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과 노조, 도구적 의존을 넘어서기 위하여

노동사회

당과 노조, 도구적 의존을 넘어서기 위하여

편집국 0 3,203 2013.05.29 09:25

17대 대선투쟁에서 민주노동당이 얻은 결과는 누가 보아도 참담한 패배다. 투표율이 낮았다거나 다자구도로 인해 불리했다는 것은 변명이 될 수 없다. BBK 논란 역시 이유가 못 된다. 당내 경선으로 후보가 선출된 이래 민주노동당은 독자적 득표 추동력을 한 번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상황변수를 돌파할 스스로의 상수를 애초에 갖고 있지 못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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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은 ‘내용적, 사회운동적 결합’을 강화해나가는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의 정례협의회 모습. ▶ 매일노동뉴스 ]

슬로건들 사이의 공백… 전략도 비전도 없었다

이러한 패인은 흔히 “전략도 비전도 없었다”는 말로 요약되고 있다. 물론 신선함을 주지 못하고 국민의 기대에도 반하는 권영길 후보의 문제가 컸다. 그리고 선거대책위원회는 선거운동 종반까지 우왕좌왕했고 당의 조직 가동력도 뒷받침되지 못했다. 따라서 유권자들의 별다른 관심을 끌지도 못했다. 민주노동당 후보는 5년 전의 권영길이 아니라 그냥 12명 후보 중 한 사람일 뿐이었다. 

왜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메시지의 부재가 본질적인 원인이었다. 왜 민주노동당 후보에게 투표해야 하는가, 왜 민주노동당을 키워주어야 하는가, 결국 금번 대선에서 민주노동당이 목 놓아 주장하는 게 무엇인가 하는 이야기가 불확실했던 것이었다. “세상을 바꾸는 대통령”과 “엄마! 민주노동당이 필요해”라는 두 개의 현수막 슬로건 사이는 공백이었던 것이다. 그냥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온, ‘민주노동당 + 권영길’이 선거 전략의 전부였다. 그러나 이것은 선대위 기획단위만의 오류도, 권영길 후보를 추대한 소위 당내 다수파만의 한계도 아니었다. 당의 상태와 수준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국회 원내 진출 이후 무엇을 실현하자는 절박함이 없는 민주노동당의 현주소였다. 

며칠 전 발표된 민주노동당 기관지 『진보정치』의 당원대상 여론조사를 보아도 이러한 평가는 확인된다. 가장 많은 비율인 22.1%가 구태의연한 공약과 차별화되지 못한 당 이미지를 대선 참패의 당내 요인으로 꼽았다. 그 외에 노동자 농민에 대한 계급투표 조직화 실패 20.3%, 참신하지 못한 후보이미지 19.6%, 원내진출 이후 활동에 대한 대중적 심판 18.1% 순이다. 

내부에서 말 많았던 ‘코리아연방공화국 파동’은 실은 득표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고, 그만큼 의미도 없는 미련한 끼워 넣기였다. 물론 이 소동이 핵심 지지층 일부를 더 이반하게 만들었다는 것은 중요하다. 2007년 11월11일의 백만 민중대회 역시 비전 없고 전략 없는 정당의 존재확인용 행사였다. 

계급투표는 작동했는가

71만 표에 불과한 저조한 득표와 관련하여 관심을 끄는 것은 민주노총 등 대중조직의 조직적 지지가 갖는 효과, 특히 ‘계급투표’의 작동 여부다.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 방침을 갖고 있는 민주노총은 이번 대선에서 조합원의 계급투표를 명시적으로 독려했다. 이는 일명 ‘8010 사업’으로 조합원 80만 명이 10명의 지지자를 만들어낸다는 구상이었다. 이에 따라 민주노총은 22일간의 선거운동기간 동안 전국 지역으로 지도부를 총가동해 정치순회를 벌였고, 특히 이석행 민주노총 위원장은 “내가 곧 권영길”임을 외치며 전국을 누볐다. 또한 서울본부를 시작으로 정치실천단도 조직했고, 선거자금 마련을 위해 벌인 세액공제사업으로 10억 원 정도를 조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조합원의 투표는 어떠했을까? 단적으로 말해 계급투표가 작동했다는 징후는 두드러지지 않는다. 울산에서도 권영길 후보 지지율은 8%를 상회하는 데 그쳤고 창원, 거제 등 경남에서도 이명박 바람을 이겨내지 못했다. ‘80×10’이라는 단순한 산수는 허상이었다. 

대선 기간 중 진행된 민주노총 기관지 『노동과세계』의 조합원 설문조사에서는 권영길 후보에게 투표하겠다는 응답이 85%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10월 말경 민주노총 서울본부 남동지구협의회에서 지역 소재 노조 조합원들에게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응답자 중 권영길 후보 지지 비율은 35% 정도에 불과했다. 실제 조합원의 지지율은 두 개의 숫자 사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반 국민들은 5년 전에 권영길 후보를 찍었던 사람 중 50%가 안 되는 유권자만이 금번 대선에서 권영길 후보에게 투표했다고 한다. 민주노총 조합원이라고 권영길 후보를 ‘배타적으로 지지’했다고 믿기는 어렵다. 

물론 민주노총 중앙 차원의 정치사업은 전례 없이 활발했다. 단위 사업장마다 권영길 후보를 지지하는 현수막이 부착되었다. 노동자 밀집 지역의 득표가 상대적으로 높기는 했다. 하지만 같은 시기 강남의 부유층 밀집 지역 아파트에도 좌파 정권을 규탄하고 정권 교체를 희망하는 대형 현수막이 나부끼고 있었다. 노동자 계급투표는 상층 부르주아 집단의 계급투표에 필적할 수 없었다. 

대선투쟁의 와중에서, 그리고 선거가 끝난 후에도 민주노총이 제안하여 당내 논의 끝에 불발된 민중참여경선제에 대하여 아쉬움을 표하는 목소리들을 듣는다. ‘집토끼’라 불리는 조직대중을 민주노동당의 지지표로 묶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방안은 기술적으로 또 시기적으로 부적절했고, 오히려 논의를 거듭하면서 당과 민주노총 지도부 사이의 관계만 껄끄러워졌다. 그 결과 대선재정 확충을 위한 세액공제 사업마저 어려운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하지만 민중참여경선제의 본질적 문제는 좀 더 원칙적인 데에 있었다. 말하자면 민중참여경선제는 한편으로 민주노총, 전농, 전빈련 등 ‘운동권’ 조직을 묶는다고는 하지만 오히려 일반 유권자들과 당을 단절시키는 방식이고, 다른 한편으로 조합원 교육의 차원이라고는 하지만 조합원 대중을 단순 동원대상으로 삼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해서 1백만 표 이상을 득표했으면 성공한 것인가, 또는 민주노총 입장에서 그러한 방식으로 민주노동당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것이 올바른 일인가 하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민중참여경선제를 제안한 진의는 순수했겠지만, 설령 성사되었더라도 그것은 민주노총의 당에 대한 영향력을 확인하는 결과 이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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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중참여경선제는 성사되었더라도 민주노총의 당에 대한 영향력을 확인하는 결과 이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지난 5월 열린 민중참여경선제에 대한 찬반토론회 모습. ▶ 매일노동뉴스 ]

문제는 ‘민주노총당’이 아니라 불건전한 배타적 지지 관계

대선을 전후로 민주노동당의 주요한 한계 중 하나로 ‘민주노총당’이라는 비난 혹은 혐의가 회자된다. 대공장 노조의 영향력과 근시안적 이해에 좌우되는 민주노총의 문제점을 당이 답습한다는 지적이다. 민주노총 대의원대회 폭력사태나 몇 차례의 비리 사건으로 민주노총의 국민적 위상이 하락하면서 당의 지지율마저 같이 떨어지는 상황에 대한 우려도 컸다. 

민주노총의 지지 하락에 대해서 ‘거리두기’는 당이 취해야 할 올바른 입장은 아니다. 그러나 쌍끌이 지지율 하락 경향은 분명해져 왔다. 단지 지지율만 하락한 것이 아니라 진보정당과 민주노총의 잘못된 관행을 서로 묵인하고 고착시켜왔다. 바깥의 국민대중이 외면하게 되었던 것 못지않게 양 조직의 내부가 이러한 문제들에 관성적이 되고 냉담해졌다는 게 문제다. 

대공장 노조의 임금·단체협상에 대하여 당이 의견을 제출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지금도 찬반의 논의야 가능하고 필요하겠지만, 민주노총의 일련의 사건에 대한 당의 사실상의 침묵, 당이 제출한 ‘사회연대전략’이 민주노총에게 거부당한 사례 등은 지난 5년여간 ‘배타적 지지 방침’ 아래에서 양 조직의 내용적 결합 또는 상승을 좀체 이루지 못했음을 증명한다. 

2005년 12월 진보정치연구소가 여론조사 결과를 통해 한국 위기 10대 주범과 노동운동 위기의 주범으로 대기업 노조를 포함시켜 발표했을 때 민주노총이 이를 “심각한 도발”로 규정하고 공식 항의하며 진상조사를 요구한 에피소드에 이르면 고민은 더욱 깊어진다. 

반면에, 대선을 앞두고 민주노동당 사무총장이 한국노총과의 정책연대를 고려하여 한국노총에 공문을 전하고 비정규직 법안 논의와 관련한 과거의 대립에 대해 공식 사과한 사건에 대해 당 내부와 민주노총 산하 조직에서는 엄청난 비난이 일어났지만, 『노동과 세계』는 이에 대하여 한 줄도 다루지 않았다. 총연맹 차원의 공식 논평이나 성명도 없었다. 민중참여경선제 불발에 대한 불만보다 한국노총 공식사과에 대한 분노가 작을 리는 결코 없었다. 이는 아무리 생각해도 기묘하고 불건전한 배타적 지지 관계다. 

그런데 더 우려가 되는 것은 소위 국민파, 중앙파, 현장파로 불리는 민주노총의 정파 구도가 당으로 재생산되고, 당내의 갈등이 당직·공직 선거 등을 계기로 민주노총으로 다시 확대 재생산되는 경향이다. 현재의 구도가 변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경향은 향후 더욱 커질 것이다. 

브라질 노동자당과 총연맹 관계를 모델 삼아야

대선은 끝났고, 이제 미래를 이야기할 때다. 여전히 한국의 진보정당은 조직된 노동대중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 올바르며, ‘민주노총당’이라는 비난은 회피가 아닌, 관계의 건강한 재정립과 내용적 강화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묵인이 아닌 철저한 성찰과 과감한 제안이 수반돼야 한다.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 모두 이제까지 노동계급운동과 노동자 정치세력화 운동의 잠정적 결과물이다. 최종 목표지점의 조직 형태도, 구성도, 내용도 아니다. 대선투쟁 22일간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1997년 노동자총파업과 국민승리21 탄생에서부터 2007년 12월19일에 이르는 10년에 대한 돌아봄과 판단이 필요한 이유다.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새로운 10년과 민주노총 운동의 새로운 10년을 기획해야 하는 이유다. 

방법론적인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배타적 지지 방침은 앞으로도 민주노총이 논의하여 스스로 결정해갈 문제지만, ‘공식적 지지 결정’과 ‘하향식 정치사업’보다는 ‘내용적, 사회운동적 결합’을 강화해나가야 할 것이다.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 사이의 정책적 정례협의를 보다 활성화하고 서로에 대한 의견을 기탄없이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당과 노조는 기층에서 그리고 지역에서 사업을 통하여 자연스레 만나는 기회를 많이 만들어야 한다. 산별노조 운동도 민주노총 바깥에서 지역 당 조직을 통하여 새로운 조직화 경로를 발굴하고 자극할 필요가 있다. 

민주노동당 쪽에서는 노동 등 부문할당제는 폐지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당과 노조의 관계 모델로 보자면 영국 노동당 보다는 브라질 노동자당 경우처럼 하는 게 맞다. 브라질 노동자당은 중앙노동조합총연맹(CUT) 간부 중 대다수가 당원이지만, 당과 총연맹의 공식적-제도적 연관은 없다. 노동조합 활동가들은 개별 당 활동가로서 지역과 각급 당 조직에서 의견을 제시하고 관철시키는 방식을 취한다. 조합 차원의 대선후보 지지방침 결정도 룰라가 1차 집권하던 2002년에야 최초로 이루어졌다. 물론 이는 1980년대 중반 노동자당이 오히려 CUT 건설운동을 추동했던 역사적 맥락과 연관이 있다. 그러나 시간이 걸리더라도 민주노총과 노동자정당과의 관계는 이러한 그림을 지향해야 한다. 

새로운 10년을 위한 ‘각자의 답’을 내놔야

진보정당은 조직된 10%의 노동계급을 넘어 전체 노동계급 형성의 매개이자 구심점으로 나아가야 한다. 민주노총은 진보정당의 초창기 병참기지와 엄호부대 역할을 넘어 계급적 정치운동과 사회운동을 개척해가는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다음 단계 사업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러한 과제 앞에서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은 이제 앞으로의 새로운 10년 동안 도구적 의존이 아닌 생산적 관계를 고민해야 할 때다. 기존 관계와 관성 속으로 안주하는 것은 서로의 발목을 잡는 일이다. 

이러한 막중한 과제를 눈앞에 두고 있음에도, 대선참패의 후폭풍 속에서 상황은 혼란스럽고 어렵다. 새로운 진보정당 창당이나 민주노동당 분당 같은 논의까지 분출하는 와중이다. 그러나 그것은 누구 마음대로 또는 어떤 세력 의도대로 되는 것이 아니며, 반대로 혹자나 어떤 집단이 자유로이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1국 1당 1노총’의 원칙은 잠시 유보될 수도 있다. 현실과 원칙은 실은 가끔 만나는 것이다. 

이 원칙보다 더 중요한 정언명령은 의회와 제도정치 권력에 갇히지 않고 조직대중의 즉자적 이해에 종속되지 않으며 퇴행적 민족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진보정당 운동을 위해 당이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연대와 보편적 계급대중, 다수 노동자의 변화된 존재조건을 반영하는 새로운 총연맹 운동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진보정당운동과 노동조합 운동 모두에게 미래는 없다는 것이다. 모두 각자의 대답을 내놓아야 하는 때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2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