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데렐라의 ‘구두’에 관한 단상

노동사회

신데렐라의 ‘구두’에 관한 단상

편집국 0 4,012 2013.05.29 10:12
 

tnrud_01.jpg서울 성수동에는 구두노동자들이 ‘제화거리’라고 부르는 길이 있다. 길 양쪽으로 1층에는 가죽가게와 구두액세서리점이 모여 있고, 2층과 3층에는 구두제작공장들이 숨어 있다. 숨어 있다고 말한 건 공장들이 간판도 붙어있지 않고 제대로 된 현관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가 본 사람이 아니고서는 쉽게 공장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번 공장에 발을 디디면 잊혀지지 않을 시각적 충격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곳이 20만 원을 갖고 가도 몇 만 원 더 얹어주기 전에는 살 수 없는 고가의 수제화를 생산하는 곳이라는 걸 안다면, 그 충격은 더 커질 수 있다. 시적 영감이 좀 있는 이라면 백화점 구두진열대나 패션소비자들의 세련됨과 비교하며 현대자본주의 사회의 이면을 보여주는 은유이자 상징의 장소로 삼을 수도 있겠다.

가끔 가는 곳이지만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그 곳, 19세기적 수공업의 풍경이 낡은 이미지가 아니라 살아 숨쉬는 동영상으로 재생되는 그 곳. 성수동 구두공장은 내게 삶과 사회의 모순을 보여주는 텍스트가 되었다. 

신데렐라 구두를 만든 게 잘못한 일?

이제 그만, 생산에 도움 되지 않은 이야기는 접고 구두 만드는 이들의 이야기를 해보자. 성수동 제화노동자들은 20년 역사의 노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노동조합은 유지하기 힘겨운 노동환경의 절대적 조건과 전체 노조운동의 부침 속에 이제는 간판 내려갈 날만 기다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조합이 뭔지 알고, 개인이 아니라 조직으로 모여 살아갈 방도를 찾는, 그 맛을 아는 구두노동자들이 한 1년간 모임을 가진 끝에 공장 밖에서 왁자하게 만날 자리를 기획하였으니, 이름하여 <신데렐라의 구두는 누가 만들었을까 - 구두 만드는 사람들의 축제>란다. 

여기서 1단계 문제! 신데렐라의 구두는 가죽 구두인가? 유리 구두라고 하는 게 대세다. 그럼 구두를 만든 것은 구두노동자인가, 유리노동자인가? 여기까지는 농담이다. 

진짜 문제! 구두축제를 기획하면서 신데렐라의 구두를 떠올린 이는 누구일까? 모임을 주재하는 단체의 활동가일까, 모임에 나오는 노동자일까? 답은? 노동자이다.

그렇다면 마지막 문제! 노동자가 자신들의 축제를 기획하며 오래된 동화 속 주인공을 불러왔을 때 활동가의 태도는 어떠해야 할까? 사회적 편견과 불평등에 편승하는 제안이니 다시 생각해보자고 해야 하나? 

축제의 슬로건을 정하는 회의에서 ‘신데렐라’라는 단어가 등장했을 때 활동가는 잠시 당황했다. 그리고 다음 회의까지 결정을 미루자고 했다. 다음 회의에서 노동자들은 활동가의 우려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 여자를 내세우기로 결정했다. 시비가 걸렸다. 

“신데렐라는 백마 탄 왕자님이 나타나 자신의 인생을 바꿔주길 바라는 여성의 꿈이 실현된 모습을 미화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데렐라 콤플렉스’라는 용어도 나온 것이고요. 그렇다면 이 카피가 의미하는 것은 ‘수동적인 신분상승의 도구로 사용된 구두조차 노동자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맞는 말이다. 노동자들의 축제와 신데렐라가 썩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다. 나는 답했다. 

“구두노동자들은 익숙한 비유를 떠올린 것이고, 신데렐라 얘기를 들을 때마다 ‘구두’에 대해서 할 말이 많았던 것 같아요. 사회적으로 이름을 얻지 못한 자신들의 노동에 대해서…….”

질문을 던진 이는 건강한 활동가이다. 진지하게 생각하고 어떤 문제든 노동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려고 한다. 나 역시 그가 비판하는 뜻을 이해하고 공감한다. 

그러나 너무 진지할 때 너무 심각할 때 우리는 현실로부터 둥실 떠버리곤 한다. 운동이라고 해서 늘 완벽한 정치적 옳음을 구현할 수는 없다. 늘 접하지 않나. 너무나도 옳음을 추구한 나머지 바보 같아지는 정치적 구호가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수동적인 신분상승의 도구조차 노동자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노동자가 생산하는 것들이 모두 이롭고 옳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는 예는 너무 많다.

과거 이미지만 보게 하는 낡은 프레임에 갇힌 건 아닌가

오늘 아침 구두축제 때 전시할 사진을 찍기 위해 한 공장을 방문했다. 30여 명의 노동자가 디자인부터 재단, 갑피, 저부, 포장, 진열의 전 공정을 소화하는 꽤 큰 공장이었다. 

그런데 노동자의 얼굴에 렌즈를 들이대는 순간, 제화공장을 드나들던 수년 동안에도 암초처럼 가라앉아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중대한 고정관념의 실체를 퍼뜩 깨달았다. 가난한 육체노동자의 이미지. 기름때 낀 손톱과 찌든 얼굴, 어두운 조명 아래 망치를 두드리는 팔뚝, 굽은 등. 공장을 드나들 때마다 사진으로 기록하고 싶다고 열망했던 이미지가 겨우 이런 것이었나? 

한 달쯤 됐나, 금속공장에 들어갔다가 사람이 없어 그냥 나오려던 적이 있다. 바닥에는 검은 쇳가루가 널려있고, 기계는 멈춰져 있었다. 대낮인데도 어찌나 깜깜한지 한발자국 내딛기가 조심스러웠다. 그때 “누구 찾아왔소?” 하는 소리가 들려 앞을 보니, 하얀 치약거품이 보이고 두 개의 눈동자가 있었다. 그 날도 난 오늘 아침처럼 낡은 ‘시각의 렌즈’를 들이댔던 것 같다. 손에 카메라가 없던 게 다행일까? 

내가 성수동에서 보아 온 것이 동시대성을 상실한, 속도전에서 지체된 늙은 육체노동자의 얼굴이었다는 걸 알았다. 이런 이미지를 좇는 나의 호기심은 ‘신데렐라’라는 상투적인 표현에 딸려오는 기계적인 비판보다 더 게으르다고 할 수 있다. 

살아 있음과 만나는 동시대의 운동이어야 한다!

카메라를 내리고 잠시 생각해본다. 운동은 현재의 운동이어야 하고 동시대의 운동이어야 한다. 반짝이는 가죽에 칫솔로 본드 칠을 하고 있는 저들 또한 21세기를 사는 생활인이다. 죽은 구호가 현실을 외면하게 만들 듯이, 죽은 프레임에 갇혀 있으면 현재가 아닌 과거만을 보게 된다. 

그래서 오늘 아침 작업의 결과는? 명랑한 생활인이자 노련한 장인으로서 구두노동자를 담는데 성공하였나? 결과가 좋지는 않다. 다만 오늘 깨달은 오류를 성수동 영세노동자운동에서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다짐 정도는 성과로 남았다. 

<신데렐라의 구두는 누가 만들었을까 - 구두 만드는 사람들의 축제>는 오는 8월13일 성수동에서 사진전을 비롯해 구두제작 시연, 구두 무료수선, 구두인 노래자랑 등으로 동시대인과 만난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3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