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화된 패배에 대처하는 자세

노동사회

일상화된 패배에 대처하는 자세

편집국 0 3,126 2013.05.29 10:35

‘연대(連帶)’는 노동운동이 사랑하는 단어다. 많은 노동운동 활동가들이 부드럽게 울리다가 묵직하게 닫히는 발성을 가진 이 단어에, 뭉클함, 저릿함, 애잔함, 통쾌함, 벅참 등등의 등골 간질이는 감정의 기억들을 하나 이상은 덧씌워 두고 있을 것이다. 함께 만들어낸 정의로운 승리, 함께 만들어낸 찬란한 패배, 신뢰와 긴장 속에서 함성으로 터져 나온 응어리, 위태롭게 맞잡은 손에서 느껴지던 섬세한 온기, 그리고 그렇게 계속되는 삶. 연대는 노동운동 활동가들이 스스로를 단련하고 재생산해온 과정들을 응축하고 있는 정서적 덩어리이다.

패배했거나 패색 짙은 연대투쟁들을 지켜보며  

이렇게 되먹지 못한 미사여구를 들먹이는 것은 일종의 균형추를 맞추기 위해서다. 어쨌거나 결국에는 패배했거나 패색이 짙어가고 있는, 연대투쟁들과 사회적 연대들의 암울한 현실의 무게를 버텨내기 위한. 그러니까 뼈아픈 인정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민주노총이 전례 없이 단위사업장 문제에 ‘올인’했다는 뉴코아-이랜드 투쟁도, 수많은 지식인들이 지원했던 KTX 승무원 투쟁도, 육체적 한계를 초월한 절박함으로 호소하고 있는 기륭전자 투쟁에서도, 일부에서 새로운 사회적 연대의 가능성으로 상찬하는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투쟁에서도, 우리의 연대는 최소한 처음에 목표로 했던 무언가를 쟁취하지 못했거나 못하고 있다.

이는 무엇을 뜻할까? 노동운동을 포함한 진보진영 역량의 총합이 작은 사회적 변화도 일으키지 못할 만큼 약화되어 있다는 냉엄한 현실에 대한 깨달음? 어떤 경우에 권력은 폐쇄회로를 통해 사회로 투사되는 것일까? 그리하여 신자유주의 토건세력이 입구를 틀어쥐고 있는 동안에는 다른 세력의 어떠한 압력도 사회로 투사되지 못하는 것일까? 그러나 이는 비관주의적 도피를 이끌어내는 맹목에 빠진 질문일 뿐이다. 이제 ‘위기’를 운운하는 게 귀찮아졌을 정도로 우리 운동진영이 침체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놀라울 정도로 무능한 수구·보수세력이 만들어내는 어그러짐과 균열도 만만찮다.

그러니까 이런 얘기다. 소통 불능의 이명박 정부와 그에 편승한 자산계급들은 사회적 고통과 불안을 급격하게 누적시키면서도 자신들의 훌륭한 신세계를 향한 정치에 나설 것이고, 노동운동을 비롯한 진보진영은 ‘저지’를 위한 연대투쟁으로 줄곧 떠밀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관성적인 연대투쟁은 거의, 아니 당분간은 반드시 질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의 순환은 비대칭적 권력관계 도식의 기계적 반복이 아니라, 권력을 넘어서는 어떤 성찰과 작은 변화의 누적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정면으로 부닥쳐 깨지고 깨지더라도, 또 한편으로는 신자유주의 토건세력이 파놓은 균열에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꽃을 피워야 한다. 뿌리 뒤얽고 열매를 맺어, 권력을 붕괴시키는 과정이어야 한다.

노동운동은 연대를 통해 ‘다시’ 성장할 수 있을까

그러한 생명을 키워내는 데 필요한 것이야말로, 노동운동 활동가들의 역동적인 정서 덩어리로서 연대일 것이다. 노동운동은 자신을 성장시켜 준 에너지로서 연대를 기억해낼 수 있을까? 먼저 깨지고 먼저 나눔으로써, 더 커지고 성장하는 ‘비등가 교환’ 혹은 ‘장기투자’로서 연대를 현명하게, 자발적으로 실현할 수 있을까? 연대의 활성화가 아쉬운 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을까? 모를 일이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3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