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포럼] 사회공공성투쟁의 오늘과 미래

노동사회

[노동포럼] 사회공공성투쟁의 오늘과 미래

편집국 0 3,954 2013.05.29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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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 오건호 대안연대 운영위원
토론: 정태인 진보신당 서민지킴이운동본부장
      홍주환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위원

날짜: 2008년 6월27일 (금)요일 오후 4시
장소: 한국노동사회연구소 교육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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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자: 사회공공성이라는 개념은 노동운동 속에서 이미 많이 이야기됐고, 최근에는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공공부문 민영화가 이슈가 되면서 새롭게 부각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런 시점에서 그동안의 논의와 현실적인 문제들을 정리할 필요를 느껴 오늘 노동포럼을 기획하게 됐습니다. 발표는 ‘사회공공성운동의 논점 및 과제’라는 제목으로 오건호 박사님이 준비하셨고, 토론은 정태인 진보신당 칼라TV 리포터와 우리 연구소 홍주환 연구위원이 준비하셨습니다. 이제 발표를 듣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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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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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um_01.jpg오건호: 최근 대중운동 속에서 사회공공성 관련 의제들이 실제로 확산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 계신 분들도 많이 경험하셨을 테지만, 개념 그 자체에서도 그렇고 또 개념을 쓰긴 하는데 뭔가 말끔하진 않은, 여전히 홀가분하지 않은 부분이 존재하고 있기도 합니다. 저 역시도 그런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사회공공성 개념 자체에서 발생하는 논점도 있을 테고, 사회공공성운동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논점도 있을 텐데요. 이러한 논점들 중에서 제가 듣고 본 것들을 중심으로 발제문을 작성했습니다. 

다음에, 예전부터 공공성 개념은 있었지만 민주노총이 사회공공성 개념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운동에 나선 것이 2003년입니다. 5년이 지난 지금 신자유주의에 저항하기 위한 대안 개념으로서 그리고 구호로서 사회공공성은 대중조직에서도 자주 사용하게 됐지만, 사회공공성운동을 통해서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이야기인지 구체적인 부분에서는 별로 진전이 없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남발, 남용되고 관성화되고 있는 측면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혹시 그런 부분이 있다면, 사회공공성운동이 등장한 것이 기존의 노동운동과 진보운동의 관성적인 방식을 뛰어넘자는 취지였음에도 같은 일이 되풀이 되고 있는 거라면, 더욱 치열한 논쟁을 통해 극복해야 할 겁니다. 이러한 취지에서 몇 가지 제안을 포함해서 사회공공성운동의 과제를 발제문에 담았습니다. 이제 발제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2003년 사회공공성을 유포시키면서 이 게 진보적인 운동의 개념이 되려면 정치경제학적인 근거가 있어야겠다, 단순히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운동을 넘어서 새로운 사회상을 담을 수 있어야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사회공공성 개념을 ‘탈시장화’, ‘탈이윤화’라는 정치경제학적 개념 틀로 정식화시켰습니다. 또한 탈시장화, 탈이윤화의 기본적인 정치경제적 메커니즘으로는 ‘부등가교환’ 또는 정치적 표현으로서 ‘사회연대교환’을 제시했고요. 이러한 사회공공성이 온전히 실현되기 위해서는 소유, 재정, 운영의 세 가지 측면에서의 공공성이 확보되는 것이 기본 조건이 될 텐데요. 예를 들어 철도의 사회공공성을 얘기하면, 철도의 소유 자체가 사회화되어야 하고 철도산업의 운영에 필요한 재원이 공공적 방식으로 확보되어야 하고, 또 그 운영 구조와 지배구조 역시도 사회구성원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민주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편, 사회공공성운동에는 각 산업의 다양한 특성이 반영될 수 있습니다. 전력 같은 에너지산업의 경우에는 소유와 재정, 운영의 공공성에 더해서, ‘에너지원의 공공성’, 즉 재생 가능한 에너지원의 개발 등도 사회공공성운동의 분야에 들어갈 수 있겠죠. 

시장적 개혁이냐 공공적 개혁이냐, ‘사회공공성’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오늘 토론할 쟁점들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낡은 쟁점이긴 한데 주최측에서 요구하셔서, ‘사회개혁과 사회공공성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사회공공성 대신에 사회개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못할 이유는 없지만, 최근에 와서 사회개혁이라는 용어가 갖는 진보성이 많이 상실됐다고 생각합니다. 1990년대 진보적인 조직으로서 민주노총이 사회를 어떻게 바꿀까 하는 맥락에서 사회개혁이라는 용어를 썼는데, 이제는 그 단어가 시장주의자들도 사용하는 것들이 되어버린 거죠. 이를 테면 시장지향적인 사회변화도 ‘개혁’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말하는 세상이 된 겁니다. 

시장적 개혁이냐 공공적 개혁이냐 그 갈림길에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바는 후자고, 그런 방향성을 포괄할 용어로서 사회공공성이 제시됐습니다. 즉 시장과의 대결이 본격화되지 않고 권위주의 정권과의 일반 민주주의적 과제들로 충돌했던 시기에 형식적 민주주의 진전을 담는 용어로 사회개혁이 쓰였던 거고, 신자유주의 시장화와 공공성 문제가 본격화된 지금 시점에서는 사회개혁이라는 용어가 계급적 성격을 포괄하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해서 사회공공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한 겁니다. 

그런데 사실 2003년에 사회공공성이 작명되기 전부터, 노동조합에서는 공공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었어요. 사회공공성은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대중조직들이 자신의 언어로 공공성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는 건 일종의 대중적 검증을 거쳤다는 거죠. 그런 공공성 개념에 ‘사회’를 덧붙인 데는 그렇게 심오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에 의료공공성, 교육공공성, 기간산업의 공공성 등이 따로 제기되고 있었는데, 이러한 것들을 총칭하는 합으로서의 활동을 지칭할 때는 ‘사회공공성’으로 하면 어떻겠냐 하는 거였죠. 만들고 보니 언어 운율상 공공성보다 사회공공성이 낫더라고요(웃음). 정리하자면 각 산별 연맹에서는 자기 산업과 관련된 공공성운동을 하자는 거고, 총연맹의 전체적인 운동노선으로는 사회공공성을 제기했던 겁니다.    

‘정유사의 공공성’을 상상하자! 실현하자!

다음 쟁점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사회공공성운동이 노동운동 내에서 확산되는 과정에서 제기됐던 비판 중에, 이거 ‘사민주의자들의 조합주의적 관점’이 아닌가 하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사회복지를 중심으로 한 공공영역에서의 사회적 가치를 제고하는 사회공공성운동은 잘 해봤자 사민주의, 케인스주의 경제체제에서의 노동조합운동의 요구 이상의 의미를 갖기 어렵다는 비판입니다. 다시 말해 급진적인 노동운동의 이념과 전략으로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거죠. 그래서 사회공공성 대신에 핵심산업의 사회적 소유와 통제를 주장하는 ‘사회화론’이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진보운동의 이념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사회진보연대가 이런 주장을 했었는데, 제 생각에는 사회화론과 사회공공성운동이, 물론 차이는 있습니다만, 노선상의 질적인 차이까지는 아닌 것 같습니다. 

사회공공성운동의 의제는 선험적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특정 시점의 역사적 성격을 가지며 그 사회 구성원들의 담론에 의해서 정해지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예전에 한국통신 민영화 반대할 때 노동조합이 ‘통신의 공공성’을 이야기했는데, 요즘에는 한국통신이 사기업이 되면서 서민들의 통신비 부담이 무척 높아졌음에도 일부 시민단체들을 제외하고는 이야기하질 않죠. 이렇듯 시장과 이윤논리에 지배되어서는 안 된다고 여겨지는 영역이 선험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회적으로 형성된다는 것이고, 그것이 사회공공성의 의제라는 겁니다. 

사회공공성 강화투쟁은 이러한 의제들을 심화시키고 확산시키는 운동입니다. 사회공공성 강화투쟁의 핵심은 ‘강화’라는 두 글자에 있습니다. 그것이 의료, 교육, 기간산업에 주로 국한해서 이야기되는 이유는 이러한 것들이 지금 이 시대의 대중들이 인정하는 사회공공성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미 거의 필수재가 된 ‘이동통신의 공공성’도 진보진영이 낚아채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같아서는 ‘정유사의 공공성’을 문제 삼을 수도 있겠네요. 도시나 농촌에서 이동에 필수적인 것들, 예를 들어 경차 정도는 저렴한 사회적 가격으로 국가가 기름을 제공하는 방안도 고려해 볼 수 있을 겁니다. 이처럼 사회적 필수재들의 생산과 관련하여 소유, 운영, 재정을 얼마나 공유화하느냐, 그런 고민들을 정치화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 운수노조가 미국산 쇠고기 운송을 거부하는 게 하나의 사례가 될 수 있을 텐데, 어떤 상품이 생산되는 과정뿐만 아니라 그 상품이 소비되는 과정에서의 사회적 연관도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것 같습니다. 거기서 공공성의 의제를 포착하여 확대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거죠. 일례로 한미 FTA 반대투쟁 과정에서도 미국 정부가 배기량에  따른 세금 기준을 무너뜨리려고 할 때 현대자동차노조가 조세주권을 주장하면서 거리로 나섰다면 좀 더 대중적인 투쟁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지금은 사회공공성투쟁의 영역이 공공부문에 국한되는 경향이 있지만 이처럼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이 속한 공장, 자신이 생산한 상품이 사회와 어떤 연관을 갖고 있는가를 계속 주목하고 정립하는 활동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대안 모델의 확산을 통한 이행?

다음 쟁점은 사회공공성운동이 ‘자본주의 내의 운동이냐 바깥의 운동이냐’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입니다. 21세기의 운동에서 체제 내냐 체제 밖이냐는 선험적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회주의운동이라는 것은 최대강령적 전환을 지향하지만, 민주노동당의 지난 활동에서도 보듯 실제 운동에서 대중과 접할 때는 최대강령적 사업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20세기의 사회주의운동이 ‘체제이행 강령’을 자신의 정치적 입론으로 설정하고 이를 대중을 향한 정치슬로건화할 수 있었던 것은, 실제 이행모델이 존재했고 이를 근거 삼아 사회주의적 요구를 활동가와 대중들에게 연역적으로 제시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 사회주의가 실패하면서 생긴 역사적 외상이 깊게 남아 있는 지금은 그와 같은 방식으로 할 수가 없는 거죠. 

현실 사회주의가 망했지만 열심히 해서 다시 사회주의적 경제체제를 만들어보자는 주장은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활동가모임에서는 통할 수 있지만, 제도적 합법적 권력을 획득하고자 하는 진보정당들에게는 가능하지 않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오늘날의 대중운동에 있어서 시장을 넘어선 새로운 방식의 사회 재생산 실현은 사회주의 논리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끊임없이 미시적인 실험들의 귀납적인 검증과정이 축적돼서 만들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사회공공성운동은 전체 사회의 이행을 확보하지는 못하지만 특정 영역에서 시장 논리를 뛰어넘는 생산이 가능함을 보여줄 수 있죠. 

이러한 모델들이 하나 둘 성공해서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거점’이 되면, 이를 기반으로 시장을 뛰어넘는 재생산을 확산시킬 수 있겠죠. 이러한 부분이 사회공공성운동이 갖는 ‘이행의 잠재성’이라고 판단합니다. 다시 말해 사회공공성운동은 사회연대적 경제의 단초를 실천하고, 그러한 경제체제가 실현 가능하다는 것을 검증하고 보여주는 운동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공부문 제도개혁에 한정되지 않는 사회공공성운동 또한 사회화론과 마찬가지로, 직접적 경로냐 간접적 경로냐의 차이가 있지만, 체제 이행의 문제의식을 담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회공공성운동은 크게 보면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운동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의료영역에서 사회공공성운동 성공모델 만들어야

이제 사회공공성운동의 과제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구체적인 성공 사례를 만들어야 합니다. 사회공공성운동이 추상적이라는 지적이 많습니다. 왜 추상적이냐면 아직도 사회공공성이 제대로 구현된 모델이 우리 사회에 없기 때문입니다. “시장이 아닌 사회공공적 원리로 운영되니 참 좋더라”라는 체험이 아직 우리 대중들에게 없다는 얘기죠. 따라서 가능한 빨리 사회공공성적 원리를 실현할 수 있는 모델을 구체화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의료’가 한국사회에서 그런 모델을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큰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노동운동도 의료시장화 반대투쟁만 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급여를 확대해서 환자 본인 부담을 최대한 줄이는 공공의료의 체험을 만들어 갈 수 있을까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우선 우리의 대안이 실현된다면, 이명박이 국가 운영의 책임자로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계기가 ‘청계천’이었던 것처럼, 사회공공성운동도 의료공공성의 성공모델을 가지고 다른 분야로 확산될 수 있을 겁니다.    
       
둘째, 현실에서 사회공공성싸움은 여전히 구조조정을 방어하는 측면에 머물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러한 방어투쟁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뛰어넘어 내가 있는 곳에서 어떻게 공공성을 확장할 것인가, 즉 자신의 노동생산물에 대한 공공성 입론을 정식화시키고 대중화하려는 노력이 더욱 강화돼야 합니다. 최근 기업은행 민영화 방침이 흘러나오니까 노조에서는 민영화되면 이러이러한 문제들이 생긴다고 얘기해요. 즉 기업은행의 공공성을 이야기하는 건데, 저 같은 사람도 사실 기업은행이 시중은행과 무슨 차이가 있는 건지 잘 모르거든요. 이런 얘기를 하면 거기 노조지부에 계신 분들은 억울하다는 거예요. 기업은행이 공공적으로 하는 역할이 얼마나 많은데 하면서. 

그렇다면 민영화 방침이 나오기 이전부터 중소기업과 서민 지원이라는 자신의 공공적 역할을 활성화시키고 홍보하는 작업들을 했어야 했는데, 그런 걸 안 하다가 이제 와서 하려니까 어려워지는 거죠. 또 진보진영은 국민연금기금 주식투자 반대를 고수하고 있는데, 반대해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가 없습니다. 대안적인 자산운영 전략을 마련해야 하는 거죠. 매번 반대만 한다면 그 정치적 효과는 국민들의 연금 불신 이상이 아니게 될 겁니다.    

‘사회공공회계’를 통한 정당성 확보 

셋째, 사회공공성 의제를 자신이 속한 조직 이해를 관철시키시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경향을 지양해야 합니다. 토론이 필요한 부분입니다만, 특히 연금 영역에서 그리고 무상의료 영역 등에서 드러나는 것 같은데요. 대안을 제시하는 슬로건은 있는데 그것을 구체화시키는 활동은 없다는 거죠. 그러면 늘 같은 자리에 머물게 되고, 그 슬로건이 가졌던 참신함마저 갉아먹게 될 겁니다.  

넷째, 공공부문 노동자들이 혁신의 객체가 아니라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신자유주의 정권이 새로 들어서서 뭔가 하나 터뜨리려고 하면 제일 먼저 공공부문을 건드립니다. 그만큼 공공부문에 대한 사회적 불신이 누적되었다는 사실은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권 탓만 하지 말고 공공부문 노동자로서 ‘책임’도 공유하자는 거죠. 예를 들어 사업장에서 『우리 공기업 사회공공성 훼손 사례 백서』 같은 걸 노조가 주도해서 만들면 어떨까요? 처음에는 좀 쪽팔리더라도 이걸 기반으로 대중과 소통할 수 있을 테고, 또 그러한 소통과 공감을 기반으로 『우리 공기업 사회공공성 확산 사례 백서』도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참여하는 전략이 필요하다는 거죠.

다섯째, 정규직 중심주의를 뛰어넘는 의식적인 사업이 필요합니다. 노동조합이 말은 항상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하지만, 막상 실제로 사업을 하게 되면 리스크 부담에 망설이게 되는 경우가 많았죠. 이러한 리스크가 실제 존재하는 건지 지나친 기우인지는 시스템적으로 검증해봐야 할 테지만, 저는 우리 노동조합이 정규직 중심주의에 대해서 지나치게 방어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론에서 워낙 ‘정규직 책임론’으로 얻어맞다 보니까 그런 리스크의 소지가 있는 것들은 아예 하지 않아버리는 수동적 행태를 보인다는 거죠. 내부 논란을 감수하고서라도 지금 시점에서 정규직 중심주의와 대결하는 도발적인 활동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전체 운동이 굉장히 위험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섯째, 양적인 ‘수치’로 말해야 합니다. 사회공공성운동이 근거를 갖고 자기 자리를 찾으려면, 단지 질적으로 “좋습니다, 좋습니다” 하는 소리를 넘어, 양적인 수치로도 그 근거를 내보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공기업에서 사회공공성운동이 제 역할을 하게 되면 기존의 공기업 회계기준으로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게 됩니다. 좋은 일을 하지만 적자를 보게 되고, 또 뭐 국민 혈세를 쏟아 붓는다 따위의 비난에 휩싸일 가능성이 있다는 거죠. 따라서 공공적 부가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사회 회계’ 또는 ‘사회공공적 회계’를 계발할 필요가 있습니다. 진보진영에서 번역작업이라도 우선 시작해서 단순한 모델이라도 만들어지면, 정부가 정부평가 기준으로 공기업에 순위를 매기듯이 우리도 우리 기준으로 사회공공성의 순위를 매길 수 있겠죠. ‘서민 못살게 굴어서 얻은 일등’과 ‘서민에게 복무해서 얻은 일등’을 비교해서 보여주자는 겁니다. 그런 게 공기업 실제 경영평가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공기업의 사회공공적 활동을 뒤에서 지원하는 역할을 할 수 있겠죠.

제가 준비한 내용은 여기까지입니다. 이상으로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사회자: 오건호 박사님께서 ‘사회공공성운동의 논점 및 과제’ 걸맞은 내용으로 발제를 해주셨습니다. 이제 토론자들의 토론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정태인 선생님부터 해주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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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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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um_02.jpg정태인: 사회공공성은커녕 ‘공공성’이란 용어에 대한 정의도 명확하지 않습니다. 사실 공공성이라는 용어를 쓰는 나라는 이 세상에 일본과 우리나라 정도밖에 없습니다. 공공성을 영어로 번역하면 publicness 또는 publicity 정도 될 텐데, 많은 사람들이 공공성이라는 용어를 쓰지만 학술적으로 엄격하게 사용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다만 경제학자들이 몇 가지 용례를 제시하긴 했는데 제가 본 바로는 대부분 엉터리였습니다. 여기서는 공공성을 정의하기 위한 몇 가지 단초들에 대해서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공공성 개념의 학술적 정의를 찾아서

경제학에서 공공성에 가장 가까운 정의를 갖고 있는 건 ‘외부성’일 텐데, 그것 자체도 사실 애매한 개념입니다. 이를 테면 스티글리츠의 ‘유사 외부성’이라는 개념에 이르면 외부성을 갖지 않은 재화는 이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또 경제학에서 공공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공공재’ 개념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공공재라고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비경합성, 비배제성을 가진 재화로서 외부성의 아주 특수한 형태입니다. ‘공유지의 비극’이라는 것도 많이 이용하는데, 외부성과 공유지의 비극은 전자는 서비스의 공급과 관련된 것이고 후자는 공유라는 소유형태에서의 이용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명확하게 차이가 납니다. 

그러나 외부성이나 공유지의 비극이나 해결하는 방식은 비슷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근대 경제학은 사적 소유를 명확히 하고 거래를 활발하게 하면 둘 다 해결된다고 합니다. 코즈의 정리(Coase theorem)라고 해서 사적 소유를 명확히 하고 거래비용이 없다면 외부성 문제를 국가가 개입하지 않고도 해결할 수 있다는 거죠. 공유지의 비극과 관련해서도 사적 소유를 명확히 하면 자신의 풀밭을 명확히 하면 자기 풀밭을 황폐화시킬 리는 없으니까, 지속 가능성이 보장된다는 겁니다. 이게 하딘(Garrett Hardin)이 제시하는 해결책입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인데, 사실 자본주의가 되기 전까지 역사적으로 공유지는 황폐화되질 않았다고 합니다. 언제부터 언제까지는 공유지에서 소에게 풀을 먹이면 소가 죽는다더라 식으로, ‘터부’라는 이름의 비과학적 규제가 항상 존재했던 것이죠. 하딘도 이후 논문에서 ‘규제가 있는 공유지’는 공유지의 비극과는 다른 문제라고 이야길 했습니다.             

한편, 남용을 막는 것도 우리가 말하는 공공성의 일부가 되어야할 겁니다. 이를 어떻게 할 것인가는 다음 두 가지로 나눠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공급의 과다 또는 과소를 어떻게 막을 것인가, 둘째 이용의 남용과, 이용할 수 없도록 만드는 접근의 차단을 어떻게 제어할 것인가. 이러한 단초들을 결합해서 공공성에 관한 정의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공공성은 인간행동의 원리 중에서는 ‘공동행동의 원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행동의 이익이 자기에게 온전하게 돌아오지 않으면 행동하지 않기 때문에, 예를 들어 공중전화가 고장이 났을 때 그걸 신고해서 고치는 행위는 자신에게는 비용으로, 다른 모든 사람에게는 혜택으로 돌아오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거죠. 

지금까지 얘기한 이러한 내용들을 종합하면 뭔가 우리가 얘기하는 공공성에 근접한 개념정의가 나올 것도 같습니다만, 현재까지는 전부 실패했고 존재하지가 않죠. 그래서 어쨌든 실제 존재하는 생산물로부터 귀납적으로 들어가는 것이, 개념의 정의를 얻는 데 더 도움이 되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욕먹어도, “공공서비스, 지금이 낫다”보다 더 나가야

그런데, 오건호 박사가 얘기하는 방식으로는 사회공공성이 너무나 확대된 개념으로 제시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사회화론의 비판에 대한 대응으로서 이렇게 개념을 확대한 것 같은데, 이럴 경우 모든 것을 지칭하면서 아무것도 지칭하지 않는, ‘사회주의’와 같아져 버릴 것 같습니다. 사회주의는 모든 걸 공공재로 만들자는 건데 실패할 수밖에 없었죠. 사회주의 운영원리가 인간의 심성과 어긋나고 정보를 체계적으로 왜곡시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왼쪽에서의 비판을 의식해서 사회공공성 개념을 확대해버리면, 내부의 단단한 논리가 무너져 모호해지고 실천전략을 만들어내는 데도 실패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우선 우리가 공공성이 강하다고 인식하고 있는 서비스들부터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고 제안을 합니다. 그러한 공공적 성격의 서비스들의 공통점은 뭐고 특성은 뭔가를 살펴보고, 뭔가를 찾아내면 제가 앞에서 얘기했던 연역적 정의를 위한 단초들과 결합해서 정의를 내려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제 그 서비스들에 대해서 좀 더 살펴보도록 하죠. 

먼저, 공공재는 아니지만 공공성이 가장 강한 서비스로 철도, 전기, 가스, 우편 등의 네트워크 서비스를 들 수 있습니다. 현재 네트워크 서비스는 민영화 안 하겠다고 이명박 정부가 한 걸음 물러나 있습니다만, 사실 저들의 입장에서는 이 서비스가 민영화의 제1대상입니다. 이걸 팔면 엄청난 돈이 들어오고, 재벌들도 군침을 흘리며 눈독들이고 있기 때문이죠. 임기 내 언제든 시도될 수 있으리라 봅니다. 

네트워크 서비스의 속성은 ‘필수재’입니다. 필수재라는 용어도 사실 정의가 잘 안 돼 있는데, 보편적 서비스, 즉 저것을 내가 누리지 못하면 인간답지 않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사회적으로 합의된 것쯤 될 겁니다. 어쨌든 네트워크 서비스는 사람들이 아주 간단하게 필수재라고 인정할 수 있을 겁니다. 더군다나 전기, 가스, 수도, 철도는 모두 요금제로 운영되는 등 필수재의 특성으로 일컬어지는 정합성이나 배제성도 확실하게 있죠. 한편, 이러한 네트워크 서비스는 공유지의 비극 성격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가격이 낮을 경우 소비가 늘어나는데, 예를 들어 우리나라는 전기, 수도, 그리고 가스도 일부 거의 ‘남용’의 수준입니다. 공공성을 이야기한다면 그러한 남용을 줄일 방안도 강구해야 합니다.

네트워크 산업 공공성을 규정하는 중요한 기초는 먼저 그것이 전국적인 서비스라는 거고, 그 시설 건설에 대단히 많은 비용이 들며, 한 번 건설되면 독점이 이뤄진다는 겁니다. 또 하나는 헌법 35조와 36조에서 보장하는 보편적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국가 또는 외부의 보조가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산골에 들어가는 전기, 수도, 가스, 철도는 모두 국가의 보조를 받고 있죠. 어쨌든 이 두 가지 특성, 즉 천문학적 건설비용과 그것으로 인한 독점성, 그리고 교차보조의 필요성이 네트워크산업 공공성의 근거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네트워크 서비스 각 분야에서 공공성을 확장하기 위한 구체적인 대안을 만드는 작업은 상당히 어렵습니다. 물 민영화 반대 투쟁이 벌써 3년째인데, 아직 그에 대한 구체적인 우리의 대안이 없습니다. 전국적 요금, 광역 관리 등까지는 합의가 됐는데 실제로 그걸 어떻게 운영해서 더 좋은 질의 물을 공급할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나온 게 없습니다. 노조에서도 못 내놓고, 학자에서도 못 내놓으니까……. 때문에 공공성문제에 대해서는 역설적으로 진보진영이 보수주의자가 됩니다. “지금이 낫다” 말고 대안을 내놓기가 어려운 겁니다. 그냥 “건강보험을 지키자” 수준인 거죠. 오건호 박사도 얘기했듯이, 그걸 “확대하자”고 주장하면 좌파에 의해서 개량주의로 비판받는 아이러니가 발생하죠. 

“월 30만 사교육비는 써도 교육세 연 30만은 못 내”

두 번째로 살펴볼 영역은 ‘가치재’입니다. 교육, 의료, 주거 같은 것들이죠. 이것도 사실 경제학적으로 명확하게 정의되어 있지 않고, 모두 필수재입니다. 이 부분은 가장 사적인 이해가, 즉 국민 스스로가 공공성을 침해하고 있는 영역이기도 합니다. 교육과 주택이 특히 그러한데, 그래서 운동을 벌이기도 굉장히 어려운 것 같습니다. 공교육이나 공공주택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은 쉽게 하면서도 개인들은 모두 뒷구멍으로 사적인 이해를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는 거죠. 예를 들어 통계청 조사를 보면 가구당 사교육비가 월 30만 원가량 되는데, 그렇게 매월 30만 원을 지출하지만, 공교육 강화를 위해서 1년에 30만 원의 세금을 걷으면 아마 폭동이 일어날 겁니다. 이는 보편서비스를 넘어서는 고급서비스를 받을수록 개인이 얻는 이익이 더 커지기 때문이죠.   

의료는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의료는 최소한의 서비스만 받아도 별 불만이 없거든요. 입원할 때마다 1인실에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겁니다. 1인실 들어간다고 나의 부가 늘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거는 땅값 정보를 갖고 있으면 자기 자산이 늘어나기 때문에, 그리고 교육은 사교육을 통해 성적을 향상 시키면 장래가 보장되기 때문에, 대단히 이기적으로 행동할 유인이 있는 거죠. 이러한 영역에서는 완벽한 모델을 만들어서 설득하거나, 지역에서 그러한 모델을 실현해서 확산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의료 영역에서는 다릅니다. 지금 건강보험이 보장하는 60%말고 나머지 40%에 세금을 붓든가 건강보험료를 올려서든 100% 보장되게 하자고 하면 실제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진보운동이 이를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 과거 사회연대전략에서도 나타났던 것처럼, “자본이 내야지 그걸 왜 우리가 내야 하냐”는 식이죠. 

세 번째는 ‘안보재’입니다. 식량과 에너지가 여기에 해당하죠. 에너지는 네트워크 산업과도 일부 겹치는데요. 안보재는 특히 생태문제와 전 국민의 생명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무조건 소비를 줄여야 합니다. 어떻게 낭비를 없앨 것이냐면, 간단한 해법은 이겁니다. 필수적인 소비에 대해서는 필수재만큼으로 가격을 낮추고, 이를 넘어서는 소비에 대해서는 가격을 굉장히 높게 매기는 거죠. 기업의 수익은 기존과 같게 하거나 조금 줄이면서 이용자 내부에서 가격을 조정하는 겁니다. 즉 남용하는 사람들의 돈이 가난한 사람들의 필수적인 소비로 연결되도록 하는 겁니다.

이러한 부분에서의 공공성운동 역시 무척 어렵습니다. 우선 지역공동체운동과 연결되어야 하고, 그 분야에 있어 장기적인 계획이 있어야 하는데 어렵습니다. 사실 관념적이고 실천을 안 했을지 모르지만, 노무현 정부는 그런 장기계획을 세우는 부분에서 신경을 많이 쓴 편이에요.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그걸 다 폐기해버렸고, 관련 자료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갖고 있죠. 이명박 정부는 아무 계획 없이 민영화로 가고 있고요. 

마지막으로 누가 뭐래도 부정할 수 없는 공공재로서 치안이나 국방, 그리고 방송이 있을 겁니다. 특히 방송은 공공재로서 특성을 정확히 갖고 있습니다. 정부가 확실하게 소유하고 운영해야죠. 그런데 방송을 시장화, 금융화할 수 있는 기법이 많이 개발됐어요. 의료에다가 보험을 붙였기 때문에 민영화 문제가 발생하듯이, 방송도 광고가 있기 때문에 민영화의 문제가 생기고 있죠. 그런 부분들을 어떻게 제어하고 개입할 것인가가 대책이 나와야 합니다.

급진적 슬로건으로 위장한 ‘소시민 이기주의’ 넘어서야

오건호 박사 발제 중 주로 왼쪽과 논쟁하기 위해서 제시한 ‘논점’들은 사실 저는 필요가 없는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들을 의식하면 구체적인 현실에 대응하는 대안들이 흐려져 버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 운동이 공공성이라는 의제에 갖고 있는 태도가 사실, 소시민, 중산층 이기주의 수준이라고 판단합니다. 슬로건은 매우 급진적이지만 그 실 내용이 소시민적 이기주의라는 거죠. 

예를 들어 과거 민주노동당이 제출한 사회연대전략을 반대하는 근거가, 그 돈을 왜 정규직이 내놔야 하느냐 그거 정규직 책임론 아니냐는 거였는데,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있다면 그거 정규직이 아니더라도 내놔야죠. 사실 연대를 위해 내놓자고 하는 돈이 아까웠던 거라고 생각합니다. 10년 전에도 제가 보기에 민주노총 중앙 간부들 너무 처우가 안 좋아서 조합원 1인당 맹비 1천 원씩 더 내놓으라고 하면 안 되겠냐 했더니, 그러면 ‘어용’이라고 욕먹는다고 하더군요. 그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극복하고 대안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더 많은 ‘계산’이 필요합니다. 가령 공공성 전략을 실현하기 위해서 현대 자동차 노조원이 내놔야 할 돈은 얼마고 그 돈을 내놨을 때 현대자동차 조합원이 실제로 받는 혜택은 얼마나 되는지를 구체적인 수치로 계산해서 보여줘야 한다는 겁니다. 단 돈 얼마라도 더 받는다는 것을 계산으로 보여줘야 한다는 거죠. 공무원이 참여하면 참 도움이 될 텐데, 굉장히 구체적인 분석이 많이 필요합니다.

다음으로, 오건호 박사가 제시한 공공성운동 강화를 위한 ‘과제’들에 대해서는 저 역시 모두 동의합니다. 하나하나 모델을 만들고 실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물 산업과 관련해서는 브라질의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모범사례가 만들어져 운영되니까 다른 국가들에서도 그걸 모델로 삼고 있거든요. 한국에서도 그런 것들을 만들어내는 게 중요합니다. 아주 정밀한 계산과 분석, 그리고 주민들의 적극적인 참여,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작은 부분이라도 하나씩 실천하는 게 중요합니다. 

당장 공기업 민영화 문제가 닥쳤는데, 이거 기업별로는 방어논리가 어느 정도 준비돼 있어요. 그런데 더 나아가기 위한 대안에 대해서는 노조도 학자도 상당히 부족한 상태입니다. 사실 몰두해서 투자하면 그러한 대안을, 완벽하진 않겠지만, 만들 수 없는 건 아닙니다. 그런데 노조가 재정을 대는 연구 프로젝트는 거기까지 원하질 않죠. 현재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은 찾아도 말입니다. 이러한 부분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공공성운동이 나아갈 수 없습니다. 굉장히 변혁적, 급진적 슬로건으로 위장된 자기중심주의, 그런 한계를 넘어서야 합니다. 이상입니다.

사회자: 다음으로 홍주환 연구위원의 토론을 듣겠습니다.

forum_03.jpg홍주환: 발표와 토론 잘 들었습니다. 우선 정태인 선생이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은 ‘모두가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얘기와 같은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도덕적인 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이 과연 있을까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자료를 준비하지 못한 관계로 다소 두서없습니다만, 이제 제 생각을 본격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국가 매개하지 않은 사회공공성운동 가능한가

먼저, 공공성은 공평할 공(共)과 함께 공(公)이라는 한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제가 중국어 사전을 찾아보니 두 글자의 의미가 겹치는 부분이 많긴 한데, 앞의 글자는 state, government의 의미가 강하고 뒤의 글자는 social, open 등의 의미가 강하더라고요. 이처럼 이미 ‘사회적(social)’이라는 의미가 공공성이라는 단어에 들어 있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굳이 동어 반복적으로 ‘사회공공성’이라는 용어를 쓸 필요가 있겠냐는 거죠. 

그리고 오건호 박사 발제를 들으면서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도대체 사회공공성의 대상 영역이 아닌 것은 무엇일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어느 외국 학자가 ‘모든 조직은 공적이다’라고 무척 설득력이 있는 화두를 던진 적이 있습니다만, 어쨌든 귀납적으로 만들어가자고는 하셨으나 “사회공공성운동이 모든 영역에서 가능하다”고 하는 주장은 참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제기한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일반적으로 사회공공성담론은 국가 또는 정부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국가를 매개하지 않는 사회공공성운동은 어떤 것이 있을까 고민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국가라는 것은 양면성을 갖고 있긴 하지만 물리적 폭력과 강제의 시스템인데, 이는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 같은 진보정당이 정권을 장악해도 근본적으로 바뀌기 어려운 부분일 겁니다. 그런 성격을 가진 국가를 매개로 한 공공성의 실현이 갖는 본질은 무엇일까, 공공성운동을 통해 국가를 민주화한다는 것이 국가를 시민사회의 통제하에 놓겠다는 것인지 그래서 궁극적으로 없애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사회주의적 독재를 거치겠다는 것인지, 이렇듯 국가를 매개로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서 누구도 말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다시 말해 만약 강제와 폭력의 시스템인 국가를 매개로 하지 않는다면 공공성운동은 무엇을 매개로 할 것인지 어떤 형태를 갖게 될 것인지,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도 고민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저는 지금 거의 모든 운동이 우리가 직접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 청원하는 형태를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참여민주주의든 촛불집회든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데, 이러한 부분이 운동에 독으로 돌아올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탈시장화’의 구체적인 상이 필요하다

셋째, 기존의 운동은 공공성의 물질적 형태로서 공공재와 관련하여 생산자, 공급자 관점에서 주로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소비자의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소비자는 싸고 좋은 질의 공공재를 공급받길 당연히 원하고 이는 생산자와 부딪치는 측면이 있는데, 이러한 와중에 생산자를 보호하는 조직 중에 하나가 노동조합이라는 겁니다. 노동조합은 소비자의 이해관계를 반영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틀림없이 존재한다는 거죠. 노동조합운동은 이런 문제를 해결할 것을 계속 당위로서 요구받고 있지만 사실 ‘안’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사회운동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 가끔씩 파열구가 열리기도 했습니다만, 시민사회운동이 공공성을 담보하라는 내용의 정당한 요구를 했을 때도 노동조합이 이를 담아내지 못하고 있는 거죠. 노동운동이 시민사회운동이 되고 있지 못한 겁니다. 이러한 부분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이 필요합니다. 

넷째, ‘탈시장화’가 무엇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상이 필요합니다. 탈시장화가 국가를 매개로 한 계획경제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성공할 수 없으리라고 봅니다. 엘리트들에 의한 계획은 결국 일상적 의미에서의 독재로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발제자가 말하는 “자본주의를 넘어선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어요. 결국은 사회주의일 가능성이 많은데, 사람들이 사회주의를 싫어하니까 최대강령적 목표로서 세워놓은 사회주의를 감추고 사회공공성이란 말을 내놓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습니다. 그냥 사회주의란 말 쓰면 될 텐데 하는 생각이 들고요.

다섯째, 진보나 발전 개념도 사회공공성과 관련하여 한 번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네트워크가 쫙 깔리는 게 진보고 좋은 것인지, 우리가 고민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사회공공성운동을 통해서 생태주의를 강화하자는데, 그렇다면 아나키즘적 문제의식을 비켜가지 못하리라 생각합니다.

여섯째, 경영과 자본을 등치시키지 않는 방식을 모색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적 소유가 아닌 사회적 소유, 공적 소유하더라도 경영은 필요할 텐데, 그 와중에는 인적 구조조정도 필요할 겁니다. 이런 문제들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이야기는 합니다만 결국 노동과 자본 간의 갈등으로 귀결시키는 경향이 많은데, 저는 실제 한국사회에 계급이 형성되고 존재하고는 있는지도 의심스럽습니다. 계급 이야기를 너무 쉽게 하는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계급으로 환원시키지 말자, 그리고 충분히 개량적이 되자, 그리고 조금만 더 사람들이 행복하게 되면 된다는 소박한 인식을 놓치지 말자, 이렇게 주장하고 싶습니다.

이런 이야기의 결론은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결국 모두가 좋은 사람이 되자 식으로 갈 수밖에 없을 텐데요. 저는 이게, 이론적으로 정식화시키는 데 걸림돌이 많다, 그런 문제가 아니라, 이론 문제로 넘어가는 것 자체가 현실적으로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넘어가기 어려운 것을 자꾸 초월하려고 하지 말고 한 단계씩 나아가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사회공공성의 폭과 넓이가 조금씩 커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상입니다.

사회자: 다양한 문제제기를 해주셨습니다. 이제 토론자들이 제기하신 문제에 대해서 발제자께서 대답을 해주시죠.

오건호: 간략하게 이야기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공공성에 접근하는 방식이 정태인 선생님하고 저하고 많이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공급의 과소와 남용의 문제라든지, 필수재, 가치재, 안보재의 성격 등등 너무 각 생산물의 물리적 성격으로 나눠서 보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애초 제 문제의식은 ‘어떤 방식의 생산이냐’에 집중돼 있습니다. 각 영역에서 시장 이윤 논리에 의한 방식의 생산이 확대되니까 그 대응하는 대안적인 생산시스템이 필요하다는 거고, 때문에 생산물의 물리적 성격보다는 생산과정에 더 집중해서 문제제기를 하고 있습니다. 생산물의 물리적 성격을 강조하면 너무 복잡하고 혼란스러워질 우려가 생겨서, ‘시장화에 대당하는 사회공공성’이라는 개념으로 가는 게 더 산뜻하고 집중적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여기저기서 사회공공성운동의 씨앗이 발아하고 있어

다음으로 사회공공성운동을 과도하게 확대해서 보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있었는데요. 저는 그렇기 때문에 사회공공성운동이 역사적 비전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사회공공성운동으로 성장할 내부의 잠재적 씨앗이 많음에도 정치적으로 개화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시장담론이 많은 영역들을 장악하고 있다는 거죠. 다시 말해, 모든 영역에서 대안적인 사회공공성의 방식으로 접근하고, 전환하고, 발굴하고, 공론화시켜서, 자신의 실천적 지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겁니다. 저도 초기에는 기간산업, 사회복지 등의 영역에만 국한해서 사용하다가 이미 대중운동에서 문화, 언론, 먹거리 등에서 공공성 영역을 확대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개념을 확장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잠재적 씨앗들이 발아하고 있는 긍정적인 현상이다, 사회공공성운동의 정당성을 판정해주는 현상이다 느꼈습니다.      

정태인 선생님이 가장 강조하신 게 구체적인 모델이 필요하다는 거였는데, 그건 정말 중요한 것 같습니다. 제가 전체 발제에서 가장 강조한 부분도 그것인데요. 그런 실천과 검증을 통해서 사회공공성담론이 동어반복을 넘어 체계화되고 정리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홍주환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사회공공성’은 동어반복입니다. 그러나 의미를 부여하자면 ‘사회’는 공공성의 원리가 구현되는 대상이고, ‘공공성’은 그 대상에서 구현되는 원리의 방향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굳이 사회공공성이라는 말을 만들어봤습니다. 사회와 공공이 사전적인 의미에서는 비슷할지 모르지만 완전한 동어반복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다음으로 전부 국가를 매개로 하는 것 아니냐고 지적하셨는데요. 한국 사회에서 생산구조의 중심축이 국가가 되다 보니까 불가피하게 사회공공적 대안모델도 정부 중심적으로 개발할 수밖에 없었던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원론적으로는 사회공공성운동이 국가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찾기 어렵지만 시장도 아니고 정부도 아닌 ‘제3섹터’가 생겨난다면 그 영역에 가장 잘 어울리는 원칙은 사회공공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례로 에너지대안과 관련하여, 우리나라는 중앙집중적 에너지시스템을 갖고 있어서 한국전력을 중심에 놓고 논의하는데요. 이후에 분권적인 에너지 대안체제가 가시화된다면, 그것의 주체가 지자체든 지역트러스트든 지역 중심적으로 되면, 사회공공성운동은 그에 걸맞게 진화하리라 봅니다. 어쨌든 중앙집중적 체제가 갖고 있는 폭력성을 극복하기 위해서 제3섹터가 주체로 등장하는 게 옳다고 봅니다. 

그리고 생산자의 관점과 소비자의 관점이 통일 조화되는 게 사회공공성운동의 목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긋나는 경우가 분명 있죠. 이런 경우에는 양자를 조화시키는 게, 그리고 그 조화 과정에서 생산자들의 이기적 이해가 발동할 때는 생산자를 설득하는 게 사회공공성운동의 역할일 겁니다. 특히 사회보험징수공단 설립문제라든지, 주택공사와 토지공상의 통합문제에서 일반 시민사회적인 요구와 노동조합이 갖고 있는 이해가 충돌할 수 있다고 봅니다. 조화시켜야죠. 생산자들이 갖고 있던 내부의 이해보다 시민의 이해를 우위에 놓고 가야 할 테지만, 노동조합이 이를 수용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 핵심에 고용불안이 있을 텐데 그에 대한 사회적 안전장치를 만들어놔야 공사 통합에 따른 전환배치 등을 수용할 수 있는 거죠. 

진보운동, ‘계급형성’ 고려한 사업평가체계 갖춰야

또한 말씀하신대로 사회주의란 용어를 쓰진 않지만 어쨌든 사회공공성운동은 사회주의가 갖고 있는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제가 궁여지책으로 ‘일종의 유토피아적 사회로 가는 과도적 이행체제로서 사회공공체제’라는 걸 제시했다가 욕을 많이 먹기도 했는데요. 어쨌든 자본주의를 질적으로 뛰어넘고 지양한다는 목표는 분명합니다.

계급 이야기는 안 할 것이 아니라 더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역사적 주체들은 어쨌건 계급이기 때문에, 이를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 의식화할 것인가 문제는 대단히 중요인데, 지금 한국사회에서는 매우 후퇴되어 있는 상황인 것 같습니다. 저는 한국사회에서 계급론을 새로운 방식으로 복원시킬 필요가 있고, 각각의 모든 사업평가에서 계급론적 문제의식을 가미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어떤 사업의 물질적인 목표 수행 정도와 함께 계급형성 여부도 평가를 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한국의 급진좌파들은 계급형성 여부와 관련하여 지나치게 레닌적 계급구성론을 기계적으로 도입시키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 우리 운동이 거기서 한 치도 못 나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때문에 더욱 더 사업평가와 결부된 계급 형성에 대해서 구체적인 논쟁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과정이 계급 형성에 일조를 할 수 있고, 또한 그런 평가와 논쟁의 과정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자가 진보적인 정치운동의 주체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정치적 권위도 형성되리라는 겁니다. 앞으로 각각의 사업평가에 있어서 이러한 계급론적 시각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봅니다.

한편, 한발 한발 또박또박 가는 거, 저도 좋습니다. 그렇지만 사회공공성운동이 단순하게 소시민들의 생활지침이 아니라 사회운동이기 때문에, 그 시대의 역사적 사회상에 대한 분석과 미래사회에 대한 역사철학적 비전을 가져야 하고, 때문에 어렵지만 ‘체제 전환’까지도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운동이 갖고 있는 고유의 정체성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는 거죠.

사회자: 답변 잘 들었는데요. 시간이 많이 지났습니다만, 플로어에 계신 분들의 문제제기와 질문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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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석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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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자: 지금까지 경험을 봤을 때 공공성투쟁의 주체가 과연 노동조합, 또는 생산자가 될 수 있느냐 하는 의문이 듭니다. 대안을 제기한 사람들도 대부분의 경우 노동조합운동에 실질적인 입지를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노동조합을 이런 운동의 주체로 세우는 것이 과연 현실적인가 답변 부탁드립니다. 

정태인: 우리 경험만 봐서는 그럴지 모르지만, 세계 여러 사례를 보더라도 대안을 내놓은 노조운동이 집권도 하고 하는 거지, 대안도 없이 집권하는 노조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연대라는 말에서 기본적으로 떠올리는 게 스웨덴 모델이잖아요. 그들이 연대전략을 통해서 구체적인 대안을 내놓고 실천했으니까 스웨덴 노조가 집권할 수 있었던 거죠. ‘자기 것 지키기’에만 머물면 불가능한 경지입니다.

전교조의 교원평가제에 대한 입장을 예로 들 수 있겠는데요. 물론 현재 시스템 속의 평가라는 게 문제가 많긴 하지만, 일반 국민들에게는 다른 사람 다 받는 평가를 교사들만 안 받으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이런 상황에서는 바람직한 평가는 이런 거라고 구체적으로 대안을 내놔야지, 그 평가가 신자유주의적 강요라고 떠들어서는 설득력이 없죠. 그건 그냥 현재 상태에서 자기 이익을 지키겠다는 것으로밖에 안 보이거든요. 이런 자기 집단 중심주의는 전교조의 덩치는 키우는 반면 힘을 약하게 만드는 기제가 될 수 있죠.  

참가자: 지금까지 사회공공성 투쟁을 3년 이상 실제적으로 해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모범적인 것으로 선전할 만한 사례가 있다면 어떤 것들입니까?

오건호: 저에게는 2002년 3사 기간산업 민영화 저지투쟁이 기억에 남습니다. 당시 2002년 초에 경실련은 “발전 민영화 하라”고 성명서 발표하지, 환경운동연합에서도 “공기업 한전보다는 민간기업 한전이 맞다”고 하면서 정부 안에 대해서 사실상 용인하는 태도를 보였어요. 그래서 민주노총이 시민사회 연대를 할 때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그나마 참여연대가 긍정적인 태도를 보여줬죠. 

어쨌든 그렇게 어렵게 기간산업 3사 투쟁하면서 연대 틀이 만들어졌는데, 사실 노동조합운동이 제시한 ‘공공성운동의 원리’에 동의했다기보다는, 발전 노동자들이 하도 불쌍해서, 더 이상 이들을 고립시킨다는 건 동일한 사회 구성원으로서 책임의식이 느껴져서가 더 컸을 겁니다. 제가 그 때 민주노총 실무자로서 연대 활동에 참여했는데요. 사실 2002년 3사 투쟁 과정 속에서는 노동조합과 시민사회와 끈끈한 연결망은 형성되지 않았다고 봅니다. 

하지만 그 투쟁 이후에 어떻게든 잘 해결해보자고 의기투합하고, 또한 시민사회와의 연대망에 노동조합이 미리미리 끼어들지 않으면 나중에 정말 쉽게 고립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아서 민주노총이 당시부터 분야별로 시민사회와의 네트워크를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네트워크 중에서 가장 성공한 게 에너지입니다. 에너지시민사회노동네트워크라는 조직이 만들어진 거죠. 

당시 발전노조 이호동 위원장은 마지막 임기 때 ‘발전 에너지원 확약 포기 선언’이라는 것까지 했어요. 그 선언은, 당장 문제는 아니었지만, 발전 자회사 5개에 엄청난 내부 구조조정을 거칠 것을 전제한 겁니다. 그럼에도 시민사회운동진영에서 에너지원 전환에 찬성하지 않으면 노동조합운동의 에너지 공공성 운동을 믿지 않겠다, 함께 싸우지 않겠다는 거여서 그 선언을 한 거죠. 에너지를 친환경체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노동자의 고용안정을 지키는 데 있어서 함께 싸운다, 그렇게 합의한 겁니다. 주 에너지원 전환과 고용안정이라는 사회적 의제들을 서로 승인을 해준 겁니다. 

이를 기반으로 이후에 공동의 프로젝트와 월례 워크숍을 진행했고, 그래서 지금은 에너지노동시민사회네트워크라는, 환경단체와 노동단체 공동의 시민사회단체까지 만들어졌죠. 비록 완전하게 성공하진 못했지만 이 사례를 저는 사회공공성운동의 중요한 참고사례라고 생각합니다.  

참가자: 발제문 마지막에 정규직 중심주의 얘기를 하면서 “사회연대전략의 실패에 대한 진지한 분석이 중요하다”고 지적하셨는데요. 좀 더 구체적으로 사회연대전략이 왜 실패했다고 생각하시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습니까?

오건호: 그 실패의 핵심에는 소통의 불능문제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사실 사회연대전략이 제시됐을 때 정규직 노동자와 민주노총은, 이게 틀렸다 이게 엉터리다,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각각의 지도부 정치성향의 차이를 비롯해서 여러 이유로, 2004년부터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의 연계구조가 거의 깨져나갔어요. 그래서 비정규투쟁도 그렇고 되는 게 하나도 없었죠. 그러한 구조적인 소통의 실패가 결국 사회연대전략의 좌절을 낳은 핵심적인 원인이었습니다. 

제가 되돌아 보건데, 어느 정파는 사회연대전략을 인정했고 어느 정파는 사회연대전략을 부정했다는 식으로 몰아가는 것은, 실체적 진실하고도 맞지 않고 또 굉장히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인식인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지금에 와서 한 쪽은 정규직 중심주의에 찌들어 사회연대전략을 부정한 세력이고, 한 쪽은 사회연대전략을 이벤트 삼아 낚시질 하는 한탕주의 세력이라고 이해되는 측면이 있는 것 같아서 실무자로서 무척 책임을 느낍니다. 

그리고 제가 사회연대전략의 실패 원인을 곱씹자고 하는 것은 지금 진보신당이 보이는 태도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을 담고 있습니다. 사회연대전략이 실패한 건 말씀드렸던 것처럼 정규직이 그걸 부정했기 때문이 아니었음에도, 진보신당 일부는 지금 기층 노동조합을 ‘연대를 부정하는 정규직 중심주의자’들로 몰아갔단 말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노조가 어떤 태도를 보였다는 사실 규명도 없이요. 이건 과거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이 겪었던 소통의 실패를 더욱 심화시키는 나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어찌 될지 모르지만 진보신당은 향후 사회연대전략과 비슷한 문제의식을 담은 계획을 제출하게 될 텐데, 지금과 같이 가다가는 현장의 신뢰를 회복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될 것 아니냐, 그런 의미에서 소통의 문제를 제기한 것입니다.   
     
참가자: 공공부문과 공공성의 관계가 명확히 정리되지 않는 것 같은데요. 기업적 형태로 유지되는 공공부문과 공기업이 있고, 또 이것과는 별도로 교육과 의료 등 공적 서비스 영역이 있잖습니까? 양자는 경영측의 관리방식과 노조의 조직화 방식 모두 다른데요. 그걸 공공성투쟁이라는 하나의 영역에 묶어서 개념화해야 하는지 의문이 듭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정태인 선생님은 공기업과 공공부문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신 것 같고, 오건호 선생님은 양자를 포괄하는 과정에서 혼란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두 가지 범주를 분리해서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으로, 공기업과 관련해서 논의를 할 때 주로 소유 중심으로 되는 경향이 있는데, 저는 거버넌스 개입구조를 안착화시키는 데도 좀 더 방점을 찍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공기업의 거버넌스는 정부에 따라서 즉 노무현 정부냐 이명박 정부냐에 따라서 그 성격이 완전히 달라질 가능성이 있는 것이거든요. 때문에 소유의 문제에 구애받지 않고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화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방식이 필요하리라 봅니다. 즉, 시민사회가 공기업의 사회적 소유 또는 공적 소유를 매개로 하여 경영구조에 개입하는 방식을 통해, 어떤 정부가 됐든 구조적으로 공기업의 공공성을 훼손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거죠.       

참가자: 공공성운동의 범위나 영역 얘기하는 걸 들으니까 머리가 더 복잡해지네요. 어쨌든 정부의 민영화 방침이 다소 주춤하고 있는 지금 상황이 그나마 우리들이 뭔가를 준비할 수 있는 상황일 텐데요. 우리들은 대안을 준비할 태세가 되어 있는 건지, 결국 지키기 운동밖에 할 수 없는 건지,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정태인: 노무현 정부 때는 ‘민영화’를 ‘산업육성’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렇게 언어의 의미를 왔다 갔다 하게 해서 사람들을 혼란시는 거죠. 이명박 정부는 한 술 더 떠서 ‘공기업 선진화’라는 말을 만들어냈죠. 그런 식으로 사기쳐가면서 진행하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확실하게 진행되는 것은 상수도와 의료 부문인 것 같습니다. 에너지 영역은 지금 원유가가 상승하면서, 다시 말해 세계 기름 시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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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권 : 제13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