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기업’을 꿈꿨던 전태일

노동사회

‘사회적 기업’을 꿈꿨던 전태일

편집국 0 3,935 2013.05.30 12:13

 

shlee_01.jpg전태일이 분신한 지 40년, 평화시장 앞 청계천 거리는 오늘도 북적거리고 있다.

겨우 이름을 찾은 ‘전태일 다리’ 위에는 상인들의 오토바이가 가득하고, 5년 전에 세운 전태일 흉상은 두 팔을 가볍게 늘어뜨리고 다가오는 사람을 안을 듯 언제나 그 자리에 서 있다. 전태일이 근로기준법 책자를 안고 분신한 그 자리도 표지 동판이 깔리고, 전태일 상 앞에는 꺼지지 않는 불꽃이 타오르리라. 그리고 그 불꽃은 그곳을 찾는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도 옮겨져서 불씨가 되리라.

오늘도 전태일은 말이 없지만 전태일을 마음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저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열사 전태일 이전, ‘모범업체’ 운영을 꿈꾸던 전태일

나는 오늘 또 다시 전태일을 바라보면서 ‘사회적 기업’을 꿈꾸던 전태일을 만난다.

우리는 전태일을 당시의 열악한 노동조건을 고발하고 개선하기 위해, 노동운동을 촉발하기 위해 과감히 자기 몸을 불사른 ‘열사’로만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가 쓴 일기나 다른 글들, 또는 당시 친구들의 기억에 따르면 그는 현실적 대안을 찾으려 무척 애를 썼다. 지금의 사회적 기업에 해당하는 ‘모범업체’를 만들어 보기 위한 구상도 그 하나였다.

그가 분신할 수밖에 없었던 1970년 11월13일, 그해 3월17일 일기에는 모범적인 피복업체를 만들기 위한 방대한 계획서가 기록되어 있다. 일종의 개요에 해당하는 계획서 첫머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이 일을 하려면 어떤 방법을 택할 것인가?

1969년 4월부터 이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 문제는 1968년 12월 달에 착상한 것이다. 나 자신이 꼭 해야 될 일로 생각했다. 그러나 1969년 서울특별시 근로감독관실에 진정서를 제출했으나 심사도 받지 못하고 말았다. 나 자신이 너무 어리다고 무시했기 때문이다.

나 자신이 직접 제품사업을 시작해서 정당한 세금을 물고, 기능공을 기계와 다른 인간적인, 배움의 적령에 있는 소년소녀로서 여기에 합당한 대우를 하고도 사업을 성공시켜 나갈 수 있는 것을 사회의 여러 경제인, 특히 평화시장 제품 계통의 사업주에게 인식시키기 위함이다.

첫째는, 사업자금을 구하여야 하기 때문에 사회의 여러 독지가들에게 나의 목적하는 바를 이해시키고 자금을 구하는 것이다. 사회는 보통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궁색하고 메마르지 않은 것을 믿기 때문이다. 각자가 다 해방과 6?25를 겪은 강박관념을 떨쳐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정신적인 오해이다.

나는 사업계획을 세워놓았고 나를 도와서 일할 사람이 주위에 있다. 때문에 사업자금만 준비되면 일의 80% 이상을 행한 거나 다름없다.
자금을 구하기 위하여

1) 나는 학력이 없으므로 대학 동창이 없다. 또한 집안 친척들 중에도 나에게 필요한 만큼의 자금을 댈 만한 사람이 없다.  그러므로 나의 가진 것 중에서 사회에 내놓을 것이라고는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 즉 한쪽 눈을 사회에 봉사하는 것이다. 눈을 사회에 봉사하고 나는 사회로부터 자금주를 소개받을 것이다.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이 사업을 꼭 이루고야 말 결심 아래 행하는 두 번째 방법이다.

2) 자금주에게 이득이 되는 조건 제시: 나는 이 사업을 3~5년간 내가 전 권한을 책임지고 맡는 대신에 이 사업이 완전한 궤도 위에서 행해질 수 있다는 것을 자타가 공인할 시기에는 아무런 조건 없이 전부를 자금주에게 반환할 것이다. 그러므로 조건이 좋기 때문에 투자를 할 것이다. 
*****************************************************************************************************

이렇게 시작하는 전태일의 ‘사업계획서’에는 미싱 50대, 종업원 157명, 자본금 3,000만 원의 사업체에 대한 아주 구체적이고 상세한 내용이 대학노트 25쪽 분량으로 적혀 있다. 지금 보아도 실현 가능한 모범업체의 청사진이다. 

그러나 결국 전태일은 자본금 3,000만 원을 구하지 못해, 아니 눈을 빼주고라도 협조를 구하려고 했던, 그렇게 믿었던 사회로부터 외면당하고 멸시받으면서, 그 꿈을 접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꿈이 좌절되고 희망이 꺾인 전태일, 결국 당시의 우리 사회는 전태일을 죽음의 벼랑으로 밀어붙였던 것이다.

살아 있는 전태일이 되는 방법

요즘 사회적 기업과 함께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얘기가 보편화되면서, 노동조합이나 노동자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얘기도 나오고 있다. 당연하고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구체성이나 진정성이 많이 모자라는 게 현실이다. 마지못해 하는 척하거나 흉내 내기에 급급하다.
40년 전의 전태일이 아직 우리 곁에 살아 있는 건, 그의 꿈과 계획이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 중의 하나가 그가 모범업체라고 표현한 사회적 기업과, 기업가와 노동자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탁견이다.

“정당한 세금을 물고, 근로기준법을 준수하고도, 제품 계통에서 성공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 경제인들에게 입증시키고, 사회의 여러 악조건 속에 무성의하게 방치된 어린 동심들을 하루 한시라도 빨리 구출하자는 취지”를 내세운 전태일의 정신을, 오늘 우리가 옹글게 이어받아야 할 것이다.   
  
전태일 40주기, 우리는 오늘도 어려운 여건 속에서 억눌리고 짓밟히고 있는 노동자, 민중 속에서 살아 있는 전태일을 만나야 한다. 그래서 우리 모두 전태일이가 되어야 한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5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