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물연대 전 인천지부장 윤정구 씨 이야기

노동사회

화물연대 전 인천지부장 윤정구 씨 이야기

편집국 0 5,927 2013.05.30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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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공부도 취미 없고 해서,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장사를 시작했거든. 장돌뱅이로 시작해서 이것저것, 떡장사, 생선장사, 방앗간…… 내가 손재주가 좋아서 장사를 정말 잘 했다. 이거 하기 바로 직전에 했던 게 소장사야. 우시장 돌아다니면서 한우나 비육우 같은 거 사다가 공급처에 넣어주는 일을 한 10여 년 했지. 그 땐 정말 돈이 돈이 아니더라고. 소 값으로 목돈을 쥐고 다니니까 하루 저녁에 천만 원, 이천만 원이 그냥 왔다 갔다 해. 그러다가 2000년 초반에 구제역 한 방에 시원하게 정리됐어. 있는 소 다 팔아도 한 마리 사료 값이 안 나오더라고.

정말 난감하지. 살고 싶지가 않았지. 내가 애가 셋인데, 당시 큰 놈이 막 중학교 들어갈 때였고, 그 뒤로 초등학교랑 갓난쟁이가 있었어. 그 때 내가 일을 저질렀지. 농약의 효과가 얼마나 좋은지 한 번 확인을 해보자, 하고 시원하게 들이켰는데 안 죽더라고. 괜히 고생만 뒤지게 했지. 그러고 있으니까 어느 친구 놈이, 그 꼬라지를 보고 안타까우니까, 3.5톤 화물차를 끌고 와서 휙 던져놓고, 이거 할부다, 니가 못 갚으면 나도 죽는다, 하더라고. 친구까지 죽일 순 없잖아. 그래서 그거 끌고 나가면서 화물 기사 일을 시작한 거야. 

내가 소장사하면서 전국 장을 전부 돌아다녀 봤거든. 지리를 잘 알지. 동네 선배한테 짐 싣고 끈 묶는 것 걸 좀 배워서 일을 하니까 자동차 할부는 갚겠더라고. 근데 우라지게 일을 해도 남는 게 한 달에 100만 원에서 150만 원 왔다 갔다 해. 애 키우고 월세 내는데 생활이 안 되는 거지. 그래서 한 1년쯤 됐나 그럴 때, 화물차 매매하는 후배한테, 야 일이 뭐 이따위냐, 어떻게 먹고 살라는 거냐 했더니, 형 큰 차 해봐, 큰 차는 좀 나아, 그러더라고. 

그래서 그 후배 따라서 25톤 대형차에 딱 앉으니까, 세상에 차에 기어가 그렇게 많은 건 그 때 처음 알았어. 승용차나 3.5톤 차 몰다 그거 타니까 난감하지. 어쨌건 운전을 해보라고 해서 어디 운동장을 세 바퀴쯤 빙 돌았다. 면허는 예전에 방앗간 하면서 심심해서 따놨었거든. 그랬더니 느닷없이 김해를 가래, 마그네슘 자석으로 쩔그럭 거리면서 철근을 실어주고는. 그렇게 대형 화물차를 시작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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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게소 쪽문 뒤의 별천지, 와꾸 안의 기사들

트레일러 화물 기사 일을 하면서 좋은 점은, 뭐라 그럴까, 내 눈으로 아침에 뜨는 해를 직접 볼 수 있다는 거, 첫 새벽에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안개 섬이 만들어지는 걸 볼 수 있다는 거, 그런 거밖에 없어. 그러잖아. 남들은 사진으로밖에 볼 수 없는 것들을 직접 본다는 게 정서적으로 좋을 뿐이지. 나머지는, 졸릴 때도 자기 싸대기 때려가면서 운전해야 한다는 거, 미친듯이 소리 질러 가면서 일을 해야 한다는 거는…… 뭐 요즘 같은 시대에 먹고 살 수 있는 직업이 있다는 거 빼면 만족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 

고속도로 휴게소가 아닌 다음에야 대형 화물차는 세울 데가 없어. 식당 앞에 주차하면, 그 큰 자리 차지하면서 5천 원짜리 밥 하나 먹고 간다고 무지하게 욕먹지. 그래서 그런지, 휴게소는 예전에는 기사들에게 별천지였어. 안 되는 게 없고 없는 게 없었어. 홀아비가 필요한 건 뭐든, 심지어 여자나 마약까지, 구할 수 없는 것이 없었지. 지금은 화물연대 들어서고 불법적인 건 많이 근절됐어. 어쨌든 경부선 따라 있는 휴게소들은 대부분 쪽문 뒤에 식당들이 좍 있거든. 그 식당들에는 장거리 기사들 쓰라고 샤워장이나 빨래터가 다 있어. 기사들은 밥 먹을 때만이라도 도로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정 바쁠 때 아니면 휴게소 밥 잘 안 먹어. 

화물 기사 일이 특히 나쁜 점은 거의 집에 못 들어가는 거, 피로 누적되는 거…… 여러 가지지. 나 같은 경우는 집에서 새벽 3시 반이나 6시 타임에 출근해서 하루 600~700킬로, 12~13시간 정도 운행을 하거든. 근데 이게 내가 화물연대 인천지부장 일을 하면서 낯가죽도 좀 팔리고 해서 어떻게 보면 운행조건이 무지하게 좋은 편이야. 나는 운행 구간도 거의 정해져 있는데, 절대 대수의 장거리 화물 기사들은 매일 어디로 갈지를 몰라. 영남권, 호남권 그런 것만 알고 어디로 가야할지도 모르고, 어디서 깡통(컨테이너)을 픽업해야 할지도 모르고. 하루종일 쪼그리고 앉아서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고.    
       
그래서 사고사나 과로사로 죽는 경우도 많아. 짐을 하차 하려고 하는데 트레일러 줄이 길잖아. 그래도 기사들은 어디 나가서 제대로 쉬지 못하고 차 안에서 핸들에 다리 올려놓고 자. 근데 이놈의 와꾸(기사)들은 자는 놈을 안 깨워줘. 그 놈이 졸다가 하차 차례를 건너뛰면 자기 차례가 조금 빨리 오니까. 그렇지만 우리는 양심상, 또 화물연대까지 했는데 그거 그냥 지나치면 안 되잖아. 그래서 야 일어나, 하고 흔들어 보면, 죽어 있어. 핸들에 다리 올려놓고 고대로 죽어 있는 거지. 뺨 때려가면서 20시간 이상씩 운행하고, 잠깐 쉰다고 눈 붙였다가 그대로 죽은 거야. 동료들 중에 한두 놈 그렇게 안 보내본 기사들이 없을 걸. 나도 지부장 하면서 몇 건을 내 손으로 수습했어. 

불법 등 떠미는 구조, 열 받는데 ‘준법’ 한 번 해보자!

대형 화물을 처음 시작했을 때 보니까, 이게 매출은 월 1,000만 원이 넘는데 집에 가지고 가는 건 예전 3.5톤 하고 똑같네. 또 3.5톤은 그런 게 없는데 25톤 차는 지입료라는 게 있어서 알선업체에서 매달 25만 원씩 꼬박꼬박 떼어가네. 거기다가 짐을 상하차해준다면서 업체에서 또 수수료로 20프로 정도를 떼는 거야. 그러니까 매출의 30~40프로를 알선업체한테 바치는 거지. 이래저래 열받고 있는데, 결정적으로 성질나게 한 건, 나라에서 떼 가는 부가가치세를 업체에서 80%만 내고 나머지는 기사한테 미루는 거야. 너무하지 않느냐고 따졌더니 다 그렇게 한대. 

알고 보니까 대신 불법으로 수입을 보전하더라고. 그 때는 기사들이 ‘자료’(부가세 환급 자격)를 업체한테 샀어. 뭐냐면, 처리하지도 않은 수리비 3천만 원을 장부로 만들면 300만 원이 부가세 환급분으로 나오잖아. 그거 ‘자료’를 기사들이 업체한테 50만원에 사는 거야. 250만 원 챙겨 먹는 거지. 그런 걸로 기사들은 수입을 유지하고, 사업자들 그렇게 몇 년 해먹다가 세금이 한 1억 밀리면 부도내고 나르는 거야. 시원하게 해먹고 날랐다가 지역 바꿔서 다시 시작하는 거지. 그 땐 나도 이게 웬 떡이야 하고 챙겨먹긴 했지만, 뭐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다 있냐고 생각했던 게, 어쨌든 기사들 수입은 불확실한 거고 특히 관행을 모르는 놈들은 혼자 굶어 죽는 거잖아. 게다가 범죄자가 되는 위험 부담을 지는 건 기산데 제대로 챙겨먹는 건 알선소 놈들이거든.

또 인천 같은 경우는 어땠냐면, 알선소 대리쯤 달면 마누라가 당연하게 연안부두에서 횟집을 해. 기사들한테, 야 우리 마누라가 어디서 횟집을 하는데 어떡하냐, 이러는 거지. 거기 가서 팔아주는 기사들은 ‘오다빨’이 좋아져. 같은 알선소에서 일을 배정 받아도 매출이 달라지고, 또 같은 매출이라도 기름 값이 훨씬 적게 먹는 오더를 가져가는 거지. 찍힌 놈한테는 ‘콤파스 오더’를 보내. 예를 들어서 같은 경기권 안이라도 저기 남쪽 끄트머리에서 북쪽 끄트머리로 왔다 갔다 하는 거를 보내는 거지. 보통은 그런 데 한 번 갔다 오면 가까운 데를 보내주거든. 그렇게 오더가 순서대로 돌아가는 건데, 그런 순번 무시하고 ‘콤파스 오더’ 몇 번 몰아서 주면 뭐 나가라는 거지.

어쨌든 그렇게 대충 먹고 살고 있는데, 2002년에 고속도로 통과비용이 5.4%인가 오르는 일이 있었어. 정부 발표가 그렇게 난 거지. 그런데 업체에서 주는 돈을 받아서 보니까 아무래도 5.4%는 더 떼는 것 같아.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계산을 해봤더니, 아니 5종 차량(4축 이상의 차량)은 12% 이상은 되는 거야. 좆같잖아. 열 받아서 TRS(주파수 공용 통신) 무전기에다 대고서 내가 살살 긁었지. 당시에는 TRS 쓰는 사람이 별로 없었고, 주로 서울 부산 왕복하는 장거리 화물차 운전자들이 썼어. 그래서 그거 쓰는 사람끼리 고속도로 휴게소에 모여서 열 받아서 떠들다가, 우리 심심한데 ‘준법운행’이나 하자는 이야기가 나왔어. 재미 반, 항의 표시 반으로 시작했지.

‘맨 땅에 헤딩하기’였던 노동조합 활동  

그걸 우리끼리 하는 말로는 ‘사다리’라고 부르는데, 대형 화물차들이 고속도로에서 최저 준법속도로 나란히 가다가 계속 차선 변경을 하면서 서로 추월하는 거야. 대형차들은 조금만 핸들을 틀어도 꼬리가 차선 하나 반을 왔다 갔다 하면서 요동치거든. 승용차들이 무서워서 거길 들어오나. 그러면 도로가 절단이지, 꽉 막혀버려. 경찰이 딱지 끊는다고 세우면, 내려서 최대한 시간을 끌어. 그러면 뒤에 차도 딱지 끊기는 사람이 자기 일행이라고, 그거 본다고 세우고 내려서 천천히 걸어와서 항의하는 거지. 그러다가 언제였더라, 하도 길이 막히니까 화물 기사들이 아예 차를 세워버린 일이 있었어. 그랬더니 거기 있던 기사 세 사람이 정말로 경찰에 연행됐네. 그런데 그 중에 한 사람이 연행되는 통에 짐을 하차 못해서 위약금을 크게 물어주게 된 거야. 

어떡할 거야. 당장 생활비는 만들어줘야 할 거 아냐. 맨날 휴게소에서 커피 먹으면서 야 오늘 어땠어, 하고 이바구 맞추던 사인데. 그래서 우리끼리 모금통을 만들었거든. 근데 모금이 들어오는 게 장난이 아닌 거야. 감당을 못할 정도로 돈이 많이 들어온 거지.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누가 먼저 그랬달 것도 없이 화물 기사들의 이해를 대변할 수 있는 조직의 필요성을 자각하게 됐고, 지금 화물연대의 시초가 되는 ‘화물노동자공동연대(준)’이라는 이름으로 조직이 만들어진 거야. 그러면서, 야 우리끼리는 안 된다, 이걸 유지하려면 상급단체가 있어야 한다, 민주노총이 좋을까 한국노총이 좋을까 하는데, 몇몇(나중에 알고 보니 학생운동 출신들이더구만.)이 민주노총으로 가야 된다는 거야. 그래 가보자, 거기가 뭐하는 덴데, 하면서 민주노총으로 갔지.

그래서 운송하역노조라는 델 갔더니 처음에 몇 번을 뺀찌를 놓네. 그 당시에는 민주노총 내에서도 특수고용직군 조직에 대해서 말은 있었지만, 설마 그놈들이 조직되랴 했던 거지. 준비가 없었던 거야. 그 때 운송하역노조 사무처장이란 자가, 조직을 더 해오쇼, 하더라고. 그래 할 수 없지. 알았어, 남는 게 시간인데. 진짜 겨울에 한 잠을 못자고 밤새도록 화물연대 전단지를 나눠줬어. 그렇게 조직을 했네. 그러면서 결국 차는 임대로 주고 나는 전업으로 노동조합 일을 하게 된 거야. 지부장님, 월급을 안 줘요. 왜 못 받았는데?, 몰라요. 알았어, 들이대 보자. 차 번호판을 떼 갔어요, 왜?, 아시잖아요. 알았어. 들이대 보자. 그렇게 맨땅에 헤딩하면서 시작한 거지. 

화물연대, 기사들의 ‘이름’을 되찾아주다 

화물연대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기사들끼리 ‘이름’이란 게 없었어. 예를 들어서 차량번호가 6192면 “6192번”이 나야. 서로 관계를 유지하는 동료라는 의식이 없었지. ‘사다리’ 타는 거 모의하고 그럴 때도 서로 형 동생하거나, 이름으로 부르질 않았어. 그 때는 TRS 아이디 번호 따라서 그냥 “몇 번 국장”으로 불렀지. 민증 까고 그런 건 없었고, 다 그냥 국장으로 불렀어. 10살 정도는 위아래가 없었고, 좀 높여서 부르면 “국장님”하고 님자 붙여 부르는 정도였지. 그런데 2002년 10월에 화물연대가 생기면서 ‘동지’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고, 야 이제 우리도 이름을 좀 정확히 알아야겠다, 하면서 알게 된 거야.

특히 2003년 파업을 겪으면서 인간관계가 많이 친밀해졌어. 2003년에 철도하고 우리가 각각 파업을 해서 승리했다가 깨졌잖아. 우리는 파업해서 지면 그냥 짤리는 정도가 아냐, 악 소리 못하고 죽는 거야. 그렇게 아프게 깨지고 서로 보듬어주면서, 아 이런 게 동지구나, 하는 마음이 싹트기 시작했지. 그 때 정말 돈 없어서 피눈물 나는 이야기가 많아. 집에다가 파업 한다고 하면 욕먹고 쫓겨나니까, 야 일 없어서 꿀었어, 하고 생활비를 받아와서 파업장에서 나눠서 같이 쓰는 거야. 그렇게 니 돈 내 돈 개념도 없이 어려움을 나누면서 살은 거지. 그래서 그 때 초기 멤버들끼리는 지금까지도 마음으로 지원을 해. 요즘에야 조직이 커지다보니까 간신배나 양아치 같은 벼라별 새끼들이 다 꼬이지만, 초창기에는 그렇지 않았어.  
   
나는 어려서는 내가 국가를 위해 존재해야 하고 그런 줄 알았는데, 노조를 해보니까 그런 게 아니더라고. 위험한 발상인지 모르겠지만 거의 무정부의에 가까워졌어. 인간 중심의 원칙,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가치 실현, 직업의 소중함 같은, 노조 일을 하기 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이 삶의 지표가 된 거지. 요즘에는 차 유리에다가, 차별에 저항하라, 라고 선탠지로 붙여갖고 다니거든. 노동자들을 가르는, 자본이 부여한 질서를 거부하란 거지. 시쳇말로 예전에 트레일러 기사들은 10톤 차 기사들 하고는 밥도 같이 안 먹었거든. 지들 차가 더 크다 이거지. 그런 어리석은 차별을 나부터 극복해야 한다 이거지.   

소박한 자부심을 허용치 않는 사회 

노조 일을 하면서 실은 내가 가정이 깨졌어. 애들은 내가 데리고 사는데, 막내는 초등학생이고, 애들이 아직 부모 손길을 필요로 하는 나이야. 그런데 화물 일이라는 게 그렇게 하질 못하게 하잖아.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많아. 조금이라도 애들한테 더 신경을 쓸 수 있는 여유를 주는 일이 있다면, 수입이 지금 정도만 유지되면, 바꿔야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들어. 그렇지만 내가 국가 물류를 담당하고 있다는 데는 자부심이 있어. 화물연대 하면서 배운 것에 대해서도 그렇고. 화물 기사들이 가정을 유지할 수 있고, 평범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조건만 되면 그래도 참 괜찮을 텐데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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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물 기사들의 버릇 이야기

#1. 골 때리는 건데, 나는 바빠 가지고 달린다고 달려. 80킬로, 100킬로로 달리려고 하는데, 운전을 하다 보면 어느새 시속 70킬로로 와 있어. 기름 값이 무서우니까 경제속도가 몸에 밴 거지. 또 하나는 트레일러는 백미러로 안 보이는 꼬랑지 부분까지 감으로 5센티미터 간격에도 집어넣어서 주차를 하거든. 근데 가끔 가다 피곤하면 승용차 주차를 잘못한다. 아무리 해도 안 될 때가 있어.  

#2. 장거리를 뛰면 커피를 왕창 사다놓고 달려, 졸리니까. 커피로도 안 되면 느닷없이 싸대기 빡빡 때리면서 달리거나, 한겨울에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달려. 아니면 라디오 소리를 크게 틀어놓고 달리거나. 별 수 없어. 기사들이 그래서 대부분 볼륨이 커. 기사들이 모이면 싸우는 것 같잖아. 직업적으로 그냥 크게 이야기하는 거야. 남들이 보면, 저 사람들은 왜 그렇게 떠들어, 하는 거지. 

#3. 며칠 전에는 짐을 21톤을 실었다. 차 중량까지 합치면 40톤 무겐데, 그게 브레이크 밟는다고 잘 세워지나. 밟아도 잘 안 들어. 브레이크 라이닝 패드가 이렇게 두꺼운데, 차를 세우고 나면 진짜 새빨갛게 달궈져. 식혀야 될 거 아냐. 근데 차에 있는 음료수 뭐 다 부어봤자 소용없어. 별수 없이 거기 위에다 오줌 눠서 식히거든. 펄펄 끊지. 근데 이게 습관이 되는 거야. 오줌이 마려우면 자동적으로 그리로 가게 되네. 일종의 직업병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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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작년도 :
  • 통권 : 제15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