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 그리고 3년.
2014년 4월16일.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뒤 3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습니다. 세월호 참사를 두고 혹자는 ‘수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는 여객선이 침몰했는데 아무도 제대로 된 구조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 참사의 핵심이라고 말합니다. 청와대에 있던 대통령을 중심으로 컨트롤타워가 꾸려져 사고에 대한 신속한 대책을 세우고 구조에 임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것이죠. 맞습니다.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결국 대통령의 탄핵사유가 되었던 부분이기도 하죠. 그러나 참사의 성격을 온전히 아우를 수 있는 말은 아닙니다.
『신자유주의와 세월호 이후 가야할 나라』(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 앨피, 2016)는 세월호 참사의 문제점 곳곳을 아우르기 위해 거시적인 관점에서 참사를 바라보고, 앞으로 해결해 나가야 할 부분들을 짚어냅니다.
‘재난 자본주의’의 구조화
이 책은 “세월호 참사의 핵심은 신자유주의다”고 말합니다. 누군가는 고개를 갸우뚱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들여다볼수록 수긍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유주의 국가에서 분명한 것 하나는 공공서비스의 제공에서 총체적인 ‘도덕적 해이’ 현상이 불가피해진다는 점이다.”
신자유주의가 본격화되면서 정부가 책임져야하는 영역이었던 공공서비스가 민간 자본의 영역으로 넘겨지고, 정부는 책임에서 자유로워지는 반면 자본은 수익성의 원리에 따라 이윤창출을 해낼 수 있는 방법으로 서비스를 제공하게 됩니다. ‘안전’도 공공서비스의 영역으로 분류되며 이렇게 자본에게 그 책임이 전가되어 왔던 것이죠. 이 책의 여러 장에서 ‘규제 완화’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데, 이 또한 같은 맥락입니다.
실제로 정부는 안전 분야의 무차별적 탈규제를 시행해 왔습니다. 「선박안전법」, 「선원법」, 「수난구호법」, 「개항질서법」, 「해상교통안전법」, 「해운법」 등을 개정하여 연안 여객선 운항 연령 제한을 20년에서 30년으로 완화시키고, 안전점검 기준도 완화시키고, 고박(固縛) 기준도 완화시키더니 위치발신장치 설치 면제 대상을 확대하고, 현장점검 횟수를 줄이고, 선장 휴식 시 조종 지휘를 대행할 선원의 범위를 넓히고, 구난·구조를 외부 민간업체에 ‘외주화’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끝도 없습니다. 이러한 탈규제의 결과로 위험천만한 세월호를 버젓이 운항할 수 있었던 것이고, 아이들이 아직 배 안에 있는데도 청해진 해운에 구조·구난 업체인 ‘언딘’과의 계약 체결을 종용하느라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던 것이겠죠.
신자유주의 언론의 모습
안전의 ‘외주화’, 탈규제뿐만이 아닙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해 논의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전원구조 오보’ 또한 신자유주의 하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뷰징(abusing)에 빠진 언론은 ‘전원구조’라는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줄줄이 반복해서 보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관계를 제대로 확인하는 것보다 검색 횟수를 늘리는 게 더 우선이었던 것이죠.
“출처 불명의 미확인 정보, 사건 사고나 인물에 대한 선정적이고 자극적이며 지엽적인 이슈는 여전히 확대 재생산 되고 있다.”
모두들 기억하실 겁니다.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에 대한 염원이 불타오르던 때 갑자기 튀어나온 ‘유병언’ 이슈는 모든 기사를 잠식했었죠. 궁금하지도 않았는데 유병언이 무엇을 입고 있었는지, 그 브랜드가 얼마나 비싼지, 유병언의 아들이 숨어있는 와중에 뼈 없는 닭을 시켜먹었는지 어쨌는지를 실시간으로 봐야만 했습니다.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는 제3차 청문회에서 이러한 보도로 인하여 종합편성채널들의 시청률이 올라간 것에 대해 밝혀내기도 했었죠. 결국 ‘이윤’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성찰과 개혁 없이 안전한 대한민국은 없다
“국가권력과 경제사회의 근본적 노선 변화를 위해서는 민주공화국의 재구성을 위한 시민적·민중적 이니셔티브(주도권)가 중요하다.”
책에서는 이러한 문제 해결을 위해 다시 ‘시민의 책임’을 불러옵니다. 결국 ‘우리’가 주체로 서야 한다는 결론입니다. 촛불정국이 시작되기 전에 만들어진 책인데, 이미 촛불을 예언하고 있었네요.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시민들의 다짐은 결국 불타올랐습니다. 일렁이는 촛불이 세월호를 딛고 일어나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드는 그 날을 고대해 봅니다. ‘잊지 않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