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골프장 경기보조원 이야기

노동사회

어느 골프장 경기보조원 이야기

편집국 0 4,083 2013.05.30 12:17

유년 시절은 정말 부유했어요. 지금으로 치자면 이마트 같은 소형 백화점을 아버지가 운영하셨거든요. 지역유지라서 그런지, 그 당시 공화당 당원으로 가입하라고 권유도 많이 받았어요. 하지만 아버지께서 계속 거부하시고 도망 다니셨죠. 운동권이나 좌익은 아니셨는데 굉장한 반골이셨거든요.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강하셨고요. 그런데 1968년 12월에 아버지께서 운영하시던 매장에 큰 불이 났어요. 소방차가 36대나 출동할 정도로 큰 불이었죠. 그게 옆집에서 난 불이 옮겨 붙으면서 주변을 전부 태웠던 건데, 옆집에 혼자 사는 여자의 잘못 때문에 그렇게 된 거라 믿었죠. 그 여자가 동네 돌아다니면서 여기저기 사과하고 다니니, 너도 어렵게 됐고 나도 어렵게 됐는데 어쩌겠어, 뭐 이런 식으로 무마된 거죠. 

박정희 죽는 꼴 결국엔 보고 돌아가신 ‘반골’ 아버지

그런데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던 여자 집이 막 건물을 짓는 거예요. 낌새가 이상했죠. 아버지하고 어머니하고 조사를 해보니, 실제 불을 냈던 건 공화당 지구위원장이었던 거예요. 밉보였던 거죠. 아버지는 3박4일을 식음 전폐하면서 검사하고 싸웠어요. 그 검사가 자기가 질려서 순천 쪽으로 자원해서 발령받을 때까지 아버지는 끝까지 싸웠죠. 재판이 끝나지도 않고, 그렇게 12년을 끌고 끌어 79년까지 갔어요. 박정희가 죽고 딱 일주일 있다가 아버지께서 결국 돌아가셨죠. 공화당이 원수가 되니 아버지께서, 내가 박정희 죽는 꼴은 꼭 보고 죽을 거야, 라고 입버릇처럼 말하셨는데 정말 그렇게 가셨어요. 

집은 그 때 화재 이후로 풍비박산 났고, 결국 고등학교를 그만뒀어요. 고등학교 3학년 때였죠.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비인가 학교를 다녔는데 더 이상 다닐 수 없게 된 거예요. 제가 바로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거든요. 제가 1남5녀 중 셋째였는데, 큰 언니는 직장생활 좀 하다가 결혼해서 외국으로 갔고, 오빠는 공장을 다니다가 월급을 제대로 못 받았어요. 그러다 오빠는 남의 공장 옆에 더부살이 공장 하나 마련해서 뭐 좀 해보려고 했는데 계속 잘 안됐어요. 결국 제가 가장이 될 수밖에 없었죠. 

1978년에 학교 그만두고 바로 서울 화양동 봉제공장에 들어갔어요. 서울 와서 모집 공고 보고 그냥 간 거였는데, 먼지도 심하고 기숙사에 갇혀 사는 생활이었죠. 거기서 번 돈으로 동생 셋 학비를 냈어요. 그렇게 사는데 다음 해 아버지가 그렇게 가셔버리고, 엄마를 혼자 둘 수는 없었고…… 그래서 고향으로 다시 내려왔죠. 뭐 할까 고민을 많이 했는데, 고향 근처에 골프장이 있었고 거기를 가야겠다고 결정했죠. 그런데 부모님이 예전부터 저를 내려와서 일하게 하려고 골프장을 좀 알아보셨다는 거예요. 골프장 보조원에 대해 이거저거 알아보시고는 생활이 화려하고 문란하다는 느낌을 받아서 안 되겠다고 생각하신 거죠. 그래서 제가 거기에 취직을 한다고 했을 때 엄마가 반대하셨거든요. 하지만 내가 선택하고 내가 할 일이니 걱정 마시라고 했죠.

18홀당 3천 원으로 시작한 경기보조원 생활

그 때 12월은 보조원을 뽑지도 않을 때였어요. 모집공고가 보통 2~3월에 나는데, 저는 직접 골프장을 찾아갔어요. 담당자 만나고 싶다고 하고 그 골프장 마스터한테 직접 갔죠. 어떻게 왔냐고 물어서 일하고 싶다니까 출근하라고 하더군요. 처음 시작한 일이 연습장 공 줍는 일이었어요. 급여 없이 3개월 수습이었어요. 공 줍기 하면서 골프 백 메는 법, 손님 응대 요령 등을 배워요. 그렇게 수습기간 거치고 3월에 정식으로 고용됐어요. 그 때 첫 급여가 1일 18홀 3천 원이었죠. 한 라운드 더 뛰면 3천 원 더 주고……. 그런데 그게 내가 뛰고 싶다고 되는 건 아니고, 골프장 마스터가 배치를 해줘야 가능한 거예요. 계산해보면 한 달에 최소 9만 원, 최대로 벌면 18만 원인데, 보통 13~15만 원 정도 벌었어요. 

봉제공장보다 근무여건은 좋았죠. 그런데 겨울에는 또 일이 없으니까 일정하지는 않아요. 일은 없어도 골프장은 계속 출근해야 되고……. 새벽 4시가 첫 팀이에요. 첫 팀 배치 받으면 새벽 2시에 일어나죠. 시간대로 예약이 되어 있어 출근을 해도 예약이 취소되면 계속 기다리다가 보통 9시 반, 10시쯤 2부 팀 배치가 시작되는데 그 때까지 기다리는 거죠. 그 당시에는 3부가 없었는데 이제 라이트가 생기니까 오후 2시부터 3부가 시작되고, 4시10분에 마지막 팀이에요. 골프장마다 다르긴 한데, 보통 18홀 도는데 7시간 정도 걸리니까 제일 늦게 끝나면 9시 반, 10시쯤 되는 거죠. 54홀 다 돌때는 새벽 4시에 시작해서 오후 7시에 끝날 때도 있어요. 그럴 때면 밥 먹기도 힘들죠. 하루 종일 물만 먹는 거예요. 18홀 끝나면 시간이 나서 식사를 먹기도 하고, 하나 끝냈는데 바로 또 있으면 내장객들이 식사하거나 간식 먹을 때 잠깐 국수라도 먹는데 그것도 힘들죠. 

결국 배치라는 게 중요한데, 그러니까 ‘마스터’한테 잘 보여야 해요. 수습이 끝나면 신입생들 딱 세워놓고 번호를 지급해주거든요. 마스터가 순번 배치, 징계권한에 키를 쥐고 있으니까, 야료(까닭 없이 트집 잡고 마구 떠들어 대는 짓)가 있을 수밖에 없죠.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런 곳은 여전히 그러고……. 아예 입사 때부터 돈 먹이고 들어오는 경우도 있었고, 마스터가 강매를 하는 경우도 많았어요. 찻잔, 커피 잔, 은도금 수저, 화장품, 건강식품 카탈로그 주면서 사보라고……. 경기보조원이 어쩔 수 있겠어요. 싫어도 억지로 그걸 살 수밖에 없는 구조였죠. 저는 아예 돈이 없어서 그런 건 하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불이익을 받은 건 또 아니었던 거 같아요. 깐깐한 손님이나 중요한 손님들 위주로 배치됐거든요. 일하는 스타일이 손님이 농담 잘하는 것 받아주고 그러질 못하고, 철저하게 정석대로 일하는 스타일이라서 그런 쪽에 배치를 많이 받았어요. 

준비와 지원 없이 주도한 1986년 12월 파업 …… 그리고 이직 

1986년 12월경이었죠. 지금까지 대충 30년 일하면서 그 때 딱 한 번 이직을 했던 건데…… 그 전에 있던 골프장에서 제가 파업을 주도했어요. 그게 이직 원인이기도 한데, 중요한 경험이었죠. 일하다 보면 골프공에 머리가 맞는 사고가 간간히 있어요. 그 당시에 동료가 그 사고를 당한 거예요. 그 때 치료비로 20만 원을 받았어요. 손님이 마스터한테 치료비하라고 줬다는 거죠. 그런데 그 손님이 나중에 그 사고 난 동료의 동생과 함께 라운드를 돌았거든요. 그 때 지나가는 말로, 그 때 그 보조원 치료 잘 받았나 몰라, 하고 말한 거죠. 치료비로 40만 원 줬다고…….

동생이 자기 언니 이야기니까 손님한테 정말 40만 원 줬냐고, 나중에 사실관계 확인해 줄 수 있겠냐고 하니까, 해주겠다고 한 거예요. 그래서 따지려고 했는데 경기보조원은 손님 연락처를 알 수 없게 돼있으니까 관리자한테 삼자대면 시켜달라고 했죠. 그런데 죽어도 안 된다는 거예요. 그 때 그 동생이 저한테 도와달라고 했죠. 성격상 잘못된 일은 못 넘기니까 동료들을 집에 모았어요. 그리고 디데이 정하고 저희 집에서 회의를 했죠. 그런데 그게 샌 거예요. 회사 차 여러 대가 저희 집 앞에 와서 라이트 켜고 감시하고……. 전화로 저희 집에 오지 말라고 다른 동료들한테 연락하고…… 그렇게 어렵게 300명이 집결했죠. 

한꺼번에 골프장으로 올라가서 로비 식당을 점거했어요. 근처 부식 가게에는 지금부터 우리가 다 외상으로 갖다 먹고 파업 끝나면 해결해주겠다고 했죠. 쌀, 라면 단무지 같은 거를 사서 4일 동안 농성했어요. 결국 회사가 돈 떼먹은 관리자를 해고했죠. 우리들이 다치지 않는 선에서 마무리 한 거예요. 그리고 부식 가게에서 외상 갖다 먹은 거는 사장한테 해결하라고 했죠. 당연히 밉보이게 되었고 새로 온 관리자가 신입생을 붙여서 저를 감시하기 시작했어요. 

무슨 용기로 시작했는지 모르겠지만, 파업에 대한 지원도 교육도 받은 적이 없었어요. 그 동안 보조원들이 쌓였던 불만이 그 사건을 계기로 응집되고 폭발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이전부터 관리자가 횡포를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구조에서 겪었던 서러움, 비굴함, 자책감 이런 게 힘이 되었던 것 같아요. 동료한테도 싫은 소리하고 회사한테도 싫은 소리하던 제가 직접 나설 수 있었던 것도, 그 사건뿐만 아니라 중간에 캐디 피를 떼먹거나 마스터의 횡포를 계속 지켜보면서 이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던 게 큰 것 같아요. 밉보여도 아닌 것 아닌 거고…… 그래서 이직을 결심하고 다른 골프장으로 옮기게 된 거죠. 

‘사회지도층’ 향한 일말의 존경심도 사라지게 한 캐디 일

그렇게 10년 동안 일했던 직장에서 떠날 수밖에 없었어요. 그렇지만 일을 그만둘 수는 없었죠. 동생들 학비 벌고 결혼시키려면 생활비의 공백이 길어지면 안 되니까. 하루 이틀 삼일 벌어서 등록금 주고, 또 하루 이틀 삼일 벌면 다음 동생 등록금 주고, 등록금 해결되면 책값 주고 그 다음은 운동복 사줘야 되고 신발 사줘야 되고. 한 달도 제가 뭘 배우거나 전직을 하기 위해서 준비할 수 있는 여유가 없었어요. 그렇게 벌기만 해서 동생들 다 결혼시키고 결국 저는 안 했죠. 27살 때부터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렇게 오빠 동생들 도와주다가 후회한다는 말도 많이 들었는데, 제가 결혼하면 동생들도 못 배울 것 같고……. 내가 결혼해서 애를 낳는다면 정말 좋은 세상일까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을 것 같았어요. 

그 때가 87년 민주화 시절이었는데 저는 세상이 더 좋아지기보다는 각박해질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좋은 시절 오니까 서로 남을 죽여야 되고, 그렇게 해서 내가 일어서야 되는 세상에 내 아이가 살게 될 거라고……. 그래서 선도 안보고 결혼할 생각도 전혀 안하게 됐어요. 어찌 보면 사회에 대한 불만이 많았기 때문일 거예요. 아버지 사건 때문에도 그랬고. 제가 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잖아요. 처음에는 부모님을 많이 원망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사먹는 라면 한 봉지에도 세금이 포함되는데, 그 세금을 걷어서 기업이 내는 건데 기업이 탈세를 하면 결국 내 돈을 떼먹는 거고, 그게 아니라면 국가가 나한테 뭘 해줘야 하는 건데, 무상교육은 못해줄 망정 골프장 가는 길에 전두환 오고 노태우 온다고 돌아가라고나 하는 거죠. 

골프 치는 사람들이 소위 사회지도층이고 국가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많던 시절에, 직접 보면서 이전에 갖고 있던 조금의 존경심도 사라졌어요. 보조원한테 거침없이 모독을 일삼기도 하고 성적으로 희롱도 하고,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는 거 들어보면 탈법 편법으로 탈세하는 것 주고받고…….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되더라고요.

약자들의 노조 뭉개는 게 공공부문 선진화일까 

지금 일하는 곳에는 노조가 있어요. 1999년에 분회로 출발해서 2001년에 첫 단체협약을 체결하고, 2003, 2005, 2008년까지 계속했죠. 제가 노조 위원장 맡으면서 앞에서 말했던 관리자의 횡포는 최대한 없애려고 많이 노력했어요. 물론 조합원 본인이 꺼려하면 참 난감한 상황이죠. 그 사람 생존권이 걸린 문제니까. 그래도 많이 개선시키려고 노력했고, 그런 분위기는 상당히 바뀌었다고 봐요. 

그러다 2008년 정권이 바뀌니까 본격적으로 노조탄압이 시작되었어요. 공공부문 선진화 정책 일환으로 사장과 임원이 바뀌면서 노골적으로 노조를 탄압하더라고요. 새 관리자가 오자마자, 지금 단협은 니네들이 좋을 대로 다 해 놨다, 현 정부는 노조를 싫어한다, 이 정부에서는 니네들이 싸워도 이기지를 못 한다, 그러면서 2008년에 ‘서약서’를 쓰라고 강요했어요. 서약서 내용 중에, “업무 중 골프 카 사고가 발생했을 경우에 회사의 여하한 모든 조치를 감수하겠다” 이런 게 있더라고요. 그래서 이 “여하한”이 도대체 어디까지냐, 라고 물어도 대답이 없길래 서명 거부했죠. 그랬더니 골프 카를 작동시키는 리모컨을 뺏어버리더라고요. 

이후에 국정감사 받고 나서 “여하한”이란 “단협과 경기보조원 수칙의 범위 안에서다”라는 답변이 있은 후에 서명을 했어요. 그러고 나서 2010년에 단협 해지를 당했어요. 2008년부터 2009년까지 조합원 151명 중 59명이 해고당했어요. ‘해고’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제명, 해지, 출장유보 등 근무수칙에도 없는 이런 단어 써가면서 해고를 시키는 거죠. 해고당한 59명 중 조합 탈퇴한 인원은 업무 복귀시키고, 나머지는 지금 소송 중이에요. 현장에는 겨우 18명 남았고 나머지는 생계 때문에 뿔뿔이 흩어져서……. 

조합 탈퇴하고 복귀한 인원이나 소송 중인 인원이나 다 가슴앓이 하는 거죠. 하도 치사하게 나와서 탈퇴 조합원이나 신입 보조원들하고 이야기도 못해요. 다 지켜보고 있다, 쟤네들이랑 이야기 하지 말아라, 하면서 완전히 감시하는 거죠. 저는 해고되고 나서 총 9건 사건에 걸려 있어요. 관리자가 폭행해서 형사사건까지……. 해고되고 나서 주말은 아는 식당가서 도와주고 거기서 좀 돈을 받아서 투쟁기금 마련하고 있어요. 제 생계비는 조합원들이 일해서 월 5만 원씩 모아주면 100만 원 정도 전임비가 마련되는데, 고맙게도 지금까지 지원해줘요. 투쟁기금 마련하는 것도 어려워서 결국 갖고 있던 조그만 아파트를 팔아서 보태고, 또 생활비에도 쓰죠. 최선을 다하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해봐야죠.

  • 제작년도 :
  • 통권 : 제15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