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독재 45년, 다시 꿈꾸는 버마의 '6월 항쟁'

노동사회

군사독재 45년, 다시 꿈꾸는 버마의 '6월 항쟁'

편집국 0 4,943 2013.05.29 09:08

가깝고도 먼 나라 버마. 버마라는 나라 이름이 생소하더라도 아웅산 수치에 대해서는 모두 잘 알 것이다. 식민지, 해방운동, 군부독재, 민주화운동 등 버마와 한국은 아주 비슷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비슷한 역사 속에 비슷한 사람들이 있다. 한국에 독립운동가 김구 선생이 있듯 버마에는 아웅산 장군이 있고, 아시아의 민주화 지도자였던 김대중과 아웅산 수치가 있다. 한국 출신인 현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이전에는 버마 출신인 우 탄트(1961년부터 1971년까지 유엔 사무총장을 역임했다) 전 사무총장이 있었다. 

zaw2001_01.jpg버마는 1948년 1월4일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그 후 1948년부터 1962년까지 국민 국가 형성을 위한 과정에 들어선다. 그러나 1962년 아웅산 장군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던 군사령관 네윈이 쿠데타를 일으켜 군사독재의 길에 들어서게 됐다. 1974년 네윈 군사정권은 군부독재의 다른 이름일 뿐인 “버마식 사회주의”라는 슬로건 아래 자급자족경제 체제를 위한 긴 실험에 들어갔고, 그 결과 버마는 국가경제 파탄이라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45년간의 군부독재는 아시아의 부국에서 세계 최빈국으로, 21세기 마지막 쇄국의 길로 버마를 인도했다.

사실 군부집권 이전의 버마는 동남아시아 최대의 쌀 생산국이자 풍부한 지하자원을 보유하고 있던 자원국이었다. 하지만 이 과거의 풍요는 네윈이라는 독재자에 의해 하나 둘씩 후퇴하기 시작했고 1987년에는 유엔이 정한 세계 최빈국이 됐다. 같은 해 네윈 군사정권은 화폐 개혁을 단행했고, 이로 인해 자신들의 돈이 하루아침에 휴지 조각이 되자 국민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르게 된다. 이것이 1988년 ‘8888 민중항쟁’이 일어났던 계기가 됐다. 

버마의 5·18, ‘8888 민중항쟁’

버마 민주화운동의 시작은 네윈 정권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70년대 초반에는 노동자나 농민들이 인권 보장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곤 했다. 그러던 중 1974년에 ‘우 탄트 사건’이 벌어졌다. 군부 쿠데타에 반대했던 우 탄트 전 유엔 사무총장의 장례식이 준비되고 있던 양곤 대학을 군부가 습격해 시신을 탈취하고 수백 명의 학생과 시민들을 살해한 사건이다. 이때부터 일부 학생들은 산으로 들어가 무장투쟁을 시작하기도 했다.  

1988년 3월, 동네 청년들과 시비를 벌이던 양곤 공과대 학생들 몇몇이 이를 말리던 시위진압 경찰에 구타당해 희생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대한 항의로 양곤대학 학생들이 시위를 벌였고, 다시 경찰에 의해 사상자가 발생하게 된다. 이 같은 경찰들의 무력 진압은 처음이 아니었다. 그동안 경찰과 군인들은 계속해서 무력으로 시위를 진압해왔다. 이로 인해 발생한 전국적인 시위는 1988년 8월8일 최고조에 다다랐다. 한국의 4·19항쟁이나 5·18민중항쟁과 같은 전국적인 반독재민주화 요구 시위가 시작된 것이다. 

학생들이 주도한 이 ‘8888 민중항쟁’으로 군부독재가 위기에 빠지자 9월18일 군부 내에서 쏘 마웅 장군(SAW MAUNG)에 의해 다시 쿠데타가 발생했다. 이들은 시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달래기 위해 1990년 총선거를 실시하여 선출된 사람들에게 정권을 이양하겠다고 약속했고, 1990년 5월27일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이 선거에서 민주세력은 원로 정치인, 군 지휘관 출신인사, 교수, 변호사, 소수민족 등 주요 민주화 활동가들을 구성원으로 하는 ‘민족민주동맹’(National League for Democracy, NLD)을 창설했다. 아웅산 수치 여사가 이끄는 NLD는 82% 이상의 놀라운 지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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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장투쟁 노선을 택한 전버마학생민주전선 조직원들의 모습. ▶  www.absdf8888.org ]

정권이양 약속은 새로운 군부독재의 위장막이었다

그러나 군부는 정권을 이양하지 않고 오히려 국회의원 중 100여명 이상을 구속했다. 이후 지금까지 국회는 열리지 않고 있으며 헌법조차 제정되지 않고 있다. 민족민주동맹의 지도자 아웅산 수치 여사는 1989년 처음 가택연금된 이후 지금까지 총 3번의 가택연금을 당했으며 그 기간만도 12년이 넘는다. 일반 시민들 역시 정치탄압, 인권탄압, 강제이주, 강제노동에 계속 시달리고 있다. 

1990년 5월 선거 이후에는 아웅산 수치 여사가 이끄는 NLD와 몇 개 안 되는 정당 외에는 모두가 불법 조직이 되었다. 그래서 학생, 스님을 비롯한 운동가들은 지하운동 중심으로 반군부 민주화운동을 해왔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반군부 투쟁의 하나가 1999년 9월9일 있었던 ‘9999 시위’였다. 그러나 이 시위는 시위를 지도하는 대학생들과 정치가들, 스님들, 노동자 등의 연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면서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군부는 학생들을 체포하고 폭력을 가했으며 민주화와는 거리가 먼 방식으로 시위를 진압했다.

2003년에는 두 번째로 가택연금에서 풀려나온 아웅산 수치 여사가 NLD를 재건하기 위해 지방을 순회하던 중 5월30일 데파인(Depayin) 지역에서 야간에 피습을 당한 사건이 있었다. 이 피습은 군부가 지원한 테러였다. 그럼에도 오히려 수치 여사와 동행했던 지지자들이 특정한 혐의나 재판도 없이 구금되었다. 2005년 6월16일 발표된 국제앰네스티의 보고서에 의하면 2004년 12월 당시 버마 내 양심수의 숫자는 1,350명에 달했다.

유엔은 1994년부터 버마 군부에게 △1990년 총선을 인정할 것, △인권·종교·노동·정치탄압을 중단할 것, △아웅산 수치 여사와 NLD 및 소수민족의 대표들과 성의 있고 의미 있는 대화를 실시할 것 등을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국제사회의 노력을 배경으로 8888 항쟁 이후 미국, 유럽연합, 스칸디나비아연방 등을 중심으로 군부에 대한 경제적 압박이 진행되었다. 또한 버마 군부에 의한 강제노동 문제 때문에 국제노동기구(ILO)는 기구 창설 50년 주년인 2000년 제88차 총회를 통해 버마 제재 결의안을 처음으로 채택했다.

버마 민주화운동의 중추, 민족민주동맹(NLD)

버마 내 민주화운동 세력은 ①NLD(민족민주동맹 - 정당이면서 전선운동의 성격도 있음), ②학생운동(무장학생운동, 학생지하운동, 학생정치운동), ③소수민족운동(일부 소수민족은 군부 종식과 함께 자치를 요구함) 등 크게 3가지로 나눠 볼 수 있다. 

이 중 가장 광범위한 지지와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NLD이다. NLD는 8888 항쟁 이후 1990년에 있었던 총선거에서 군부독재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진 버마 전 민주화 세력의 결집체이다. NLD의 대표적인 인물은 사무총장 아웅산 수치 여사, 부회장 우 틴 우를 들 수 있다. 1990년 총선 이후 선출된 국회의원과 NLD 간부 활동가 중 일부는 해외 망명과 도피 생활을 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NLD 활동가들은 아직 버마 안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망명한 NLD 활동가들의 본부는 태국에 있으며, 또한 일본, 호주, 미국, 한국 등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NLD의 핵심입장은 민주주의의 완성이다. 이를 위해 1990년 총선거의 결과를 인정하라는 요구와 함께 세계 다른 국가들에게는 경제봉쇄정책을 통해 군부를 압박할 수 있도록 협력을 요청하고 있다. 또한 가장 핵심적인 요구 중의 하나는 군부와 소수민족 그리고 NLD가 버마의 미래를 위해 대화하는 것이다. 첫 번째도 두 번째도 마지막도 대화이다. NLD는 최후의 순간까지 대화를 통해 버마의 민주화를 쟁취할 것이다. 

무기를 들어라, 시민들을 조직하라, 정치를 장악하라

학생운동은 크게 3가지 세력으로 나눠볼 수 있다. 첫째로 무장투쟁을 중심으로 하는 그룹은 ‘전버마학생민주전선’(All Burma Students' Democratic Front, ABSDF)이 중심적이다. 이들은 비록 무장투쟁을 하고 있지만, 대화를 통해 버마 민주화를 달성하려는 아웅산 수치와 NLD를 지지하고 있다. 또한 무장투쟁을 하고 있는 소수민족들과의 화해와 연대활동을 하고 있다. 1988년 이후부터 다민족 간의 화해에 있어 큰 역할을 해왔다.

둘째로는 지하운동을 중심으로 하는 그룹이 있다. 1990년 선거 이후부터 버마의 민주화운동은 정치운동 중심이었는데, 2000년대 이후 소위 ‘88년 민중항쟁’의 지도자 일부가 일반 시민들의 민주화운동 참여를 중시하기 시작했다. 정당에 관심이 없는 학생들은 한국의 전대협·한총련 같은 학생조직을 만들거나, 지하운동을 해왔다. 지하운동의 가장 핵심적인 인물은 몬족 출신 민꼬나잉(Min Ko Naing)이다. 그는 버마전국학생연합(All Burma Student Federation Union, ABSFU)의 지도자였고, 지하운동도 이 단체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 ABSFU는 주로 시위 조직화와 유인물 배포, NLD 등 정당 지지 활동을 하며 학생들과 국민들, 그리고 정치인들을 이어 주는 가교 역할을 해왔다.

민꼬나잉 회장과 꼬꼬지(Ko Ko Gyi) 버마 전국학생연합 부회장이 2004년 11월과 2005년 1월 각각 석방되면서 아래로부터의 민주화운동은 더욱 확산되었다. 이들은 스스로를 ‘88년 세대’라고 불렀으며, 그 이름으로 청년단체를 창립했다. 또한 이들은 정치운동 외에 강제노동, 강제이주 등 일반 시민들의 인권 문제를 다루는 인권단체나 에이즈(후천성 면역 결핍증) 환자 지원 단체를 만들기도 했다. 또한 이들은 기도, 서명운동, 가두행진, 민주화운동 기념행사 등 일반 시민들이 쉽게 참여할 수 있는 운동을 펼쳐나가 반체제 운동의 저변을 확대했다. 이번 2007년 시위에 일반 시민들이 대규모로 참여한 것에서도 이들 학생 지도자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마지막으로는 정치운동을 통해 민주화운동의 길을 걷는 이들이 있다. 민주화운동을 위해 아웅산 수치와 같은 정치인들은 정당을 만들었는데, 어떤 학생들은 민주주의민족동맹(NLD) 같은 정당에 들어가기도 했고, ‘새로운 사회를 위한 민주당’(Democratic Party for New Society, DPNS)을 직접 만들기도 했다. DPNS는 대다수 학생들이 참여해 만들었으며 1990년 총선거 당시 NLD 다음으로 가장 큰 정당이었다. DPNS는 NLD와 아웅산 수치에 대한 지지 운동, 그리고 다른 학생 조직들과의 연대 활동을 해왔다. 그러나 1990년 총선거 이후 군부에 의해 해산됐으며, 현재 버마 - 태국 국경지역에 기반을 두고 활동하고 있다.

군부의 ‘민족말살정책’, 그들과도 연대해야 한다

버마는 130여 개의 민족이 있는 다민족 국가다. 버마족, 카렌족, 카야족, 몬족, 아라칸족, 친족, 샨족, 카친족 등이 있는데 이들 8개 민족이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1948년 해방 이후 카렌족은 독립을 요구하는 무장투쟁을, 공산주의 계열은 사회주의 이행을 촉구하는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대부분의 소수민족들은 1962년 군부 쿠데타 이후 무장투쟁의 길을 걷게 되는데, 이들의 핵심적인 요구 사항은 독립 영웅인 아웅산 장군 생전에 이루어졌던 협약을 준수하라는 것이었다. 그 협약은 1947년 아웅산 장군과 소수민족 대표들 간에 체결한 협약으로 영국 식민주의자들을 몰아내기 위해 함께 투쟁할 것과 소수민족의 자치를 위해 공동으로 노력할 것을 주된 내용으로 한다. 그렇지만 최근까지도 군부는 소수민족들에 대한 탄압을 자행하고 있다. 강제노동, 강제이주, 정치탄압, 소년병 차출 등 다양한 방식으로 소수민족의 자치와 독립에 대한 요구를 말살하고 있다. 또한 소수민족의 언어를 사용조차 못 하도록 하고 있다. 공식 언어는 오직 영어와 버마어뿐이다. 

또 다른 문제는 자원 채굴에 관한 것이다. 버마는 천연 자원이 풍부한 국가로 자원의 대부분은 소수민족이 거주하는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하지만 소수민족들에게 자원의 혜택은 돌아가지 않고 있다. 그들은 오히려 자원으로 인해 강제이주와 강제노동을 당하고 있으며, 무분별한 채굴 과정에서 환경오염 문제도 발생하고 있다.

문제는 이런 소수민족들의 불만이 군부가 아닌 버마족 모두에게 향해 있다는 것이다. 소수민족들이 보기에 이런 문제들은 군부가 아닌, 버마족에 의해 자행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소수민족들의 투쟁 대상은 군부와 버마족 전체가 되었다. 하지만 버마족 역시 소수민족과 마찬가지로 군부로 인해 많은 희생을 당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8888 민중항쟁 세대들은 다민족 간의 화해운동을 전개했다. 1962년 쿠데타 이후의 운동은 민주화와 지방자치권 운동이 중심이 되었는데, 8888 민중항쟁 이후에는 다민족 간의 화해운동도 함께 하게 된 것이다.

결정적 순간에 민중들과 함께하는 스님들

군부가 버마 시민들을 통치하는 방식은 ‘총’과 ‘불교’ 두 가지다. 버마의 모든 미디어는 군부에 의해 통제되어 있으며, 신문의 1면에는 절에 기원을 하거나 시주를 하는 군인들 사진이 매일 같이 실려 있다. 대다수가 불교를 믿는 버마의 시민들은 군인들이 싸움을 자주 하기 때문에 싫어하지만 언론에서는 좋은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니 헛갈리게 된다.

그러나 스님들은 버마의 대영 독립투쟁과 항일 운동, 그리고 8888 민중항쟁에서 선봉에서 싸웠다. 1990년에도 스님들의 반독재 시위가 있었다. 8888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던 1988년 3월 사건의 희생자를 추모하는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군인들이 총을 난사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시민들과 스님들이 희생당했다. 이에 공개적인 사과를 요구하며 스님들은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는 큰 스님들이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했다. 그러나 이번 2007년 시위에는 큰 스님들도 지지를 보내고 있다.

버마의 ‘6월 항쟁’을 꿈꾼다

이번 2007년 시위는 2000년대 이후 발전해온 아래로부터의 민주화운동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번 시위 초반 군부는 학생 지도자들만 체포하면 잠잠해질 것으로 판단, 학생지도자들 13명을 비롯해 200여 활동가들을 체포했다. 그러나 지도부가 없는 상태에서도 시위는 한 달 이상 계속되고 있다. 

강경 진압으로 거리 시위가 어렵게 되자 시민들은 저녁 8시부터 9시까지 TV나 라디오를 시청하지 않고 전기를 사용하지 않는 방식으로 저항하고 있다. 군부독재 통제하에 있는 TV나 라디오가 잘못된 보도를 하기에, 보지도 듣지도 않겠다는 것이다. 절에 감금된 승려들이 시주를 받지 못해 어려움을 겪자 시주를 보내는 운동도 벌어지고 있다. 이 역시 저항의 한 방식이다.

군부도 언제까지나 무력으로 시민들을 통제할 수는 없다. 최근 군부는 9월 말부터 계속된 야간 통행금지 조치를 해제했다. 시위 진압을 위해 양곤에 배치되었던 병력들도 조금씩 철수하고 있다. 국제적 압력 때문이기도 하며, 사병들이 일반 시민들과 장기간 접촉하면서 동요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시위 때 체포된 일반 시민들도 조금씩 석방되고 있다. 국영방송에서는 체포된 3천명 중 2천명이 석방되었다고 하고, 민주화운동가들은 6천명이 체포되었는데 아직 5백명 정도밖에 풀려나지 않았다고 한다. 풀려난 사람 중에는 자가나(Zagana) 등 영화배우 2명도 포함되어 있다. 풀려나온 사람들은 “이번 시위는 실패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계속 싸울 것이며 이길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국에서는 5·18이 있었고 버마에서는 8888 민중항쟁이 있었다. 한국이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민주화를 시작했던 것처럼, 버마에서도 지난 9월 불교 스님들이 중심이 된 시위를 통해 민주화가 시작될 수 있기를 버마 시민들은 희망하고 있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2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