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조원들은 ‘시민적 다양성’을 드러낼 수 있을까

노동사회

노조원들은 ‘시민적 다양성’을 드러낼 수 있을까

편집국 0 4,482 2013.05.29 10:40

지난 2008년 6월, 미국산 광우병위험 쇠고기 수입을 우려하는 시민들의 문제제기로 개화되었던 촛불시위가, 마침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새로운 시민권력(civic power)의 발견’으로 최절정에 달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노조 간부의 절실한 고백

시민들이 내뿜는 개성과 다양성의 향연, 그리고 카니발적 열린 공간에 매료되었던 어느 노조간부는 고뇌했다. 그는 “시민에게 있는 다양성이 왜 우리 조합원들에게는 없는 것일까?”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노조원들의 다양성 부재를 현 노조운동이 직면한 중요한 문제라고 고백하는 놀라운 통찰력을 보여주었다. 이 노조간부는 공공노조의 신세종 부위원장이다. 그의 통찰과 반성은 인터넷 매체 『레디앙』(7월8일~12일)에 소개된 바 있다. 그의 글을 조금만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동원되지 않은 촛불, 조직되지 않은 촛불, 다양성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모인 촛불. 이것이 정답이고 이것이 배후이다. 이러한 다양성과 자발성은 창조성을 끌어냈다. 5월24일 이전까지 촛불집회를 재미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의 관념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손 피켓의 문구들, 그 재치 발랄함과 창의성들. 내로라하는 명 연설가들을 뛰어넘는 재치로 대중을 압도하는 학생과 시민들의 발언들. 번호표를 나누어 주어야만 집회가 진행될 만큼 몰려드는 자유발언자들. 끊임없이 쏟아지는 새로운 구호, 새로운 선전물들. 사진기를 들고 피켓만 찍으러 다녀도 지칠 정도로, 집회 자체가 생기 넘쳤다. 

그런데 우리 노동조합은? 잠시 우리(노동조합)의 집회와 비교해 보자. 집회의 목적에 대한 (때로는 치열하기까지 한) 토론, 조직지침 하달, 조직 동원, 틀에 박힌 집회(민중의례, 십수  년째 비슷한 사람들의 항상 똑같은 발언, 너무 익숙해져서 아무런 감흥도 일으키지 않는 민중가요 부르기, 공연 한 토막, 결의문 낭독). 이제는 선전전조차 동반하지 않고 시민들에 대한 홍보방송조차 하지 않는 따분하고 무의미한 행진, 그 과정에서 조합원 대부분이 빠져나간 후 진행하는 마무리 집회……. 너무 심하게 표현했지만, 그래도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노동자도 국민이고, 시민이다. 아니 노동자가 국민과 시민의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국민과 시민에게 있는 다양성이 왜 우리 조합원들에게는 없는 것일까? 없는 게 아니라 우리가 외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민주와 자유, 노동해방과 진보를 부르짖는 우리들이 한편으로는 또 다른 획일주의를 양산해 오고 그것에 익숙해져 있던 것은 아닐까?


이러한 고백을 통해 신세종 부위원장이 던진 질문들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를 해명하거나 이론적으로 검토해 볼 것을 촉구한다고 생각한다. 첫째, 시민이 가진 ‘다양성’은 무엇인가? 둘째, 시민들이 가진 다양성을 드러내지 못하는 노조원들의 ‘활동’은 무엇으로 개념정의 할 수 있는가? 셋째, 노조원들도 시민적 다양성을 드러낼 수 있는가? 넷째, 노조원들이 시민적 다양성을 드러내게 하기 위한 해법은 무엇인가? 

‘정치공학’ 버리고 ‘정치적인 것’ 복원해야

이러한 질문들에 응답하기 위해서 한나 아렌트(H. Arendt)라는 미국 정치학자의 의견을 참고해보도록 하겠다. 아렌트는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노동(labor)과 작업(work), 그리고 행위(praxis: action) 세 부분으로 나누고, 그 중 행위를 최고의 것으로 위계 지웠다. 여기서 행위는 고대 그리스 자유시민들의 삶의 형태로, 자신의 말과 행위를 통해 개성을 드러내면서 자유를 느끼는 즉, “인간됨을 표현하는 정치적 행위”를 뜻한다.

한편, 행위보다 아래에 있는 노동과 작업은 각각 고대 노예와 장인의 삶의 양태다. 먹기 위해 살아가야만 하는 인간형인 노동적 동물(animal laborans)과, 이윤을 위해 자기 삶을 소비하는 제작인(homo faber)의 삶을 상징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아렌트는 생물학적인 존재로서 인간이 신진대사를 유지하기 위하여 먹이를 구하는 것(사냥, 식물채집 등)은 노동으로, 직접적인 신진대사를 넘어서 항구적인 물건을 만드는 것(기계생산, 도시건설, 사회제도화 등)은 작업으로 구분했다. 그런데 이러한 노동과 작업은 모두 타인의 삶과 목적을 위해 자신을 노예화하거나 수단화하는, ‘도구적 행위’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따라서 아렌트는 오직 행위만을 ‘인간적인 것’으로 존대했다. 다양성(plurality)을 행위의 속성으로 파악하였기 때문이다. 즉, 아렌트에게 행위는 다양한 사람들의 말과 행위가 소통되면서 열리는, ‘공감된 세계’ 속에서의 공동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드러나는 공적영역의 사례로서 아렌트는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와 로마의 ‘공화국’, 그리고 1871년의 ‘파리코뮌’을 제시한다.    

고대 그리스의 자유시민이 공적영역에서 (정치)행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사적인 것, 즉 가정경제(oikos)의 일, 그러니까 노예와 여성 등에 이뤄지는 생식과 노동이 안정됐기 때문이었다. 쉽게 말해 안정적으로 먹고 살 수 있었기 때문에 인간됨을 표현하는 정치적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듯 정치적인 것(‘공적인 것’)과 가정경제적인 것(‘사적인 것’)을 분리시키는 고대 그리스의 단순한 개념 쌍 구도는, 근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기초한 국민경제 국가체제를 맞이하면서 크게 변화했다. ‘사회적인 것’이 등장한 것이다. 

아렌트에게 사회적인 것이란 과거에는 사적인 것이었던 경제행위가 공적인 관심을 획득하면서 만들어진 영역이다. 다시 말해 사회적인 것이란 ‘자본-임노동 관계의 전면화’로, 과거 사적인 영역에 속해 있던 (가정)경제가 근대와 더불어 국가적 차원에서 공적 관심의 대상이 되어버린 역사적 과정을 지칭한다. 이러한 과정에는 가정에 묶여있던 노예들과 여성들이 근대적인 임금노동자로 ‘해방’되는 과정이 동반된다.  

한편, 사회적인 것의 등장으로 인해 공적영역의 구조에도 변동이 왔다. 과거에는 분명했던 공과 사의 경계가 무너지고, 그로 인해 진정으로 공적이고 진정으로 정치적인 것이었던 ‘행위’가 공적인 관심에서 멀어지고 망각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 최고의 가치였던 정치적 행위가 새로 등장한 경제 및 계급논리에 밀려 노동과 작업에 비해 후순위로 전복된 것이다. 말과 다양성을 기초로 드러났던 공적 영역의 가치는 축소되고, 그 대신 정치적 다양성을 부정하는 하나의 획일화된 관점과 표준화된 척도가 자리잡은 것이다. 

이러한 속에서 구조화된 ‘현대의 정치’는 노동과 작업의 정치적 버전이 되었다. 자신의 개성을 자유롭게 드러내면서 인간됨을 표현하는 것이었던 정치적 행위가, 목적달성을 위한 합목적적인 도구적 행위(기획·계몽·동원)로서 ‘정치공학’으로 대체된 것이다. 아렌트에 따르면 맑스주의와 사회주의는 정치공학의 대표적인 예로, 이러한 기획들은 자본주의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한 최고의 가치로서 노동을 넘어서 행위를 복원하는 데 실패했다. 다시 말해, 정치적 다양성과 개성을 계급과 이념으로 환원하여 획일화하는 ‘전체주의’를 주조함으로써, 인간됨을 기초로 드러나는 대화와 소통의 공적영역을 복원하는 데 실패했다.

아렌트는 정치공학으로는 공적영역을 복원할 수 없다고 판단한다. 그는 말과 행위로 인간됨을 드러냈던 고대 그리스 자유시민들의 행위 개념을 현대에 되살려, 공적영역과 정치적인 것을 복원할 것을 촉구한다.

시민들의 다양성과 노조원들의 획일성

이렇듯 인간 삶을 바라볼 때 아렌트가 사용한 ‘노동’과 ‘작업’, 그리고 ‘행위’라는 개념들과 그것들 각각이 추구하는 세계를 거울삼아 비춰보면, 앞에서 언급한 네 개의 질문 중 첫째와 둘째 질문에 대해 어느 정도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시민의 다양성이란 무엇이며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가? 아렌트의 개념을 빌리자면 시민들이 보여줄 수 있는 ‘다양성’은 인간 삶의 최고의 형태인 ‘행위’의 속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즉, 자신의 말과 행위를 통해 개성을 드러내면서 자유를 느끼는, 즉 인간됨을 표현하는 정치적 행위(‘정치적인 것’)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일 터다.  

그렇게 볼 때 시민적 다양성을 드러내는 행위의 핵심은 ‘시민적 대화활동’이다. 시민들은 시민적 대화활동을 통해 도시공학적·경제적인 ‘물질적인 세계’가 아닌 말과 행위가 소통되면서 열리는, ‘공감된 세계’(공적영역)를 창조하고 그 속에 있을 때 인간됨을 느낀다. 시민적 대화가 다양성을 드러낼 수 있는 이유는 그 속에서 이뤄지는 행위가 목적-수단에 얽매이는 도구적인 속성을 가진 작업과는 다른, ‘목적 그 자체’를 추구하는 ‘자유로운 행위’이기 때문이다. 신세종 부위원장이 촛불시민들의 다양성과 자발성 속에서 창조성과 생기를 느낀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둘째, 그렇다면 노조와 노조원들의 노조활동은 무엇이며, 어떤 속성을 갖는가? 이것은 ‘작업’에 해당한다. 노조는 노동자의 사회경제적인 이익과 권리를 도모하기 위한 목적으로 탄생했고, 노조 지도부의 활동들은 대체로 노조원들을 계몽(교육)하거나 조직화하기 위한 ‘목적의식적 활동’들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노조의 활동은 목적-수단관계를 내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작업에 해당한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는 목적달성을 위해 노조원들은 집단적(집합적)이고 조직적(효율적)일 필요가 있지만, 인간의 다양성을 드러낼 필요는 없다.

이는 노조의 집단행동은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다양한 개성과 자유로운 의견을 드러내면서 형성되는 네트워크와 인식공동체에 기반하기보다는, 오히려 시민적 다양성을 ‘임금노동자’라는 단일한 속성으로 환원하여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노조의 활동은 그 속성상 노동자들의 통일성을 위해 지도부, 기획, 전술, 지침, 조직화, 통권 등을 강조하게 된다. 그런 측면에서 노조활동에서 ‘획일성’은 어느 정도 당연한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해방이 아니라 자유, ‘정치적 노동운동’의 지향 

그렇다면 노동자들은 ‘행위’를 할 수 없는 것일까? 다시 말해, 노조원들은 획일성에서 벗어나 다양성을 드러낼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도 아렌트의 의견을 들어보자.

아렌트는 노동운동을 이중적으로 본다. 그는 노동운동을 경제적 노동운동인 ‘노동조합운동’과 ‘정치적 노동운동’으로 구분했다. 아렌트는 경제적 노동조합운동을 작업의 영역으로, 즉 정치적이지도 않고 혁명적이지 않은 ‘비정치적인 것’으로 규정했다. 이에 반해 프랑스에서 발생한 1848년 혁명이나 1956년의 헝가리 혁명과 같이 사회경제적인 해법 요구를 넘어 ‘새로운 정부형태’의 형성을 요구하며 시민적 자유를 드러낸 사례들은 정치적 노동운동으로, 즉 행위의 영역으로 인정했다.     

이와 관련해서 아렌트는 1871년 파리코뮌과 자코뱅당이 주도한 1789년 프랑스혁명을 특히 강조하여 대조적으로 평가했다. 아렌트에 따르면 “혁명의 목적은 자유이고 반란의 목적은 해방”인데, 파리코뮌의 경우에는 그 목적이 자유에 있고 프랑스혁명의 경우엔 해방에 있었다는 것이다. 아렌트에게 해방(liberation)은 노동과 작업의 영역에서 빚어지는 빈곤과 전제정치 등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했고, 자유(freedom)는 공적 공간에서의 공적행위, 즉 동등한 사람들 사이에서 공동행위와 공동권력을 창출하는 과정을 의미했다. 따라서 아렌트는 그 과정에서 인간의 다양성을 무시하는 폭력과 공포를 동원한 자코뱅당과 로베스피에르가 주도한 프랑스혁명을 ‘해방’으로 보았던 것이다.  

또한 그는 정치적 노동운동과 대칭되는 ‘경제사회적 노동운동’에 대해서도 스스로 어떤 언어를 사용했건 간에, “노동조합은 사회를 대표하는 정치제도를 개혁함으로써 사회개혁을 바랐다는 점에서 결코 혁명적이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또한 “거의 대부분의 ‘노동계급의 정당’은 단지 이해관계 정당이었으며, 다른 사회계급을 대표하는 이익정당과 결코 다르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물론 이러한 비판은 노동운동의 경제사회적 동기를 부정하거나 정당의 역할을 무의미한 것으로 보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아렌트는 노동조합과 정당이 “노동계급의 근대사회로의 통합, 특히 경제적 보장, 사회적 위신 그리고 정치적 힘의 엄청난 성장”에 일정 부분 기여했음을 인정한다. 다만 이러한 주체들이 ‘행위’가 드러나는 새로운 정치적 공간을 창설하는 것을 포기했다는 점에서, “혁명적이지 않았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노조원들은 시민적 다양성을 드러낼 수 있을까

아렌트는 노동운동 초기 단계에서 노동자들의 열정을 주목한다. 그가 보기에 이러한 열정이 깃든 노동운동은 스스로를 아주 열악한 상황에서 투쟁을 통해 획득한 경제적 이익을 보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성숙한 정치투쟁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집단으로, 즉 “인간으로서 말하고 행위하는 유일한 조직”으로 여기며 새로운 정치적 공간을 창설하는 데 비중을 두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다른 이익집단들처럼 경제적 기득권과 사회적 특권에 집착하며 정치성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즉, 1871년 파리코뮌, 1917년 러시아 소비에트, 1956년 헝가리 평의회 등의 경험에서처럼 정치적 자유를 위한 정치공동체의 창설을 위한 운동이 아니라, 이제는 더 많은 임금과 여가시간만을 위해 존재하는 경제적인 이익운동으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아렌트의 인식 속에서 “노조원들도 시민적 다양성을 드러낼 수 있는가?”라는 셋째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초기 노동운동이 그러했던 것처럼 새로운 정부형태 형성을 추구하는 정치적인 노동운동을 지향하는 속에서, 노조원들은 시민적 다양성을 드러낼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자의 시민적 대화능력, 어떻게 키울까

그렇다면 노조원들이 시민적 다양성을 보다 잘 드러내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 핵심은 노조원들의 ‘시민적 대화능력’의 활성화를 통해 ‘공동세계’를 발견하도록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크게 세 가지 방향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노동조합활동이 보여주는 ‘작업’의 본질적인 성격, 노조원들이 어느 정도 집단주의적 획일성 속에서 움직인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즉, 노조가 시민적 다양성을 드러내는 데 일정한 한계를 노정한다는 점을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그렇게 상황을 솔직하게 인정할 때만이 노조원들의 다양한 목소리와 개성들이 아래로부터 드러나도록 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추구할 수 있을 것이다. 

한계를 인정하는 가운데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노조의 위계적인 대의구조를 수평화하고 쌍방향소통구조로 변화시켜 ‘토의민주주의’를 활성화해야 한다. 토의민주주의는 일반적으로 어떤 선호(이익)가 ‘다수결’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제안이 대화와 공적 토의 속에서 가장 ‘합당한 이유’에 의해 지지되는가에 따라 의사결정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토의민주주의는 충분한 대화와 토론 및 합의형성을 중요시하며, 이러한 토의민주주의가 작동될 때 노조 내 시민적 대화활동이 살아나고, 특정 정파에 포획된 특수이익들이 다수의 보편적 이익 또는 공동선을 향한 의사결정으로 전환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노조원들은 노조 외에 다른 ‘소통 공간’에 참여해야 한다. 시민적 다양성이 노동조합의 틀 내에서는 하나의 집단적 노동자성으로 환원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다른 대화공간이 필요한 것이다. 특히, 노조원들이 시민단체와 연대하거나 그런 단체의 회원이 되어 소통할 필요가 있다. 즉, ‘시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경제적 부르주아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시민적 대화능력을 풍부하게 가꿔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 시민적 대화활동에 의해 열리는 공동세계 또는 새로운 정부형태를 구체화 할 ‘정치적인 노동운동’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정치적인 노동운동이 추구해야 할 모습은 이미 2008년 촛불시위가 보여줬다. 그 핵심은 노조원들이 몰개성적이고 획일적인 노동자집단으로 나서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시민적 다양성을 드러내면서 시민들 사이에서 ‘소통과 인식의 공동체’ 또는 ‘자유인들의 네트워크’를 발견하도록 하는 것이다. 

2008년 촛불시위의 시민들은, 1871년 파리코뮌의 시민들이 체험한 것처럼 자신들의 다양한 가치를 드러내는 가운데서 새로운 정부형태인 “진정한 민주공화국”을 집단적으로 제안했다. 우리는 이러한 민주공화국을 ‘민주’의 측면에서 권력의 출처로만으로 해석하지 말고, ‘공화’의 측면에서도 적극 해석할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시민적 공론정치가 있어야만”

일반적으로 공화주의(republicanism)는 시민적 대화능력을 구비한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면서 공공복리의 실현에 공헌하는 활동의 지향을 의미한다. 따라서 여기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시민적 대화활동’이다. 즉, 공화주의에 기반한 공화국은 ‘도시공학적 삶과 경제적 부르주아적 삶을 초월하여 시민적 대화활동으로 운영되는 정치체제’다. 또한 시민들의 대화가 있을 때 시민들의 정치참여 자유가 실현된다는 점에서, 이러한 대화활동은 ‘적극적 자유’와 동의어라 할 수 있다.

촛불시민들이 외쳤던 것처럼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공화국의 존립 기반인 시민적 대화능력을 가진 국민의 정치참여가 요구된다. 즉, 공화국 시민들이 경제적 불평등과 종속관계에 시달려 있다면 시민적 대화활동은 살아나지 않을 것이다. 즉, 공화국이 신자유주의적 경제불평등 체제 도입을 위한 도구적 정치공학을 포기하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정치영역에 침투해오는 경제적 이해관계에 기초한 이익정치를 공공성의 시각에서 심의할 수 있는 ‘시민적 공론정치’가 부활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노조는 공장안팎에서 ‘토의민주주의’와 ‘정치적 공론장’을 꽃 피우는 데 모범을 보여야 한다. 또한 시민사회와의 연대를 통해 제도정치권에 대한 감시·견제활동을 더욱 활성화하고, 그 방식에서도 ‘정치적인 것’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정치권 전반에 만연되어 있는 ‘정치공학’과 ‘엘리트적 활동방식’ 및 ‘이익정치’를 ‘소통적인 공론정치’로 바꿀 수 있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3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