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에 스페인을 방문했었다. ‘포데모스’라는 신생 정당이 인기를 얻는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 지역신문, 지역단체 활동가들과 함께 스페인을 찾았다. 스페인의 단체, 정당과의 만남이 신선한 자극을 줬지만 정말 머리를 맞은 듯한 띵함을 느낀 건 통역을 맡아준 대학생과의 대화에서였다. 인터뷰가 없는 시간 동안 머쓱해서 스페인 대학생활에 관해 질문을 했는데 할 때마다 난관에 부딪쳤다. 수업은 많아요? 듣고 싶은 만큼. 거기도 시험은 중간, 기말 이렇게? 그건 학과마다 알아서. 축제는 하나요? 그것도 과마다 알아서. 학교 전체 행사는 없나요? 1년에 한번 전체가 모여 술 마시는 날이 있긴 한데 그것도 알아서.
우리에겐 학사일정을 파악하는 게 중요하고 사실 그 일정이라는 게 전국의 대학들이 거의 다 비슷하다. 마치 우리가 전국동시지방선거에 관해 아무런 의문을 품지 않고 치르는 것처럼 말이다. 왜 전국이 동시에 지방선거를 치러야 할까? 말 그대로 지방선거인데. 왜 단체장, 지방의원, 교육감들이 같은 날에 선거를 치르고 같이 임기를 마쳐야 할까? 왜 전국의 지방정부들이 동일한 구조를 가져야 할까? 지역적인 특성을 하나도 반영하지 못한 채로.
지금 우리의 현실은 과거에서 누적되어온 사건의 결과물이다. 지방분권이 개헌의 화두가 되었지만 정작 지방에 사는 사람들에게 화두가 되지 못하는 것은 그 내용만으로 설명되기 어렵다. 지역자치를 어렵게 만들었던 조건들은 무엇이었는지, 그런 조건에서 어떤 방식으로 지방자치제도가 진행되어 왔는지, 다가올 6월 13일 지방선거는 또 그런 조건이 어떻게 드러날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려 한다.
강력한 중앙집권형 국가와 민주화
한국은 강력한 중앙집권형 국가였다. 그 기원을 어디서부터 볼 것인지에 관해서도 논란이 있다. 조선 시대를 얘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현재의 관료제도와 정치문화, 폭력적인 통치양식이 자리를 잡은 건 일제 식민지 시기부터라고 볼 수 있다. 해방 이후 잠깐 지방자치제도가 실시된 적이 있지만 지방자치를 위해서라기보다는 통치를 연장하려는 이승만의 전략으로 활용되었고 박정희의 군사쿠데타로 지방자치제도는 바로 유예되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지방자치제도 부활이 정치권의 중요한 요구조건이 되었으나 노태우 정권은 이를 유아무야 연기시키려 했고, 1990년 10월에 당시 김대중 민주당 총재가 단식농성을 시작한 뒤에야 지방선거 실시가 합의되었다. 그리고 1991년 3월 26일에 시군구 의회선거가, 6월 20일에 시도의회 선거가 실시되었다. 단체장 선거는 1995년 6월이 되어서야 실시되었고, 이때부터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실시되었다.
왜 군사독재는 지방자치제도를 실시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을까? 지금 지방정부들이 하는 일을 보면 특별히 중앙정부에 위협적이지도 않은데 말이다. 그럼에도 지방자치제도가 보류되었던 가장 큰 이유는 자치권이 민주주의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소수의 사람들이 권한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접근조차 어려운 청와대와 국회에 권한이 있는 것과 시/군청, 지방의회에 권한이 있는 것은 다르다. 접근이 가능한 만큼 권력을 감시, 비판하고 견제할 가능성이 생기고, 시민들이 얻을 수 있는 정보도 달라진다. 여차하면 시민들이 직접 권력을 잡기 위해 정치에 나설 수도 있다. 이런 가능성이 있기에 지방자치제도는 ‘민주주의의 학교’라고 불린다.
지방자치제도와 기업의 관계는 어떨까? 중앙정부가 도지사, 시장을 파견하던 시절에는 기업들이 무조건 중앙행정부처에 줄을 대거나 그곳 출신 관료들을 기업으로 끌어들이면 인허가권을 받거나 개발사업을 할 수 있었다. 그러니 막대한 비자금을 조성해서 소수의 정치인이나 관료들만 잘 구워삶으면 되는 구조였는데, 지방자치제도는 그렇게 건드릴 사람들의 범위를 넓힌다. 그리고 중앙의 밀실에서 구워삶는 건 지역주민들이 잘 모르는데 지역에서 그렇게 하면 어디서든 소문이 나게 마련이다. 기업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들이 지역에서 내려지면 기업들도 주민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고, 노동자들이 밀집해서 사는 지역이라면 그만큼 영향력도 강해질 수 있다.
‘개발론’이 지방선거의 핵심 구호가 된 이유
그래서 한국의 중앙정부는 지방자치제도를 실시한 이후에도 지방정부에게 권한을 주기 싫어했다. 지방선거를 치른다고 지방자치제도가 실현되는 게 아닌데, 중앙정부는 마치 그런 것처럼 착시현상을 만들었다. ‘자치’가 되려면 권력이 시민에게로 와야 하는데, 중앙정부는 권력을 지방정부에게만 조금씩 넘겼고 관변단체들이 지방정부를 장악하도록 해서 기득권을 유지했다. 실제로 1991년에 실시된 지방의회 선거에서 선출된 지방의원들 중 상당수가 대표적인 관변단체인 새마을회나 자유총연맹, 바르게살기협의회 출신이었다. 그럼으로써 비공식적인 토호권력이 공식적인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고, 공천권을 쥔 중앙정치와의 공모관계가 만들어졌다.
이들이 공모관계를 강화시키는 주된 방법은 선거제도였다. 2006년에 중대선거구제도가 도입된 뒤에도 토호권력은 4인 선거구를 2선거구로 쪼개는 방식으로 거대 여당, 야당의 기득권을 유지시켰다. 얼마 전 서울시를 비롯한 대부분의 지역에서 4인 선거구를 권하는 획정위원회의 권고를 거부하고 다시 2인 선거구로 쪼갠 것은 기득권을 지키려는 노력이었다. 기득권정당의 기호만 받으면 당선이 유력해지니 공천권이 중요하고, 공천권을 쥔 국회의원들은 지역정치인들을 줄 세워서 권력을 관리했다. 그러니 지역정치인들은 공천권을 쥔 국회의원과 기득권정당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고 주민자치는 뒷전으로 밀려난다.
그리고 중앙정부는 세금이라는 지방정부를 통제할 중요한 수단을 놓치지 않았다. 지금도 국세와 지방세의 비중은 8 : 2 정도이고, 지방자치제 실시 이후 수도권을 제외한 지방자치단체들의 재정자립도는 높아지는 게 아니라 계속 떨어졌다. 정치적인 구호로는 지방자치를 외쳤지만 재정의 문에서는 중앙집권화가 여전하다. 이렇게 돈이 없으니 지방정부는 중앙정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지방선거라고 말하지만 언제나 지방선거는 중앙정치판의 복제였다. 지방선거의 주된 구호는 ‘정권 심판’ 또는 ‘개발론’이었다. 지방선거는 청와대나 국회의 중간평가처럼 진행되었고, 중앙정치인들이 지역에 와서 마음대로 쏟아내는 개발공약들이 지방선거의 의제였다. 더구나 전국동시지방선거로 치러지니 전국이 동일한 의제로 싸우는 기이한 현상이 생겼다.
여기에 더 혼란을 부추기는 것은 단체장과 지방의원을 선거로 뽑으면서 ‘업적’이 중요해졌다는 점이다. 다음 선거를 노리는 선출직 정치인들은 자기 임기 내에 개발사업들을 적극적으로 추진했고 지역의 특수성과 다양성을 고려하지 않는 개발공약들이 양산되었다. 지방자치제도가 실시되면서 지역주민들의 필요와 밀착된 사업들이 진행되기는커녕 대형 개발사업들만 늘어났고 그와 연관된 부패는 심각해졌다.
2018년 6월 13일 지방선거는 다를 수 있을까
1991년에 부활된 지방선거는 68.4%의 투표율로 시작해,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48.8%로 가장 낮은 투표율을 기록했고, 점차 상승해서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의 투표율은 56.8%를 기록했다. 이 투표율과 비교해서 2012년 총선 투표율이 54.2%, 2016년 총선 투표율이 58.0%로 지방선거 투표율은 회복되고 있다고 평가될 수 있다. 그러니 이번 지방선거 때는 사전투표제도와 투표시간 연장으로 투표율이 더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투표율이 높으면 민심이 더 잘 반영될까?
개헌과 관련된 분위기에서 감지되듯이 지금 자유한국당은 문재인 정부를 ‘좌파 정부’라 규정하고 지방선거를 이에 대한 심판의 장으로 활용할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찍은 사진을 내걸은 ‘묻지 마’ 더불어민주당 정치인들은 사실 뭘 할지 잘 모르겠고 지금까지 나온 공약들을 보면 자유한국당과 뭐가 다른지도 잘 드러나지 않는다. 따라서 분권과 개헌론이 지역의제를 부각시킬 수 있지만 실제로는 더 중앙정치로 논의를 압축시킬 수도 있다. 그리고 선거구 획정이 중대선거구를 확대하는 방식이 아니라 여전히 쪼개기를 고수하는 방향으로 확정되었기 때문에 지역구에서 원외정당이 당선될 가능성도 매우 낮다. 촛불정국과 대통령선거 이후 첫 번째 지방선거이지만 정치개혁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여전히 낮다.
특히 지난 조기대선을 통해 이미 많은 개발공약들이 나왔고 국정운영 5개년 계획이나 자주 언급되는 규제프리존법을 고려하면 개발공약들은 더욱더 늘어날 수 있다. 수도권이나 지방 대도시를 제외하면 사실상 경기침체 상태라 개발공약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이 높을 수 있다. 사회의 민주화에도 지역토호들의 영향력은 여전하고, 정부예산을 지원받는 관변단체들의 공식/비공식 지배 권력 구조도 여전히 강력하다. 지방선거에 미치는 정치적인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토호나 관변단체들을 장악하려는 기성정당들의 경쟁이 치열할 것이고, 역으로 이들의 지배구조는 더 탄탄해질 가능성이 크다. 반면에 이들을 감시할 지역시민/주민단체의 영향력은 감소하거나 감시/비판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니 청와대의 주인은 바뀌어도 지방권력구조는 거의 변하지 않을 것이다.
더욱 강화될 지방정부 권한
더구나 문재인 정부는 지방정부의 권한과 재정을 더 강화시킬 계획을 짜고 있다. 이번 청와대 개헌안이 통과되면 지방정부는 법률의 범위 내에서 제약을 받지만 조례를 제정하고 세금을 징수할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지금도 지방자치단체 단체장은 각종 인허가권부터 공무원들의 인사권, 예산편성권을 가지고 막강한 권한을 행사한다.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생활임금제 등의 노동이슈가 지방자치단체장의 판단에 따르는 것도 그런 권한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꼭 공공부문의 일만일까? 거의 모든 지방자치단체들이 대중교통 준공영제를 실시하며 버스회사에 적게는 수십억 원, 많게는 수백억 원의 보조금을 1년에 지원한다. 그리고 지방자치단체들이 기업을 유치하기 위해 많은 세금을 면제하고 지원금을 책정하는데 그 돈은 모두 회사로 들어가고 임금으로 지역상권을 유지시키는 노동자들에게는 닿지 않는다. 그리고 직접 지원하는 예산이 아니더라도 도로를 놓고 상하수도관을 깔고 대중교통 노선을 만들고 주민들의 시설을 만드는 것도 지방정부의 일이고, 그런 일들에는 사람의 노동이 필요하다. 그러니 지방정부가 노동에 미치는 영향은 실제로 상당히 크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2018년 6월 13일의 지방선거 때 이런 문제들이 제대로 다루어질까? 지금의 상황을 보면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진보정당의 후보들이 지역의 노동현안을 언급할 수는 있겠지만 그런 내용이 선거공약으로 들어갈 가능성은 매우 낮다. 여전히 지역사회에서는 생활과 노동의 경계, 삶터와 일터의 경계가 뚜렷하게 갈라져 있다. 아파트 경비노동자들의 문제를 놓고 지역주민이나 시민단체들이 연대하는 경우는 있지만 그런 불안정한 노동의 문제가 사실은 우리 모두의 문제라는 점을 고백하는 정도로 나아가지는 못하고 있다. 그래서 시간이 좀 흐르고 나면, 주민구성이 바뀌면 다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불안함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시민사회와 노동운동은 뭘 준비해야 할까
엄격하게 따지면 노동자도 주민이다. 노동자도 주소지를 가진 주민이고 주민등록상의 주소지는 있지만 다른 지역에서 생활하는 사람, 둘 중에 누가 더 지역의 현안에 관심이 많을까? 지방선거에서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은 주소지 주민이지만 실제 지역을 움직이는 것은 노동자이다.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 없이 학교는 돌아가지 않고, 쓰레기를 수거하는 노동자 없이 지역사회는 청결할 수 없다. 왜 아파트에서 비닐을 수거하지 않느냐고 항의할 게 아니라 그동안 어떻게 노동자들이 수거를 해왔는지를 물을 때, 왜 쓰레기 수거시스템이 지방정부의 몫이 아니라 민간기업의 몫인지를 물을 때 우리는 다른 가능성의 장에 설 수 있다.
예전에 민주노총이 주최한 토론회에서 이런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다. 노동조합이 <민중의 집>과 같은 별도의 공간을 만드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지역의 자영업자들이 운영하는 공간을 지정해 정기적으로 활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민주노총이 지정하는 ‘연대가게’와 같은 스티커를 붙여두고 그 가게는 알바노동자들의 최저임금 보장, 휴식시간 보장 등 공정한 노동조건을 유지하도록 하면 어떻겠냐는 제안이었다. 그러면 실제로 도움을 받는 자영업자들의 노동조합에 대한 시각이 달라질 것이고, 알바노동자들도 자연스럽게 노동조합을 접하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지역가게를 이용하면서 노동조합도 지역현안들에 관한 이야기를 더 자주 듣게 되지 않을까? 그때의 제안은 그리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분위기여서 넘어갔지만, 기업노조의 틀을 벗어나는 방법이 꼭 특정한 사안을 놓고 연대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구조적이고 오랜 시간이 걸리는 문제만이 아니라 일상에서 서로 동선이 겹쳐지는 부분들에 대한 세심한 관찰이 필요하다. 지역사회의 복지시설, 예를 들어 도서관과 같은 시설은 노동자와 가족들이 이용하는 공공시설이다. 그런 점에서 노동자도 주민이다. 주민으로서 노동자는 지역사회에 어떻게 개입할 수 있을까? 자신이 만드는 상품, 서비스를, 거기에 들어가는 재료나 상품과 서비스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노동자들은 잘 아는 반면, 소비자로서의 주민들은 잘 모른다. 생산과 소비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생산자와 소비자가 만나서 나눌 얘기들이 좀 있다. 요즘 도서관의 ‘사람책’이나 교육청의 마을교육공동체 프로그램이 많은데 왜 꼭 말을 할 사람이 외부의 전문가나 명망가여야 할까?
일터가 있는 곳의 주민으로서 노동자들이 삶터의 주민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때 단지 선거만이 아닌 지역정치가 바뀔 가능성이 열린다고 생각한다. 지역의 기업들이 공헌사업이나 사회적 책임이라는 구호로 주민들을 만나는데, 노동자들은 그렇게 주민들을 만나고 있지 못하다. 이런 부분이 지역사회 속에서의 영향력 차이를 만들고, 지역정치도 보수적으로 만든다. 그러니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지역에서 생활하고 일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정치화하도록 만드는 과정이 진정한 자치라고 얘기할 수 있다.
물론 이런 만남이 쉽지는 않다. 각자의 경험이 다르고 언어도 다르다. 그렇지만 만나지 않고서는 아무런 접점을 찾을 수 없다. 건설 노동자들이 송전탑이 세워지는 밀양의 주민들과 손을 잡을 수 있듯이 지금 우리에게는 더 많은 맞잡음이 필요하다. 시민들은 공장의 현황에 대해, 노동자는 지역의 운영에 대해 더 많이 귀를 쫑긋 세우고 듣고 이야기를 나누자. 그리 대단할 것 없지만 큰 변화는 그런 소소함에서 시작될 것이다.