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역사 기록, 왜 중요하고 어떻게 할까

노동사회

노동자 역사 기록, 왜 중요하고 어떻게 할까

편집국 0 4,147 2013.05.29 10:14

8월23일 보라매 청소년수련관에서 ‘노동자역사 한내’(www.hannae.org)가 창립행사를 했다. “노동자, 계급투쟁 100년을 기억하라”는 제목 아래 △사진으로 보는 노동자역사, △머리띠에서 깃발까지 노동운동 만물상, △노래로 부르는 노동자역사 등 전시와 공연을 했다. 이처럼 노동자역사를 매개로 사업을 하는 단체가 만들어진 것은 처음이라 생소할 수 있으나, 사실 한내의 뿌리는 1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어려운 시기일수록 과거 제대로 성찰해야  

1995년 12월3일은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가 역사적 소임을 다하고 해산한 날이다. 대의원들은 남은 재정을 백서를 만들고 자료를 정리하는 데 쓰기로 결의했다. 전노협 사무실에서 수집한 자료의 양이 무려 600박스 정도에 달했다. 1년 6개월간 그 자료를 정리해 작업한 끝에 『전노협백서』 12권을 만들었다. 백서를 만들고 나니 보관하고 있던 자료를 어찌할 것인지 대안을 만들어야 했다. 처음에는 민주노총에서 자료실을 만들어 이어갈 것을 요구하고 실제 시도도 했다. 

그런데 관계자들이 와서 자료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백서 사무실에 있던 전노협신문 합본호, 각종 자료 복본 등을 폐지로 버렸다. 이런 과정에서 민주노총으로 자료를 이관하려던 계획은 없던 일로 돌아갔다. 민주노총은 자료실을 만들 공간도 없을 뿐더러 산적해 있는 문제로 전노협 자료에 신경 쓸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그때부터 전노협백서팀은 자료실을 독자적으로 만들기 위한 시도를 했다. 그러나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이 소수였고, 재정 문제로 확장되지 못했다. 전노협백서팀은 전노협 자료들을 박스에 담아 세 번이나 장소를 옮겨가며 보관했다. 박스에 차곡차곡 담아놓은 덕에 종이가 햇빛에 노출되지 않아 오히려 보존 상태가 좋다. 그러던 중 전노협백서팀 팀장을 맡았던 김종배 동지가 1999년 8월 사고로 운명했다. 유족들은 그의 뜻을 이어달라며 기금을 전달했다. 노동운동가 김종배 추모사업회는 공간을 마련해 노동운동역사자료실을 운영했다.『전노협백서』를 재발간했고, 한국통신계약직노동자 투쟁백서『517일간의 외침』, 발전노조 투쟁백서『가자 총파업으로』를 만들었다. 

그러나 노동운동역사자료실은 재정문제로 2003년 12월에 문을 닫고 연구용역 사업만을 추진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2007년 8월, 사업회에서 노동운동역사자료실 복원을 중심으로 하는 사업 방향을 수립하고 준비하게 되었다. 더 이상 시간을 늦추다가는 자료가 햇빛을 보지 못하고 사장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노동운동이 어려운 시기일수록 과거를 돌아보고 스스로를 반성, 전망을 밝혀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 대한 공감대가 컸다. 

전노협 창립일인 1월22일에 150여 명의 발기인들이 모여 발기인대회를 열고, 노동자역사 한내 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기금을 마련해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자료들을 모았다. 당진 농가 창고, 일산 개인 집, 성공회대 민주자료관 위탁 보관자료 등등. 1톤 트럭 6대 분량의 자료들이 흩어져 있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한내에는 1980년대와 1990년대 사회과학도서 3,000여 권, 노동관련 정기간행물 30여 종, 노동조합 관련 사료 2만여 건, 전노협 관련 사료 3만여 건, 관련 사진과 물품 등이 보관되어 있다.

기록 주체 따라 달라지는 역사… 노동자가 개입하자

이명박 정부는 현대사 박물관을 짓겠다고 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광주민주항쟁을 복원하는 데,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은 6·10항쟁에 공을 들였다. 왜 그랬을까? 지배계급은 과거를 장악하는 데 많은 것을 투자한다. 사람들의 경험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자기 기반을 탄탄하게 다진다. 노동자가 한 일과 역할을 지워버리기도 하고, 수동적인 것으로 남겨놓기도 한다. 

『한국노총 50년사』 화보에 동일방직 노동자들이 똥물 뒤집어 쓴 사진이 실려 있다. 그 때 한국노총이 무슨 일을 했는지 기억하고 있는데 노동자들의 투쟁을 자기 역사처럼 정리했다. 주체가 정리하지 않고 방치한다면 어떻게 정리되고 왜곡될지 모를 일이다. 자료의 선택도 역사 서술도 관점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는 “과거를 둘러싼 계급투쟁”이라고도 한다.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자 노력했을까? 스스로 기억할 만한 곳, 내 아이에게 보여줄 만한 곳이 그다지 많지 않다. 인식부터 바꿔야 한다. 자기 역사를 찾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어떻게 시작할 것인지! 노동자역사 한내는 노동자 스스로 과거를 돌아봄으로써 전망을 밝히는 작업이 현 시기 운동의 하나로 전개되어야 한다는 데서 출발했다. 

그런 점에서 독자적 기반 구축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동안 곳곳에서 노동운동자료를 모아보려는 시도가 있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는 예산을 확보해 많은 자료를 모았다. 노동교육원에서도 노·사·정 자료를 한군데 모아보자는 시도를 했으나, 주체들의 동의를 얻지 못해 힘을 얻지 못했다. 한국사회 노사관계의 특성을 볼 때 정부 재정으로 노동운동 자료를 수집하겠다는 것은 무리가 따르는 일이다. 노동운동은 여전히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료는 모아놓고 정리하는 것 자체만이 목적은 아니다. 자료를 버리듯이 갖다 주는 것은 의미 없다. 자료생산 주체가 자료의 중요성을 느껴야만 이후에도 자료가 유실되지 않고 올바르게 관리된다. 

엄청난 재정이 들어가는 일이기에 자료실을 독자적으로 운영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독자적 재정 기반을 마련하지 못한 채 외부 지원에 의존한다면 우리가 하고자 하는 사업들이 제한될 수밖에 없다. 자료를 아무데서고 모아 보존하면 된다고 생각할 일이 아니다. 역사는 누가 쓰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역사적 기록을 누가 어떻게 보존하고 관리하는가는 역사 바로 세우기의 출발이다. 

“삶이 묻어 있는 모든 것들을 찾습니다”

자료를 버리지 말고 보내라고 하면 “도대체 어떤 게 자료냐”고 되묻는 경우가 있다. 형태상으로 볼 때 문서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배지, 혈서, 머리띠, 각종 기념품 등등 모두 자료가 될 수 있다.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는 것에 대한 생각도 바꿔야 한다. ‘개인적인 것’이라는 생각에 버려지는 자료가 많이 있다. 한국통신계약직 노동자 투쟁백서를 만들 때는 자료수집 단계를 가장 중요시하였다. 조합원들이 꼼꼼히 적어놓은 글, 편지, 일기를 모으고, 구술을 채록했다. 그러던 중 수집한 어느 동지의 일기는 가장 소중한 자료였다. 그 동지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투쟁기간 동안 경험과 느낌을 솔직하게 적어두었다. 38일 동안 산개투쟁을 벌인 발전노조의 한 조가 적어 놓은 일지도 발전노조 투쟁백서를 만드는 데 활용되었다. 20명이 한 조였는데 누가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어떤 규율을 갖고 움직였는지, 반찬은 무엇이었는지까지 상세하게 적어놓았다. 이런 자료들은 노동조합 홈페이지를 통해 내려간 지침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이행되었는지를 보여주기도 하고, 조합원들의 활동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공식자료의 한계를 보완하는 역할을 한다. 

이런 것들을 모아야 보다 풍부한 운동사를 재구성할 수 있다. 공식적으로 남겨진 자료가 담지 못하는 조합원들의 목소리를 담아서 그들의 생각을 정리할 수 있다. 가치 있는 자료와 아닌 자료를 구분할 수는 없다. 누가 판단하느냐, 어떤 시기에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노동운동 과거·현재·미래 잇는 큰 물줄기를 트기 위하여!

한내는 노동운동 자료 통합관리 시스템을 구축해 가고 있다. 창립대회 때 공공운수연맹 자료 목록을 가지고 등록, 검색 등 전 과정을 시연했다. 9월부터는 마창노련 자료 전산화를 시작하고, 전노협자료 전산화를 마무리한다. 또 이러한 자체 소장 자료 전산화와 함께 노조와 단체 등에 자료실을 구축하는 사업을 진행하며, 자료에 대한 인식 확산, 위탁 사업을 통한 자료 통합 관리, 협정기관 확대에 주력할 것이다. 

노동운동사 전문 연구자들이 함께 결합해 조직사, 개인사 쓰기도 지속적으로 진행한다. 구술채록도 하나의 사업으로 잡아 사라져 가는 기억을 기록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노동자 자기 역사쓰기를 확산한다는 점에서 진행하는 사업들이다. 소박하게는 회원들이 자기 삶과 경험을 적어 회원 소식지를 통해 공유하는 일도 하고 있다. 

노동운동역사자료실은 단순히 자료를 분류·축적해 놓는 곳이 아니다. 역사를 삶의 공간으로 불러오기 위한 사업을 중심에 두고자 한다. 청소년 교육문화사업은 그 한 방편이 될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에 대응하여 청소년들이 우리의 문화, 역사, 경제를 알고 누릴 수 있는 장을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 중장기적 목표로 정하고 구체적인 기획을 해나가고 있다. 

한내는 회원들의 회비를 기반으로 운영된다. 물론 자료실, 각종 연구사업을 통한 수입기반을 확보해 가고 있다. 그러나 한동안은 이 사업의 필요성에 동의하는 회원들이 힘을 모아야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 

몸으로 함께할 일들이 많다. 자료 정리, 입력 등. 노동운동사 연구자들도 자료를 추적, 수집, 정리해 가는 과정, 없는 자료를 만들어 가는 것까지 함께한다면 더 유익할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료를 버리지 말고 노동운동의 자산으로 만들자는 것이다. 자료관리 체계가 잡혀있지 않은 곳에서는 집행부가 바뀔 때마다 자료를 조직적으로 폐기한다. 민주노조들이 20년 역사를 맞이하게 되는 즈음 돌아보면 변변하게 정리할 기초 자료가 없는 데가 대부분일 것이다. 조직에서는 자료관리 체계를 정비하고 스스로 보존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가야 한다. 개인들은 이사할 때마다 조금씩 버렸던 자료들을 한내에 기증해 공공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한내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는 일을 동지들과 함께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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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내라는 이름은 큰 물줄기 또는 한줄기 냇물이란 뜻이요. 여러 또랑물과 샛물이 하나로 모두어 제 구비친다는 뜻입니다. 서울의 관악산 뒤에도 한내란 물길이 있으며 황해도 구월산 기슭에도 맑고 티 없는 냇물이 있는데 그것을 한내 그럽니다. 

백기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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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작년도 :
  • 통권 : 제13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