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플루, 한국사회의 천국과 지옥을 보다

노동사회

신종플루, 한국사회의 천국과 지옥을 보다

편집국 0 3,522 2013.05.29 11:48

신종플루 기세가 한 풀 꺾였다고 한다. 그래서였나, 며칠 전 우리 사무실에서 열린 월례특강 “신종플루와 공공의료” 강좌에 손님이 많지 않았다. 

그래도 내심 기대를 했었다. 플래카드도 걸고, 지역 노동자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내용을 만들어 선전도 했기 때문에, 많이는 오지 않아도 우리가 입주해 있는 건물 주변에서는 오지 않을까 하면서 말이다. 인터넷이며, TV에 휴교 문제에서부터 백신, 타미플루, 사망자 소식 등이 연일 시끄러운 시국을 생각하면 관심을 끌 만한 주제가 아닌가. 

단체 상근자들 10여 명과 노조간부 몇 명이 단출하게 모여 강좌를 들으면서, 우리 강좌가 왜 지역 노동자들에게 외면당했을까를 짚어본다. 

호환마마, 신종플루보다 하루벌이가 더 버거운 사람들

우선, 평일 저녁에 강좌를 열면 제조업, 생산직 노동자들은 시간을 내기가 어렵다. 보통 저녁 7시30분 정도에 강좌를 시작하는데, 하루 일을 마치고, 씻고, 저녁 식사를 한 후 우리 강좌를 들을 수 있는 분들은 거의 없다. 지금 이글을 쓰는 밤 10시에도 맞은 편 건물의 작업장은 불이 환히 켜져 있다. 그러니 매월 강좌를 열면서 홍보는 지역노동자들에게 하지만, 막상 당일에는 단체상근자들만 앉아있기 일쑤다.  

그러나 강좌가 중반으로 접어들수록 지역의 노동자들이 이번 강좌에  관심을 안 보인 다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신종플루 ‘고위험군’이 아니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가족이나 친지 중에는 대부분 어린 아이나, 노인 등 고위험군이 있을 것이기에 이것이 이유는 아닐 것이다.
 
국가적 재난이라고 하면서, 국가가 국민들에게 아무 것도 해준 것이 없다.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 가게를 비울 수 없는 영세상인들, 아이가 아파도 쉴 수 없는 수많은 불안정한 노동자들에게 국가는 아무 것도 해준 것이 없다. 즉 신종플루가 신경 쓰이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당장 하루하루를 먹고 살아야 하는 이들에게는 이미 플루보다 더 무서운 것이 버티고 있는 것이다.  

신종플루 확산 방지를 위하여 모든 학교를 휴교하자는 주장을 의사조직이 망설임 없이 할 수 있는 무개념 사회에서, 누가 노동자의 아이들을 걱정해주었는가? 맞벌이 노동자, 한부모가정, 조손가정의 아이들, 이주노동자의 아이들은 누가 돌볼 것인가 걱정해주었는가? 강좌에 오신 대기업노조의 간부 말씀이 본인이나 가족이 플루에 걸리면 일주일 이상의 병가, 공가가 보장되고 있다고 한다. 공무원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신종플루 대응, ‘정부 정책’이 없다.

대기업 정규직이거나 공무원 아닌 이들은 신종플루 검사비용부터, 발병 이후 병가처리까지 어느 것 하나 수월하게 넘길 수 있는 부분이 없다. 가까이 있는 병의원 두고 일부러 찾아가야만 하는 대학병원을 거점 병원으로 지정해놓은 정부와, 막상 검사비용에 특진비를 청구해버리는 상술 앞에서, 질병의 공포조차도 매출의 극대화로 활용하는 병원의 경영능력에 감복할 뿐이다. 서울의 강북지역보다 강남지역에 신종플루 환자가 많은 이유가 검사비와 관련이 있다는 주장을 믿고 싶지 않았지만, 사실인 것 같다. 여기까지는 그렇다 치자. 비슷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니까. 

그런데 병원 직원들 백신 접종하면서, 병원에서 중환자 간병하고, 주사바늘 처리하고, 의료폐기물 청소하는 분들은 왜 주사를 안 주나? 미등록?이주노동자의 임신 중인 아내가 신종플루에 걸리면 어디에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 건가? 밤낮없이 손님이 들어 불황을 모른다는 모텔촌 깊숙한 곳에서 하루에도 수차례 침대시트를 갈고, 변기를 닦는 아주머니는 검진을 받고 싶어도 모텔을 빠져나올 시간이 없다……. 

정부가, 국가가 존재한다고 느낄 만한 제도적 안전판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다. 줄 세워서 열재기, 열나는 아이를 무조건 학교에서 내보내기, 손 씻으라는 협박 같은 것을 ‘국가적 대응’이라고 하기에는 좀 낯 뜨겁지 않나. 그냥 두어도 잘 돌아갈 곳은 알아서 돌아가게 두고, 찾아내서 배려해야 할 곳을 찾아내고, 피해가 덜 가도록, 안심할 수 있도록, 아프지 않도록 하라고, 정부에 국가에 촉구하고 싶다. 힘이 좀 빠지긴 했지만. 

지상 지옥의 주민들로서, 이 뜨거운 연대감!

빌딩 청소를 하다가, 보증금 50억 원이 있어야만 입주할 수 있다는 실버타운에 청소자리를 얻어 일터를 옮긴 서 씨 아주머니를 오랜만에 만났다. 

“거기는 천국이야, 헬스하고, 온천한 다음에 손바닥을 따~악 갖다 대기만 하면 그날 몸 상태 따라서 식단이 나온다니까.” 

정말 그럴까?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나 같은 건 거기 목욕탕에서 손도 못 씻어. 거긴 천국이고, 니들 사는 여긴 지옥이야. 그것도 모르고 웃는 니가 불쌍하다.”

그 말에 나는 정말 큰 소리로 우하하 웃고 말았다. 서 씨 아줌마도 나도, 지상에 사는 지옥의 주민으로서 저 깊은 속에서 부울쑥 연대감 같은, 뜨거운 기운이 솟는 것 같았다. 아줌마 어깨에 팔을 두른 내 귀에, 아줌마는 한 번 더 웃음보를 건드린다. 

“야 오늘은 오후 청소라서 가는데, 다음에 와서 천국 얘기 더 해줄게.”


 
  • 제작년도 :
  • 통권 : 제14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