넥타이부대의 탄생
지난 6월10일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30년 만에 30년 전의 바로 그 자리에서 외쳤다. 전국사무금융서비스노동조합에서 마련한 6월 항쟁 당시의 ‘넥타이부대’ 재현 행사에 초대되어 명동성당 계단에서 광화문까지 행진도 했다. 명동성당 앞에서 진행된 항쟁 재현 공연은 생동감 있게 구성되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30년 전으로 되돌아간 것 같은 감동을 느꼈다. 그 때도 서울의 하늘은 그렇게 푸르렀다.
당시의 민주화운동은 주로 학생이나 재야 그리고 일부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6월 투쟁이 항쟁으로 발전한 것은 사무직 노동자 및 택시 노동자들의 대거 참여로 명실공히 전 국민적인 운동이 됐기 때문이다. 6.10 항쟁 첫날 사무직 노동자들은 시위대에 박수를 보내거나 구호를 따라 외쳤다. 사무실 창문으로 화장실용 휴지를 내려 보내며 시위대에 지지를 보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6월12일에는 명동성당 앞에 5천여 명이 모여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쳤다. 이때 거리로 쏟아져 나온 사무직 노동자들을 기자들이 ‘넥타이부대’로 부르기 시작하면서 이 말이 널리 쓰이게 되었다.
1987년 6.29 선언 이후 울산에서 시작된 생산직 노동운동과 서울의 사무직 노동운동은 이른바 ‘7, 8월 노동자대투쟁’으로 승화되었다. 1987년 8월18일 울산공설운동장에는 현대중공업을 비롯한 현대그룹 소속 6만여 노동자와 그 가족 3천 명이 모였다. 노동자들은 ‘나 태어나 이 강산에 노동자 되어….’를 부르면서 덤프트럭, 카고트럭, 심지어 샌딩머신까지 앞세워 전경들을 압도하면서, 끝없는 대열을 이루어 운동장에 당도했다. 이 집회는 노조를 일거에 인정받은 7, 8월 노동자대투쟁의 백미였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다. 사무금융업종에서도 6.29 선언 이후 많은 노조가 결성되었지만, 7, 8월 노동자대투쟁 이후 운동의 중심이 되었던 노조는 6월 항쟁 이전의 동토의 시기에 어려운 투쟁과정을 거치며 결성되어 이미 단련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들 노조의 간부와 조합원들은 6월 항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명동, 을지로, 서울시청 주변의 사무금융 노동자들이 시위대에 지지를 대거 보내고 참여하는 과정에 중심이 된 것은 노조 간부들이었다. 이른바 넥타이부대의 탄생이었다.
(사무금융노조가 2017년 6월10일 명동성당 앞에서 ‘넥타이부대’ 재현 행사를 진행 중이다. ⓒ사무금융노조)
동트기 전이 가장 어둡다
‘동트기 전이 가장 어둡다’ 고 조영래 변호사가 1987년 5월16일 동아일보에 쓴 칼럼의 제목이다. 1987년 4.13 호헌조치가 발표된 후 4월23일 당시 이헌기 노동부 장관은 한국노총 위원장과 16개 산별연맹 위원장들을 초대한 오찬자리에서 대통령 담화에 대한 한국노총의 지지성명을 요구했다. 이에 한국노총은 “대통령 특별담화는 사상 초유의 평화적 정권 이양과 88올림픽의 성공적 수행을 위한 시의적절한 결단이라고 사료되어 환영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자 5월8일 13개 사무금융노조의 노조 간부 17명이 ‘노총의 성명은 노동자의 뜻이 아니다’는 취지의 반박성명을 내게 되었다. 당시 예술가, 교수, 종교인, 의사, 약사 등 많은 인사들이 4.13 호헌조치 반대 성명을 냈으나, 대중조직인 노조가 조직적으로 참여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조 변호사는 칼럼에 이렇게 썼다. “(전략) 특히 충격적이었던 것은 금융노조 산하 몇몇 조합이 한국노총의 호헌지지 성명을 자기들의 뜻이 아니라고 반박하며 나선 일이었다. 대기업에 소속된 봉급생활자들로서 이른바 ‘보통사람들’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는 은행원들이 보여준 이 같은 시민적 용기는 ‘현대자동차를 만들어 낸’ 바로 그 한국인들의 높은 정치적 수준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하겠다. 박해를 각오하고 발언할 수 있는 국민은 민주주의를 하기에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요사이 얼마 동안의 우울한 일들에만 사로잡혀 지나치게 낙담할 것은 없다. 원래 동트기 직전이 가장 어두운 법이 아닌가.”
그런데 이러한 노조의 4.13 호헌조치 반대투쟁은 그 어떤 우리 현대사 책에도 언급되지 않는다. 재미있는 일이다. 조 변호사가 말한 ‘보통사람들’의 용기가 바로 30년 뒤의 촛불혁명으로 이어졌는데도 말이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도 퇴임연설에서 ‘보통사람들’이 관여하고 개입하면서 변화를 요구할 때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했다. 2017년 촛불혁명의 성공은 바로 이 ‘보통사람들’이 이루어 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얼음 아래에 흐르고 있던 뜨거운 물
4.13 호헌조치를 반대할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 모든 사물에는 인과관계가 있듯이 그런 일들이 그냥 우연히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1980년대 초반 암울한 시기에 기업들은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하여 해고를 비롯한 여러 형태의 부당노동행위를 광범위하게 일삼았다. 탄압 일변도의 제5공화국 노동정책으로 많은 노조가 와해되는 결과가 발생했으나, 역설적으로 무자비한 탄압정책은 노조를 건설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1980년 5월 신용보증기금노조 결성을 시작으로 은행, 상호신용금고(현 저축은행), 보험회사, 투자금융회사, 리스회사 등에서 노조가 꾸준히 결성되었다. 그렇지만 노조를 결성하고 이를 인정받는 투쟁 과정에서 회사의 성격이나 경영진에 따라 크고 작은 어려움이 있었다.
수많은 투쟁사례 중에서도 한일투자금융노조, 현대해상화재보험노조, 범한화재해상보험노조의 노조결성 투쟁은 대표적이다. 1983년 6월에 결성된 한일투자금융노조는 노조를 파괴하려는 회사 및 공권력에 맞서 치열하게 투쟁해 결국 이겼고, 그 투쟁의 실전경험은 제2금융권 노조 건설투쟁을 지원하고 연대하는 역할로 이어졌다.
1985년 1월에는 현대그룹 최초의 노조인 현대해상화재보험노조가 만들어졌다. 울산에서 현대그룹 노조가 본격적으로 출범하기 2년여 앞서 탄생한 것이다. ‘현대왕국’에서의 노조 설립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노조가 결성되자 회사는 노조 설립 자체를 무산시키기 위해 설립신고증이 교부되기 전에 창립대회에 참석했던 조합원 8명을 하룻밤 동안 별관 5층에 붙잡아 놓고 탈퇴서 제출을 강요했다. 그리고 노조 간부들을 그룹계열사인 현대중공업으로 발령하거나, 노조 부위원장을 제주지점에 발령하기도 했다. 이에 집행간부 12명은 금융노련 사무실에서 단식투쟁에 들어갔고, 제2금융권 노조들의 연대투쟁으로 노조는 2박 3일 만에 승리했다.
현대해상화재보험노조 건설투쟁에서 힘을 발휘했던 연대투쟁은 범한화재해상보험노조 투쟁에서 더욱 힘을 내게 된다. 1986년 12월에 결성된 범한화재해상보험노조의 쟁의부장이 해고되자, 1987년 3월 금융노련 산하 60여 개 노조의 간부 450여 명이 6박 7일간의 치열한 농성투쟁으로 쟁의부장을 복직시켰다.
이러한 연대투쟁은 제5공화국의 노동법 독소조항인 ‘제3자 개입금지’ 조항과 ‘단체행동금지’ 조항을 무색케 한 것이었기에 당국을 긴장하게 했다. 이 과정에서 노조 간부들 간에 자연스럽게 동지적 연대의식이 생겨났다. 더욱이 승리한 연대투쟁이었기에 연대감과 더불어 자신감도 자라났다. 이러한 투쟁을 통한 동지적 연대의식이 있었기에 4.13 호헌조치 반대투쟁에도 동참할 수 있었다.
조합원을 진정 대변하는 상급조직을 만들다
6.29 선언 이후 6월 항쟁은 7, 8월 노동자대투쟁으로 승화했다. 그해 여름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노조 결성과 어용노조 반대 그리고 임금인상 등 근로조건 개선투쟁이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울산, 거제 등 대단위 사업장에서 시작한 노동운동은 전국으로 파급됐고, 중소사업장이나 택시·버스·지하철 사업장 그리고 언론·병원 등 사무전문직에서도 노조 결성과 파업 등 단체행동이 이어졌다.
그러나 9월이 되어 대선국면에 들어가면서 야권은 대통령 후보를 둘러싸고 분열됐고, 노동운동의 열기도 식기 시작했다. 비판적 지지, 후보 단일화 지지, 민중후보 지지 등으로 입장이 나뉘는 가운데 중심이 제대로 서지 못한 노동운동도 예외일 수 없었다. 이런 가운데 제2금융권 노조들은 그동안 노조 건설투쟁과 4.13 호헌조치 반대투쟁 과정에서 형성된 동지적 연대의식을 바탕으로, 조합원들과 단위 조합을 진정으로 대변할 수 있는 상급조직에 대한 열망을 담아 1987년 11월27일 45개 노조의 250여 명이 모여 ‘한국자유금융노동조합연합’의 깃발을 올리게 된다. ‘자유’는 80년대 초 우리나라 매스컴에 널리 소개되었던 폴란드 대통령 바웬사의 비공산 계열 자유노조(solidarnosc, 1980년대 폴란드의 민주화 운동을 이끈 노조 조직)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러나 1988년 8월 노조 합법성 쟁취까지 9개월의 고난의 행군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위기를 기회로 삼아
그 뜨거웠던 7, 8월 이후 노조 조직률은 1989년 19.8%를 정점으로 계속 떨어져 지금은 10% 미만에 머물고 있다. 노동운동의 지평을 새롭게 열고, 운동의 전망을 세워야 한다. 또한 지난 30년을 반성하고 새로운 30년을 구상하며 전략을 세워야 한다. 우선 노동운동이 단결과 연대의 영혼을 회복해야 한다.
1925년 G.D.H. 콜은 영국 노동운동의 역사를 쓰면서 “노동운동의 세 부문 - 노동조합, 협동조합, 그리고 정치조직은 하나의 노력이 세 국면으로 나타나는 것이고, 공통의 필요와 열망에서 나오며, 때로는 분열을 겪을지라도 우리의 길은 공통의 목적을 향해 뻗어 있다”고 강조하였다. 특히 요즘과 같이 공유경제와 사회적 경제 부문이 확대되는 상황에서는 여러 형태의 사회운동과 연대하고 함께 해 나갈 필요가 있다.
그리고 산업변화와 이에 따른 노동시장의 변화에 대응하는 조직화 전략도 수립해야 한다. 현재 조직률 1% 정도에 머물고 있는 비정규 노동자들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지, 또 특수고용직, 플랫폼 노동자를 비롯해 증가 일로에 있는 불안정 노동자인 프레카리아트(Precariat, 저임금·저숙련 노동에 시달리는 불안정 노동 계급)를 조직하기 위한 전략도 모색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제 관념적인 운동에서 구체적 현실에 토대를 둔 운동을 해야 한다. 생활현장에서 구체적인 요구와 열망을 담아 가는 운동, 일터의 민주주의를 실현해 나가는 운동으로 미래를 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철학의 전환도 필요할 것이다. 명분에 집착하는 주자학에서 실사구시 하는 양명학적 접근도 고민해 봐야 하지 않을까?
이스라엘의 8대 대통령이었던 시몬 페레스가 했던 말, “미래는 기억하는 자의 것이 아닌 상상하는 자의 것이다”로 7, 8월 노동자대투쟁을 기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