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득주도성장론’을 기치로 내걸고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지도 반년째에 접어들고 있다. 소득주도성장론을 주창한 학자들이 청와대와 정부의 요직에 포진됐고, 경제 관련 국책연구기관에서 소득주도성장에 대한 연구도 한창이다. 이 과정에서 보수진영의 공세도 강해졌다. 소득주도성장론은 분배론일 뿐이지 성장론이 아니며, 성장론으로서는 경제학의 족보에도 없다는 신랄한 비판이 잇따라 나왔다.
‘소득주도성장론’이란 무엇인가
이런 어처구니없는 비판이, 그것도 나름대로 진지한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나오고 있는 것을 보면, 소득주도성장론이 경제학의 관습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있는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그렇다고 해도 소득주도성장론은 그저 분배론일 뿐이라는 비판은 실소를 자아낸다. 왜냐하면 모든 성장론은 필연적으로 분배론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경제성장은 생산의 문제이지만 경제에서 생산과 분배는 일종의 거울상을 이룬다. 그 어떤 생산론 또는 성장론도 명시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특정한 분배론을 갖는다. 이제껏 우리에게 익숙했던 ‘선성장-후분배론’이나 ‘낙수효과론’을 보자. 이들은 부자에게 분배를 많이 해야 한다는 생각을 깔고 있다. 2008년 이른바 ‘MB감세’로 부자와 대기업에 1백조 원이 넘는 세금을 깎아줬다.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분배론’이라면 이 이론이 ‘성장론’이기는 한가? 노동자와 서민의 소득을 늘리면 이들이 소비를 많이 해 성장할 것이라는 소득주도성장론이 성장론이 아니라면, 부자와 대기업에 분배를 많이 해 그들의 소비와 투자로 인해 성장할 것이라는 낙수효과론도 대단한 성장론이라고 보긴 어렵다.
경제이론의 역사에서 보면, 소득주도성장론은 '과소소비(Under Consumption)론'의 일종이다. 과소소비론은 공황 내지는 불황을 설명하기 위한 이론으로 공황과 불황의 원인을 소비부족에서 찾는다. 이는 경제학에 매우 널리 퍼져있는 사고로 근대 이후의 경제학에서는 맬서스(T. R. Malthus)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으며, 케인스의 이론도 과소소비론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마르크스도 모든 현실적 공황의 원인이 대중의 소비여력 부족에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하지만 마르크스를 과소소비론자로 보긴 어렵다).
과소소비란 상대적인 개념이다. 소비가 너무 적다는 것은 생산된 것에 비해 그렇다는 것이다. 따라서 과소소비에 맞닥뜨린 자본가들은 생산을 줄이지 않을 수 없다. 때로는 물건을 못 팔아 도산하기도 한다. 산업의 가동률은 떨어지고, 생산용 기계는 팔리지 않는다. 소비재의 과소소비는 생산재 생산부문을 포함한 경제 전체를 침체에 빠뜨린다. 이것은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가 당대의 제국주의를 설명한 방식이기도 하다. 그에 따르면 과소소비에 직면한 선진국의 자본은 해외로 눈을 돌려 제국주의에 나선다.
공황과 불황의 원인을 수요부족에서 찾기 때문에, 과소소비론이 수요 진작에서 그 해결법을 찾는 것은 자연스럽다. 수요 진작은 소득을 늘려야 가능하다. 문제는 ‘누구의’ 소득을 늘려줄 것인가 하는 거다. 바로 이 대목에서 과소소비론의 다양한 입장들이 갈라진다. 흔히 과소소비론의 원조로 여겨지는 맬서스는 지주의 소득과 소비를 늘려야 한다고 했고, 케인스는 자본가의 소비(투자)를 늘려야 한다고 했다. 오늘날 소득주도성장론은 노동자와 자영업자를 포함한 서민들의 소득과 소비를 늘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소득주도’인가 ‘임금주도’인가
현 정권에 의해 주창되는 소득주도성장론은 국제노동기구(ILO) 등에 의해 애초에 제안되었을 땐 ‘임금’주도성장론이었다. 이것이 우리나라로 넘어올 때 ‘소득’주도성장론으로 탈바꿈한 데는 크게 두 가지 배경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 우리나라에는 임노동자나 다름없는 영세 자영업자가 다른 선진국에 비해 많다. 이들 중 상당수는 정리해고와 명예퇴직 등으로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자영업으로 내몰린 사람들로, 대기업 프랜차이즈에 속한 사실상의 임노동자다. 즉 임금주도성장을 소득주도성장으로 개명한 데에는 노동자의 임금뿐 아니라 자영업자의 사업소득도 늘려주는 게 바람직하다는 판단이 개입된 셈이다. 둘째, 최근 몇 년간 우리나라의 성장은 부채에 크게 의존했다. 즉 ‘부채’가 아니라 ‘소득’을 통해 성장해야 한다는 생각이 소득주도성장이라는 용어에 담긴 것이다.
이러한 의도는 충분히 이해할만한 것이다. 하지만 소득주도성장론이 최근 심화하는 소득양극화 속에서 고통받는 서민을 돕자는 이론이 아니라 경제 성장을 도모하자는 이론이라면, 그것이 소득을 늘려줘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경제적 성격, 다시 말해 경제 전체의 작동에서 그 위상에 대해 고민이 필요해 보인다. 우선 노동자의 소득인 임금을 늘려주면 그 자체로도 수요진작 효과가 있겠지만 노동생산성을 향상시킴으로써도 성장에 기여할 것이다. 임금은 그를 고용한 자본가의 이윤을 줄이면 즉각적으로 높일 수 있다. 어차피 이 자본가는 이윤을 전부 투자하지도 않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자본가의 소득이 노동자에게 이전되는 것은 자본가의 투자─이는 총수요의 일부다─를 크게 줄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면 자영업자는 어떤가? 일반적으로 자영업은 경제에서 부수적인 역할을 한다. 자영업이 성장을 견인하는 경우는 성숙한 자본주의에서는 있을 수 없다. 정책적으로 자영업자의 소득을 늘려줄 방법도 마땅치가 않다. 자영업자의 소득은, 그가 내놓는 재화나 서비스의 소비자들이 소비를 더 함으로써만 늘어날 수 있을 뿐이다. 이게 아니라면 그의 소득은 그가 고용한 노동자의 임금을 줄이거나(이것은 소득주도성장론에 반한다), 정부가 인위적으로 보조금을 지급해야(이것은 지속가능하지 않다) 늘 수 있다. 과연 이것이 바람직한가? 경제성장에 기여할 수 있겠는가? 좀 더 근본적으로 현재와 같은 자영업 규모를 유지하는 게 바람직한가? 사실 우리나라에서 영세 자영업이 많은 것은 저임금 및 장시간노동이 일반화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자영업을 유지하는 게 좋은 것인가? 자영업에 대한 정책은 소득보장이라는 측면보다는 경제 전체에서 이들이 점하는 위상이라는 관점에서 별도로 고안되어야 한다.
‘소득주도성장론’이 멈추는 곳
바로 이러한 이유로, 소득주도성장론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원래의 임금주도성을 명확히 해야 한다. 노동자는 현대 경제에서 가장 큰 집단을 이루며, 수요의 주체이자 생산의 주체다. 노동자의 소득이 높아지고 노동조건이 개선되면, 수요만 증가하는 게 아니라 생산성도 높아진다. 불행히도 현재의 경제성장지표인 국내총생산에 노동자의 건강 등은 전혀 고려 되지 않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노동자 건강이 성장에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노동자의 소득을 포함한 전반적인 상태 개선을 중심으로 ‘성장’이라는 개념을 재정의해야 한다.
하지만 노동자의 소득이 늘고 노동조건이 개선된다고 저절로 경제가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을 우리는 인정해야만 한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성장의 진정한 동력은 결국 자본가들의 경쟁적인 기술혁신일 수밖에 없다. 어떻게 그것을 자극할 것인가? 기술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난 10년 동안 세계경제가 침체하는 동안 이른바 ‘4차 산업혁명’에 속하는 눈부신 기술혁신이 있었음을 떠올려 보라. 여기서 핵심적인 질문은, 왜 그러한 기술이 경제를 성장시키고 인류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데 본격적으로 이용되지 않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혹시 이것이 현재와 같은 자본주의의 한계를 가리키는 것은 아닐까? 소득주도성장론은 이에 답을 주지도, 이런 문제를 제기하지도 못하는 것 같다. 물론 이것은 소득주도성장론만의 문제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