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의 담합을 직시하라!

노동사회

우리 안의 담합을 직시하라!

편집국 0 3,239 2013.05.29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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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9월에 있었던 현대자동차지부의 2007년 임단협 조인식. ▶ 현대자동차지부 ]

지난 9월 금속노조 현대자동차지부의 임금·단체협상 교섭이 10년 만에 ‘무쟁의’로 타결되었을 때, 어느 경제신문 기자가 내게 전화를 했다. “현대자동차지부의 무쟁의 타결이 어떤 의미를 가지며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가능할 것이라고 전망하는가.”라는 질문에 의견을 듣고 싶다는 거였다. 길게 떠들 것 없이 내 대답은 간단했다. “이번 무쟁의 타결은 정몽구 회장의 구속을 둘러싼 여론비판을 잠재우고, 노동조합이 회장 구속을 이슈화시키는 것 방지하려는 회사측의 의도와, 이에 화답한 현대자동차지부의 실리적 담합에 불과하다. 이를 두고 무슨 의미를 찾고 전망을 하겠는가.”   

돌아온 ‘회장님’의 돈 잔치 앞, 옹색해진 계급적 분노

shkim_01.jpg현대자동차지부 무쟁의 임단협 타결이나 정몽구 회장에 대한 판결 자체는 사실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는 현상이었다. 물론 일각에서는 정몽구 회장의 공판결과가 발표되었을 때 이를 계급의 이름으로 단죄하는 투쟁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고, 현대자동차지부의 무쟁의 타결에 대해 내부적으로 문제제기하는 분위기가 존재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법의 판결이라는 것이 피고가 갖고 있는 자본의 많고 적음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은 이미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현대자동차지부의 무쟁의 타결 ‘용단’도, 사측이 그만큼 퍼주었으면 못 이기는 척 입 다물고 손잡는 게 한국 노사관계의 상식이라는 측면에서 그다지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도 아니다. 

문제는 이를 수용하는 우리의 자세와 상황이다. 정 회장의 횡령에 대해 노동자 계급의 이름으로 분노를 표명하는 유인물들이 여러 장 나오긴 했지만, 이러한 것들이 도대체 실천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되묻게 하고 짜증만 불러일으키는 내용이었다는 상황이 문제인 것이다. 그 유인물들은 정몽구 회장이 비자금으로 횡령한 1천억 원은 노동자들의 피땀 어린 돈이며, 이에 대해 정몽구 회장에게 책임을 묻고 단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정 회장을 단죄하더라도 기존의 체계가 변하지 않는다면 비슷한 일은 되풀이 될 것이다. 이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는 왜 말하지 않을까? 이제 새로운, 아니 이미 알고 있으면서 당사자들이 실천하지 않으려 했던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한다.        

이쯤에서 현대자동차지부의 ‘그들만의 돈 잔치’를 떠올려 보자. 올해 임단협이 끝난 후 현대자동차지부 조합원들이 1인당 확보한 돈은 평균적으로 약 1천5백만 원이라고 한다. 노동조합은 이 돈과 함께, 이러한 성과금은 올해 기업의 실적이 좋았고 노동자들이 연간 2,500시간의 장시간 노동을 감내한 덕분이라는 명분을 제시한다. 그러한 주장의 타당함이야 백 번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게 그냥 그렇게만 넘어갈 수 있는 일인가 하는 의문은 사라지지 않는다. 단도직입적으로, 현대자동차의 성과는 그들만의 것인가?    

회장의 횡령은 보여도 회사의 후려치기는 안 보이나  

잘 알려져 있다시피 현대자동차는 원·하청 관계의 정점에 있으면서 독점적 지위를 누리고 있다. 이러한 지위를 배경으로 현대자동차는 매년 하청회사들의 부품단가를 인하했고, 이것은 고스란히 원청회사인 현대자동차의 재무성과 중 일부로 전환됐다. 이러한 불공정한 원·하청 관계에 따라 부품회사 노동자들의 임금인상은 매년 억제됐고, 이로 인한 임금수준 격차는 이제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게 되었다. 

물론 현대자동차 사측의 입장에서 보면 경영합리화라는 측면에서 부품단가 인하를 주장할 수 있는 근거와 정당성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연대와 단결을 추구하야 할 노동조합운동의 입장에서는 이를 용인할 수 없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그간 자동차연맹, 금속연맹, 금속노조의 역사를 거치며 원·하청 불공정 거래문제는, 노동조합 내부에서 누구나 이야기 하는 그러나 누구도 직접적으로 부딪치지 않는, 노동자 연대를 위한 핵심 화두가 됐다. 이쯤에서 현안으로 다시 돌아와 보자. 횡령된 ‘1천억 원’이라는 눈에 보이는 증거에 계급적 분노를 표현한 현대자동차지부 조합원들은, 아니 금속노조를 포함한 노동조합운동 진영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심증만은 명확한 부품단가 후려치기에 대해서는 애써 눈을 감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정몽구 회장의 공판에 따른 무쟁의 선언은 비판하지만, 불공정 거래에 기인한 성과금에 대해서는 침묵했던 것 아닌가?    
  
안타깝게도 나는 현대자동자치부의 돈 잔치에 대해서 내부에서 집요하게 문제제기하는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오직, 회사가 ‘회장님’에게 쏠린 관심을 돌리기 위해 고육지책으로 돈을 풀었고, 그런 상황에서 노조는 공정한 대가를 요구하는 지극히 정상적인 방법 즉 임·단협 교섭이라는 틀을 이용해 정당하게 돈을 받았을 뿐이라는 인식만 횡행하고 있다. 또한 이는 현재 현대자동차지부 집행부의 ‘혁혁한 성과’로 기록되고 있다. 이러한 ‘성과’에 대해 소위 개량주의자들부터 계급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제대로 시비를 거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 그나마 가장 전투적이면서 계급적 원칙을 강조한다는 기아자동차 내 일부 현장조직에서 시빗거리를 만들어낸 적이 한 번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이는 “‘저들이’ 1천5백만 원 받을 때 ‘우리는’ 겨우 5백만 원밖에 못 받았다.”며 집행부를 공격하는, 그다지 품위를 갖추지 못한 내용으로 기억한다. 이에 대해 현대자동차지부 일부 조합원들은 “적자 나는 기업의 저것들이 우리하고 똑같이 요구한다.”며 알게 모르게 불만을 터뜨린다는 소리도 들린다.    

이처럼 현대자동차지부의 타결내용에 대해 어떤 식으로 비판을 하더라도 거기에는 비정규직이나 부품회사 노동자들을 고려하는 내용이 담겨 있는 경우는 없었다. 자기들만의 관계에서는 모두 옳은 소리일 수 있지만, 결국에는 자기들만의 이해관계라는 덫에 빠져 있다는 것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소리들이다. 금번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사실 우리 노동조합운동은 자신들만의 이해관계를 제기하는 방식과 계급적 연대의 이해관계를 제기하는 방식이 늘 분리돼 따로 놀았다. 후자는 특히 대공장에서 정권을 잡지 못한 현장조직이 집행부를 공격할 때 더욱 빛이 났다.      

양보를 요구마라, 구체적으로 실천하라!

‘회장님’이 자신들의 피땀을 횡령한 명백한 증거 앞에서 거품을 물며 “우리 돈 돌려줘!”라고 했던 주장들이 정당화되려면, 부품사와 사내외 하청 비정규직의 피땀의 성과가 현대자동차로 흘러들어와 정규직들에게 일부 분배됐던 것에 대해서도 최소한의 염치를 보여야 한다. 그렇다고 할 때, 부품단가 인하가 얼마만큼의 합리성과 공정성이 있는 것이었는지, 현대자동차의 재무성과 중에서 어느 정도가 불공정 거래로 인한 것인지 먼저 명확해져야 한다고 주장하지 말자.

현대자동차라는 커다란 저수지에 고여 있는 물을 저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길어다 마시면 되는 것 아닌가? 지금까지 자본이 쳐둔 울타리 밖에서 물세를 내면서 겨우 조금씩 그것도 불평등하게 나눠 먹었다면, 이제 이것을 크게 나누자. “나누자.”는 것은 현대자동차 등 독점 대기업 노동자들에게 “당신들이 좀 양보해라.”라고 비굴하게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라는 괴물의 아가리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해 정당하고 적극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는 요구이다. 구체적인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산별 복지기금이든 고용기금이든, 산업 및 사회적 차원에서 보다 평등하게 임금 및 복지에 접근하는 방식들은 이미 다양하게 존재한다.      

어떤 이들은 대공장 조합원들을 설득하고 양보를 이끌어내기 어렵다고 한다. 소위 노동운동 내부 ‘우파’의 주장이다. 다른 이들은 왜 노동자 내부에서 책임을 찾는가, 공격의 초점은 자본에게 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소위 노동운동 내부 ‘좌파’의 주장이다. 둘 다 구체적인 실천을 가로막으면서 현실에서 타협하고 담합하는 기제를 유지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좌우를 막론하고 대기업 현장조직 어느 곳도 조합원들의 표로부터 자유로운 곳이 없고, 주장과 실천이 따로 놀고 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운 곳이 없다.  

진정 현실을 변화시키고 싶다면, 소극적인 양보 요구를 넘어서 보다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행동이 필요하다. 계급투쟁과 같은 천상의 공자님 말씀만을 이야기하는 것을 넘어서 비루한 현실에 부닥쳐 ‘몸으로 때우기’를 해야 한다. 그러한 구체적인 실천의 과정 속에서 계급적 학습과 경험이 축적될 때만이 비로소, 한국 노동운동이 자랑하는 ‘전투성’이 기업의 울타리를 뚫고 산업차원의 계급성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어렵다는 핑계나 계급이라는 추상으로의 회피는 더 이상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2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