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으로 만나 공부하며 성장하기

노동사회

실천으로 만나 공부하며 성장하기

편집국 0 3,563 2013.05.29 11:23

서부비정규센터 준비모임은 2007년 이랜드 월드컵분회 조직화와 연대투쟁, 연세대 청소용역노조 설립 지원 등을 계기로 만나게 된 사람들이 만든 조직이다. 그러다 보니 대체로 회원들은 서울 마포, 서대문, 은평, 용산 지역의 주민들이 많다. 직장인, 학생, 사회단체 상근자, 노동조합 활동가, 전업주부 등 다양한 회원들이, 서로 힘을 보태며 함께 분노하고 때로 다투고 부족한 부분을 서로 채워주며 활동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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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배 유해 경고문을 패러디한 서부비정규센턴(준) 브로셔에 찍힌 경고문 ]

실천은 쫀쫀하게 생각은 거시적으로!

한 주에 몇 시간씩만 내어도 비정규 연대활동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참 많다는 것, 그들은 이런 생각으로 “누구든지 언제나 참여할 수 있는 운동”을 하겠다는 포부를 내걸었다. 또한 생활인들이 직접 부딪히는 일상의 갈등과 주위 관계를 바탕으로 활동과 문제 해결의 단초를 만들어 가는 것이 우리 운동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의 현장과 우리 동네에서 시작하는, 지역운동과 결합된 노동운동을 지향하고 있다. 또한 “뿌리에서 시작하면 시들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가장 낮은 곳에서 시작되는 운동의 매개자가 되겠다고 자처했다. 밑‘바닥 노동자’들이 세상을 바꾸는 주체로 성장하는 운동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목표를 가지고 시작한 서부비정규센터(준)는 그동안 꾸준히 지역의 비정규사업장을 방문해 조직화 활동과 연대 활동을 함께 해 왔다. ‘천 원짜리 공부방’(공개강좌) 사업을 진행했고, 노동 상담과 민생지킴이 활동을 하고 있으며, 생활임금기획단을 만들어 지역의 정당·노동조합·시민사회단체 등과 함께 “우리 동네에서 자립과 공존을 위한 벼룩시장”을 추진하는 등 다양한 사업을 펼치고 있다.

그러던 중 지난 해 10월 회원 한 명이 “우리, 공부 좀 합시다!”하고 동을 떴다. 일상적인 실천을 함께 하며 활동 속에서의 고민을 구체적으로 나누고, “실천은 쫀쫀하게 생각은 거시적으로” 해보자는 제안에 몇몇 회원들이 모여들었다. “대체 뭘 공부하잔 말이야?”라는 기초적인 질문을 같이 고민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서부비정규센터(준) 온라인까페(http://cafe.naver.com/voice2008.cafe)에서 함께 공부하고 싶은 회원들이 각자가 공부하고 싶은 내용들을 중구난방 떠들면서 결국 처음 같이 공부할 책이 정해졌다. 

회원들의 삶과 활동이 다양한 만큼 매우 다양한 공부거리들이 제안됐다. 현재 갖고 있는 구체적인 활동의 고민을 풀어가기 위해 제안되는 읽을거리도 있었고, 그동안 실천해 온 활동들을 처음부터 차근차근 짚어보기 위해 제안되는 총론 격의 읽을거리도 있었다. 그렇지만 ‘배워서 남주기’로 의기투합한 회원들은 무엇부터 공부할 것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데 생각을 모았고, 우선 처음 공부할 책만 정하고 첫 모임에서 토론하다 보면 꼬리에 꼬리를 물듯이 함께 읽고 싶은 공부거리들이 이어질 거라 믿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와 토론

대부분의 공부모임이 그렇듯이 각자 책을 읽고 나누어서 발제를 하고, 사회자를 미리 정해서 같이 토론하는 방식의 첫 모임이 시작되었다. 처음 공부한 책은 윌러스틴의 『세계체제분석』이다. 이 책이 마음에 든 사람들과 마음에 들지 않은 사람들, 혹은 부분적으로만 마음에 든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떠오른 다양한 질문들을 서로에게 퍼부었고 이런저런 의견을 나누었다. 첫 토론을 진행하고 보니 처음 예상이 맞았다. 상호 질문과 토론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자연스럽게 다음 공부할 책이 정해졌다. 

윌러스틴의 『세계체제분석』에서 여성 회원 몇이 물고 늘어졌던 ‘여성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에 초점이 모아져, 다음 책은 여성주의자로 더 많이 알려진 미국의 흑인 여성 벨 훅스가 계급 문제를 이야기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기』로 정해졌다. 이런 식으로 커리큘럼은 같이 공부하다 생기는 의문을 보다 심화시키거나 확장하는 방식으로 그때그때 정해진다. 

어떤 책은 여러 번에 나누어서 읽고 토론을 하고, 어떤 책은 한 번에 몰아 읽고 토론을 한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한 달에 두 번씩 모여서 함께 공부한다. 이런 식으로 그동안 윌러스틴의 『세계체제분석』, 벨 훅스의 『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기』, 문화연구 시월의 『사라진 정치의 장소들』, 앤드류 글린의 『고삐 풀린 자본주의』, 지그문트 바우만의 『쓰레기가 되는 삶들』, <부커진 R2> 중에서 고병권의 『불안 시대의 삶의 정치』 그리고 조원광의 『유연화 시대의 프롤레타리아트 비정규직』 등을 함께 공부했다. 

또 함께 공부하면서 따로 또 같이 공부할 만한 내용들에 대한 정보가 수시로 공유된다. 가령 마쓰모토 하지메의 『가난뱅이의 역습』과 같이 읽어서 『쓰레기가 되는 삶들』이 훨씬 이해가 잘 되고 와 닿았다는 회원이 『가난뱅이의 역습』을 추천하는 식이다. 

관심이 닿지 않는 곳으로,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기본적으로 서부비정규센터(준)의 지향이 그렇기도 하지만, 특히 함께 모여 공부하는 회원들의 공통점은 정규직 노동운동보다는 비정규직 노동운동에 훨씬 더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고, 비정규직 노동자 중에서도 조직되지 않은 97%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들이 읽는 책과 이들이 하는 토론엔 목소리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미조직 노동자 혹은 소수자들의 목소리), 노동이지만 노동이 아닌 것들(돌봄노동 같은 그림자 노동), 노동에 관한 불편한 진실(노동운동에 내면화된 자본주의)같은 화두가 자주 떠오른다. 이들이 있는 모든 공간, 예를 들어 가족·지역·사업장·시민사회 등이 모두 노동운동 혹은 정치의 장소가 된다.

또 한편으로는 틀에 갇히지 않는 자유로운 상상력을 중요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위와 같은 화두를 실천적으로 풀어가기 위해서 그것은 아마도 필수적인 과제일 터이다. 진지하되 유머와 발랄함을 잃지 않는 운동, 때로 전투적이지만 재미있는 운동, 세상을 바꾸기 위해 자기 자신을 바꾸는 운동……. 이들이 절대로 놓치고 싶어 하지 않는 운동의 자세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4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