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연구목적과 연구문제
이 연구는 남성과 구조적으로 다르게 경험될 수 있는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 패턴이 여성의 노동조합 참여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전제 하에, 현재의 노조 ‘조직 안’에서 여성노동자의 참여활동이 어떠하며 문제점은 무엇인지를 짚어본다. 여성노동자 중에서도 노조 여성간부들의 노조 참여 활동을 다룬다.
기존 국내・외 연구들은 여성노동자의 노조 참여가 활발하지 않다고 진단하고 있다. 특히 양적 연구 위주이며 질적 연구의 경우 최근 시기를 다룬 연구가 적다. 이런 점에서 여성노동자 특히 노조 여성간부들의 노조 활동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실태를 다시 살펴보는 것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본 연구의 연구문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여성 노조간부의 생애주기에 따라 노조 참여에 변화가 있는가, 변화가 있다면 인과적인 경향성이 있는가, 둘째, 여성 노조간부의 노조활동과 관련한 고충은 무엇인가, 셋째, 노조의 전략과 프로그램 및 조직화에 어떤 상관관계(영향과 반응)를 갖고 있고, 노조의 대응 과제는 무엇인가.
본 연구는 문헌연구와 사례조사 방법을 사용하였다. 사례조사는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양 노총의 주요 산별노조, 양 노총에 가입되어 있지 않은 일반노조의 여성활동가를 면접조사 하였다. 면접조사는 2016년 8월부터 2016년 11월까지 3개월 동안 진행하였으며, 면접에 참여한 인원은 남성활동가 2명을 포함하여 총 24명이다.
Ⅱ. 여성 노조간부의 노조 참여 분석
1. 여성 노조간부로 어떻게 살고 있는가
고착화된 ‘여성’간부의 업무
면접에 참여한 대부분의 여성 노조간부들은 업무에 있어서 다양한 차별을 경험했고 현재도 경험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사업의 주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업무부서는 소수의 엘리트 남성이 독점하고 여성은 주로 선전, 교육, 총무의 일을 맡게 된다. 한국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여성에 대한 유리천장 현상과 성별 직무 분리가 노조 내에서도 별다른 고민 없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예전과 달리 최근 들어 여성이 임원급으로 승진하거나 노조 내 주요 부서에 배치되는 경우가 늘어났고 그에 따라 여성이 자신의 의견을 좀 더 적극적으로 표명할 수 있게 된 것도 무시할 수 없는 변화이다. 이에 대해 성평등이 실현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지만 고연령, 신규활동가 미유입 등 재생산이 원활하지 못한 조직 정체가 원인이라고 판단하는 면접참여자도 있다.
한편 현재 산별이나 중앙의 노조 내에는 노조에서 채용한 채용간부와 산별지부에서 파견된 현장파견간부가 함께 활동을 하고 있다. 노조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 채용간부와 현장간부 사이에는 직종에 따라 임금의 차이가 크게 나는 곳도 있는데, 이것은 잠재된 갈등의 불씨이기도 하다. 또한 일부 노조에서는 내부의 위계질서를 만들어 채용간부를 낮춰서 보는 시각들도 있었다. 노조에서 근무하는 채용간부를 같은 활동을 하는 동지로 생각하기 보다는 피고용인으로 대하는 간부들도 있다고 하였다.
여성 활동가로의 자각
사회 전반적으로 성차별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고 이러한 현상이 노조 내에서도 별 다른 저항 없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여성활동가들이 여성주의에 대한 정체성을 갖기는 어려웠던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여성활동가의 대부분은 80년대 전후의 학생운동에서부터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시대적으로 정치적인 대의가 활동의 주된 목표였기에, 조직 내 평등에 관한 요구들은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많은 여성 활동가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냥 활동가가 아닌 ‘여성’활동가로서 자각하게 된다.
저도 사실은 여성주의 관점이라든가 그런 게 전혀 없다가 ◯◯년부터 제가 여성 사업을 했다고 했잖아요, 그때부터 터닝 포인트로 봐야할 것 같아요. 저의 모든 직장 생활과 주변 일상생활들이 많이 바뀌었으니까요. 그때까지만 해도 사실상 뭐 여성문제에 대해서 관심이 있거나 그러진 않았거든요. 업무를 하면서 제가 체화된 케이스에요. 이제 하나하나의 문제를 여성 인권이라든가 여성노동문제로 연결하면서 문제화하면서 보는 시각이 생긴 거죠.
2. 문화적 차원에서의 성차별과 대응
술・노래방 문화
“왜 노조에서는 술을 마시는가?”라는 질문을 꺼내자, 면접참여자 N씨는 현장으로 내려갈수록 강력해지는 남성주도의 문화에 대해 이야기하며 대기업 노동자들의 문화가 노조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보고 있었다. 무엇보다 술자리는 “일반화 할 수 없지만 남성들의 관계형성(특히 권력을 중심으로 서열을 정하는)을 위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
또한 술자리는 노조 활동 영역의 하나가 되기도 한다. 여성 비정규직이 다수인 노조의 간부인 한 면접참여자는 남성 정규직들이 사측과 술자리를 가지며 미리 교섭을 할 수 있는 인적 네트워크를 지니고 있다고 보고 있었고, M씨는 노조의 활동 영역에 술자리가 포함되어 있다고 보고 있었다. 술자리가 노조의 중요한 활동 영역 중 하나라는 사실과 함께 고려할 점은, 늦은 시간까지 계속되는 술자리가 가사노동 및 양육을 맡는 여성으로 하여금 노조 활동을 위축시킨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술자리에 대한 인식과 대응이 면접참여자의 조합 직위에 따라 다소 다르게 나타나고 있었다. 평조합원을 자주 만나 조직기반을 굳건히 해야 하는 선출직은 노조의 술문화에 대해 처음에는 부정하고 비판했으나, 후에는 어느 정도 술자리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었다. 반면 채용 간부로서 맡은 직무들을 수행해야 하는 면접참여자의 경우, 2차・3차로 이어지는 여성 배제적인 술문화에 대해서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었다. 주목할 사실은 선출 간부인 면접참여자들이 술자리를 통해서 조합원을 만나는 방식을 수용한다고 해도, 기존 술자리 문화를 그대로 쫓아가는 대신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성이기 때문에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라는 요구를 들은 P씨는 자신이 “여성이 아닌 동지”임을 강조했다. M씨 역시 “술자리에서의 정보를 쫓아다닌다”기 보다는 “일 중심으로” 조합 활동을 하는 것을 대응책으로 삼고 있었다.
‘남성중심적이고 전투적인’ 초창기 노조 문화의 변곡점
노조 문화의 남성중심성은 한국의 초창기 노조 문화가 형성되고 발전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동시에 투쟁 동력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하나의 구심점이기도 했다. 문제는, 노조 문화의 남성중심성이 고착화되어 현재 시점에서는 그 자체로 하나의 권력과 권위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남성중심적인 노조 문화는 단순히 “남성 위주의 축구, 족구, 이어달리기(T)”와 같은 행사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저항성의 표상이자 자랑스러운 조합원으로서의 정체성의 상징인 ‘조끼문화’ 역시 ‘자연스러움’과 ‘권력’ 사이의 변곡점 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조합원으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수단인 ‘조끼’는, 한편으로는 제복문화의 영향을 받은 남성권력 문화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는 여성 조합원에 대한 검열로 작용하곤 한다.
초창기 노조문화가 고착화되어 노조 내에서 권력화된 모습은 소위 ‘운동권 사투리’라 불리는 언어에도 존재한다. 여성 다수 사업장 간부인 B씨는 상급단체와 함께 회의를 할 때 “투쟁하고 심각한 분위기와 용어 자체가 어렵다(B)”고 했으며, 마찬가지로 여성 다수 사업장 간부인 C씨의 경우에는 기존의 노조의 문화가 “체계적이고 약간 군대식 문화”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노동운동진영 내에서 사용된 은어로 이 문화를 공유하지 않은 수많은 노동자집단에게는 낯선 단어들이다.
가족
기혼 면접참여자 중 대부분은 자녀가 없거나, 출산 후 자녀를 “혼자 집에 있을만한 시기”까지 양육한 상태다. 면접참여자 섭외 과정에서 생애주기 2시기(자녀 출산~자녀 9세 미만)에 해당되는 간부나 조합원은 찾기가 힘들었고, 3시기(자녀 9세~자녀 성인기)에 해당되는 면접참여자들은 대부분 출산 이후 가사분담과 육아분담 문제로 가정에서 갈등을 겪었고, 그 갈등을 어떤 방식으로든 극복하거나 해결하여(혹은 인내하여) 노조 활동을 이어나간 ‘생존자’들이었다.
한 면접참여자는 “여성의 활동력이 가장 높은 30대”에 출산을 했는데, 육아를 해야 되는 활동가를 배려하지 않는 조직적 풍토 등으로 인해 온전히 개인적으로 육아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결혼 직후부터 있었던 배우자와의 가사분담을 둘러싼 갈등은 출산 후 양육분담에 대한 갈등이 되었고, 이 갈등은 “아이가 혼자 집에 있을만한 시기”가 되기 전까지 10여 년간 이어졌다. G씨 역시 집안일과 양육 및 교육문제와 관련하여 배우자와 크게 갈등을 겪은 바 있다. G씨는 자신과 배우자 두 사람 다 일을 해야 된다면 자신의 일을 존중해줘야 된다고 배우자를 설득했고, 그 갈등을 겪은 후 “많이 괜찮아졌다”고 했다. 노조 활동과 가사・양육이라는 이중 과제에서, 여성은 가정 내에서 시간 배분을 둘러싸고 지난하게 갈등을 겪어야 하는 것이다.
여성이라고 해도 다 비슷한 경험을 하는 것도 아니다. 특히 기혼 유자녀 여성에게는 아내로 며느리로 엄마로 많은 것을 요구하게 되는 사회에서 이러한 경험을 하는 여성과 그렇지 않은 여성은 생애주기에 따라 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출산과 육아에 대한 부담이 없는 남성중심적 사고를 하는 조직에서 여성에 대한 섣부른 배려는 오히려 여성의 권리를 침해하는 현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Q씨는 기본적으로 여성이 일하기 위해서는 가족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하며, 특히 노조의 특성상 업무에서 오는 감정소모와 갈등이 있기 때문에 더더욱 가족의 지지가 필요하다고 했다. 기혼 여성이 조합 활동을 하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관문 중 하나는 배우자(혹은 가족)의 정서적 동의와 지지이다. 특히 결혼 후에 조합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이들은 배우자의 동의와 지지가 조합 활동을 해나가는 데 있어서 중요한 변수가 되었다.
3. 제도적 차원에서의 성차별과 대응
여성할당제 : 확장성 미약한 선거용제도?
준비시기까지 포함하면 18년 정도에 이를 만큼 여성할당제는 노조 역사에서 오래되었고, 최초였던 적극적 조치제도이다. 시행시점부터 고려하면 10년을 전후한다. 여성할당제의 효과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보다 문제점에 대한 지적이 더 많다. 첫째, 면접참여자들에 따르면 지금의 여성할당제는 남성 가부장적 조직체계 하에서 여성 숫자를 채우려고 하는 기계적 배분으로써,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여성의 주체적인 조직화에 걸림돌이 되는 상황도 빚어지고 있다.
둘째, 여성할당제를 통해 여성들이 노조의 상근자나 임원으로 선출되어도 그 역할과 비중은 노조의 주요 정책과 전략을 추진하는 데 필수적으로 고려할 대상이 아니다. 설상가상으로 여성 임원을 “꽃”으로 대하는 태도도 무시할 수 없는 현상이다. ‘보이스가 필요하지 않은 임원’은 위원장을 보위하고 빛내주는 꽃 같은 이미지 효과뿐만 아니라 그 자격을 ‘비상근’으로 규정하는 데서 본질을 드러낸다.
셋째, 여성할당제로 뽑힌 간부의 자격과 자질도 비판의 대상이다. 그 수가 적기 때문에 대표성과 책임성의 수위는 남성 대의원, 중앙위원, 부위원장들 보다 훨씬 높다. 특정 세력을 대표하는 게 아니라 여성 조합원 전체를 대변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성 간부의 개인적 자질이 제도의 존폐 여부를 평가할 만큼 중요하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적 목적으로 그 지위가 활용되고 있다는 면접참여자의 날선 비판과, 임원들이 젠더의식을 가지고 여성의제와 직책을 수행했는가에 대해서 회의적이라는 또 다른 지적은 여성할당제가 바람직하지 못한 경로로 고착화 될 수 있다는 우려도 갖게 한다.
넷째, 여성할당제가 평조합원의 노조활동 참여를 촉진했는가는 할당제로 선출・지명된 여성 간부들이 중앙과 현장에서 어떻게 활동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면접참여자 G씨는 할당제로 선출된 간부라도 자신의 활동이 노조에 기여한다는 것을 경험하면서 노조활동에 적극적으로 변했다고 구술했다. 실제로 대의원으로 뽑힌 여성들이 현장 활동가나 간부 유경험자들이어서 목적의식적인 활동을 할 수도 있지만, 대의원들이 모든 의제에 정통하지는 않다.
다섯째, 여성할당제가 성평등 달성에 기여했는가라는 점에 대해, 앞의 세 가지 설명은 그렇지 않음을 암시한다. 나아가 최근에는 여성할당제가 기득권의 골격을 흔드는 상황으로 받아들여지는 계기가 생기면서 ‘역차별’이라는 공격 담론이 형성되고 있다.
Ⅲ. 여성 노조간부가 바라 본 노조의 위기와 기회
1. 여성의 노조참여가 저조한 이유에 주목하자
면접조사를 하면서 반드시 했던 질문 중 하나가 “왜 여성은 노조에 참여하지 않는가?” 또는 “왜 여성은 노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가?”이다. 예상과 달리 연구진들은 명쾌한 답을 얻지 못했다. 이 질문은 이번 연구의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이기도 했다. 이렇다 할 답이 나오지 않았음에도 매번 질문을 했던 이유는 그 답이 사회구조적인 문제에서부터 개인적인 문제까지 넓고 깊게 퍼져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까지 노조 내에서 이러한 문제들을 겪고 있는 여성들로부터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이유를 들어볼 기회는 많지 않았다.
여성에 대한 구조적인 성차별
노조 내 업무 분담에서 여성이 본인의 의사나 능력과 관련 없이 일부 업무로 한정되는 중범위 차원의 구조적인 문제에 대해서 자세히 다루었다. 그런데 보다 거시적으로 여성 노동자의 참여를 저해하는 구조적인 문제로써 노조 내 여성차별의 근원적 배경이 되는 가부장적인 사회구조가 있다.
면접참여자 K씨의 경우 노조에서 같이 활동하는 여성을 남성들이 활동가나 간부로 대하기보다는 여성의 틀에 맞춰 규정하고 배제하고 있다고 하였다. 여성이 노조에서 하는 활동이 활동 자체로 평가받는 것이 아니라 ‘여자가 이렇다 저렇다’로 평가받는 상황에 문제제기를 하는 여성에 대해서 남성들이 집단적으로 대처하기도 하면서 여성활동가는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하였다.
가부장적인 조직 내에서 여성은 자신의 목소리를 내면 기가 센 여자로 낙인찍히거나 조직에서 배제당하고 가만히 있으면 소극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성이 나서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배제당하거나 낙인찍힐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기 때문에 굳이 이러한 위험을 무릅쓰고 노조를 위해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이유가 없어진다. 차라리 개개인에 대한 평가가 아닌 ‘여자들은 소극적이다’라는 통상적인 평가에 안주하는 것이 여성 개인의 입장에서는 현명한 선택일 수 있다는 것이다.
노조 내에 만연한 가부장적인 조직구조는 여성의 참여를 저해하는 요소일 뿐만 아니라 참여하고 있는 여성들의 적극적인 활동도 방해하고 있다.
출산, 육아로 인한 불이익
여성들의 출산과 육아 시기는 개개인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대부분 사회적 활동이 가장 활발한 시기와 겹쳐져 있다. 많은 여성들이 직장이냐 가정이냐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는 것도 출산과 육아 시기가 사회활동에서 가장 많은 성과를 내야 하는 시기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출산과 양육을 하면서 일까지 하고 있는 여성들을 배려하지 않는 노조에는 여성들이 참여하고 싶어도 참여할 수가 없는 상황인 것이다. 타임오프제를 통해서 조합 활동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제한되고 출산과 육아를 담당하는 여성이 가장 먼저 배제되는 현상은 20~30대 여성의 많은 수가 노조 활동을 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으로 연결된다. 심지어 한 면접참여자는 30대에 출산휴가를 다녀온 후 일하던 부서가 사라져 한동안 ‘대체인력’으로 일을 해야 했으며, 직장을 잃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자녀계획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했다.
여성에 대한 대상화
앞서 면접참여자 중 동료인 남성활동가들이 자신을 동지가 아닌 여성으로 인식하면서 성희롱 등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다고 구술하였는데, 이는 여성을 성적 대상화함으로 생겨나는 대표적인 문제이다. 또한 성적 보호대상자로 여성을 대상화하는 것은 ‘여성의 헌신성’을 강요하게 되고 부당한 처우에 대항할 수 없게 만들고 있다. 이렇듯 여성에 대한 대상화는 이 틀을 벗어나는 여성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를 함으로써 여성에 대한 선입견을 더욱 강화시키게 된다.
제가 90년대에 속한 정파(생각)에 있어서는… 여성은 어머니의 품과 같다는 것이 강하게 있었어요. 여성은 조직의 꽃이고, 어머니의 품과 같다는. 그게 이데올로기적으로, 조직운동 내에서의 어떤 문화와 품성으로 작동했던 시기가 있었거든요. 저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공격적으로 대응을 하면 그게 어머니의 품과 같지 않게 되는 거죠. “쟤는 되게 시니컬하네” 이런 반응이 실제로 있었어요.
2. 남성 중심적인 노조 정체성을 탈출하자
남성중심적인 노조의 정체성은, 주류 노조가 대기업・공공부문・정규직・남성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비판과도 맞닿는다. 주류 노조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 조합원의 정체성이 노조의 정체성에 포함되어야 한다. 동시에 노조에서 오래 활동해 온 면접참여자들은 소모적인 노조의 운동 방식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 있었다. 한 면접참여자는 “노조간부라는 이유로 개인생활조차 보장받을 수 없는 현실”이 자신의 개인 생활을 침해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현재는 조합원으로 활동하는 면접참여자 역시 “비인간적으로 살고 있는” 노조 활동가들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쉬는 날에는 무조건 집회, 가투, 연수·회의 등 다 잡혀있기 때문에 자기 취미생활을 즐기며 노조활동 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사람 사는 세상 위해서 노조활동 하는데 우리가 사는 건 어떻게 이렇게 비인간적이냐. 이게 말이 안 된다’는 소리를 다 하는 거예요. …현역에서 은퇴한 활동가로서는 평소에 못했던 취미활동을 엄청 하죠. 저 같은 경우 빈 시간이 없어요. 왜냐면 그게 보상심리도 있고…. 지금 노조운동하는 사람들 보면 안타까워요. 너무 지치고 자기를 챙길 시간도 없고….
현장에서도 “어머니로서의 희생”을 요구받고, 조합에서도 간부로서 희생 요구를 받는 한 면접참여자는 노조운동이 “인간 기본 생활권들을 누려가며 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돼야 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노조에서 활동가들에게 요구하는 ‘헌신적인 활동가’라는 정체성은 활동가들에게 노조를 ‘지속적으로 활동하고 싶은 곳’이 아니라 ‘소모적인 곳’으로 여기게 만든다. 여기서 빚어지는 갈등은 조합 활동에 대한 회의에서부터 조합 이탈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지속 가능하지 않은, 소모적인 노조 활동 방식’에 대한 고민이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다.
간부로서 말씀 드리자면 사회가 전반적으로 희생을 강요받는데 간부들도 희생을 요구당하는 게 사실이에요. 노조에 노조 인권이 없어요. 저 역시도 지부장 하면서도 상근자를 채근하고 관리자처럼 움직여야 될 때 하고 싶지 않다는 걸 너무 많이 느끼거든요. 노동운동 하시는 분들이 이제 마인드, 자존감 이런 것만으로 활동하기엔 젊은 사람들이 영입되기는 정말 어려워요. 젊은 사람들 영입이 되려면… 인간 기본 생활권들을 누려가면서 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돼야 한다는 거죠. 현재는 이런 것들이 노조 문화에서 현저하게 부족한 게 아닌가.
면접참여자들의 구술을 통해서 발굴한 노조의 정체성은 ‘남성중심적’이고 ‘헌신적인(혹은 소모적인) 활동가’ 정체성이었다. 노조의 다양한 정체성 중 이 두 가지 정체성을 끄집어낸 것은, 이들이 노조의 위기를 불러일으키는 요소 중 하나가 되고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조합원 개인이 지닌 사회적 정체성이 더욱 풍부하게 조합 정체성으로 엮일 필요가 있다.
3. 여성 노동자의 세력화를 차단하지 말자
여성의 정치세력화와 조직화를 위해 조직결성 초기부터 남다른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한 참여자는 조직화와 정치세력화가 권력획득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잘 지내던 동지들과도 갈등을 겪고, 개인의 내면의식이 “폭로”되며, 일종의 “헤게모니 싸움”이라고 했다. 그것은 “잠재되어 있던 모순”을 드러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활동가는 여성의 노조활동이 남성 혹은 주류 사회의 “배려”가 아닌 “권리”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강단진 사람들(여성)이 나와서 보니까 조직이 남성 중심으로 가더라고. 너무 이상하더라고. 개개인은 다 훌륭한데 조직이 봉건인 거야. …그 사람들(남성 활동가들)이 대의적으로는 동의할 수밖에 없는 거지. 속으로는 싫어도. 나중에 싫을 때 노골적으로 반감하는 것 보면 개인적인 것이 보여요. ‘여성이 권력이 왜 필요해’ 이러는데. 아니, 우리는 권력을 달라는 게 아니다, 우리는 조직에 좀 더 봉사하고 희생할, 열성을 가지고 복무할 지위나 직책을 원하는데 이게 권력이라니. 속마음이 그때 다 나타나더라고. 그래서 그때 동지들하고 엄청 싸우고 개인적으로 척을 지고…. 어떤 헤게모니로 드러날 때는 의식이 다 드러나.
한 면접참여자는 여성들이 스스로 조직되지 않는 한, 성평등은 달성될 수 없다고 평가했다. 그는 “한국의 노동운동에서 세력화를 원하는 남자 위원장은 많지 않다”고 지적했다. 개인적 성향의 문제를 넘어 구조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위원장 중심의 의사결정방식은 노조의 선거제도와도 맥락이 닿아 있다. 노조는 3년 임기의 선출방식으로 조직대표를 뽑는다. 임기동안에 성과를 내야 연임을 하지 못하더라도 후일을 기약할 수 있는 구조이므로, 차별 극복과 같은 중장기적 계획이나, 다수의 남성 조합원들의 기득권을 침해하거나 관심대상이 되지 못하는 의제를 밀어주려고 하지 않는 속성이 있다. 뿐만 아니라 중앙이든 지부이든 임기가 종료되고 새 집행부가 당선되면 기존의 사업들이 연속되기 어려운 부분들이 발생한다. 동일선 상에서 여성 세력화를 목표로 몇 년간 열심히 교육과 사업을 하더라도 사람이 바뀌면 다시 처음부터 새로운 사업이 시작되는 과정이 반복된다. 이에 대해 영역이 넓어지는 것이 아니라 ‘단절’이라고 말한다.
한 면접참여자는 위원장 중심의 성과주의 조직체계가 문제이기는 하지만, 위원장에게 그 정도의 권한이 부여되지 않는다면 조직을 이끌기 어렵다는 불가피한 측면을 설명하면서도, 선출직 내에서도 역할배분이 적절히 이루어지는 게 필요하다고 했다. 또 다른 면접참여자도 위원장의 권한과 실질적인 집행을 분리하는, “협업적이고 수평적인” 의사결정 구조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위원장 중심주의”는 두 가지 원인이 결합되어 나타난 결과이다. 한편으로는 한국적 특수성으로써 군대의 계급과 적대적 문화가 직장문화로, 직장문화가 노조문화로 연결되면서 독특한 가부장적인 남성 편향적 조직문화가 만들어졌다. 다른 한편으로는, 노조가 조직 초기에는 역동적이며 경량화 된 사회운동적 조직 성격을 띠지만, 성숙단계에 들어서면 체계화된 위계질서와 세부 업무규정, 그리고 중앙집권화 된 관료제적 조직형태로 변모하는 노조 발달 과정도 한 몫을 한다. 권한 집중은 선거 국면마다 반대편 정파를 “죽여 놓는”, 그래서 종국에는 노조의 기반세력이 침하되는 결과를 반복해왔다. 결국 지금의 노조 활동은 “살리는 운동”이 아니라 “모두가 떠나고 싶어 하는 활동”이 된 것이다. 이는 노조의 조직 위기이자 심각한 운동방식의 위기라는 것을 드러낸다.
Ⅳ. 결론을 대신하여
결론을 대신하여 연구문제의 잠정적인 답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여성 노조간부의 생애주기에 따라 노조 참여에 변화가 있는가, 변화가 있다면 인과적인 경향성이 있는가에 대해 노조 참여에 변화가 있는 것으로 분석되었다. 노조간부는 일반적인 여성 노동자(직장인)와 노동조직의 활동가라는 이중적인 정체성을 안고 있는데, 면접참여자 중에서 전자가 우세한 사례는 평조합원을 제외하고 거의 없었다. 일부 면접참여자는 노조활동기간(근속)이 길어지면서 ‘여성노동자’로서 자각하는 계기를 갖게 되었고 노조간부의 역할을 새롭게 인식하기도 했다. 40~50대가 주류인 면접참여자들이 결혼과 출산을 했을 당시에는 국가 제도적으로나 조직적으로 지원을 거의 받지 못했다. 유산을 경험한 이들도 있고, 둘째자녀 계획을 포기한 이도 있으며, 이혼위기까지 몰린 몇몇 사례도 있었다. 개별적으로 사적인 돌봄지원 체계(부모님 혹은 돌보미 고용)를 구축하지 않고서는 활동을 할 수 없었다. 제3자의 돌봄을 지원받을 수 없었던 참여자들은 유・무형의 지원을 받았던 이들 보다 훨씬 심각한 일・가정 양립 갈등을 겪었다. 흥미로운 결과는 참여자들 중에서 간부 활동 중에 결혼, 출산, 양육을 경험한 이들 누구도 활동을 중단(육아휴직을 제외하면)한 경력단절을 경험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참여자들의 노조에 대한 헌신성을 엿볼 수 있다. 이는 학생운동을 경험한 이후 노동운동단체로 사회활동을 시작하던 80년대 학생운동권 출신 노조 활동가들에게서 드러나는 모습이기도 하다. 그런데 과거의 얘기가 아니라 현재 양육이 진행 중인 노조간부의 경우에도 유사한 모습이 드러났다. 다만 차이는 제도적으로나 조직적 차원에서 물적・심리적・관계적 지원이 다소 개선되었으며, 배우자의 역할분담이 늘어났고, 그만큼 일・가정 갈등을 개인의 책임과 부담으로 짊어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변화도 개인적・조직적 속성에 따라 편차가 있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유추할 수 있는 결과는 면접참여자들이 대체로 40~50대로 조직 몰입과 애착을 경험하는 방식이 ‘연령+세대효과’와 무관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개인의 희생을 통한 조직헌신’이 생애주기적 관점에서, 젠더적 시각에서 지속가능한가라는 물음을 던졌을 때, 이후 세대의 간부들과 차별점을 보일 수도 있는 대목이다. 결론은 일반화하기 어렵지만 여성 노조간부의 노조 참여는 생애주기적 단계의 압박을 매우 심하게 받아왔으면서도 개인적, 사적인 비용과 대가를 치르면서 조직적 헌신을 하게 되는 인과적 경향성이 면접참여자들에게는 우세했다. 그렇지만 그것이 향후에도 계속될 것인지는 미지수이며, 미혼 면접참여자들의 구술을 고려하면 오히려 약화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둘째, 여성 노조간부의 노조활동과 관련한 고충은 무엇인가에 대해, 면접참여자들은 의사결정구조에서의 발언기회와 발언권력, 맡은 직무, 일상적인 생활문화, 공식・비공식적인 회식, 교육 등에서 성차별적인 행동과 구조의 문제들을 지적했다. 핵심은 면접참여자들이 남성 가부장적인 조직체계와 문화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고 평가하는 점이다. 특히 남성, 정책부서, 엘리트, 대공장, 대기업 등으로 상징되는 노조의 권력과 권위가 하나의 배타적 조직문화를 형성해왔다고 지적했다. 면접참여자들은 중앙과 산별단위는 노조간부 간의 견제와 외부 개방성 등의 영향으로 성차별적 문화가 조금씩 바뀌어나가고 있지만 현장 단위에서는 여전히 심각하다고 평가했다.
셋째, 노조의 전략과 프로그램 및 조직화에 어떤 상관관계(영향과 반응)를 갖고 있고, 노조의 대응 과제는 무엇인가에 대해, 면접참여자들은 가장 먼저 여성할당제의 횡보적 상태를 우려했다. 일부에서는 역차별 담론에 부딪치고 있기도 했다. 여성할당제는 전체 노조가 통일적으로 도입한 최초의 적극적 조치이자 여성의 조직화를 위해 밑바탕이 될 것으로 기대했던 제도이다. 면접참여자들은 그런 유의미한 제도를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성장・유지시킬 것인가에 대해서는 뚜렷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다만 이 문제를 오래도록 고민했던 면접참여자의 의견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는 노조가 전략적・조직적으로 인적・재정적 자원을 배치해야 하며, 성인지적 관점을 노조 활동에 도입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여성 노조간부의 노조경험을 통해 드러난 노조의 위기는 노조의 정체성, 조직화, 문화 영역에서, 변화된 상황에서 새롭게 등장했거나 혹은 오래도록 모순으로 남아 있던 문제들이 노조 전략과 프로그램으로 포용되지 못해왔던 결과로서 해석된다. 때문에 위기를 탈출하려면 남성・중장년・대기업・정규직으로 구성되는 조합의 반대적 구성을 이루는 집단의 정체성, 조직화, 문화를 포용해야 한다. 적어도 면접참여자들의 구술을 종합해보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관점과 실천 예를 들면, 젠더적・생애주기적 시각에 따른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