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촛불집회와 사회운동

노동사회

2008년 촛불집회와 사회운동

편집국 0 4,190 2013.05.29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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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지난 8월 7일 정치사회학회 심포지엄에서 발표했던 「새로운 시민운동의 ‘변환점’ 」을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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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사회운동을 돌아보면 그 이전과 이후가 구별되도록 하는 특정한 역사적 사건들이 있다. ‘2008년 촛불’은, 물론 학문적 연구와 논의가 더 필요하겠지만, 운동적 상상력으로 보면 1987년 6월 항쟁처럼 이전의 운동과 이후의 운동이 달라지는 지점에 놓여 있다. 1987년 6월 직선제 쟁취라는 정치권력의 선출에 관한 절차적 민주주의의 획득 이후에, 사회운동은 사회 모든 분야에서 새로운 흐름들을 생성해냈다. 1980년대 민주화와 민중운동의 흐름은 1987년 6월을 거치며 지금의 민주노총, 전교조, 한겨레신문 등을 탄생시키고, 조직적, 정치적으로 성장하면서 제도 안으로까지 확장됐을 뿐 아니라, 환경운동, 여성운동, 시민운동 등 새로운 과제를 내건 사회운동들이 본격적으로 성장하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20년 만에 찾아온 사회운동의 새로운 분기점 

지금 시점에서 각각의 운동들이 어떤 모습으로 변화하고 발전할 것이라고 꼬집어 예측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환경운동도, 여성운동도, 언론운동도, 노동운동도 또 다른 여타의 운동도 2008년 촛불집회 이전과는 다른 양상으로 발전해갈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이미 몇몇 징후들을 우리는 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언론운동의 경우 지금 벌어지고 있는 한겨레, 경향, 방송사 지키기 운동 등이 현재 상태에서만 그칠 것이라고 예측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이미 일부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국민 포털’을 만들자는 주장까지 나오기도 한다. 여하간 인터넷과 어우러져 이전과 다른 미디어운동이 전개될 것은 분명하다. 

여성운동의 경우에도 인터넷을 매개로 거리로 나왔던 여성들을 보면서, 지금의 상태 그대로 운동이 전개될 것이라고 예측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운동의 주체이자 대상으로 보았던 여성상과는 전혀 다른 여성들이 운동의 주체로 나섰고, 또 나설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 현상이 바로 ‘하이 힐 부대’의 등장이라 할 것이다. 또 얼마 전까지 대학생들이 과거 같지 않다며 한탄했었지만, 촛불집회에서 나타난 조만간 대학생들이 될 청소년들의 움직임을 보며 앞으로의 대학이 달라질 것임은 쉽게 예측할 수 있다.

이러한 운동의 각 분야에서의 변화와 더불어, 2008년 촛불 이후의 사회운동은 의제 설정과 운동의 방식에 있어서도 이전과 달라질 것이다. 따라서 “90년대 운동이 이제 그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사회운동을 요구하고 있”으며 1987년 6월을 거치며 80년대의 “민주화운동이 그 역사적 사명을 다하고 90년대의 시민운동에게 그 사회적 지위를 내어주었듯이 이제 다른 성격의 운동들이 조직되어야 할 때”인 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는 위기이자 기회이기도 하다. 이 같은 변화의 의미를 이해하고 대응한다면 기존의 사회운동은 대중과 더 깊이 결합한 사회운동으로 거듭날 수도 있다.

‘90년대 사회운동’보다 앞선 능동적 시민들

2008년 촛불은 현재 한국의 대의민주주의 자체에 문제제기를 하고 있으며, 따라서 대의제의 핵심적 주체인 정당에 대해서도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지난 국회의원 선거에서의 46% 투표율은 국민들을 위한 선택지가 없는 지금의 정치지형에 대해서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셈이다. 뿐만 아니라 이는 1990년대 우리 사회를 이끌어 온 핵심적인 사회세력 중의 하나인 시민운동을 비롯하여 노동운동 등 여타 사회운동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5월의 첫 번째 촛불집회가 기존의 시민운동 혹은 다른 사회운동과 전혀 관계없이 시작되었다는 점은 그런 점에서 상징적이다. 

그동안 일반적으로는 집회를 조직하고 운영하며 구호를 만들어 내는 일은 ‘운동가’의 일이지 참여하는 시민의 몫은 아니었다. 구호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관련한 이슈에 대해 일정한 정보가 있어야 했고, 집회를 조직하고 운영하기 위해서도 나름의 노하우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민사회단체들이 광우병국민대책회의를 만들어 결합하기 전에 이루어진 집회는 오히려 기존의 집회와 비교해 볼 때도 훨씬 창의적이고 활기차며, 신나는 놀이터로, 누구나 쉽게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이를 구호를 만들어내기 위한 정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시민들의 입장에서 시민사회단체들이 아는 정보나 ‘내’가 아는 정보나 그리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미 시민들은 인터넷을 통해 광우병 문제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알 수 있었고, 방송을 통해 집중된 정보를 획득할 수 있었다. 집회를 조직하고 운영하는 노하우 역시 2002년 월드컵을 통해 전 국민적으로 학습된 것이었다. 또한 피켓을 만들어내는 일도,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를 위해 충분히 해본 일이었던 셈이다. 이에 따라 오히려 딱딱하고 건조한 시민사회단체들의 구호보다 훨씬 생동감과 친밀감 있는 구호들이 만들어지고, 피켓의 형태나 종류도 훨씬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났다. 

다시 말해서, 특별히 시민사회단체들이 앞서서 ‘해주길’ 기다려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90년대의 시민운동과 사회운동이 이렇듯 2008년 촛불집회에서 드러난 적극적인 모습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새로운 운동의 흐름에 자신의 자리를 내주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닌 셈이다. 

담론과 일상이 만나다, 스스로 조직되다

이러한 상황에서 2008년 촛불집회에서 사회운동이 주목해야 할 특징을 헤아려 보는 것은 앞으로의 운동의 변화와 관련해 매우 중요하다. 내 의견은 다음과 같다.

첫째, 담론과 일상이 만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삶의 정치 혹은 생활정치의 이슈라고 부르고 있기도 한데, 어쨌든 이번 촛불시위는 그동안 어느 정도 개인들의 무임승차가 가능한 ‘제도의 문제’로 이해됐던 국민의 건강권이라는 문제가, 사실은 ‘삶의 문제’라는 점을 개인들에게 확인시켜줬다. 특히 그간 대개의 상황을 제도의 문제로 보고 입법운동이나 정책대안의 제출이라는 형식으로 풀려고 했던 시민운동의 경우, 이렇듯 시민들이 사회문제에 대해서 내 삶의 문제로 보고 직접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는 점에 더욱 주목해야 한다. 기존의 의제라도 의제에 대한 이해가 전혀 다른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또한 의료, 교육, 환경 등 앞으로 우리 사회에서 주요한 의제가 될 이슈들은 사람들의 일상 삶과 직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담론은 일상과 더욱 자주 만나게 될 것이다.

둘째, 2008년 촛불에서는 운동의 단일한 중앙 지도부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명박 정부와 경찰은 촛불시위가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배후세력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찾지 못하고 있다. 사실 이번 집회에 전통적인 의미의 배후가 없다는 것은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와 한나라당, 경찰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얼마 전에는 진보연대라는 단체의 사무실을 뒤져서 ‘촛불집회 계획서’라는 것을 찾았다고 수선을 떨었는데, 그것이 실제 계획서도 아닐 뿐더러 설사 계획서라 하더라도 촛불시위가 어느 한 단체의 계획서대로 움직이지 않았음은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오히려 인터넷의 특성 중 하나인 ‘자기조직화’의 논리로 해석하는 것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 집회에서 한 사람의 행위가 전체의 행위로 이어지는 모습이 특히 그러하다. 한 사람이 집회 현장에서 (컴퓨터 입력 장치인) ‘마우스’를 끌고 다니는 모습이 인터넷에 사진으로 오르면, 다음 날 집회에서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많은 사람들이 고장 난 마우스를 끌고 다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어느 집에 “광우병 쇠고기 수입을 반대한다”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는 모습이 알려지면, 어느새 비슷한 플래카드가 전국 곳곳에 걸린다. 이는 단일한 지도부가 일사분란하게 명령을 내린다고 실행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셋째, 기존 조직과 집단의 권위에 대한 신뢰가 약하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지도부가 없다는 점과 연결되기도 한다. 6월10일 대규모 시위 이후 이명박 정부의 탄압으로 주춤하던 촛불집회를 천주교사제단의 미사가 이어주면서 시민들의 신뢰를 받기도 했지만, 이번 촛불시위에서는 전반적으로 기존 조직과 집단이 시민들에게 과거와 같은 신뢰를 받는 상황은 아니었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광우병대책회의가 집회가 끝나고 나서 해산을 종용할라치면 “너희나 집에 가”라고 한다든가, 집회 도중에라도 다른 시위 공간으로 이동할 사람들은 자유롭게 이동한다든지, 또 강기갑 의원을 제외하고는 정치권 누구도 집회에 나서지 못했다든가, 집회 초기에 조직과 집단의 깃발을 앞세우는 것을 거부했던 현상 등이 그 증거다. 

새로운 여론형성 방식 등장, 부각된 개인 참여 중요성

넷째, 여론이 형성되는 과정과 경로가 기존과 다르다. 실제 2008년 쇠고기 수입문제로 촛불집회가 시민들의 자발성하에 이루어지기까지 여론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조금 과장되게 말하자면 시민사회단체들은 ‘소외’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인터넷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문제에 관한 논란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촛불집회가 아니었다면 들어보지 못했을 인터넷상의 모임과 카페들, 다음의 아고라 등에서 시민사회단체들은 그리 적극적인 결합체들이 아니었다.

시민사회단체들이 토론회를 갖거나 기자회견을 갖거나 입법청원을 하면, 이를 기존 언론이 보도하고 논란이 되면서 사회적 여론이 형성되고 정책으로 실현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면, 이번에는 전혀 다른 과정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물론 애초 문제제기했던 보건의료단체들은 전통적 방식으로 열심히 문제를 제기해왔고, 그 결과 주요한 국면에서 여론이 형성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주로 이들의 견해가 ‘퍼 날라졌던’ 것이지, 인터넷의 여론을 이들이 조직한 것은 아니었다.

다섯째, 다양한 가치지향을 가진 집단과 사람들이 특정한 사안을 중심으로 만나고 헤어진다. 광우병대책회의라는, 네티즌들도 참여한 시민사회단체 중심의 연대기구가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이 기구는 전통적인 모습의 연대기구가 아니다. 말 그대로 ‘회의체’다. 그동안에도 존재했던 사안별 연대기구와는 성격이 다르다. 한편, 대책회의 안에 다른 의사결정기구가 있었던 것이 아니어서, ‘상황실’이라는 집회 실무를 담당하는 기구가 마치 ‘지도부’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이는 착시 현상일 뿐이었다. 이번 촛불시위 과정에서 일반적인 모습은, 가치와 지향이 전혀 다른 집단들이 한 가지 사안을 중심으로 제각기 다른 의사결정과정을 거쳐 한 공간 안에 모여드는 것이었다. 한 번 참여했다고 영속적으로 참여한다는 보장도 없고, 그것을 의무로 강제하는 곳도 없다. 

여섯째, 엄숙주의가 파괴된 집회문화가 일반적이었다. 새삼스런 묘사가 필요 없을 정도로 풍자와 해학, 놀이가 어우러진 집회문화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마우스를 끌고 다니는 행위나 소위 ‘닭장투어’, ‘온수구호’ 등은 이전의 집회에서 보기 어려웠던 상상력의 발현이었다. 아마도 이런 경험을 한 시민들에게는 이제 일정한 틀에 맞추어진 플래카드 뒤의 인사말과 구호의 낭독으로 이어지는 관성적인 집회는 그 영향력과 파괴력에서 이전처럼 주목받기는 어려워 보인다. 

일곱째, 집단적 조직적 참여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지만, 무엇보다 ‘개인’의 결정과 참여가 주요한 흐름이라는 점이다. 2008년 촛불 이전부터 인터넷에서 ‘개인’은 조직과 집단 이상으로 영향력을 발휘할 수도 있음을 확인해주었다. 대규모 촛불시위의 출발이 되었던 2002년의 두 여중생 사망사건 때의 촛불시위도 한 사람의 제안으로 시작되었고, 2008년 촛불시위 역시 어느 고등학생의 제안으로 시작되었다. 수많은 개인들이 다음의 아고라 토론방과 MBC의 100분 토론 게시판, 각종 카페와 블로그에서 논의에 참여하기도 하고 지켜보기도 하면서 나름의 판단과 결정을 내린 후에 오프라인 공간으로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의무와 강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판단에 의한 자발적인 참여가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가치’에 기초한 의제생산을 주도하라

이러한 특성들에 대한 검토를 거쳐, 이제 앞으로 시민사회운동이 지향해야 할 과제들을 살펴보자. 시민사회운동은 모든 지점에서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 가치와 의제의 생성, 운동방식의 변화, 소통방식의 변화, 운동주체의 변화를 위한 전략이 필요하다. 정책대응운동에서 대안운동으로, 중앙권력 일변도에서 지역정치까지, 제도에서 생활문화운동으로의 확장으로. 

이를 위해서는 첫째, ‘가치’에 기초한 의제생산을 주도해야 한다. 물론 단순한 정책대응운동이 아니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 변화에 대한 구조적 천착은 반드시 필요하다. 특히 2008년 촛불에서 확인된 것처럼 ‘변화하는 환경’에 주목해야 한다. 아직 본격적으로 의제로 형성되지 못하고 있는 한미 FTA가 가져올 변화, 남북관계의 변화, 이미 깨져버린 평준화시스템이 가져올 변화, 이주노동자로 인한 인구학적 변화, 비정규직이 이미 노동자계급의 다수인 노동자들의 존재와 인식의 변화, 기후변화 등등, ‘변화’에 주목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지금 현재 사회운동이 암묵적으로 합의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운동의 과제들을 전복적으로 검토해야 할 것이다. 특히 이명박 정부의 교육정책에 대한 반감에도 서울시 교육감 선거에서 전교조 등 기존 교육운동단체들이 지지했던 후보가 패배한 지점을 평가해 볼 때, 반드시 내걸었던 공약을 점검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유권자들은 이명박 정부의 교육정책에 대해서도 분명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교육시민운동이 내건 교육문제의 해결방향에 대해서도 의문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 셈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시민사회운동 내에서도 소수의 목소리였던 생태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 평화운동가, 영 페미니스트, 인권운동가, 대안교육자들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기존의 운동과제들에 대한 전복적 문제제기가 담겨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의제 형성과정이 곧 네트워크 형성과정이 돼야  

둘째, 깃발이 내걸린 하나의 조직이 아니라 사회적 세력으로서의 네트워크를 만들어야 한다. 어떤 가치지향을 가지고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자고 할 것인가를 중심으로, 사회운동이 어떠한 새로운 ‘세력’과 네트워킹해야 하는가를 적극적으로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기존의 운동방식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 필요하다. 즉, 과거에는 이미 만들어진 의제를 제기하고 여론화하는 방식이었다면, 지금은 의제를 만들어가고 형성해가는 과정이 운동을 조직화하고 네트워킹하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번 촛불집회가 시사하는 바다. 누군가 어떤 계획이나 프로그램을 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프로그램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중요한 것이다.

운동 전체가 하나의 깃발 아래 뭉칠 것이라는 과도한 기대도 버려야 한다. 다원화된 가치지향들이 한 가지 가치로 묶일 수는 없는 일이기에 더욱 연대와 네트워크가 중요하다. 연대와 네트워크의 경험과 족적이 쌓이면서 서로 다른 가치에 기초한 주장들의 공감대가 넓어지고, 사회적으로 수용 가능한 정책적 대안들이 운동 내부의 주장이 아니라 사회적 요구로 받아들여질 것이기 때문이다.

‘풀뿌리’의 일상에 결합하는 담론이 변화 가져 온다

셋째, 담론과 일상이 만나는 운동이 되어야 한다. 시민운동의 경우에 시민운동에 대한 오래된 비판 중에 하나가 “시민 없는 시민운동”이라는 것이다. 시민운동은 이 비판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시민단체들의 주장과 구호는 어느새 시민들의 일상 삶과 멀어지고 상근운동가들만의 무거운 진지함으로 여겨지고 있다. 시민운동과 시민들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풀뿌리운동에 대한 주목이 높아지고 있다. 대개 지금의 풀뿌리운동에 대한 이해는 지역주민운동으로 한정되어 있는데, 그러다 보니 모든 운동가가 “지역으로 가야하나”하는 의문을 갖기도 한다. 풀뿌리운동이란 것이 지역적 범주로만 이해되어서도 안 될 뿐 아니라 풀뿌리운동만이 운동의 전부는 아니다.

시민운동뿐 아니라 노동운동을 비롯한 지금의 사회운동은 지금 현재 한국사회가 소외시키고 있는 사람들에 주목해야 한다. 비정규직 노동자, 비정규직인 지식인, 이주노동자, 잘못된 교육제도 탓에 멍들어 가는 학생 등이 그들이며 이들 역시 ‘풀뿌리’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들의 이야기는 우리의 미래와 직접적 관련이 있다. 촛불집회는 지역의 풀뿌리만이 풀뿌리가 아님을 보여주었고, 담론과 일상이 만났을 때 세상의 변화를 가져올 것임을 설명하지도 않아도 될 만큼 충분히 보여주었다.

‘개인이 미디어’인 시대, 스스로 언론이 되라

넷째, 스스로 언론이 되어야 한다. 1990년대 시민사회운동은 특별히 자신의 미디어에 주목하지 않아도 좋을 정도로 기존 미디어와 친밀하였다. 시민운동의 경우에도 “언론플레이에 능숙한 시민운동”이라는 평가까지 듣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런 시민운동조차 2000년 총선연대 활동을 정점으로 안티조선 운동을 거치면서 기존 미디어로부터 소외되기 시작하였다. 90년대 후반 거의 모든 신문이 갖고 있었던 ‘엔지오’ 공간이 2000년 이후 사라졌으며, 보도 분량도 급속히 줄어들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어쨌든 현재 기존 미디어와 시민운동이 90년대 같은 우호적 관계가 아닌 것은 분명해 보인다. 앞으로도 미디어 시장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기존 미디어들이 과거처럼 시민운동을 다루어 주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자신의 견해를 다른 매체에 의존해 시민들과 소통하려는 방식은 지금의 조건에 맞는 방식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시민운동이 2002년 이후 일반화된 인터넷을 매개로 한 새로운 미디어에 그리 익숙한 것도 아니다. 따라서 미디어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대응을 하기 위해서는 기존 미디어에 대한 감시와 모니터에 그쳐서는 안 되며, 스스로의 미디어를 갖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이번 촛불집회에서 보았던 것처럼 이미 미디어는 단순한 정보의 공급자가 아니다. 공급과정 자체가 여론의 형성과정이며 확산과정이다. 미디어 자체가 운동의 조직수단이기도 하다. 이미 2008년 촛불집회가 현재는 “개인이 미디어”인 시대라는 점을 확인해 주었다. 수많은 블로그와 UCC가 인터넷 포털사이트를 매개로 여론화되는 과정을 시민운동은 지켜보고만 있는 현실을 넘어서야 한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3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