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후진국' 딱지가 부끄럽지 않은 걸까

노동사회

'노동후진국' 딱지가 부끄럽지 않은 걸까

편집국 0 3,874 2013.05.29 08:46

국제노동기구(ILO)는 지난 6월15일 제299차 이사회를 열어, 한국 사례(#1865호)에 관한 권고를 포함하고 있는 346차, 347차 결사의자유위원회(Committee on the Freedom of Association) 보고서를 채택했다. 이번 권고는 1993년 ‘ILO공대위’ 시절 첫 제소 이후 14번째이며, 민주노총 창립 이후에만 총 12번째다. 사실 한국정부 제소 사례는 ILO 결사의자유위원회에서 콜롬비아 다음으로 오래된 사례다. 콜롬비아는 매년 수십 명의 노조활동가들이 살해당할 정도로 노동기본권의 보장 상황이 최악이다. 그런 콜롬비아 다음으로 오래된 사례가 한국이라는 점은, 한국 노동권의 수준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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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번째 ILO 권고의 핵심내용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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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례적으로’ 강력했던 14번째 ILO 권고

이번 ILO 권고는 이례적으로 매우 강력하다. 먼저, 이번 보고서는 총 30건의 제소 사례를 다루고 있으며, 총 397쪽에 달하는데, 이중 84쪽을 한국 사례에 할애하여 대단히 세밀하고 자세하게 검토하고 있다. 개별 국가 사례를 양적으로도 20%가 넘는 상당한 비중을 할애하고, 특히 각각의 제소 건에 대해 이처럼 상세하게 다루는 예는 ILO 결사의자유위원회에서 아주 드문 경우다. 특히 이번 보고서는 극히 이례적으로, 노사정 간에 첨예한 쟁점으로 부각되었던 부분들, 예를 들어 공무원노조와 건설노조 탄압 문제, 하중근 열사 사망사건, 김태환 열사 사망사건, 2005년 최저임금 협상장 근접거리 경찰력 배치, 대한항공 조종사노조 파업 긴급조정 적용 사례 등 구체적인 사건들을 개별적으로 각각 검토하여, “심각한 유감” 혹은 “우려” 등의 용어를 사용해 ILO의 의견과 권고를 내리고 있다. 여기에 더해서, ILO 이사회는 6월15일 보도 자료를 발표하여(http://www.ilo.org/global/About_the_ILO/Media_and_public_information/Press_releases/lang--en/WCMS_083110), 이번 보고서 중 다섯 사례를 적시하면서 소개하고 있다. 여기에는 캄보디아, 콜롬비아, 필리핀, 이란 외에도 한국이 포함되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ILO가 한국의 노동기본권 보장 상황에 대해 얼마나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다음으로 이번 ILO 권고는 “1998년 한국을 방문하여 3월 이사회에 보고를 제출한 바 있는 ILO 고위급 노사정 대표단에 한국 정부가 87호와 98호 협약을 비준하겠다고 한 약속(committment)을 상기”시키고 있다. 이에 대해 한국 정부는 ‘약속’(committment)한 바는 없고, ‘의향’(willingness)이 있다고 했을 뿐이라면서, ILO 결사의자유위원회가 잘못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반박한 바 있다. 국제사회 무대에서 보다 정확한 언어를 사용해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겠지만, 위와 같은 한국 정부의 태도는 옹졸하기 짝이 없다. 한국 사례에 관한 ILO 결사의자유위원회 보고서 중 ‘권고’(recommendations) 부분의 맨 마지막 사항으로 87호와 98호 협약의 비준에 관한 ‘약속’ 혹은 ‘의향’을 상기시킨 것이, 87호와 98호를 비준할 것을 ‘권고’하는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슨 뜻이겠는가? 특히 이번 권고처럼, 특정 국가에게 결사의 자유 관련 핵심 협약인 87호와 98호 비준에 관해 언급한 사례가 결사의자유위원회 역사상 거의 유례가 없는 일이라면, 이에 대해 한국 정부는 꼬투리나 잡고 있을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결사의 자유 관련 핵심협약 비준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번 권고는 건설노동자와 관련하여, “특히 비정규 ‘일용’노동자들을 포함하여 건설부문에서 고용조건에 관한 자유롭고 자발적인 단체교섭을 증진시키기 위한 추가적인 노력을 다할 것”을 요청하면서, 특히 건설부문 단체교섭에 관해 “정부가 원한다면, ILO 사무국의 기술지원(technical assistance)을 이용할 수 있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이 내용 역시 이번 ILO 권고의 특징 중의 하나다. 즉 최소한 건설부문에서의 단체교섭 관행과 원칙이 국제노동기준에 부합하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ILO가 ‘기술지원’을 통해 직접적으로 개입할 의향이 있다는 점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정부가 “자유롭고 자발적인 단체교섭”을 증진하기 위한 조치들을 자발적으로 취할 계획과 의지를 갖고 있다는 판단이 든다면, 왜 ILO가 ‘기술지원’을 할 수도 있다고 제안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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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4월10일 열린 '한국 노사관계 현황과 OECD 특별감사 과정 전망' 국제워크숍 ▶ 민주노총 ]

노동부의 공무원 및 공공부문 파업권 관련 아전인수 해석

공무원과 공공부문 노동자의 파업권과 관련하여 ILO의 원칙은 확고하다. 이번 권고를 그대로 인용하면, “공무원 파업권에 대한 전적인 제약은 안 되며, 파업권의 제약은 엄격하게 특정한 범주의 공무원으로만 제한할 것”이다. 또한 직권중재와 긴급조정권 발동에 관해, ILO는 “직권 혹은 긴급 조정 부과를 삼갈 것을 정부에 촉구”하고 있다. 특히 항공사 파업에 긴급조정 조항을 적용한 것은 ILO 결사의 자유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간주하면서, “긴급 조정의 경우 모든 관련 이해당사자들의 신뢰를 받고 있는 독립적인 기관이 부과할 때만, 그리고 결사의 자유 원칙에 부합하게 파업을 제한할 수 있는 경우만 부과할 수 있도록, 긴급조정 관련 노동조합법(TULRAA) 조항(76-80조) 개정”을 요청하고 있다. 이처럼 ILO가 인정하는 ‘파업권 제한’은 두 가지 경우인데, 하나는 ‘국가의 이름으로 권한을 행사하는 공무원’과 다른 하나는 ‘엄격한 의미의 필수공익사업장’의 경우이다. 

그런데 노동부는 반박자료를 통해
(http://molab.korea.kr/molab/jsp/molab1_branch.jsp?_action=news_view&_ property=e_sec_1&_id=155213048), “참고로 그간 ILO는 일관되게 공무원에 대한 파업권은 제한될 수 있다는 입장을 견지해 오고 있으며 다수 선진국들도 공무원의 파업권을 제한하고 있음(일본, 미국 등)”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는 국민을 기만하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ILO 원칙의 핵심은 “파업권을 제한할 수 있다”가 아니라, “파업권에 대한 전적인 제약은 안 되며, 파업권 제한도 아주 특수한 경우로 한정한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언제 ILO가 공무원 노동자, 교원 노동자의 파업권은 전적으로 제약될 수 있다고 얘기하고 있는가? 

더욱 가관인 것은, 노동부가 공무원 단결권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반박자료를 발표했다는 점이다. “동 초안에는 ‘모든 직급에 대해 임무, 기능에 관계없이 자신들의 이익보장을 위해 스스로의 단체(association)를 결성할 권리를 보장’으로 되어 있는바, 여기에서의 단체는 직장협의회와 같은 자신들의 단체도 포함하는 것으로 모든 공무원이 노동조합에 가입토록 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님.” 이는 노동부의 구시대적이고 비겁한 인식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마치 ILO가 규정하는 ‘결사의 자유’는 꼭 ‘노동조합’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므로, 전국공무원노조는 탄압해도 된다는 의미로 들린다. ILO 원칙의 핵심은 스스로의 선택에 따른 단체 결성 및 가입권을 보장하라는 것이며, 그것이 노동조합이든 혹은 다른 어떤 형태의 조직체이든 탄압하지 말라는 것 아니겠는가? 10만명이 넘는 공무원노동자들이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공무원노동조합을 결성하고 가입했으며, 실질적인 노동조합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공무원노조의 실체를 인정하고 대화를 개시하는데, 이 이외에 어떠한 조건이 더 필요하겠는가? 

한미FTA 저지 총파업은 ILO 원칙에 부합

한미FTA 저지 총파업에 대해 노동부 장관은 “근로조건 개선과 관계없이 한미FTA 체결저지를 목적으로 한 정치파업으로 현행법상 명백한 불법파업”이라고 규정했고, 다수의 금속노조 지도부들에게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하지만 ILO 결사의 자유 원칙은 노동자의 파업권에 대해 보다 광범위하게 인정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수많은 사례들에서, ILO 결사의자유위원회는 노동자의 파업권은 노동조건에 한정되지 않으며 조합원의 이해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보다 광범위한 사회경제적 이슈들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린 바 있다. 따라서 한미 자유무역협정과 같은 국제적인 무역협정의 사회적 영향을 고려하면, 노동자들이 위 문제에 대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ILO 원칙에 충분히 부합한다. 이는 이번 ILO 권고에도 명확히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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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ILO의 국제노동기준은 파업권을 노동자의 경제?사회적 권익을 증진시켜내기 위한 필수적인 수단으로 인정하고 있으며, 동시에 포괄적인 사회?경제적인 문제에 관한 파업 역시 결사의 자유 원칙에 부합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따라서 금속노조 파업의 주요한 의제인 ‘한미FTA’는 두말할 나위 없이 노동자들의 고용 및 임금조건, 나아가 국가 경제와 사회 전체에 큰 파급력을 가질 수밖에 없으며, 이에 대한 노동자의 의견 피력과 단체 행동은 국제노동기준에 부합한 것이라 말할 수밖에 없다. 

정부가 이행해야 할 ILO의 요구사항

한국 정부는 지난 6월12일 OECD 감시과정(monitoring process)의 중단 결정을 근거로, ‘노사관계의 선진화’를 이뤘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한 바 있다. 하지만 ILO 결사의자유위원회 권고는 한국 노동기본권 보장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주고 있다. 더구나 OECD 이사회 역시 한국 정부가 2010년 혹은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유예된 개혁조치가 효력을 발생한 이후의 추가적인 이행 조치에 대해 OECD 고용노동사회위원회(ELSAC)에 보고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아직도 상당수 OECD 회원국은 한국의 노동법 및 노사관계 개혁에 있어서 해결되어야 할 많은 중요한 과제들이 남아 있다는 점을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이 강조되어야 한다.

따라서 정부는 ILO 권고 이행을 위한 구체적인 후속조치를 즉각 취해야 할 것이다. 특히 ILO가 반복적으로 권고해 온 △기업단위 복수노조 허용, △노조전임자임금지급 문제에 대한 법적 개입 금지, △노조활동에 대한 ‘업무방해죄’ 남용 금지, △실업자 및 해고자 조합원 지위 인정 및 노조간부 출마 허용, △긴급조정 조항 적용에 관한 엄격한 제한 등에 대해 즉각 결사의 자유 원칙에 근거하여 해결해야 한다. 또한 전국공무원노조에 대한 일체의 탄압과 개입을 중단하고, 행자부?노동부 등 관련 부처는 ILO가 지적한 특별법상의 문제점 개선을 위해 조건없이 공무원노조와 대화해야 한다. 동시에 건설연맹 노조 조직가와 간부에 대한 탄압을 중단하고, 건설현장 단체교섭에 관한 ILO의 기술지원을 조건없이 받아들여야 한다. 

ILO 87호와 98호 협약 비준을 시작하자

마지막으로 강조되어야 할 것은, ILO가 이례적으로 권고한 결사의 자유 관련 핵심 협약인 87호, 98호 비준 과정을 즉각 개시해야 한다는 점이다. ‘의향’이든 ‘약속’이든, 한국 정부가 지난 1998년 ILO 고위급 노사정대표단에게 말한 것은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거의 10년의 세월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진전이 없다면, 이는 ‘정부 의지’의 문제가 아니겠는가? 민주노총은 올해 하반기부터 ILO 결사의자유 핵심 협약 비준 촉구를 위한 적극적인 활동에 나설 것이다. 이를 위해 우선 9월 ILO 전문가, 국제노동조합 조직들과 함께 한국 노동기본권의 수준을 재점검하고, 87호와 98호 협약 비준 과정 개시를 촉구하는 국제회의를 개최할 것이다. 이를 계기로, 하반기 정기국회와 대선 국면에서도 이 사안이 주요한 사회적 의제가 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할 계획이다. 이에 대해,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노동자 권리와 사회 진보를 위해 투쟁하는 단체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연대가 절실하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2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