 형태의 제도적 장치 구축을 필요로 한다. 산업 수준의 노·사 또는 노·사·정 당사자들 사이의 교섭만으로는 산업별 노사관계가 정착하기 어렵다. 산업 수준에서의 노사관계를 뒷받침할 수 있는 총연맹, 경총 등 초산업적 사용자단체, 정부 사이의 사회적 교섭 또는 정치적 교섭의 제도적 장치가 동시에 제도화될 필요가 있다. 

물론 현 시점에서 노·사·정 상호 간의 신뢰 부족 등 사회적 파트너십 구축을 위한 다양한 전제 조건이 충족되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업별 단체교섭을 근간으로 하는 산업별 노사관계를 형성하기 위한 노력과 사회적 파트너십을 구축하기 위한 조건을 마련하는 노력은 병행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특히, 기획예산처 등 노동부 이외 관련 부처)의 노사관계에 대한 이해 부족의 해소, 노동조합운동에 대한 전향적인 태도 변화가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노동시장 양극화와 노동조합운동의 정치력 확대

jhhong_03.jpg경제위기 이후 비정규직의 급속한 확산은 노동시장 양극화와 관련하여 중요한 사회적 의제가 되었고, 비정규직 고용관계(노사관계)·노동운동이 크게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비정규직 문제는 ‘대체적으로’ 대기업부문에서의 문제였다고 볼 수 있다. 

노동시장 양극화 문제는 대기업부문에서의 정규직·비정규직 격차 문제로 표출되는 경우가 많았으나, 더욱 근본적으로는 대기업 노동자와 중소·영세기업 노동자의 고용조건 격차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 중심의 노동조합운동이 자신들의 고용조건을 ‘배타적으로’ 또는 ‘주로’ 대변해 왔던 관행이 지속된다면, 노동시장 양극화 문제의 해결에 노동조합운동이 기여할 수 있는 여지가 별로 없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노동조합운동이 노동시장 양극화 문제해결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대기업 정규직 조합원들의 대기업 비정규직 노동자와 중소영세기업 노동자들과의 두 방향 ‘연대’가 시급히 요청된다.

한편, 민주노동당의 결성과 노동조합운동의 정치활동 강화는 제도권 ‘노동정치’의 양상을 크게 변화시켰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으로 전망된다. 그렇지만 노동운동의 정치적 영향력이 빠른 시일 내에 급속히 증대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여전히 제도권 정치에서 민주노동당의 위상은 취약한 상태이며, 속단할 수는 없지만 당분간 민주노동당의 대안적 정치세력으로의 부각은 간단한 문제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서 노동조합운동의 조직적 분리는 노동조합운동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중요한 요인이다. 노동조합운동의 양분은 ‘노동정치’의 주체를 노·사·정 3자가 아니라 노·노·사·정 4자로 만드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갈등보다는 협조와 조율을 근간으로 하는 경쟁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양 노총이 매진하지 않는다면, 노동조합운동의 정치력 영향력은 취약한 상태를 면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상당부분 제도화된 노조운동, 발전모델에 대한 고민 있어야

87년 이전과 이후, IMF 위기 이후의 시기 노동조합운동의 사회적 위상은 크게 변화하였다. 한국사회에서 노동조합운동은 (충분하지는 않지만) 일정 수준 이상으로 시민권을 확보하였다고 볼 수 있다. 조직률이 매우 낮음에도 한국사회의 미래를 전망하는 의사결정 과정에 다양한 방식으로 발언하고 있다. 제도(권)화의 정도도 매우 높아졌다.

그렇지만 제반 노동권이 한국사회에 뿌리박는 것은 아직 요원한 상태이다. 이러한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노동, 노동자, 노동조합, 노동운동을 대하는 부정적인 사회적 분위기가 하루 속히 극복되어야 한다. 노동조합운동에 대한 사회적 신뢰 수준을 높이는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동조합운동의 부단한 노력이 요구된다.

개별 노동자, 개별 조직 단위의 이해관계를 서로 조율하여 하나의 목소리로 발언할 수 있기 위해서는 각 수준별 발언의 사회적 책임성을 제고할 필요가 있다. 조직 노동 및 미조직 노동을 전체적으로 고려하는 전략적 행위를 통해서 소위 ‘이기주의’ 문제를 불식시켜야 한다.
한편, 지양되어야 할 모순관계로서의 ‘노·자 관계’ 개념을, 내외적으로 다원적 이해관계의 갈등을 내포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기능적 보완관계에 있기도 한 ‘노·사·정 관계’ 개념으로 보완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는 노사관계 당사자들 사이의, 그리고 각 당사자 내부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합리적 대화를 통해서 조율할 수 있는 역량을 확보하는 문제로서, 특히 노동조합운동은 아직 취약한 이 부분의 역량을 제고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특히 노동조합운동은 △조직 내의 이질성 극복 및 완화, △미조직 노동자들을 포괄하는 전략적 행위 외연의 확대, △노동조합운동의 지역공동체 뿌리박기, △‘사회적 연대’를 기치로 하는 정책 수립 및 추동 역량의 확보 등을 통해 사회적 정당성을 다시 확인해 나가야 한다. 

장기적으로 노동조합운동은 현재의 ‘막나가는 시장’을 효과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새로운 경제시스템 모색의 주도 세력이 되어야 한다. 현재 노동조합운동은 여전히 시장 중심의 발전·성장 모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모델은 사회 전체에 대해서나 근로대중에 대해서나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이다. 여기에 매달려 있는 한 소위 ‘노동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구할 수 없다. 노동조합운동은 발전·성장 모델에 대한 성찰을 통해서 노동조합운동의 이념에 생태주의 등 대안적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대안적 사회모델의 다양한 가능성을 탐색하고 그 현실화를 위해 꾸준히 시도하여야 한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2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