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과 토론은 모든 운동의 기본이자 출발이다

노동사회

학습과 토론은 모든 운동의 기본이자 출발이다

편집국 0 2,759 2013.05.29 10:13

 

sooya_01.jpg“그제서야 한 가지 생각이 외서댁의 머리를 스쳤다. 음마, 염병허네웨. 끙께로 저것도 새끼들헌테 미리 학습얼 시키는 것 아니라고? 외서댁은 기가 차기도 하고, 희한하기도 해서 헛바람 새는 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암탉이 병아리들을 데리고 그런 연습을 시키는 것을 목격하기는 처음이었다. 달구새끼가 저러는디 빨치산에서 날마동 학습허고 토론허고 허는 것이야 당연지사제. 이나저나 목심 보존허자는 것이야 달블 것이 하나또 읎는 일잉께. 외서댁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토방으로 올라서고 있었다.”

목숨과도 같은 ‘물음’을 다잡기 위하여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에 나오는 대목이다. 학습과 토론의 중요성을 이를 데 없이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동물들의 세계는 본능적인 것이라 치더라도, 빨치산의 생활이야 그야말로 생사를 넘나드는 극한적인 상황일터인데도 학습과 토론을 필수적인 일과로 삼는 것은, 그것이 “목심(목숨) 보존”과 세상을 바로 세우는 일에 맞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부문은 제쳐두고라도, 노동운동이 현재의 위기와 침체 국면을 극복하고 자기발전의 계기를 뚜렷이 창출하기 위해서는 학습과 토론의 활성화가 무엇보다 긴요하다는 사실은 어느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 근거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성급하게 해답을 구할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우선 ‘물음’부터 떠올리기 위해서다. 물음은 개념을 다듬는 전제조건이고, 문제제기식 교육을 통해서만이 끊임없이 현실을 벗겨내고 그것을 변혁하기 위한 해답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이런 물음들이다. 노동자의 상태와 내부구성은 투쟁과 어떤 관련을 갖는가? 노동자의 계급적 의식을 높이는 요인은 무엇인가? 노동자계급의 형성에서 공통점은 어떠하고 특수성은 또 어떤가? 노동운동의 고양과 침체를 규정하는 주된 요건은 무엇인가? 파시즘에 대항한 노동운동의 역사적 경험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경로는 어떻게 유형화할 수 있는가? 21세기 노동운동은 변혁 지향적 노선을 포기한 것인가? 이처럼 수없이 많은 물음들이 제기될 수 있다. 학습과 토론은 이런 물음과 진지하게 대결하는 가운데 활동가들이 내실을 다질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둘째, 새로운 상황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다. 노동운동을 둘러싼 정세의 변화도 급격할 뿐만 아니라, 주체적 조건(내부 구성, 상태, 의식, 조직 상태, 타 세력과의 연대 등)도 이전에 비해서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이런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노동운동의 역사에서 도출된 원칙과 자신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대중적인 토의를 통해 새로운 행동양식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브라질의 민중교육운동가 파울로 프레이리의 “인간은 세계라는 매개체를 통해 서로를 교육한다”는 말은 그러한 맥락에서 토론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셋째, 파벌주의의 극복을 위해서다. 파벌주의는 개인주의, 소영웅주의, 주관주의를 바탕으로 한다. 오늘 우리의 현실에 비추어 보면 치열한 노선 투쟁으로 파벌이 조성되는 경우보다는 오히려 헤게모니의 장악을 위한 분파 형성으로 비롯되는 측면이 더 크다. 그런 점에서 파벌주의, 분파주의는 조직과 투쟁을 해치고 노동운동의 발전을 가로막는 ‘병폐’다. 파벌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조직적으로 상호 비판의 자세를 갖추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일상적인 학습과 토론을 진행하는 것 또한 유력한 방책이 될 수 있다. 학습과 토론이 간부들과 활동가들의 이론과 사상 수준을 높임과 동시에, 다양한 견해의 교류를 통하여 공통의 가치를 발견하도록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넷째, 활동가의 육성과 노동운동 풍토 개선을 위해서다. 노동운동은 언제 어디서나 유능하고 성실한 노동운동가를 절실하게 요구한다. 대중운동 발전에서는 헌신적인 간부나 활동가의 역할이 이를 데 없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노동운동 상황을 냉정하게 진단하건데, 노동조합 간부와 활동가들 가운데 열성적으로 학습과 토론을 수행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다. 노동운동이 지금 놓인 상황에 비추어 매우 실망스럽고 우려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노동운동가는 열성이나 성실한 자세만으로 자기 역할을 다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이론과 실천을 닦아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집단적인 학습과 토론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간부나 활동가의 이런 노력 축적될 때만이 노동운동 풍토 개선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학습과 토론에 관한 어느 작은 사례 

여기서 학습과 토론에 관한 한 가지 사례를 소개해두고자 한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가 주관하여 약 1년 전부터 운용되고 있는 <세계노동운동사 학습반>의 경우다. 열 명 남짓 되는 노조 간부들이 모여서 ‘공부반’을 구성하고, 한 달에 두 번 정도 학습과 토론을 진행해 오고 있다. 한 사람이 미리 준비된 세계노동운동사 교재의 한 절 정도를 발제하고, 개념에 대한 질문과 답변을 마치면 토론할 대목을 설정하여 토론을 진행했다. 토론은 오늘의 노동운동 현실과 관련지어 행해질 수밖에 없었으며, 과거와 현재가 자연스럽게 연관되어 해석되고 평가되기 마련이었다. 발제와 토론이 끝나면 총괄 강의로서 마무리가 된다. 그 뒤로도 뒤풀이 장소에서 토론은 이어지고 새로운 주제들이 나오기도 한다.

학습의 내용은 대체로 이러했다. △노동자계급의 형성과 노동운동의 발생, △정치적 자립을 향한 노동운동 전진, △국제노동운동의 출범과 사회주의 이념의 대두, △독점자본주의 단계의 노동운동, △파리 코뮌, △제2인터내셔널과 식민지·종속국 노동운동의 초기 발전과정, △20세기 초두 노동자계급 투쟁의 새로운 단계, △제1차 세계대전과 대중적 노동자계급운동, △사회주의 혁명과 국제노동자계급 등등. 보다 폭넓은 측면에서 노동운동 선배들이 걸어온 발자취의 아주 작은 일면들이다.

맹목과 독선 가운데 다시 기본을 생각한다

세계노동운동사 학습은 ‘지식 쌓기’를 위한 것이 결코 아니다. 노동운동의 흐름을 역사적 관점에서 파악하기 위한 것이며 토론을 위한 대상을 역사적인 사실로 설정했을 뿐이다. 비단 1백 년 또는 2백 년 전에 일어난 사건에 관해 학습하고 토론하는 경우에도 오늘의 현실과 관련지어 이루어지는 것은, 그야말로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로 구실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학습과 토론의 주제는 학습 참가자들 스스로가 설정하면 그것이 어떤 것이든 상관없는 일일 터다.

학습과 토론은 모든 사회운동의 기본이자 출발이다. 그런 점에서 학습과 토론이 죽어있는 운동 판에서는 맹목과 독선이 판치기 마련이다. 노동운동의 미래를 열어가는 데서 학습과 토론의 활성화가 하나의 중요한 계기가 될 수는 없는 것일까.

 

  • 제작년도 :
  • 통권 : 제13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