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들이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

노동사회

노동자들이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

편집국 0 4,154 2013.05.29 11:45

정리: 최은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교육국장 load101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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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에서 진행하는 세계노동운동사 학습모임에서는 분기별로 특강을 진행합니다. 9월12일 세 번째로 진행된 이번 특강은 “노동자들의 역사를 공부해야 되는 이유”라는 주제로 서울대 서양사학과 최갑수 교수님이 열강을 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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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오늘 강의 주제가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인데, 추상적이고 어렵네요. 그래도 제가 전공한 프랑스혁명사와 연관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kchoi_01.jpg역사는 흥미롭다, 인간의 이야기다

역사 공부를 왜 할까요? 일단, 흥미롭기 때문이지요. 왜냐하면 역사란 건 ‘사람 사는 이야기’거든요. 역사는 영어로 히스토리(History), ‘그의 이야기’입니다. 줄거리가 있는 이야기이죠. 제가 미국에 1년 정도 공부하러 가 있었을 때 등산을 많이 다녔습니다. 그런데 재미가 없더라고요. 미국에 있는 산은 크고 높은데 말이죠. 왜냐면 그 산에는 이야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미국 원주민들을 백인들이 싹 쓸어버리면서 그 산에 얽힌, 그 산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같이 없애버렸습니다. 그런 게 사람을 황폐하게 만듭디다. 동남아시아, 동유럽 이런데 가면 보기에는 찌그러지고 못살고 그렇습니다만, 거기에는 유물도 있고, 사람도 살고, 그들의 이야기도 살아있습니다. 그래서 훈훈하죠. 

저는 어렸을 때부터 역사를 좋아했는데, 이게 소설보다 더 재밌단 말입니다. 바로 인간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역사학의 매력이죠. 포스트모던이니 해가지고 과거를 경시하는데, 저는 과거를 기억하는 행위 자체가 인간 존재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의 거울을 통해 형성되는 국민적 정체성

여기 오신 분들은 노동운동하시니까, 역사 공부하시는 이유를 대부분 “교훈을 얻기 위해서”라고 하실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역사책을 읽을 때 가장 많이 대는 이유가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기 위한 것이지요. 그런데 역설적으로, 지금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역사책을 읽는 걸 보면, 교훈을 그다지 많이 얻진 못한 것 같습니다. 중국의 사마광이 편찬한 자치통감을 한문으로 쓰면 ‘資治通鑑’입니다. 마지막 글자 ‘감’(鑑)은 거울을 이야기합니다. 비추어본다는 거지요. 근데 이 책의 주요 내용은 정치권력의 이야기지요. 서양에서도 역사는 주로 치자(治者), 즉 지배계급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습니다. 왕조, 도시국가, 교회 이런 것들이 치자에 속하는데, 역사의 주체였고 역사를 장악해온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역사에도 지금 남아있는 것은 이조실록, 고려사편찬 등인데 이 역사서에는 권력의지가 침윤되어 있습니다. 역사가 인간의 다양한 모습보다는 국가권력과 관련된 측면을 더 많이 담은 것이죠. 또 거기서만 기록을 남기고 후대에 전하려고 노력했고요. 권력의 속성에서 볼 때, 권력을 가진 자에게는 이런 식의 역사가 중요했습니다. 그 속에 자기반성이 있어 과거를 통해 자신을 성찰하는 거니까요. 이런 측면에서 교훈을 얻는다는 자기반성은 역사를 포함한 인문학의 뿌리겠지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인문학, 특히 역사학의 자기성찰로서의 기능은, 사실은 권력자 중심의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민주화된 지금에 있어 역사학의 역할을 무엇일까요? 바로 ‘국민적 정체성’을 함양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어느 나라라도 초등학교부터 국사를 가르칩니다. 중등교육으로 가면 우리나라는 국사를 가르치지만, 다른 나라는 자국사를 포함한 세계사를 가르칩니다. 이렇게 교육제도 안에서 국사를 가르치면서 국민적 정체성을 통일시키고, 과거에 대한 국민적 기억을 관리해내고 보듬어냅니다. 우리의 단일민족신화도 그런 거지요. 극단적 예로 미국의 애국주의를 들 수 있겠네요. 미국은 이주민들이 주류를 형성하게 되면서 민족주의가 아닌 애국주의를 강조합니다. 9·11테러 기념일에 미국에 가보면 애국주의가 얼마나 강한지 느낄 수 있습니다. 아무튼, 근대에 들어와서 역사학의 주된 임무는 국민적 정체성 함양에 있습니다. 

근대 대학, 지배계급의 지식을 ‘국민’에게로 

역사학의 기능이란 게, 과거에는 통치계급의 반성을 위한 역사, 지금은 국민정체성 형성을 위한 역사인데, 이렇게 변화되게 된 과정을 좀 살펴보겠습니다. 근대사회로 넘어오는 가장 큰 기준은 서양에서는 프랑스 혁명이고, 우리나라의 경우엔 해방 이후입니다. 혁명 이후에 국민을 하나로 통합해내는 것이 중요해집니다. 그러면서 근대 대학이 등장하지요. 그 전에 지식인들은 지배층이거나 혹은 지배층의 보호를 받는 자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이름을 들어본 홉스, 루소, 로크 이런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이게 근대로 넘어오면서 국가가 국가 발전을 위한 구체적 방안의 하나로 근대 대학을 만들었습니다. 

독일에서 제일 먼저 탄생했죠. 산업혁명 이후로 영국과 프랑스가 기술이든, 학문이든 가장 앞선 나라였는데, 이걸 후발자본주의국가인 독일이 따라잡아야했거든요.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개인의 발전이었다면, 독일은 국가가 주도한 거죠. 그래서 국가주도로 1810년 독일 베를린대학을 만들었습니다. 이 대학이라는 게 학자들 입장에서는 기가 막힌 겁니다. 권위를 주고 돈도 대주면서 하고 싶은 연구 하면서 살라니, 얼마나 좋습니까? 대학 안에서는 완전 자치권을 주었거든요. 그래서 막스베버, 만하임 등등 당시의 유명한 학자들은 다 독일 출신이 많죠. 나중에는 영국과 프랑스도 근대 대학을 설립하고 미국도 연구 대학을 만들고 그럽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치자와 유한계급이 중심이었던 지식의 존재가, 근대에서는 대학, 아카데미로 넘어오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대학의 지식인들은 일견 자유로워 보이지만, 그 근저는 국립대학, 바로 공무원이라는 점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국가가 왜 대학에 자치권을 주었겠습니까? 그래야 대학이 가장 효과적으로 자기 역할을 할 수 있게 되고, 그 배경엔 권력의지가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근대역사학이 자리를 잡게 됩니다. 자유로워 보이지만 실질적으로 한 역할은 바로 국가가 요구한 것, 국민적 정체성 형성을 위한 학문적 작업을 한 거죠. 국어학, 국민문학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많은 역사학자들의 항의를 받을 수도 있어요. 대학에 있지만, 국민적 정체성을 뛰어넘는 작업, 민족적 정체성을 깨려는 노력을 하는 분들도 있죠.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국민정체성의 형성에 기여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프랑스 역사를 전공했지만, 프랑스 사람이 하는 공부와는 다릅니다. 한국의 역사적 인식을 풍요롭게 하는 게 제 목표고, 한국적 문제의식이 프랑스사를 보는 데도 들어와 있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역사학이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역사 공부의 이유1: 과거를 통해 현재를 낯설게 하기

그러면 여러분들이 공부하는 세계노동운동사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제가 하는 작업을 소개하면서 같이 이야기를 풀어가죠. ‘역사를 왜 배우느냐’고 물어본다면 저는 두 가지를 들 수 있겠습니다. 역사학이라는 것은 국가의 권력의지가 개입되어 있고, 핏빛으로 물들어 있죠. 이건 피지배계급이나 지배계급이나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측면에서 역사학을 보면, 자기 성찰의 기능이 중요합니다. 특히, 과거에 대한 연구를 통해 현재를 낯설게 하는 것이 역사학의 중요한 기능입니다. 

프랑스 혁명기의 정치가 로베스 피에르와 다산 정약용이 같은 연배입니다. 두 분 다 모두 공부를 잘 했어요. 피에르는 지방 소귀족 출신인데, 국왕장학생으로 파리의 루이 드 그랑, 우리식으로 하자면 왕년의 경기고등학교에 와서 공부하고, 왕이 왔다고 감사편지도 대표로 낭독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가 정약용과 피에르, 둘 중에 누구와 더 이야기가 잘 통할까요? 혹은 두 사람은 같은 연배니 대화가 잘 통할까요? 

아마 두 사람은 대화가 불가능했을 테고, 우리도 피에르와 더 잘 통할 겁니다. 왜일까요? 우리가 흔히 쓰는 국가, 시민사회, 잉여가치, 자본, 국민, 이런 단어는 100년 전에는 우리나라에선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정다산에게는 종묘사직이죠. 이렇게 생각해보면, 우리 사회가 이미 단절을 겪고, 그게 우리 현대사의 고통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이런 단절은 정체성에 혼란을 만들어내는데, 그건 우리가 근대를 주도적으로 이끌지 못해서 생겨난 겁니다. 마르크스와 김정호, 동년배 사람인데, 사실 우리는 누구를 더 가깝게 느끼나요? 마르크스일 겁니다. 그건 마르크스가 살았던 현실과 우리의 현실이 더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불행하게도 우리 한국사는 우리가 잃어버린 과거를 우리가 이해하게 하는데 실패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를 생각해봅시다. 지금은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민주주의가 좋은 체제라고 생각한 것은 역사적으로 100년도 안됐어요. 그 전에는 폭군정보다는 나쁘지 않지만, 군주정, 귀족정보다는 못하다고 생각했지요. 우리가 다 아는 플라톤은 악명 높은 ‘반민주주의자’에요. 루소가 1761년에 쓴 사회계약론을 통해 민주주의를 좋게 표현한 최초의 사람이었고요. 

민주주의의 핵심이 뭡니까? 가난한 사람들의 계급지배입니다. 근대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징표는 보통선거제죠. 플라톤 시대의 아테네에는 보통선거제가 있었는데, 시민들의 빈부격차가 심해지면 민회에서 부채탕감을 결정해버리는 경우가 많았어요. 대지주였던 플라톤은 당연히 민주정을 안 좋아했겠죠. 19세기 자유주의자는 재산제한선거제를 주장했습니다. 영국도 인구의 6분의 1, 또는 7분의 1에게만 선거권을 줬습니다. 모든 성년 남자들에게 투표권을 주면 큰일 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노동정치가 성장하고, 선거권에 대한 요구가 커지니 투표권을 줘도 컨트롤이 가능하겠구나, 하는 인식이 생겼습니다. 

민중의 성장은 대세니까, 그래서 19세기 말에 보통선거권을 주고, 그걸 통제하기 위해 의회제를 같이 도입했습니다. 민주주의자는 보통선거권을, 자유주의자는 의회제를 쟁취해서 자유민주주의가 결합하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 선거제는 엄밀하게 말하면 ‘귀족제’의 일환입니다. 진짜 민주적인 것은 ‘추첨제’이지요. 프랑스 혁명 때도 추첨을 통해 관리들을 선출했습니다. 어쨌거나 이런 과정들을 겪으며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프랑스에서는 노동자들이 국민으로 통합이 됩니다. 우리나라는 어떤가요? 그런 의미에서 아직 국민통합을 이루어내진 못했습니다. 유럽은 그러면서 민중들이 대거 정치무대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국민적 신화를 만들어내면서 국민적 정체성을 형성해나갑니다. 

아일랜드에서는 남자가 전통치마를 입잖아요? 그것도 이때 만들어진 겁니다. 이걸 보고, 역사가 홉스봄은 ‘전통의 발명’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중요한 때, 우리나라는 나라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만주도 굉장히 먼 나라가 되어버렸고, 해방이후 반공주의가 득세하면서 지적 다양성도 줄어버렸죠. 1945년~1950년 사이의 우리나라의 역사를 회복하면서 우리의 지적 자산도 같이 복구해야 합니다.

여하튼, 낯설게하기를 통해 우리의 사고 지평이 얼마나 달라집니까? 프랑스 혁명이 났을 때, 당시 사람들은 이게 뭔지 잘 몰랐어요. 엄청난 일이 벌어졌는데, 해석할 수가 없으니, 고대 로마 공화정으로 설명하려 했습니다. 그러면서 당시 기록을 통해 군주제 지지자에서 공화주의자로 바뀌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변화는 본인도 모르고 나중에 자료를 통해서 알게 되는 거죠. 지금 우리에게 당연한 것이 역사학을 통해서 낯설게 되는 것, 이게 역사학을 배우는 가장 큰 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 공부 이유2: 가려진 부분을 드러내기

두 번째, 역사학을 배우는 이유는 가려진 부분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격동기에는 은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도 잘 몰라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몰라서 가려지는 것들이 많습니다. 물론, 의도적인 것도 많지요. 예를 좀 들어보죠. 프랑스 혁명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강조할 때, 프랑스 사람들은 그때 노예제까지 폐지했다고 주장합니다. 1794년 2월4일에 정말로 노예제를 폐지했습니다. 영국은 1846년 권리장전에도 노예제는 논의도 안됐으니 굉장히 빠르지요. 이렇게 보면 미국과 영국의 부르주아 혁명을 뛰어넘는 자랑스런 기록입니다. 나중에 나폴레옹이 집권하면서 다시 부활시키지만 말이죠. 

근데 알고 보니, 프랑스 사람들이 원해서 그런 게 아니라, 다른 속사정이 있었던 겁니다. 그 시기에 생 도맹고(Saint Domingue)에 시스파뇰라라는 섬이 있는데, 동쪽 3분의 1이 스페인 령, 나머지 3분의 1이 프랑스령인, 지금의 아이티(Haiti)이죠. 정말 못사는 섬인데, 이 사람들이 1791년에 노예반란을 일으켜 1804년에 흑인공화국을 만듭니다. 이 섬이 있는 카리브 해는 커피가 특산품인데, 이걸 누가 장악하느냐가 문제였습니다. 프랑스 혁명 와중이니 영국이 이 섬을 먹으려고 합니다. 식민지쟁탈전에 혁명전쟁, 이데올로기 갈등까지 해서 당시 영국과 프랑스가 사이가 나빴거든요. 그런데 프랑스가 국내가 혼란스러워 군대를 보낼 여력은 없으니, 현지 관리들이 노예들에게 영국과 싸워서 이기면 해방시켜 주겠다고 약속하게 되고, 바로 그 이유로 노예제 폐지를 선언하게 됐습니다. 

여기에 투생 루베르(Toussaint L’ouverture)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정말 탁월한 전략가인 흑인 노예입니다. 나중에 나폴레옹이 노예제 부활을 위해 이 섬에 오기도 하는데, 5만의 흑인 군대로 6만의 나폴레옹 군대를 이깁니다. 무기를 사오기 위해 미국에 특사를 보내기도 하구요. 이렇게 흑인 노예들이 싸워서 공화국을 만들었는데, 프랑스가 전쟁배상금도 요구하고, 백인들이 인종차별로 국제적 국가 승인도 의도적으로 지연시켜서, 지금도 세계에서 제일 못 사는 나라가 된 겁니다. 이렇게 의도적으로 역사를 조작하기도 합니다. 이런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내는 것이 역사학을 배우는 목적입니다. 

객관적으로 보이지만 덧씌워진 것이 많습니다. 가장 심각한 것이 ‘유럽 중심주의’입니다. 유럽이 근대학문을 가장 많이 만들어서인지, 우리도 모르게 유럽인들은 본래부터 잘났다는 생각을 합니다. 거기에 ‘미국 중심주의’가 더 들어왔지요. 또 우리나라 기득권세력은 친일, 친미, 다 그 아류들입니다. 이런 것들을 어떻게 드러내야 할까요? 지나치게 한국적인 걸 강조하는 것도 콤플렉스로 보입니다. 아주 섬세하게 가려내야 합니다. 근대적 주체를 형성해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는 겁니다. 한국사의 과거청산, 민간인학살, 이런 것들도 역사 연구에서 많이 하고 있고요.

제 이야기를 좀 해볼게요. 저는 대학원에서부터 사회주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생시몽이 제 출발이었습니다. 그때가 1976년이니까, 그걸 연구하는 것만으로도 쉽지 않은 시절이었지요. 생시몽(Henri de Saint-Simon)은 백작 작위를 가진 대귀족입니다. 그때는 사회주의자라는 말이 없을 때니까, 자유주의자였습니다. 프랑스 혁명 때 망명귀족과 교회의 재산을 몰수해보니 국토의 10분의 1이나 됐거든요. 이걸 생시몽이 500억 원을 빌려 사서는 3,000억 원을 벌었습니다. 젊어서는 기사로 뽐내고 으쓱거리고 그러다가, 프랑스 혁명도 경험하고 미국혁명에도 참전합니다. 이런 격동의 시기를 살면서 현실의 문제를 성찰하고 고민하다가 사상이 엄청나게 바뀝니다. 나중엔 그 많은 재산을 다 과학연구에 바치고 만년을 빈곤하게 보냅니다. 시대적 상황이 사람을 얼마나 변화시킬 수 있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저에게 그 당시의 지적 질곡에서 외부로 향하는 출구가 바로 이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질의 응답>

질문: 최근 금융위기 등으로 자본주의가 무너지고 있는데, 혁명이 가능한지 혹은 세계가 어떻게 변화할 것 같은지, 최갑수 교수님이 역사를 통해 보는 전망은 어떤지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대답: 옛날 마르크스가 제시했던 혁명이데올로기와 프롤레타리아가 결합된 혁명전략을 지금 제시하기는 어렵지요. 기껏 좌파가 이야기하는 건, 자본주의가 스스로의 성공으로 무너질 것이다, 라는 논평인데, 이 게 강력한 행동을 수반하는 것도 아니고요. 같은 자본주의라고 하더라도 유럽 자본주의와 미국 자본주의는 엄청나게 다릅니다. 역시 사회세력의 역학관계가 어떻게 되어있는가가 중요합니다. 목숨 걸고 계급투쟁한 나라와, 그렇지 못한 혁명적 노조운동이 꺾여버린 미국은 다를 수밖에 없는 거죠. 

미국에 비하면 유럽은 노동운동, 혁명정당, 이의 지지 세력을 기득권층이 무섭게 받아들인 거고, 그래서 사회민주국가, 복지국가가 나온 겁니다. 사실 노동운동 세력은 복지국가 만들려고 했던 게 아니고, 국가를 때려 부수고, 부르주아를 때려잡으려고 했던 거였죠. 이런 모습은 사실 우리 상황에서는 상상하기도 어렵습니다. 실업수당 받으면서도 휴가 때 되면 휴가수당 나오고, 그게 다 투쟁의 산물인 겁니다. 목숨 걸고 싸운 걸로 보면 결과는 덤덤합니다만, 우리가 볼 때는 그 나라들의 복지시스템은 엄청난 거거든요. 그렇게 자본주의라는 것을 ‘대문자’로 보는 게 아니라 ‘소문자’로 구분해서 어깨 힘 빼고 쓰는 게 좋지 않을까 싶네요. 그렇게 되면 꿈을 좀 소박하게 가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혁명적 노조운동이라는 것이 과연 주류일까요? 노동운동이라는 게 원래 경제주의적인 성격을 갖는 것 아닌가요? 경제주의와 정치주의가 분리될 수 없으니, 경제주의적 요구를 살려서 노동자들의 이익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제가 지금 맹렬하게 글을 쓰거나 헌신하는 게 아니라 말씀드리기 조심스러운데, 소문자 자본주의 속에서 노동운동이 가지고 있는 현실적 성격을 조금 더 드러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서양에선 이미 노동문제, 계급 문제뿐만 아니라 환경, 여성 문제도 중요한 이슈입니다. 우리나라도 인종까지는 아니지만 민족/국민/노동/젠더 등의 여러 분류가 쌓여있어서 큰 전망을 이야기하기 어렵습니다. 층위가 다르지요. 

젠더문제가 가장 오래된 거고, 노동은 한 250년? 인종은 400~500년? 이런 역사적 층위가 다른 것을 하나로 묶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마르크스는 그걸 계급으로 묶어 갈려고 했는데, 지금 상황에서는 안 되지 않는가요? 또 우리나라는 젠더가 제일 공격적이잖아요? 노동은 그런 활력이 없는 것 같습디다. 미국학계는 이렇게 분절된 현실을 하나로 보려는 메타이론, 자체가 환상이고 이데올로기고, 폭력이라고도 합니다. 마르크는 역사적 통합학문의 실례를 보여준 것인데, 모든 학문하는 사람의 꿈이죠. 그 정도 스케일이라는 게. 

그런데 현재로서는 그 철학 가지고도 안 되는 거거든요. 지식인이 역량부족인지……. 다양한 층위를 하나로 묶어 우리사회의 반(反)자본의 전선을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 이런 걸 끌어 모아서 같이 가야하는데, 그게 쉽지 않은 것이죠. 이론화하기도 어렵고, 운동하기도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질문: 1차, 2차 세계대전 이후 노동권이 강화되는 것, 그리고 근대국가가 형성되면서 계급타협이 되는 과정을 이야기해주시면서, 한국 사회는 진정한 국민통합이 안 이뤄졌다고 이야기해주셨습니다. 1970년대는 노동이 강화되면서 통합의 기회가 있었는데, 지금은 노동 자체가 후퇴하는 듯합니다. 

대답: 돌이켜볼 때, 유럽 같은 경우는 미국과 달리, 나중에 비판을 많이 받기도 했지만, 사회주의 진영에서 중앙권력을 장악하지 못하니까 지방을 중점으로 두었습니다. 1880년대부터 영국의 맨체스터 같은 노동자 도시의 지방자치단체 권력을 장악하고는 전차도 깔고, 싸게 공급했습니다. 그러면서 생활과 관계된 것들, 수도, 교통, 주택 등을 지방수준에서나마 노동자들을 위해 하자, 그러면서 굉장히 노력했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지방정치에서 낙후된 부분들이 있지요. 부녀회, 통반장회, 노인회, 재향군인회, 해병대동호회, 바르게살기운동협의회 이런 조직이 무섭잖아요. 저는 이런 게 안 깨지면 우리나라 중앙정치도 안된다고 봅니다. 

우리 현 정권은 말이죠, 아무리 ‘서민’이니 ‘중도실용’이니 떠들어도 상위 1%를 위한 정권인데, 유심히 보면 확실한 지지표가 30%가 있습니다. 이 표가 지역 토호세력이죠. 이건 독재보다 더 오래된 겁니다. 유럽은 지방수준에서 정말 많은 사람이 헌신했습니다. 『더 레프트』라는 책 아시죠? 원제가 “민주주의 벼려내기”인데, 앞부분에 지방에서 헌신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런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유럽의 사회구조가 가능했다는 거죠. 근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좌파들이 다 중앙에 목숨을 걸고 있죠. 

물론 지방의 한계는 당연하죠. 그렇지만 의회도 한계가 있다고 의회주의를 안 할 순 없잖습니까? 우리나라 지방은 토호, 어깨들이 다 장악했습니다. 호남을 민주당이 잡았으면 호남은 비교적 서민적으로 잘해야지 않겠어요? 근데 이게 다 기득권인겁니다. 민주당이 광주에선 잘하고, 진보신당이 울산에서 잘해야 됩니다. 선거는 결국 진검승부고, 그래서 의회선거가 중요한데, 우리 실력은 어떤가요? 결국 노동운동으로 보면 다시 현장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런 거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현장엘 많이 못 가보지만, 노동운동도 현장으로, 정치도 생활정치로 가야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마무리를 해보죠. 우리가 그동안 운동하면서 성과도 많았고, 많은 사람들이 고생을 했는데, 고생한 사람이 숨 쉴 수 있는 여지를 많이 만들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게 참 아쉽습니다. 프랑스나 유럽에서는 의회가 노동현장에서 제기된 요구를 추인하는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그게 인민전선 시기에 시작됐습니다. 실업수당도 노조가 주고, 이미 노동조합에 준국가기구적 성격을 준 것이지요. 그러면서 노동조합 간부들이 숨 쉴 수 있는 구멍이 생겼습니다. 오너 눈치 안 봐도 떳떳하게 일하면서 노동운동 역량을 살릴 자리가 있었는데, 우리나라는 잘해야 국회의원 정도일까요? 그런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 게 역량이라고 생각됩니다.

국가의 공공성을 위해서는, 노동운동가도 위치나 자리를 차지할 땐 차지해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앞으로는 누군가를 진출시켜서 그런 위치와 자리를 싸워서 만들어내고 해야하지 않을까 하는 거죠. 저는 대학에서 일하면서 보상을 받았는데, 어렵고 힘들게 싸우시는 분들을 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그런 여지를 만들어가면서 지방 의회라도 진출해서 역할을 했으면 합니다. 지역에서 역할하고, 깨끗하게 하고. 그래서 유럽은 수천, 수만 명이 지역 의회와 공직에 진출해서 하거든요. 그런 노력들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부족한 강의 들으시느라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4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