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운동사에서 노동사로

노동사회

노동운동사에서 노동사로

편집국 0 3,581 2013.05.29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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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노동사회연구소는 김금수 명예이사장과 함께 “함께 읽고 토론하는 세계노동운동사” 학습모임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세 그룹으로 나누어 공부를 하다가 분기마다 전체 모임을 갖고 특강을 듣습니다. 지난 4월25일에는 두 번째 특강으로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교수인 정현백 선생님을 모셔서 노동사에 대한 강연을 들었습니다. 이 글은 강연의 핵심을 요약한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노동운동의 전망을 찾고자 하는 회원 여러분께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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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ad_01.jpg저는 70년대에 독일에서 독일 노동운동사로 학위를 받고 1984년에 귀국을 했습니다. 제 전공이 노동운동사와 노동사인데, 이 분야는 당시 서구에서 가장 각광을 받던 분야였지만 요즈음은 인기가 없습니다. 시대의 흐름입니다. 한국에 들어와서는 여성운동에 관여하면서 여성사 관련 공부도 했고, 여성단체연합 등의 활동도 했습니다. 학위를 마친 지 오래돼서 최신 경향에 대해 밝은 것은 아니지만, 오늘은 노동운동사에 관심을 가진 분들에게 노동사에 대해 소개하고, 같이 이야기를 나눴으면 좋겠습니다.

기층으로부터의 식민주의 극복

제가 강의를 준비하면서 여러분들이 공부하시고 계시는 세계노동운동사 목차를 읽어봤습니다. 그런데 주요 참고서적인 소련아카데미의 『세계노동운동사』 이후 세계 학계의 역사 패러다임은 요동치며 변해 왔습니다. 학자들도 정신을 못 차릴 정도입니다. 한동안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유행하더니 뒤를 이어 ‘포스트콜로니즘’이 나왔고, 최근에는 ‘트랜스내셔널리즘(transnationalism)’이 주류를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 주장은 “개인은 다 다르고 ‘차이’를 지닌 존재인데, 이런 다른 존재를 통합성으로 설명해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라는 거지요. 이 이야기는 다들 들어보셨을 겁니다. 포스트콜로니즘은 우리말로 포스트식민주의라고 합니다. 이 연구는 주로 인도에서 많이 진행됐습니다. 영국이 인도를 식민 지배하면서 대중과 엘리트를 철저하게 분리하는 정책을 썼었죠. 지금도 인도 엘리트들을 만나보면 완전한 영국식 영어와 매너를 사용합니다. 

그런 인도에서 제국주의 투쟁 이후 인도 사회를 조사해보니, 해방 이후 사회의 각 분야들이 독자적인 체제가 아니라 제국주의 통치자들이 사용하던 그 틀을 재생산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제국주의 유럽국가들이 내적으로 사회주의, 자유주의 진영으로 나뉘어 서로 싸운 것처럼 식민지 해방 후의 국가들도 그 체계들을 그대로 재생산하고 있다는 거죠. 그런데 민중들은 지식인의 이런 논쟁과는 전혀 상관없는, 자기 나름의 사고방식과 규율, 도덕을 가지고 있다는 거예요. “통치자는 이러면 안 돼” 또는 “자본가들은 그렇게 하면 안 돼”라는 그들 나름의 도덕경제(Moral Economy) 관념을 가지고 움직였다는 거지요. 그걸 지식인들이 사회주의니 자유주의니 하는 사상적 잣대로 이편, 저편으로 규정했다는 겁니다. 

민족주의 중심의 사고 비판한 트랜스내셔널리즘

그런데 이 포스트식민주의를 넘어서서 트랜스내셔널리즘이라는 연구 조류가 미국에서 나왔습니다. 흔히 민족주의냐, 민족주의의 해체냐의 문제를 가지고 논쟁을 하는데, 트랜스내셔널리즘은 민족주의와 대치되는 개념은 아닙니다. 하나의 국가는 민족주의적 경향을 보이면서, 동시에 민족국가의 경계를 넘어서 다른 나라들과 영향을 주고 받았다는 것이지요. 민족주의-국민국가 중심의 사고 자체가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유럽의 근대론자들이 만든 것인데, 우리는 그 셋팅에 너무 갇혀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중국의 아편전쟁을 영국과 중국의 전쟁으로만 생각합니다만, 트랜스내셔널리즘의 시각으로 본다면 아편전쟁의 원인은 미국혁명에 있어요. 미국이 독립하게 되자, 영국은 아메리카 식민지로부터의 이윤창출이 불가능해졌고, 결국 그 대신에 중국에 아편을 팔아서 이윤을 뽑아내려고 하였던 것이지요. 

이 관점에서 중요한 것이 ‘전유’, 즉 ‘자기 것으로 하기’입니다. 누구나 타 민족과 타 국가의 문화를 받아들일 때 선택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거지요. 예를 들어 제가 한국현대사를 규정해온 군부엘리트에 대한 구술조사를 한다고 합시다. 이것도 트랜스내셔널합니다. 미국의 육군 사관학교에 가서 교육을 받고 온 군부엘리트들이 그 테크닉이나 문화를 한국에 가져올 때는 선택적으로, 자기 식으로 바꿔 유용한다는 겁니다. 일부 해외 학계에서는 서구화를 선택적으로 수용한 경우로 일본, 중국, 한국, 러시아 등을 꼽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식민지, 종속국들이 서구의 직접적 영향을 받았다거나 제국주의 문화에 침윤됐다는 이야기는 너무 일반화하는 것을 조심합니다. 다시 말해서 트랜스내셔널한 경향성은 결코 일방적이지 않고 쌍방으로 작용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유럽중심주의를 비판하고 비서구권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것이지요.  

근대적 노동운동의 시작 알린 마르크스와 엥겔스

아무튼 최신 연구 동향이 이렇게 요동치며 변하고 있는데, 이런 변화의 한 계기를 제공한 것은  바로 68운동입니다. 한국에서는 당시 68운동을 “서구의 철없는 애들이 한 것”이라고 평가절하한 사람도 있었지만, 사실 68운동은 전 세계적인 흐름이었습니다.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아르헨티나 등의 남미도 비슷한 시기에 운동이 있었고 헝가리 같은 동유럽은 완전히 휩쓸었으며, 일본에서도 요도호 사건, 전공투 등이 있었습니다. 68운동 전까지의 노동운동사에서는, 엥겔스가 1848년에 쓴 『영국 노동계급의 실상』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을 통해 근대적 노동운동이 시작됐다는 것이 정설이었습니다. 

엥겔스에 대해 잠깐 이야기를 드리지요. 독특한 사람입니다.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엥겔스는 ‘여성의 세계사적 패배는 사유재산과 일부일처제의 확립으로 비롯되었고, 사유재산과 계급이 해방되어야 여성이 해방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사회주의 사회가 오면 여성은 반드시 사회적 참여를 해야 하고, 가사는 사회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엥겔스의 주장이 실현된 것이 소련과 중국, 북한입니다. 그래서 그 나라에는 일일 탁아뿐만 아니라 주 탁아, 월 탁아 제도도 있습니다. 그리고 엥겔스 본인은 계급과 사유재산에 기초하지 않은, 진정한 사랑에 기초한 결혼이 가능해질 때까지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했고, 정말로 결혼을 안 했습니다. 

당시 부르주아 사회는 체통(respectability)을 중요시 여겼는데, 이런 엥겔스를 부르주아 재력가였던 아버지가 얼마나 한심해 했겠어요? 결국 엥겔스는 아일랜드 노동자이고 글은 읽지 못하지만 영리한 메리 번즈와 동거를 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아일랜드 노동자라면 사회적으로 최하층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메리 번즈와 같이 살면서 엥겔스는 그녀의 가족을 만나게 되고, 당시 아일랜드 노동자들의 참혹한 삶에 대해 알게 됩니다. 또 노동자 문화도 접하게 되지요. 그런 속에서 나온 것이 『영국 노동계급의 실상』입니다. 어찌됐든 이 책과 『공산당 선언』을 통해 노동자들이 참혹한 삶의 조건에 대한 즉발적인 저항행위에서 한 걸음 나아가 사회적 전망과 계급의식을 가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이 두 책이 근대적 노동운동의 시작이라고 보는 겁니다.

일상생활과 문화를 중심 영역으로 끌어올린 68운동

그런데 영국의 E. P. 톰슨이라는 학자는 68운동 전에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이라는 책을 내고, 1848년이 아니라 1830년대에 이미 영국에는 노동계급이 형성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 당시의 민중문화, 기독교 특히 감리교의 급진적 전통, 노동자들의 공동체와 작업장에서의 사회적 관계 등을 배경으로 아래로부터 집단적 자의식을 형성하며 계급이 되었다는 겁니다. 노동자들이 지식인들을 통해 노동을 이해하게 된 것이 아니라, 이런 다양한 문화 속에서 스스로 계급을 만들어가게 되었다는 거지요. 그간의 노동사에서 나타났던 위로부터의 노동사 서술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노동사를 쓰려는 노력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68운동은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자본주의의 황금기에 일어났습니다. 독일, 프랑스, 미국에서 시작되었지요. 독일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사회 시설의 90%가 파괴되었는데, 당시 사회 주류층들이 이것들을 복구했습니다. 그런 자부심으로 살고 있는데, 청년들이 묻는 거죠. “그래서 어쨌는데요? 그래서 행복해졌습니까?”라고요. 삶의 근원적 질문을 하게 된 겁니다. 그리고 68운동 중에 성별 갈등도 생기게 됩니다. 같이 운동을 하면서도 남자들은 테이블에서 밤새도록 토론하고 선언문을 작성하면, 여자들은 그걸 타이핑치고 커피 타주고, 애까지 봐줘야 하는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여성운동이 학생운동에서 분리되어 나옵니다. 남성과 함께 활동하면, 스스로가 의식하지 못한 채 그런 성별 역할을 재생산한다는 것이지요. 그 분리 경향이 얼마나 강했냐면 테러도 여성, 남성이 따로 할 정도였습니다. 

미국에서는 “사적인 것이 정치적이고, 정치적인 것이 사적인 것이다”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원래 이 문장은 케이트 밀레트의 『성의 정치학』에서 제기됐는데, 책은 유명한 통속소설의 남녀 성교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저자는 인간의 가장 내밀한 영역인 성행위에서조차 권력관계가 작용한다는 것을 분석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 속에 모세혈관처럼 들어 있는 이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깨트리지 않으면 진정한 인간해방, 남녀해방은 이뤄지지 않는다고 했죠. 

이런 운동의 흐름은 남녀 간의 문제를 다룬 것이지만, 이 구호는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를 예비하였고, 문화, 의식, 가치, 태도의 중요성과 미시권력들을 어떻게 바꿔낼 것인지를 핵심이슈로 떠오르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독일의 경우 교수가 넥타이를 매지 않은 채 강의실에 들어오는 것도 68운동 이후부터였습니다. 그 후 학교에서는 학칙제정을 위시한 제반 학교운영 과정에서 학생의 참여를 확대했고, 남녀 관계도 완연하게 달라집니다. 삶의 의미나 일상생활의 개혁문제를 제기하면서 대안적 탁아소 운동, 생활공동체, 코뮌 운동도 활발해집니다. 주택점거운동도 이뤄졌고요.

노동운동사에서 노동사로, 거대 담론에서 일상 담론으로

이러면서 노동운동에 대해서도 다시 들여다보기 시작합니다. 68운동이 정치운동으로는 실패했는데 왜 그랬는가? 노동자들이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노동자 파업이 이뤄진 곳은 프랑스뿐이지요. 남미에서도 일부 참여하긴 했지만 대부분 국가에서 노동자들은 냉담했습니다. 왜일까요? 문화적으로 분석해보면, 경제적 황금기가 시작되면서 노동자들이 컬러 텔레비전과 자동차에 만족하고 안주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서구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로부터의 작별”이라는 말도 나옵니다. 

이제 노동사에서도 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노동운동사와 노동사를 분리하게 됩니다. 그동안 우파들을 명망가들의 역사, 왕과 귀족 간의 음모와 간계 등 위로부터의 역사를 쓴다고 비판했는데, “그럼 좌파들은 어떠냐?”는 문제의식입니다. “노동운동사 역시 마르크스와 엥겔스, 레닌 등의 명망가 중심이었고 여자는 로자 룩셈부르크 정도 아니냐?”는 거죠. 좌파들도 명망가, 조직 중심의 노동운동사를 써 왔다면 이제는 아래로부터의 역사, 노동자들의 ‘노동사’를 보자는 이야기가 나오는 거지요.

흔히 자본주의의 결정적 시작은 산업혁명, 즉 면직산업의 발달과 기계의 발명을 계기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면직과 비단산업은 인도와 중국도 영국 못지않게 발달했는데 왜 서구에서 먼저 시작했다고 할까요? 산업자본주의의 발전과 관련하여 심성의 변화, 금융의 변화를 포함하여 사회적 관계의 변화가 주요했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이 연구에 따르면 자본주의 변화의 핵심은 인간 의식의 변화, 즉 인간 욕망의 혁명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노동의 역사를 보면 승리의 과정이라기보다는 타협과 절충의 과정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합니다. 노동자들은 정의감이 있지만, 욕망의 주체로도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지요.

노동의 역사는 ‘타협과 절충의 과정’

‘블루 먼데이(Blue Monday)’, 멍들은 월요일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산업화 초기 노동자들은 토요일 오후에 퇴근해서 집에 주급만 갖다 주고는 술집으로 달려갔습니다. 일이 고되고 낙이 없으니까요. 그리고 주말 내내 술을 퍼마시고 월요일 아침에는 힘들어서 출근을 못 하지요. 그러면 월요일 오전에는 공장이 돌아가질 않습니다. 이걸 없애려고 자본가들이 무지하게 노력을 했습니다. 그게 몇십 년이 걸렸어요. 독일 에쎈에 있는 일상사박물관에 가보면 그 당시 공장을 재현한 게 있는데, 공장의 정문의 모습이 상당히 거대합니다. 노동자를 압도하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위용을 갖춘 공장 입구에서 출근 도장을 찍는데, 1, 2분만 늦어도 그날 일급의 절반을 깎아버렸습니다. 노동규율을 확립하기 위한 자본가의 치열한 노력이지요. 

이런 과정을 통해 블루 먼데이가 사라졌습니다. 이건 자본가들의 승리죠. 그런데 80년대에도 독일대학에서는 아침 9시30분에 행정실이나 교수 비서실에 가면 다 비어 있습니다. 찾아보면 카페테리아에서 커피타임을 즐기고 있어요. 이건 자본가와의 갈등 속에서 노동자들이 승리한 거예요. 이렇게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승리가 아니라 치열하게 밀고 당기는 과정 속에서 노동관계가 만들어집니다. 시계는 또 어떤가요? 농민들은 시간과 상관없이 자율적으로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시계에 적응하며 살지요. 일방적으로 주어진 규율에 적응해 가는 자기 상실의 역사인 겁니다.

또 다른 예로 자투리를 들 수 있습니다. 산업화 초기의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물건을 생산하고 남은 자투리나 생산품을 주머니에 넣어서 가지고 갔습니다. 자본가들은 이걸 못하게 하느라 노력했지요. 요즘은 자투리를 가져가는 것이 이상해졌습니다만, 당시 노동자들은 내가 만들었으니 내 물건이고, 내가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천륜이라는 거지요. 이런 노동자의 자율성을 약화시키는 실질적 포섭은  컨베이어 벨트의 등장과 더불어서입니다.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라는 영화를 보면 채플린이 끊임없이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에서 나사를 박다가, 나중에는 단순동작의 반복에 지쳐 자신의 바지구멍까지 함께 박아서 결국은 자신도 벨트에 빨려 들어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이 노동자들의 완전한 종속을 풍자한 것입니다.

노동자 의식구조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그 외에 노동사에서는 노동자 의식구조, 즉 문화와 의식, 가치체계를 많이 연구하고 있습니다. 독일의 크룹(Krupp)이라는 회사는 노동자 주택을 지었습니다. 사택에 ‘좋은 희망’, ‘전진’ 등의 이름을 붙이고는 말 잘 듣는, ‘모범 노동자’들에게 나누어 주었지요. 길게 지은 공동주택에 중간 중간 담을 쌓아서 만든 보금자리에서 노동자들은 채소나 꽃을 가꿀 수 있는 텃밭과 함께 행복한 가족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노동자들이 노동운동에는 집중하기보다는 사생활에 안주하도록 했지요. 

여가생활도 통제를 많이 했습니다. 또한 초기 노동자들은 전래의 놀이, 즉 개싸움, 닭싸움, 오소리 싸움, 황소 지분대기 등에 내기를 걸고 흥분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부르주아지들은 이런 놀이의 폭력성, 야만성이 노동자의 폭력적 속성을 강화한다고 염려했지요. 유럽의 술집에 가보면 축구동호회와 겹쳐있는 것들이 많은데, 노동자들의 전래놀이를 없애고 대신 축구를 정착시킨 것입니다. 금연·금주운동도 부르주아지들이 주도했습니다. 금연·금주를 통해 노동자들이 모범적인 생활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지요. 

이런 노동자들의 폭음에 대한 염려에도 불구하고, 독일 역사가들의 연구에 따르면 당시 술값이 노동자들 주급의 11~15% 정도니까 비싼 건 아니었지요. 그런데 술집이 노동운동의 중요한 활동무대였거든요. 1878~1890년 사이 독일의 「사회주의자법」이 시행되면서 지역을 넘어서는 활동이 금지됐습니다. 그때 사회민주당 지역지도자들이 활동을 위해 여인숙과 술집 운영을 많이 했어요. 그게 네트워크 산업 아닙니까? 그런데 사민당 역시 이후 점차적으로 활동을 안정적으로 하게 되면서, 노동자들도 도덕성을 갖추게 하기 위해서 금연·금주 운동에 동참하게 됩니다.

‘체통’ 내면화하면서 이루어진 부정적 통합

유럽의 부르주아지들이 체통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시민으로 존경받으려면 체통이 있어야 하고 언행도 그래야 한다고 하죠. 독일 가정에서는 아이가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춤 학교를 다니게 합니다. 춤은 사교생활에 필요하고 또 자세를 바르게 하고 매너를 좋게 하거든요. 이래서 사민당도 노동자 문화운동을 대대적으로 합니다. 연극이나 콘서트는 입장료가 주급이랑 맞먹었으니까 부르주아지들만 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민당이 연극단을 만들어서 노동자가 극장과 계약해서 매달 일정한 회비를 내면 연극을 볼 수 있게 했습니다. 부르주아와 같은 문화를 누리게 된 거죠. 

그러면서 부르주아지들의 ‘체통’을 내면화하게 되었어요. 계급은 먹고 사는 것도 있지만, 문화적 간격도 있습니다. 사민당은 그걸 극복하려고 했어요. 노동자체조연맹, 합창연맹, 에스페란토어연맹, 체조연맹 등이 그렇습니다. 부르주아지들의 바캉스를 모방해서 사민당이 풍광이 좋은 곳에 “자연의 벗(Naturfreundehaus)”이라는 이름의 유스호스텔을 짓고 노동자들에게 싼 값에 빌려주기도 했습니다. 또 독일에는 ‘플러스’라는 마트가 있는데 사민당에서 만든 거예요. 싸고 질이 좋은 걸로 판매합니다. 나중에 부패 스캔들로 없어졌지만 “새로운 고향”이라는 주택공사 같은 것도 사민당이 운영해서 노동자들이 자기 집을 가질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노동자들의 삶이 개선되니까 혁명이 일어나진 않겠죠? 카우츠키가 “독일에는 혁명적 정당이 있지만 혁명을 하진 않는다”고 했는데, 관찰자들이 보면 체제 내로 부드럽게 통합되는 ‘부정적 통합’을 사민당이 하게 된 겁니다. ‘부정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스스로는 체제에 저항한다고 생각했지만, 관찰자가 포기에는 통합되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시스템 안에서 노동자들의 절대적 지위는 향상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노동자들은 체제에 길들여졌고요. 틈이 없는 사회가 된 거죠.

사회의 혁명과 노동자로서의 개인, 중심가치는 어디에?

독일 유학 시절은 한국이 엄혹한 군부독재 하에 있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저는 독일 사민당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박사논문을 썼습니다. 그런데  동구권이 붕괴되고 개인적으로 여러 경험을 하면서 생각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제 독일인 친구 이야기를 해 볼게요. 그 친구는 아버지가 노동자였는데 10살 때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초등학교 졸업자로 슈퍼마켓 계산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어머니는 3대째 사회민주당 당원이라는 데 자부심을 가지고 살고 계십니다. 군축반핵 시위에도 참가하고, 동네 이주노동자의 자녀도 돌봐주고, 독거노인들도 살피면서 노년을 보내고 계시죠. 제 유학시절에는 한국의 양심수 소식을 들으시고는 구속자 가족에게 전해 달라고 저에게 돈을 주신 적도 있습니다. 사민당이 혁명에는 실패했다고 해도, 한 사람의 노동자가 속물 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 이렇게 자긍심에 차서 살게 해준다면  굉장히 성공한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독일의 수상이었던 빌리 브란트는 노동자였고 사생아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외할아버지가 사민당 집회에 데리고 다녔다고 해요. 자라면서는 사민당 학교에서 공부했고요. 결국 독일 사민당원들은 사민당 마트에서 물건 사고, 사민당이 주관하는 연극 보고, 체조연맹에서 체조 배우고 사민당 학교의 이론을 학습합니다. ‘국가 안의 또 하나의 국가’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부르주아지의 체통도 내면화했지만, 사민당 당원 혹은 노동자라는 자부심도 결합되어 있습니다. 또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우리는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이 분리되어 있잖아요? 독일은 거의 이중 멤버십입니다. 사민당원이면서 환경단체 회원이지요. 사민당 지역모임에서도 “우리 동네 시냇물이 오염됐는데 어떻게 할 것인가?”를 가지고 토론합니다. 지역 조직이 잘 되어 있는 거지요. 

변화된 기층의 자생적 사회운동에서 출발해야

마무리를 지어볼까요? 68운동 이후 “노동계급으로부터의 작별”이라는 말이 생깁니다. 제가 최근에 발간된 『더 레프트』라는 책을 보고 사회주의 운동이 실패한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해 봤습니다. 하나는 젠더 문제를 직시하고 해결하는 것을 기피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조직 위주의 사회운동을 전개하면서 아래로부터의 올라오는 자생적 운동에 관심을 안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오스트리아는 1차대전 후에 보수적인 우익이 집권했지만, 빈에서는 1920~30년대에 사민당이 집권하면서 ‘붉은 빈’ 운동을 펼칩니다. 빈은 전 유럽에서도 집세가 비싸기로 유명한데, 사민당이 집세를 1/7로 깎고 그 대신 주택세를 받아서 아파트를 6만 채나 지었습니다. 제가 “칼 맑스 호프”라는 공동아파트에 가봤는데, 그곳은 들어서는 순간 “노동자라는 것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가!”라고 느끼도록 설계되어 있어요. 중앙 광장엔 손을 내어젓는 노동자 동상이 있고, 공동주택은 도서실, 어머니센터, 병원, 가게, 회의실, 탁아소, 공동세탁실, 놀이터 등의 다양한 복지시설을 갖춘 복합적인 공동체 공간이었습니다. 이런 운동 덕분에 중소 영세상인들조차도 사민당을 지지하면서 사민당이 지자체 선거에서 3번이나 연속 당선되었지요. “당이나 조직된 노조를 중심으로 생각하면서 이런 노동대중의 일상생활과 밀접히 연결된 운동을 무시하지는 않았는가?” 하고 생각해 봤습니다. 

제가 유럽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한국에서는 이런 차이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요? “옛 것은 죽어가지만 새 것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라는 말이 『더 레프트』에 나오더군요. 유럽의 복지사회는 이미 많이 관료화되어 있습니다. 비효율적인 국유산업 등은 시민들이 좌파에 비판적이도록 만들지요. 결국 자본주의 사회가 죽어가고 있는 지금, 다양한 실험을 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1950년대부터 독일에서는 평준화 사회를 이야기했습니다. 정말 잘 사는 사람은 소수고, 국민 전체의 경제 수준이 평준화된 거죠. 이렇게 되면 노동자로서의 특성이 없어지더군요. 

우리는 어떤가요? 대기업 생산직 노동자의 월급이 웬만한 화이트칼라보다 더 많을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하고, 노동자의 역사적 사명감을 강조하는 게 얼마나 가능하겠습니까? 저는 이제는 노동운동이 노동과 관련된 이슈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시민사회가 제기하는 문제에도 적극적으로 결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청년실업 문제는 시스템 문제지만 역사적 주체들이 어떻게 대응하느냐도 중요하잖아요? 모든 운동이 다 만나는 거 아닌가 싶습니다.

욕망의 통제를 통한 자본주의 통제가 시급하다

또 한 가지를 말씀드리자면, 독일은 자본주의로 돈 벌어서 사회주의적으로 소득재분배를 합니다. 서독은 통일 이후에 동독의 복구를 위해서 소득의 6.5%를 단결세로 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라면 아마 시민들이 뒤집어질 것입니다. 독일인들은 개인적으로는 불만이 있겠지만 어쨌건 공개적으로는 불만을 제기하지 않는 ‘체통’이 있잖아요? 이것이 발전한 국가와 그렇지 않은 국가의 차이이지요. 

독일에서 독신여성인 제 친구는 신문사 기자인데요, 중상층이긴 하지만 본봉으로 치면 월급의 40%를, 보너스는 약 80%를 세금으로 냅니다. 이런 것들을 사람들이 상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해도 사회패턴은 각기 다를 수 있습니다. ‘사회주의를 어떻게 건설할 것인가’라는 슬로건보다, 자본주의 시스템을 어떻게 바꾸어나갈 것인가를 고민해야지요. 국제적으로 풀어야 할 문제들도 있지만, 대내적으로 자본주의 구조를 바꿔가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욕망을 통제해야 합니다. 그래서 대안경제 혹은 대안패러다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진보’는 과거의 진보적 내용을 지키는 것 못지않게 오늘 상황에서의 문제해결을 발본적으로 고민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서구에서 살다 온 사람들에게 한국에 대한 평가를 들어보면 “에너지가 넘치기는 하지만, 전부 다 최고가 되고 싶어한다”고 합니다. 대안적 삶의 방식에 대한 고민이 운동과 결합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욕망의 주체로서 삶의 형태를 바꾸지 않으면 평화운동이든 통일운동이든 안 되더라고요. 독일 사람들은 정말 검약하게 삽니다. 경제적 조건보다 의식의 변환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노동운동이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 역시 그런 흐름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긴 시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4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