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전태일, 그리고 민주노조운동

노동사회

2010년 전태일, 그리고 민주노조운동

편집국 0 4,275 2013.05.30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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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서울 서대문 한국노동사회연구소 회의실
일시: 2010년 11월26일(화) 오전 10시30분
사회: 오동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부소장
참가: 김태현 전 민주노총 정책실장
      전병덕 전 민주노총 부위원장
      정의헌 민주노총 수석부위원장 
      한석호 문화다양성포럼 사무처장 (가나다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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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_06.jpg사회자: 노동운동 하는 사람들에게 전태일이란 듣기만 해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이름일 텐데요. 그래서 이 좌담은 전태일이란 이름을 처음 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으며 자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라는 질문부터 시작해볼까 합니다. 먼저 야전에서 잔뼈가 굵은, 지금은 전태일 40주기 기념 사업단에서 집행위원장을 맡고 계신 한석호 동지부터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이름, 전태일

한석호: 논쟁이 아닌 이런 식의 좌담이 참 익숙지가 않은데요. 어쨌든 이야기를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대학교 1학년 때였던 것 같아요. 제가 대학 갓 입학해서 서클에 들어가 사회과학 공부하고 그럴 때, 마침 전태일 평전이 출판되었거든요. 그 때 서클에서 세미나를 하면서 함께 읽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제가 운동을 그만두지 않고 할 수 있도록 해준 결정적인 동인들이 몇 개 있었는데요. 그 당시에는 전태일 평전과 5월 광주항쟁이 저에게 큰 충격을 준 것이었죠. 광주항쟁의 참상을 복사본으로 돌려보면서 그 처참함에 분노를 느꼈고, 전태일 평전은 워낙에 책을 잘 읽지 않았던 제가 처음으로 울면서 읽은 책이었습니다. 그 감성과 연민, 이런 사람이 어떻게 세상에 있을 수 있을까, 하는 기분을 느낀 거죠. 그런 느낌과 각성이 막연하게만 느껴졌던 노동운동에 구체적인 관심을 갖도록 하고, 이후에 노동자의 삶을 살아야겠다고 결심을 굳히는 데 영향을 준 거죠. 또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비록 11월13일 전후의 노동자대회를 계기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긴 했지만, 전태일의 삶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저를 버티게 해준 여러 지지대 중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전병덕: 전태일의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고등학교 때 교회 선배들이 이러저러하게 하는 이야기 속에서였습니다. 실제 전태일 평전을 읽은 것은 사회에 나와서 노조를 만들고 나서였죠. 위원장으로 조합원들을 만나야 하니까 이야깃거리도 필요하고, 나도 뭘 좀 알아야겠거든요. 그런데 평전을 읽으면서 보니까, 실제 전태일이란 사람은 이런저런 말들을 듣고 내가 단편적으로 그리고 있던 인물, 그러니까 분노에 의해 분신한 분이 전혀 아닌 거예요. 이 양반은 자기를 둘러싼 현실에 대해서 아주 구체적인 고민을 하고 실천을 했던 사람인 거예요.

저는 대학을 다닐 때 학생운동을 하지 않았어요. 해서 졸업한 이후에 그 부채의식 때문에 운동을 해야겠다는 강박 같은 게 있었거든요. 그렇지만 그런 운동에 대한 강박은 사실 노조를 만들면서도 굉장히 피상적이고 구체화되지 못했죠. 그런 상황 속에서 읽은 전태일 평전은, 아 운동이라는 게 현실적이어야겠구나, 지금 내가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고 있었구나, 하는 반성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사회자: 이제 1980년 이전에 운동을 시작한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어볼 텐데요. 정의헌 선배님부터 이야기를 듣겠습니다.

special_04.jpg정의헌: 나이를 좀 먹었다 보니 정확하게는 기억나지 않네요(웃음). 제가 1970년대 중반에 대학에 들어갔는데, 전태일이란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그 때 서클 선배들에게서였던 것 같아요. 광주대단지 사건 등과 함께 민중의 고통에 대한 상징적인 사건으로서 처음 접하게 된 거죠. 책을 읽은 것은 한참 뒤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학생운동 마치고 노동운동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된 데는, 사실 전태일 열사가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 것은 아니었어요. 그렇지만 1970년 전태일 열사의 분신 사건이 있은 지 얼마 안 있어 극소수이긴 하지만 학생운동가들이 현장에 투신하는 흐름들이 만들어졌고, 저도 그런 흐름의 연장선에 있었다는 면에서 자연스럽게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도 있겠죠. 어쨌든 우리 노동운동은 11월13일 전태일 분신 사건을 기리기 위해서 매년 노동자대회를 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측면에서 전태일은 우리 노동운동하는 사람들의 가슴에 꾸준하게 영향을 미치는 존재로 남아 있다고 봅니다. 

김태현: 마찬가지로 저도 학생운동을 하면서 전태일이란 이름을 접하게 되었는데요. 제가 75학번입니다. 75학번들이 입학하고 한 달 만에 수원에서 김상진 열사가 할복하는 사건이 있었고, 바로 한 달 뒤에는 휴교령이 떨어지고, 또 휴교령 끝나고 복학하자마자 5월22일에 무슨 사건들이 생겨서 학생들이 우르르 끌려가고…… 한 마디로 당시는 운동의 암흑기였어요. 우리를 ‘긴급조치 세대’라고 부르기도 하던데요. 어쨌든 그렇게 탈출구가 잘 보이질 않던 엄혹한 시절에 젊고 낭만적인 급진 민주주의자로서 학생운동을 하다 보니, ‘민중지향성’, 즉 민중과 함께 해야 독재정권을 무너뜨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강했던 거 같아요. 1970년대 중반쯤이면 한국 자본주의가 어느 정도 진전된 상태이니, 이런 생각은 자연스럽게 특히 노동운동과 결합해야 한다는 인식으로 나아갔고요. 그렇게 생각이 진전하는 데 근간을 이룬 것이 바로 전태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그 양반이 근로기준법을 공부하면서, 대학생 친구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했던 게 기억에 강하게 남아 있는데요. 그때는 지금처럼 80% 이상이 대학에 가는 사회가 아니었잖아요. 출신 계층들이야 다양했지만 당시만 해도 대학생이라면 어느 정도는 엘리트층이고 가진 계층이라고 할 수 있었을 텐데요. 그런 조건에 있는 저는 이 사람이 고된 싸움 끝에 죽음을 결단할 때까지 인텔리가 한 명도 함께 하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원죄의식이랄까, 부채의식 같은 걸 많이 느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사실 전태일 평전이 출판되기 전에도 복사본 형태로 그 내용이 부분적으로 돌아다녔거든요. 그걸 보면서 학교도 제대로 안 나온 친구가, 겨우 스물두 살밖에 안 된 친구가, 어떻게 그런 정도의 생각을 갖고 자기 삶을 실현해갈 수 있었을까 하는 경외감도 많이 느꼈어요. 그런 느낌들이 바탕이 된 고민들 속에서 제가 노동현장에 투신하게 할 수 있는 힘이 만들어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전태일 정신’이란 무엇인가

사회자: 말씀들 잘 들었습니다. 각자 개인의 경험 속에서 접한 전태일에 대해서 말씀해주셨는데요. 이제 좀 더 넓은 측면에서, 노동운동가로서 삶 속에서 느끼는 이른바 ‘전태일 정신’의 핵심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들어보겠습니다. 

정의헌: 어쨌든 87년 대투쟁을 통해서 전태일이 부활을 한 것일 텐데요. 우리가 평전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물론 마지막에 자신을 희생하는 측면도 경외롭지만, 그보다는 그가 살아가는 과정에서 보여준 자신이 처한 현실을 넘어서고자 하는 부단한 용기, 좌절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정신, 그런 부분들이 더 감동을 주는 것 같아요. 많은 활동가들이 그런 걸 보면서 용기를 얻고 정신을 차리는 측면이 있는 것 같고요. 자기가 정말 고단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자신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끌어안을 수 있는 마음의 깊이랄까, 하여튼 그런 부분들이 더 낮은 곳을 지향하는 노동운동의 정신을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비정규직 문제가 심각해진 오늘날 이런 정신은 노동운동에게 시사하는 바가 더욱 크다고 생각합니다.

전병덕: 저는 전태일이란 사람이 인간애가 상당히 깊은 분이었고, 정의감이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분이 아니었나 싶어요. 운동이란 걸 처음 하게 만드는 것은 이념 같은 것보다는 사람에 대한 사랑, 정의감, 도덕, 양심 그런 거잖아요. 전태일의 삶은 그런 측면이 두드러졌던 것 같아요. 어떤 명확한 이념을 토대로 세상을 뒤집으려는 혁명가나 그런 게 아니고, 내 주변의 어린 시다를 보면서 인간적인 안타까움에, 세상이 이렇게 가면 안 되는데 하는 정의감으로 움직였던, 인간애가 깊고 현실에 성찰적이고 정의감이 높았던 분이 아닌가 싶어요. 그런 단순하면서도 깊은 매력이 전태일이란 이름을 노동운동을 하는 이들이 지금까지도 생동감 있게 되새길 수 있도록 하는 것 같습니다.

김태현: 저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데요. 인간에 대한 사랑, 억압받고 가난한 자기 주변 사람에 대한 애정이 참 깊었고 거기서부터 실천을 시작했던 것 같아요.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연대 정신이 투철한 양반이었다고 할 수 있겠죠. 당시 시다와 재단사 관계는 굉장히 봉건적인 위계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자기 집도 엄청나게 힘듦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위해서 살려고 했다는 점은 정말 대단한 거죠. 또 하나는 그러한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저항과 자기희생의 정신, 즉 열심히 배우고 조직하고, 최종적으로는 엄청난 자기 결단에 이르게 되는 저항과 희생의 태도 역시도 전태일 정신의 큰 부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special_05.jpg한석호: 저도 크게 차이가 없는데요. 전태일 평전을 읽으면 읽을수록 전태일이란 사람이 정말 성인 같다, 아 어떻게 그런 삶을 살아갈 수가 있었을까, 학교도 제대로 못 다녔는데 그 어린 나이에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고 그런 글을 쓸 수 있었을까, 지금 저한테 글을 쓰라고 해도 그렇게는 절대 못 쓸 텐데, 하는 생각을 절감하게 됩니다. 당시 재단사는 지금으로 치면 거의 공장장에 가깝잖아요. 그런 위치에서 시다 문제를 나서서 해결하려고 하다가 죽음에까지 이른 건데요. 본인이 연대라는 말을 잘 몰랐겠지만 온 몸으로 이를 체현했다고 봅니다. 또 하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그렇게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좌절하게 되잖아요, 그 정도 좌절했으면, 포기하고 그냥 혼자 잘 먹고 잘 살자 하는 생각을 함직도 한데 끝까지 밀고 나갔다는 점이라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점은, 가슴으로 마음으로 움직였다는 점입니다. 역시 운동은, 물론 머리도 필요하지만, 가슴으로 몸으로 세상을 움직이는 것이라는 점을 보여줬다고 봅니다.

전병덕: 전태일 평전을 보면, 사회적으로 노동문제 모범업체를 만들기 위한 과정에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자기 눈을 기증하겠다고 결심하는 부분이 나오잖아요. 제가 이십 대 후반에 전태일 평전을 처음 읽으면서, 이게 현실적인지 아닌지를 떠나서, 나는 그런 결심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저는 어렸을 때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님이 신이 아니라 혁명가다 하는 생각을 했는데, 전태일 평전을 읽으면서도 그런 경외감을 느꼈던 것 같아요. 전태일 정신의 요체는 그런 자기희생을 통해서 구체적인 변화를 이뤄내려고 한 점이라고 봅니다.  

전태일이란 거울에 비친 오늘의 노동운동 모습

사회자: 이제 현실에 좀 더 밀착해서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올해 40주기 행사를 크게 준비하고 있고, 또 20년 넘게 노동자대회를 개최하고 있기도 한데요. 그렇다면 오늘날의 노동운동에게 전태일 정신은 어떤 자양분을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김태현 실장님부터 말씀을 들어보죠. 

김태현: 어쨌든 전태일 열사의 죽음 이후 그것이 사회 의제가 되고, 또 1970년대 이소선 어머니를 중심으로 그 의지가 계승되면서 청계피복노조 등의 민주노조운동 흐름이 만들어졌잖아요. 이후에도 1988년 11월 제1회 노동자대회를 개최하면서 “전태일 정신 계승”을 핵심 구호로 내세웠고, 전노협이나 민주노총 결성도 어쨌든 이에 기반했죠. 결국 현재 민주노조운동의 성장과 발전은 전태일 정신의 계승 발전이라는 맥락 속에 있다고 볼 수 있을 텐데요. 다만 오늘날 제기되는, 민주노조운동이 양적인 성장에 비해서 사회적 전망과 연대가 취약한 부분은 초심으로 극복해야 할 과제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정의헌: 민주노총이 전태일 40주기를 맞아서 여러 가지 사업을 준비하고 있는데요. 이는 단지 40주년이기 때문만은 아니고, 지금 우리 현실이 전태일 정신을 크게 요구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이번에 민주노총이 내세운 사업이 ‘전태일 평전 읽기’였는데요. 이 사업은 40주기를 계기로 하는 것이지만, 성과주의적 입장으로 접근하거나 11월13일로 끝내야 할 것이 아니라, 현재의 혹독한 신자유주의적 노동 탄압에 맞서 대중적 용기를 재구축하기 위한 차원에서 꾸준히 밀고 나가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전태일 열사는 우리 입장에서는 어떻게 보면 거울이잖아요. 우리가 운동을 한답시고 살면서 헝클어져 있고 온갖 때가 묻어 있을 때, 자신을 전태일 열사에 비춰보면 얼마나 비틀어져 있는지 뭐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지 정말 환히 보입니다. 이번에 실시하는 전태일 평전 읽기는 지금 활동가들이 겪고 있는 인간적 위기, 노동운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기반으로서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IMF 구조조정 이후에 우리 노동운동이 겪어온 파행과 실패와 오류를 헤쳐 나가기 위한 기초적인 준비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거죠. 

한석호: 전태일의 위치는 한국 노동운동에서 절대적이라고 생각해요. 한국에는 메이데이가 두 번 있는 거잖아요. 5월1일 노동절과 11월 전태일 분신을 기억하기 위한 노동자대회. 실제로 노동자대회가 메이데이보다 더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고, 그 만큼 전태일은 한국 노동운동에 있어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거죠. 그렇지만 지금은 아시다시피 연대의식 자체가 많이 후퇴했고, 전태일 정신이 많이 퇴색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어쨌든 이런 때일수록 전태일 정신을 살리기 위한 의식적이고 계획적인 노력들이 많이 필요할 겁니다. 잘 나갈 때보다도 못 나갈 때 정말 필요한 게 전태일 정신인 거 같아요. 사실 저도 요즘 노동운동을 보면서 짜증을 내기도 했었는데요. 이번에 40주기 사업을 하고 전태일의 삶을 되새기면서 많이 반성을 했습니다. 그 어려운 시기에 전태일도 그렇게 살아냈는데, 하면서요. 

전병덕: 돌이켜 보면 한국 노동운동이 민주노총으로 집중하는 과정에서 전태일 정신, 전태일 정신 하고 꽤나 떠들었지만, 실제로 전태일 정신의 내용을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외쳤나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즘 20년 전에 봤던 책을 다시 보면서 느끼는 건데, 열사가 실천적으로 보여줬던 삶을, 저를 포함해서 현재의 민주노총 활동가들이 조금이라도 닮고자 노력했던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민주노총이 전태일 정신을 정말로 계승한다면 비정규직이나 실업자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한 실제적인 성과를 냈어야 하는데, 다들 내 코가 석자라고 정규직 중심으로만 돌아갔다는 거죠. 우리가 외쳤던 “전태일 정신 계승” 구호는 어쩌면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었나 돌아보고, 활동가들이 정말 많이 반성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지금 우리가 겪는 어려움은 운동을 시작하는 초심을 잃었기 때문이고, 지금 민주노총 안에 비어 있는 부분은 사실상 전태일 정신이라는 거죠.

‘노동운동가 전태일’에게 무엇을 배울 것인가

사회자: 전병덕 동지의 이야기를 좀 더 이어갈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렇다면 운동가들의 자세나 각오가 20~30년 전 운동을 처음 시작할 때와 요즘 어떻게 달라졌다고 보십니까?

전병덕: 예전에 운동을 할 때는 자기희생에 대한 각오가 기본이었던 것 같아요. 다른 분들 상황은 잘 모르겠지만, 대우자동차판매에서 노조를 만들고 처음 운동을 시작할 때 제 욕심은 별로 크지 않았어요. 뭐 혁명 같은 건 꿈도 못 꾸고, 우리 조합원들이 자기 권리를 좀 더 쉽게 주장할 수 있고, 사회적으로는 내 후배와 내 자식 세대가 나보다는 좀 더 좋은 조건에서 살았으면 좋겠다 하는 소박한 마음으로 운동을 시작했던 거죠. 그런데 그 정도를 가지고도, 실제로 감방에 가게 될 것이라는 각오가 없으면 활동이 어려웠거든요. 그런데 요즘에는 저를 포함해서 자기희생에 대한 각오를 갖고 활동을 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해요. 요즘 현장이 무너졌다는 이야길 많이 듣게 되는데, 예전처럼 현장에서 필요로 하고 요구하는 것에 자기희생을 각오하고 온몸을 던지지 않기 때문이죠. 사실 운동권 내 저명한 사람들부터 일부 그런 모습이 확인 되잖아요. 대중은 그런 걸 뻔히 아는 거고요.

사회자: 김태현 선배님은 요즘 현장을 많이 다니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간부들 분위기가 어떻습니까? 

special_02.jpg김태현: 제가 돌면서 보니까 대부분의 간부들이 정치세력화 같은 경우엔, 이번 지방선거 결과가 영향을 줘서인지, 분열된 진보정당의 통합을 전제로 해서 발전적 전망을 갖고 있더라고요. 그런데 현장활동의 전망에 대해서는 정말 자신이 없어 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저는 두 가지를 생각을 했는데요. 

하나는 우리가 대중 안에서 노동운동을 촉발했던 계기에 대한 근본적이고 실천적인 반성이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즉, 정권의 탄압과 억압,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대립, 그래서 억압받는 우리들이 더 많이 (이윤 몫을) 쟁취해야 한다, 이런 식의 물질적인 논리로 운동을 촉발시켜왔는데 그 성과라는 것이 지금 상황에서 보면, 물론 그런 걸 원하지 않았음에도, 심하게 말해 ‘노동귀족’적인 부분으로 귀결되었단 말이죠. 노조라는 것이 상당부분 이윤이 뒷받침되는 사업장에서의 임금인상을 위한 도구가 되어버렸고, 과거 초기 노동운동에서처럼 끈끈한 동지애나 자기희생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 동기에서 동원되는 것에 익숙해지다 보니 조합원들이 노조에 기대하는 것도 인간적인 부분이 아니라 그저 임금이나 더 올려주는 것이 되었고, 또 그런 조건에서 고용이 불안정해지니 노조보다는 사용자들에게 기대기가 쉬워진 거죠. 이런 구조 속에서는 연대의식이 자리잡기 어렵다고 없다고 봅니다. 이러한 구조를 근본적으로 혁파하기 실천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는 민주노총에서도 아주 오래 전부터 인식하고 있었죠. 그렇지만 뭔가 하는 척만 하는 운동, 전태일 열사가 했던 것과 같은 근본적인 자기희생이 아니라, 이것도 조금 하고 저것도 조금 하는 운동이었다 보니 비정규직이나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들과의 거리를 좁히지 못했다고 봅니다. 민주노총이 그런 이들에게 함께 하는 사람들이라는 인식을 못 줬다는 겁니다.

다른 하나는, 정파구조가 활성화돼서인지, 우리가 이렇게 잘 안 되는 부분의 책임을 남한테 돌리는 데 익숙해졌다는 겁니다. 우리 계획대로만 했으면 잘 됐을 텐데, 쟤네들 끼고 하니까 안 되는 거다, 하는 식으로 핑계를 대면서 책임을 미루는 모습을 많이 보이는데, 이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합니다. 이 두 가지 부분에 대해서 반성과 소통을 진지하게 하고 극복할 수 있다면 현장활동에 대한 전망을 조금은 새롭게 재구성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정의헌: 전태일 평전을 처음 읽었을 때는 정말 먹먹한 느낌을 주체할 수가 없었는데, 요즘에 다시 읽으니 나이가 들어서인지 감정을 누르고 전태일이란 사람이 가진 특성에 대해서 좀 더 냉철하게 접근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무엇보다도 그의 운동 자세와 삶의 태도,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등에서 나타나는 자기 성찰적 모습이 눈에 크게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저는 전태일 열사가 그러한 자기 성찰적 태도를 통해 도달한 현실 인식의 깊이와 폭에 주목해야 한다고 봅니다. 

앞에서 오늘날 노동운동이 겪고 있는 조합주의의 문제점에 대해서 잘 말씀해주셨는데요. “나를 아는 모든 나, 나를 모르는 모든 나”, “인간을 물질화하는 시대” 등의 구절에서 드러나는, 전태일 열사가 치열한 삶 속에서 각성한 문제의식들에 착목을 한다면, 이를 극복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제는 조합주의적 운동으로는 진보할 수 없고 현실을 극복할 수 없다는 건 자명하다고 봅니다. 또한 세계 자본주의체제가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봤을 때 새로운 전망과 이념에 바탕한 운동이 요구되고 있는데요. 이러한 조건에서 전태일의 삶과 인식에 근거한 운동을 현재의 시대 조건에 맞게 대중 속에서 되살려내는 것이 우리의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한석호: 40주기 사업을 하면서 느끼는 건데, 어쨌든 이번에는 전태일 바람이 불었잖아요.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을 ‘전태일역’으로 개명하자는 운동이 노동운동 영역을 넘어서서, 사업단의 기획과도 전혀 상관없이 트위터상에서 자발적으로 벌어지는 것을 보면서,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희망이 있구나, 그리고 전태일은 역시 전태일이다, 하는 것을 느꼈거든요. 그렇다면 뭘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 저는 물론 헌신과 열정을 되살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선은 막힌 것을 뚫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소리냐면 우리 활동가들이 이제 노동운동을 10년, 20년 동안 해오면서 어떤 울타리 안에 갇히게 된 것 아니냐는 거죠. 비정규직 문제나 사회운동과의 연대 같은 부분에 대한 문제의식은 다들 갖고 있단 말이에요. 그럼에도 몸이 오래되고 익숙한 울타리 안에만 머물고 있으니, 정신과 육체, 말과 행동의 괴리가 일어나게 되는 거죠. 그리고 제 스스로도 반성해야 할 지점인데, 운동 내에서 권력화되어서 그걸 놓지 않으려는 관성이 생긴 부분도 있다고 봅니다. 복잡한 정파 문제에도, 물론 그것이 다는 아니지만, 이런 부분이 작용하고 있고요. 이렇게 우리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고 있는 벽들을 깨는 것이 과제로서 제기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전태일이 21세기의 20대 청년노동자라면


사회자: 지금까지 자신과 전태일의 삶, 우리 운동이 계승하고 있는 전태일, 그리고 오늘날의 노동운동에 대해서 말씀들을 나눴는데요. 말씀을 들으면서 전태일이 오늘을 산다면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집니다. 20대의 전태일이 21세기 청년노동자로서 살아가고 있다면, 어떤 고민을 안고 어떤 모습으로 삶을 채워갈까요? 한석호 동지부터 자연스럽게 이어주시죠.

한석호: 전태일 동지는 워낙 다방면에 탁월한 분이시라, 많은 생각이 드는데요. 저는 전태일이 현재 청년노동자로 살아간다면 우선 이주노동자운동을 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당시에 봉제공장에서 나이 어린 시다들이 했던 일들을 지금은 이주노동자들이 하고 있거든요. 몇몇은 재단사를 하는 경우도 있고요. 어쨌든 그런 측면에서 이주노동자운동을 하는 전태일의 모습이 제일 먼저 그려지네요. 그렇지 않으면, 청년유니온이나 기륭?동희오토 등에서 비정규직 노동운동을 하고 있겠죠. 그렇게 가장 낮은 곳에서 노동운동이나 사회운동을 하는 운동가의 모습으로 살고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삶과 관련해서는 방송통신대학교를 다니면서 소설 쓰는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을 것 같아요. 자기가 부딪치는 현실의 삶들, 자기 삶을 글로, 소설로 쓰는 거죠.

정의헌: 그런 질문을 받으니 몇몇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는데요. 20대는 아니지만, 김소연 기륭분회 분회장이나 이백윤 동희오토지회 지회장, 김성환 삼성일반노조 위원장 같은 사람들이요. 이 사람들이 뭐랄까, 아시다시피 억수로 힘든 상황이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가끔씩 찾아가면 대하는 태도가, 낙관이랄까, 성숙한 인간이 주는 느낌이 있는 거예요. 요즘 운동이 어렵다지만 결국 사람이 운동을 만들어가는 건데, 지금 시대가 운동을 위한 사람들을 만들어내고 있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쨌든 전태일 열사가 청년으로 살아 있다면 낮은 곳에 임해서 투쟁하면서 공부하고, 또 주변에서 인간적인 신뢰를 받으면서 동료에게 힘을 주는 노동자로 뛰어다니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전병덕: 앞에서 다 말씀해주셨네요. 이거 방통대까지 가버리니까(웃음). 저는 질문을 듣고 생각을 해보니까, 현장에서 치열하게 조직하고 투쟁하면서, 안이한 정규직노조나 상급단체를 과격하게 들이받아버리는, 그런 모습이 떠오르더라고요. 저도 민주노총에서 일을 했으니 저에 대한 반성일 수도 있는데, 어쨌든 자기 주변의 현실을 절대로 젖혀두지 않는, 거기서부터 운동을 하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 것 같아요. 

오늘의 노동운동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가

사회자: 이제 본격적으로 우리의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들에 바탕했을 때, 오늘날 노동운동을 이끌 정신적 기반과 태도, 이념과 노선은 무엇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김태현 실장님부터 말씀을 해주시죠.

김태현: 어떤 그림을 그리느냐에 따라 이념과 노선이라는 게 포괄하는 내용이 다양해질 수 있을 거 같은데요. 그렇지만 어쨌든 현실의 문제라는 것은 이념과 노선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인간에 대한 애정에서부터 출발해서 자기가 처한 현실에 천착했을 때 조금씩 진전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서 새로운 이념과 노선을 내세운다는 것은 그저 판만 갈아 끼우는 것밖에 안 된다고 봐요. 지금 비정규직과 정규직, 남성과 여성, 대공장과 중소영세업체 등으로 파편화되어 있는 상태를,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부터 어떻게 하나로 모아내고 단결시켜낼 것이냐에 대해서 깊이 있게 토론하고 구체적인 대안을 만들고 자기희생을 바탕으로 실천하는 것이 필요다고 생각합니다.

special_03.jpg전병덕: 개인적으로 작년과 올해, 내가 운동을 왜 시작했지, 하면서 저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는데요. 당시를 돌이켜보면 제가 아침에 출근을 해서 좀 지나면 귀가 빨개졌어요. 전국 조직이다 보니 하루에 30~50통씩 전화를 해댔거든요. 현장 소식을 듣고, 중앙 이야기를 제대로 알려내고 그런 일들이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부산이나 광주에 얼굴도 보지 못한 그 사람들이 내 동지다, 이 사람들하고 있어야 운동이 가능하고 함께 운동을 하고 있다, 하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 순간부터 제가, 그 사람은 없어도 돼, 하는 생각을 하고 있더라고요. 운동이라는 게 사람들끼리 하는 거고 전태일 정신의 핵심도 거기에 있을 텐데요. 저부터가 성찰과 반성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다음으로, 현장과 함께 하는 운동을 해야 하는데, 지금 우리가 상층을 향해서 정치만 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고민이 있어요. 저도 포함해서 하는 비판이지만, 지금 민주노총에 운동이 있는가, 없다, 정치만 있다, 하는 생각이 들어요. 사람을 중심에 두지 않고 현장과 함께 하지 않고. 그러다 보니 제시하는 ‘전망’이라는 게 현장의 ‘대안’이 아니라 정치적 ‘전략’밖에 없는 거고, 공허해지는 거죠. 일부에서 과연 민주노총이 민주노조를 대변하느냐는 문제제기가 이뤄지는 것도, 현장중심성, 현실의 구체적인 고민이 빠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정의헌: 기본적으로 다른 분들이 말씀하신 데 동의합니다. 정치나 이념 같은 게 불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낮은 곳을 향해 나아가는 노동운동, 이런 게 지금 가장 필요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앞에서도 말씀드린 전태일이 도달한 높은 수준의 통찰과 의식, 즉 인간 생명은 모두가 소중하고 귀한 것이라는 통찰과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상과 현실에 대한 확고한 의식이 바탕이 되어야 하겠죠. 

이는 또한 세계사적으로 노동운동이 축적해온 지향 및 이념의 기초와 닿아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상호 존중과 배려, 우의의 인간공동체를 지향하는 것, 그리고 인간을 물질화하는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반대하는 것, 이러한 태도를 사회주의라 부르든 뭐라 부르든 간에 어쨌든, 인류의 이상을 추구해왔던 노동운동의 태도를 우리 현실에 속에서 구체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런 기초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작동하는 정치라면 권력 추구를 노선으로 치장하는 오류를 극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과정들이 이미 일부 진행되고 있다고 봐요. 요즘에는 많은 노동자들이 세상이 실제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알고 자기 생각을 가질 수 있는 조건이 갖춰져 있다는 거죠. 1997년 IMF 구조조정과 총파업 이후 우리 운동이 무수한 실패와 패배를 경험했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경험의 축적 속에서 노동자들이 세상을 새로 보게 하는 인식의 지평 확대와 틀 변화가 함께 이뤄졌다는 겁니다. 지난 10여 년간 우리가 겪은 구조조정, 자본 이탈, 투기자본, 비정규직 등과 관련된 투쟁들은 고난을 가져왔지만, 또 한편으로는 노동자들이 처한 총체적이고 구조조적인 조건에 대한 자각을 확대시켜 주고 있다는 거죠.

자본의 위기라는 게 뜸하게 와서 평생 총파업 한 번 할까 말까 한 게 과거의 조건이었다면, 지금은 금융부문으로부터 집중적으로 발생하는 위기를 겪으면서 사회질서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대중적 인식이 큰 흐름으로 만들어져 가고 있는 지점도 있다는 거죠. 이런 부분이 축적될 때, 그리고 노동운동이 거기에 기여할 때 실제로 사회를 바꾸는 큰 힘이 만들어질 수 있으리라 봅니다. 많은 패배 속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게 현실이지만, 뭐 이성은 비관적으로 의지는 낙관적으로, 라는 말도 있잖아요. 패배 속에서도 긍정할 수 있는 측면을 보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번에 “전태일을 국민 속으로!”라는 구호와 더불어 “전태일을 세계로!”라는 구호가 나오기도 했는데요. 이 구호가 나오게 된 배경에는 신자유주의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된 속에서 전태일 정신이 이를 돌파하는 저항의 정신적 토대로서 부합하는 측면이 있겠다는 측면이 클 겁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저는, 이 구호가 오늘날 노동운동이 부딪치는 대부분의 문제들은 어쨌든 세계적으로 얽힌 자본주의 구조 속에서 만들어지고 있다는 자각의 확대를 반영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주노동자에 대한 대응이나 국제연대에 대해, 이전과는 다른 태도를 보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의 확산을 반영하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한석호: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앞에서 다들 말씀해주신 것 같은데요. 우선, 노동운동의 가장 기본으로서 낮은 곳으로의 연대, 높은 곳으로 가면서 손잡고 가는 것은 연대가 아니죠, 그런 낮은 곳으로의 연대를 회복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하고요. 다음으로, 조합원의 다양한 삶에 천착하는 운동이 되어야 한다는 거죠. 제가 답답하다고 느끼는 게, 임금?단체협약 및 고용문제 외에도 조합원들의 관심은 교육문제, 노후문제, 의료문제, 문화적 변화 등 다양한 영역으로 확대되고 있는데 노동조합은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어요. 80년대, 90년대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거죠. 그렇게 노조가 노동자들의 삶에 개입하질 못 하니까, 심지어 노동조합 간부들 중에서도 투기 목적으로 아파트를 두 채 이상 갖고 있는 사람들도 있어요. 또 극히 일부입니다만 상근자 하려고 뇌물을 주는 일까지 생긴다고 합니다. 노동운동이 이런 부분에 개입하지 못하면 안 되는 거죠.

세상을 바꾸는, 따로 또 같이 꾸는 꿈들

사회자: 노동운동의 현실에 대한 평가와 미래에 대한 전망에 대해서 많은 말씀들을 해주셨는데요. 그렇다면 노동운동가로서 각자가 꾸는 꿈 혹은 이뤄내고 싶은 개인적 목표가 있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사소한 것도 좋고 비현실적인 것들도 좋습니다. 정의헌 부위원장님부터 말씀을 듣죠. 

정의헌: 제 나이가 이제 예순이 얼마 안 남았는데, 쉰 둘인가에 일본 노동조합을 방문한 적이 있었어요. 간부들이 일을 마치고 와서 저녁에 회의를 새벽 2시까지 하는데, 다들 백발이 성성해서, 거기서 제가 제일 어린 거예요. 4박5일 방문하고 돌아오면서 드는 생각이, 야 우리는 저런 운동하면 안 된다는 거였어요. 개인적으로 보면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지만, 운동이 약해지고 젊은 사람들이 없어서 그럴 수밖에 없는 거라면 정말 서글픈 일이잖아요. 그런 일이 없었으면 하는 게 제 꿈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2012년 선거 전선을 준비하면서 민주노총이 용기를 내서 잘해야 할 테고, 진보정치세력들이 힘 있게 단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특히 진보정치세력들이 지금과 같이 분열된 상태로 2012년을 지나간다면 명목상 진보정당운동은 남겠지만,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아예 없어질 거라고 봅니다.

2012년 합법선거라는 큰 전선에 앞서 정치세력들이 진보정치 대통합을 통해 단일하게 나설 준비를 하고, 또 민주노총이 2011년 최저임금투쟁과 임단투를 결합한 ‘국민임투’를 힘 있게 전개한 뒤 하반기에는 “노동존중 사회가 참된 민주주의 사회”라는 모토로 노동기본권 법 개정 투쟁을 확대한다면,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2012년 선거에서 ‘노동기본권 문제’를 가장 큰 선거 의제로 만들 수 있다면 뭔가 의미 있는 변화가 만들어질 수 있겠죠. 한편으로 이를 뒷받침하는 게 이데올로기 전선일 텐데요. 지금 우리가 불을 지피고 있는 ‘전태일 정신 계승 운동’을 대중적으로 펼쳐나가는 것이 그 예일 겁니다. 그렇게 세 가지 전선에 제대로 구축돼 2012년 선거 국면에서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낼 수 있으면 합니다. 그렇게 해서, 제 민주노총 부위원장 임기도 그 때까지고 나이도 그렇고…… 은퇴?(웃음), 좀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으면 하는 게 제 꿈입니다. 그러면 부산일반노조 가서 교육선전부장을 할까요(웃음).

김태현: 세 가지를 이야기하고 싶은데요. 우선,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공장과 중소기업 등으로 노동자 내부가 분열되어 있는 부분을 평준화시키는 운동이 활성화되는 것입니다. 그런 부분이 이뤄져야지 민주노총이 건립 초기의 정신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음으로, 우리 운동의 정말 척박하고 취약한 부분, 즉 사람을 키워내고 학습하고 재생산하는 것이 가능한 구조가 만들어졌으면 합니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노동운동은 세계적으로는 명망이 높은데 사실 시야가 국내에 갇혀 있는데요. 최소한 아시아권에서만큼은 네트워크 역할을 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겁니다. 이런 세 부분이 이뤄지면 저도 정 선배가 말한 은퇴를(웃음)…… 아무튼 그렇게 잔뿌리가 많게 튼튼하게 운동이 성장했으면 좋겠습니다.      

전병덕: 저는 조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제가 처음에 운동을 한 것도 내 자식들이 나보다는 조금 나은 세상에서 살았으면 좋겠다는 거였는데요. 어쨌든 요즘 마음만 급하다 보니까 기초를 충실히 다지지 못하고 가는 게 너무 많은 것 같아요. 어디 교육을 가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진보진영이 실력이 없어서 권력을 못 잡은 게 천만다행이다, 만약 지금처럼 준비가 안 된 상태로 진보진영이 권력을 잡았다면 개판 쳤을 테고, 그러면 진보진영이 권력 잡을 일은 영원히 없어질 것이다. 저는 지금 급한 마음에 기본을 등한시는 부분이 정말 많다고 봐요. 사실 지금 민주노총 역사는 겨우 15년이고, 전노협까지 해도 20여 년밖에 안 됐잖아요. 그 기간 동안 겪은 시행착오들을 꼼꼼히 들여다보고 보완해야 우리 실력이 향상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렇게 기초를 튼튼히 다져 놔야 기회가 왔을 때 우리가 원하는 사회를 실현할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한석호: 지금 제 꿈은 두 가집니다. 먼저, 전태일 40주기 사업을 하고 있으니까, 지금은 전태일 열사가 고등학교 3학년 교과서에 한 두 줄로 나와 있는데, 이걸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교과서 모두에 실리게 하는 겁니다. 전태일을 이야기하면 노동운동과 노동조합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잖아요. 그렇게 우리도 유럽처럼 어릴 때부터 노동운동과 노동조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풍토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거죠. 다음으로, 좀 개인적인 생각의 변화인 건데요. 쪽팔리는 이야기지만 처음 운동 시작할 때는 혁명가, 혁명이 일어났을 때 선봉에 서서 “돌격 앞으로!”, 라고 외치다 저격수의 총에 맞는 혁명가가 제 꿈이었어요(웃음). 그런데 이건 불가능할 것 같고, 최소한 제가 죽기 전에는 우리 사회가 노동운동의 힘으로 복지·생태·평화 측면에서 북유럽 시스템 정도는 되어 있으면 좋겠습니다. 제 딸이 크는 걸 보면서 좌절감이 드는 부분이, 나도 나름대로 노동운동 하면서 정말 고생도 하고 열심히 했는데, 그 결과가 한심하게도 자식에게 비정규직 세상을 물려주는 것이라는 점이죠. 이거보다는 최소한 나아져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젊은 노동운동 활동가들에게 

사회자: 마지막 질문입니다. 후배 활동가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 아무거나 해주십시오.

한석호: 우선 제대로 못한 선배 세대 활동가로서 죄스럽고 미안하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오르네요. 우리도 노동운동을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결과적으로 조합원들만의 경제주의, 실리주의를 극복하지 못한 어려운 조건의 현장을 떠넘기는 것 같다는 거죠. 그렇긴 하지만 한편으로, 운동은 또 이전 세대를 극복하면서 성장하는 측면이 있는 것 같아요. 우리도 처음에 70년대 선배들 운동을 한계를 다소 과격하다 할 정도로 비판하면서 일어선 거잖아요. 지금 후배 세대들도 선배들이 좀 혹독하다고 느낄 정도로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다면 여기 정의헌 선배나 김태현 선배도 마음 놓고 은퇴를(웃음)…….

전병덕: 후배 활동가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오늘 전태일 이야기로 시작했으니까, 열사가 가진 많은 부분 중에서 단 하나라도 진심으로 자기 것으로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특히 인간에 대한 존중, 낮은 곳으로 향하는 사랑을 배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럴 수 있다면 충분히 운동에 복무하는 것 아닌가 싶어요. 그렇게 잘 했으면 좋겠습니다.

김태현: 젊은 세대들을 제가 잘 모르긴 하지만 한마디 하자면, 젊은 세대 활동가들은 양면성이 있는 것 같아요. 우리 세대에 비해 정파적인 배타성은 별로 없고 서로 잘 소통하는 것 같은데, 어쩌면 패기가 없어 보이는 측면도 있다는 거죠. 그렇다고 뭐라 제가 타박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부탁을 좀 하자면, 치열하게 천착하는 모습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우리 세대들은 정말로 맨 땅에 헤딩하면서 배워왔지만 요즘 젊은 세대들은 관심도 다양하고 생각도 신선하잖아요. 그런 감각이 성장해야지 운동도 변화 발전할 수 있을 테고, 선배 세대들도 이를 잘 지원해야 하겠죠. 

정의헌: 지금 젊은 세대 활동가들은 비정규직운동에 많이 복무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그런 측면에서, 물론 그 수가 많은 건 아니지만, 희망적인 면이 있다고 봅니다. 이들이 비정규 중소영세사업장을 더디지만 조금씩이라도 조직해 나간다면 지금 민주노총이 갖고 있는 문제점들을 자연스럽게 극복할 수 있을 거라는 거죠. 전태일 열사가 만으로 스물둘에 생을 마감했잖아요. 열사의 젊은 정신을 이러한 후배 세대 활동가들이 잘 이어갈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런 맥락에서 제가 몇몇 정규직 노조 동지들에게 전태일 평전 두 권을 사서 한 권은 자기가 읽고 한 권은 비정규직 동지에게 선물 하자고 제안을 하기도 했는데요. 어쨌든 젊은 비정규직 동지들을 노동운동 대오로 모아내는 데 있어서도 전태일의 삶이 좋은 안내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회자: 이렇게 이야길 해보니 막연하기만 했던 오늘의 전태일은 모습이 조금씩 구체화되는 것 같습니다. 이주노동자, 비정규직 등 낮은 곳에 있는 이들과 애정을 갖고 함께 하는 전태일, 말과 노선 싸움보다는 실천을 앞세우는 전태일, 끊임없이 학습하면서 전망을 세우는 전태일, 우리 안의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 진지하게 노력하는 전태일. 이러한 전태일의 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우리 노동운동이 좀 더 힘을 모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 의지를 확인하면서 오늘 좌담 마치겠습니다. 장시간 고생 많으셨습니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5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